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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18화 (18/227)

18화

홍동구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성질에게 내밀었다.

한성질은 그것을 받았다.

사진이었다.

사진에 찍힌 것은 아주 청초한 인상의 고운 소녀였다.

표정이 없어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아니, 그 점이 도리어 매력이 될 정도로 놀랍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것 같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 만큼의 용모였다.

탐욕스런 눈으로 사진의 소녀를 바라보며 한성질이 확인을 위해 물었다.

“이 애를 말입니까?”

“그래.”

홍동구는 틀림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질이 끝난 상태였다. 이곳에서 만난 건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해야 하는 일-

그건 다름 아닌 살인이었다.

다시 말해 사진 속 아름다운 소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성질은 의아해서 물었다.

“뭐하는 애길래…….”

“몰라. 근데 죽이란다. 그렇게 하라면 하는 거지 뭐.”

“그래도 어린애를…….”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한성질이 말했다.

홍동구가 코웃음을 쳤다. 한성질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개과천선이라도 했냐? 이것보다 어린애도 해외에 팔아넘긴 개새끼가.”

한성질은 과거 지금보다 뇌물이 훨씬 잘 통하고 경찰도 형편없었던 깡패 전성기에는, 시골에서 여자애를 납치해 해외로 인신매매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막돼먹은 놈이다.

인신매매에 대한 도시 전설 중 상당수를 한성질은 실제로 실행해본 인간인 것이다.

한성질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헤헤, 그렇긴 합니다만, 팔아먹는 거하고 죽이는 건 다르죠. 죽여서 시끄러워지면 무마할 수도 없고……. 형량도 진짜 세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한국은 인권 국가라서 사형은 안 시켜.”

홍동구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 벌써 10년이 넘도록 사형 집행이 없었고, 간혹 사형이 나오긴 하나 집행된 전례는 없었다. 그러니 쾌락 살인에 연쇄살인쯤 되지 않는다면 사형이 나올 걱정은 없었다.

‘우발적이었다.’

이 한 마디면 절대 안전한 좋은 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확실성(?) 앞에서도 역시 망설일 수밖에 없는 점은 있었다.

“그래도 무기면…….”

“이번 일은 건수가 진짜 크다. 들어오는 돈만 오십억이야.”

한성질의 눈이 커졌다.

“이 애가 뭐길래…….”

“몰라. 그런데 어쨌든 처리하면 오십억이 그냥 들어오고, 조용히 복역하면 금방 빼준단다. 그만한 힘이 있는 사람들이 부탁한 거란 말이지.”

“으음.”

그 정도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홍동구는 정리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쓸 만한 애 골라서 저지르게 하고, 자수시켜 감옥에 보내라. 출옥하면 한 5억 챙겨준다 하고 가족 보살핀다 하면 죄다 한다고 달려들 거다. 너 밑에 좋은 무데뽀 많이 가지고 있잖아?”

무데뽀는 일본어다. 무(無)대포, 총 없이 싸움에 나갈 정도로 무모하단 건데, 야쿠자들이 오야붕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수하는 똘마니나 혹은 혼자서 다른 조직의 기지를 엎어 버리는 자객에게 사용하는 은어였다.

그게 한국의 깡패들에게도 전래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성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너 이 새끼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거냐?”

홍동구가 한성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찌푸린 얼굴이 됐다.

성매매 특별법이 발효된 이후 표면적으로는 거의 죽었지만 한성질은 한때 서울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매춘 사업을 하던 놈이었다.

그가 매춘에 열정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찍혀 인생 망친 여자들이 부지기수였다.

홍동구의 시선에 창피한 듯 어울리지 않게 한성질은 수줍게 웃었다.

“헤헤.”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깨끗하게 죽이는 게 어때?”

“뭐 어떻습니까. 이렇게 예쁜데 처녀인 채로 죽게 하면 아깝지 않습니까?”

초조한 듯이 한성질은 물었다.

홍동구는 혀를 찼지만 곧 어차피 죽일 건데 그 전에 어떤 꼴을 겪든 무슨 상관일까 하고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홍동구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처녀인 채로 죽는다니. 세상에 제일 무서운 귀신이 처녀귀신이라지 않던가. 그 정도 한은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알겠다. 알아서 해라. 단, 확실히 처리해라. 만에 하나 실수가 있다면 넌 정말 시체도 제대로 못 남기는 꼴을 당할 거다.”

“물론입니다.”

한성질은 환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느긋하게 둘 일도 아니지. 학생이고 하니 방학 때 처리하는 게 적절할 것 같군.”

화제가 되면 그것 자체로도 귀찮아질 수 있다. 어차피 총알받이를 내세우겠지만 관심이 집중되면 쓸데없는 관심이 모이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방학이 가장 좋다. 사고사로 위장하기 자연스럽고, 세간의 관심도 그만큼 덜 모일 것이다.

“방학 때면 8월이면 되겠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때에 맞춰 좋은 계획을 세워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성질은 홍동구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대하겠네.”

“맡겨 주십시오.”

“좋아. 그럼 일어나지.”

“네.”

