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넷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보고 다 잘되었다 생각한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간다. 열심히들 해라.”
“자, 잠깐만요.”
강민을 멈춰 세운 것은 호성이었다.
“왜?”
“저기, 주말마다 40만 원씩 드리겠습니다! 대신 이건 좀…….”
비굴하게 웃으면서 호성이 말했다.
주말을 이런 일에 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같이 일해야 하는 재철 일당도 사실 호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에 2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호성의 입장에선 그만큼 투자하고 주말을 편히 보낼 수 있다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재철 일당은 그 말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럼 한 달에 160만 원씩 바치고 주말을 편안히 보내겠단 말이 아닌가!
부자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진짜 스케일이 다른 것 같았다.
강민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역시 마음에 드시나 보죠?”
호성도 유쾌한 강민의 웃음소리에 이 협상이 들어먹혔구나 싶어서 매우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어제 그를 공포에 굳게 만들었던 무시무시한 눈길이었다.
“네가 덜 맞았구나.”
“히익!”
공포에 질린 호성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민은 살기 가득한 눈길을 호성과 마주하며 위압적으로 외쳤다.
“감히 나랑 돈으로 맞먹으려 들다니, 대체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는 거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얻어맞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 직접 경험하고 싶은 거냐?”
“아,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개소리는 앞으로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진짜요!”
호성은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빌었다!
“겨우 주제를 안 모양이군.”
강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협상이라니. 웃기는 소리다.
이계로 가기 전 강민이라면 그게 웬 떡이냐 싶었겠지만 지금 강민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는 돈이다.
그리고 이런 놈과 한 번 협상에 응하면 끝도 없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그럼 열심히 일해서 죗값을 치러라.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는 먼저 일하기 시작한 선배들한테 물어보면 알려줄 거다.”
“네, 네.”
호성은 그저 알겠다고만 답했다. 이어 강민은 그들 네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니들은 강민단 소속인 거다.”
“가, 강민단…….”
싫은 티가 역력했다.
강민이 물었다.
“왜 싫어?”
“아니요. 그럴 리가!”
모두 단번에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떠들진 말고. 전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시끄러운 게 싫으니까. 내 명령에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도 그리 굴 필요는 없어. 이전과 같이 행동하라고. 거기 호성, 너도 마찬가지야.”
“넵. 알겠습니다.”
“그러면 수고해라.”
강민은 강민단원들을 한 번 쭉 훑어보곤 웃으며 그곳을 떠났다.
돌아가면서 강민은 허접하지만 그들이 귀찮은 일을 대신한 손 정도는 되겠지 하고 낄낄거리며 생각했다.
강민이 돌아간 다음 넷은 모두 강민이 부서뜨린 자갈 주변에 모여 정말 그것이 돌이 맞는지를 검증했다.
“과자 아냐?”
“빵 말린 거라든가…….”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미리 준비한 거 아냐?”
이어 그들은 부서진 조각을 하나하나 만져 봤다. 그러나 단단한 돌의 감촉만은 확실했다.
산산이 부서진 모습은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진짜잖아……. 준비한 흔적 같은 것도 없어.”
“으으…….”
“대체 뭐지 강민 그놈은…….”
넷 모두 자기 앞날이 캄캄하다고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
강민의 아버지는 검은 소파에 앉은 채로 눈앞에 하얀 계약서를 두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체격이 좋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강민의 아버지를 향해 인주를 내밀며 말했다.
“지장 찍어 주십시오.”
“네.”
강민의 아버지는 인주에 엄지를 찍은 다음 계약서의 서명 날인 옆에 엄지를 꾹 눌렸다. 계약서에 선명하게 지문이 남았다.
검은 양복의 남자는 만족스럽게 계약서를 받은 다음 물었다.
“계약서 내용은 확인하셨지요?”
“네. 다 확인했습니다.”