그리고 둘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모두 아랫도리가 후끈했다. 이제 방금 전까지 방에 함께 있었던 예쁜이들을 귀여워해줄 차례인 것이다.

***

어제 기분 좋게 여자를 안은 한성질은 만족한 얼굴로 자기네 본부 건물로 돌아왔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부장 수길이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형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뭐 별일 없었냐.”

건성으로 그의 인사를 받으며 한성질은 물었다.

“큰일은 없었습니다. 아, 한 가지 괜찮아 보이는 건수가 있었습니다.”

“흠! 그래? 아, 그 이야기는 약간 뒤로 넘기자. 더 급한 게 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우선은 홍동구에게 의뢰받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네.”

“총알받이로 쓸 만한 애 없냐?”

“말씀만 하시면.”

수길은 문제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일을 저지르고 대신 자기가 저질렀다 자수해 감옥에 가는 총알받이는 깡패의 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윗대가리는 책임을 면할 수 있고, 아랫것들은 빠른 출세와 충성심 과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윈윈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윈윈이 악당들의 윈윈이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이번엔 좀 큰 거다.”

“큰 거라면……?”

“사람 하나를 죽일 거야. 고등학생을.”

“그건…….”

수길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

이야기만 들어도 범행이 너무 악랄했다. 대신 죄를 뒤집어쓴다는 것도 어느 정도일 때 의미가 있다.

한국은 명목상에 불과하긴 해도 아직 사형 제도가 있는 나라다. 저만한 짓을 저지르면 사형이 뜰 가능성도 있다.

“뭐, 그만한 대우는 할 거다. 맡기로 한 즉시 2억 넣어주고, 빵에서 나오면 3억 추가로 넣고, 평생 간부 대우다.”

“굉장한데요.”

수길은 설명은 듣고 놀란 얼굴이 됐다.

현금으로 보수만 5억에 간부 대우라니. 일생을 걸어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수길의 감탄한 기색에 웃으면서 한성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동구 형님도 직접 움직일 만큼 큰일이었으니까. 어때, 구할 수 있겠냐?”

“그만한 조건이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습니다.”

사형이나 무기 구형이 무섭긴 하지만 피할 방법은 많다.

살인이 계획적인 게 아니라 우발적이었다고 한다든가, 살인 당시의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이걸 심신미약이라고 하던가?-만들어 둔다든가. 그러면 중벌은 받겠지만 무기 정도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무기도 충분히 엄청난 형량이지만 보석도 있고, 모범수도 있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일은 없다.

“알았다. 구하면 연락해라.”

“넵.”

수길은 이어 깍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네가 이야기하려던 건 뭐냐.”

“아, 이번에 돈을 좀 크게 빌려 간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사채는 현재 한성질의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다. 하루에도 억에 달하는 돈이 왔다 갔다 하니 적잖이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그놈이 하는 가게가 정말 끝내주거든요.”

“어느 정돈데.”

“좋은 친구 아십니까?”

좋은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한성질의 표정이 확 변했다.

“아, 들어봤어. 그 가게냐?”

“그렇죠. 어떻습니까? 이런 거 잡아먹는 건 또 저희가 전문 아니겠습니까?”

헤헤 웃으면서 수길이 말했다.

한성질은 턱을 쓸었다. 소문대로라면 그런 가게를 하나 잡아먹고 사업을 크게 벌이기만 하면 하루 수익만 몇 천은 기본으로 뽑는 진짜 물건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먹잇감이 여기서 돈을 빌려갔다면, 이를 가만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진짜 괜찮겠는데. 좋아. 계획 짜 봐라.”

욕심이 흉악하게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웃으며 한성질은 말했고, 수길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시험 날이다. 기말고사 날이 되고 말았다.

전날 벼락치기 하던 학생은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과 함께, 평소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은 긴장감과 함께, 불안해하면서도 공부하지 않았던 학생은 한층 더한 불안과 함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그 전날에도 게임에 열중했던 학생은 절망과 함께.

그렇게 동성고등학교의 모든 학생은 성적이 좋든, 좋지 않든 상관없이 이 괴로운 시기를 결국 맞이했다.

물론 시험만이 인생의 우울 전부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괴로움 때문에 시험을 친다고 하는 사실이 큰 긴장이 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침 쉬는 시간, 매점에서 바로 그에 해당 되는 학생 하나가 우울한 얼굴로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아침을 먹고 나오지 않아 간단히 식사를 하려는 것이다.

아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 학교의 스타 중 하나라 할 호성이었다.

“후우.”

호성이 매점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강민을 피해 매점으로 피난 와 있는 재철 일당이었다. 그들은 놀리듯이 호성을 보고 말했다.

“표정이 더럽군.”

“닥쳐.”

호성은 짜증스레 말했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얼굴을 봤다는 표정이었다.

재철은 신경 쓰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너 성적은 좋지 않냐.”

호성의 성적은 전교에서도 무척 높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뭐. 요즘 우울한 게 그깟 성적 때문으로 보이냐?”

“하기야.”

호성이 신경질적으로 하는 말에 재철 일당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의 중심에는 강민이 있다. 그의 존재에 비하면 학교고, 선생이고, 시험이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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