이율은 연 30%였다. 높은 이자였지만 제2, 아니 3금융권에서 빌리는 거니 불평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강민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장님 가게가 요즘 얼마나 잘되는지 봤기 때문에 이렇게 빌려 드리는 겁니다. 아니면 담보도 없이 이렇게 빌려 드리는 거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가게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에 이만한 조건으로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설사 장기를 팔겠다고 해도 그 돈을 빌릴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남자는 옆에 준비해 뒀던 가방을 강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일억입니다.”
“감사합니다.”
강민 아버지는 얼른 가방을 받은 다음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노란 오만 원 권이 가득했다.
“장사 잘하시고 얼른 갚으싶쇼.”
“물론입니다.”
돈을 다 빌린 뒤 가방을 메고 인사한 뒤 강민의 아버지는 방을 빠져나갔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강민의 아버지가 빠져나간 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저거 괜찮냐?”
그는 안에서 돈을 빌려준 사람의 상관이었다.
“신용 상태, 부동산 이런 거만 보면 사실 좀 별론데…… 진짜 장사 잘되는 가게거든요.”
“어딘데?”
“좋은 친구 아십니까?”
들어본 적이 있는 가게였다. 상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거기? 자리가 없어서 못 마신다고 불평불만이 그득한데 아냐?”
“맞습니다. 그래서 가게 확장한다고 급전이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그러니 아무 상관이 없죠. 이자까지 꼬박꼬박 잘 내놓을 겁니다.”
좋은 친구에 대한 소문은 폭발적이라 할 만했다. 그 가게에 돈을 빌려준다고 하면 어지간한 거금이라 해도 확실히 회수할 수 있다. 이자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흠…….”
한데 설명을 듣고도 못마땅한 듯이 남자의 상관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요, 형님? 미심쩍은 데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돈 냄새가 나서 말이다.”
그는 이 일에 오래도록 종사해 왔다. 돈을 버는 방법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편한 것들이 있는지도 안다.
좋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돈을 빌려주고 이자와 원금을 회수한다는 고식적인 방법에서 그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의 생각을 읽고 조심스럽게 검은 양복이 물었다.
“어쩌시려고?”
“형님과 상의해 봐야지.”
상관은 그렇게 답했다.
지금 여기에 그가 말한 상관은 없다. 그는 중요한 용무가 있어 이곳을 비웠다.
평범한 대부업체를 위장하고 있는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지렛대파라는 폭력 조직이었다.
***
조폭의 세계는 봉건 체제와 닮았다.
정점에 한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대영주 같은 거대 조직이 있고, 그 조직에게 각 지역을 관리하는 걸 인정받은 군소 조직이 있다.
이 군소 조직은 거대 조직에 상납금을 바치고, 필요한 때에 전투력을 제공한다.
반대로 큰 조직은 정치와 경찰 세력에 외교적인 거래를 해서 휘하 조직들이 활동하기 편하게 하고, 경찰에게 조직원들이 잡히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힘을 써준다.
복잡하다 해도 이런 구조가 중복돼서 겹치는 것일 뿐, 구조 자체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 어디나 비슷했다.
동성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을 관리하는 군소 조직은 지렛대파다. 이들은 그 상위 조직인 영동파에 충성을 맹세하고 상납금을 바치고 하달되는 각종 잡무를 처리했다.
그 지렛대파의 대장은 한성질이다.
이름 그대로 한 성질 하는 자로, 싸움은 잘하나 조직 관리는 서툴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실력에 비해서 얻고 있는 직위는 작았다.
대신 성질머리가 성질머리인 만큼 특공대로서의 가치가 있어 쉽게 맡기기 힘든 피비린내 나는 일에 자주 투입되곤 했다.
그가 벤츠에서 내렸다.
벤츠가 멈춰 선 곳은 강북의 물 좋은 나이트로 유명한 돈텔4호점이었다.
앞을 지키던 이가 한성질을 알아보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오냐. 형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어서 가자.”
“예. 안내하겠습니다.”
인사한 남자가 다른 이에게 자리를 맡기고 한성질과 함께 나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한성질은 오늘 나이트의 귀빈실에서 영동파의 상급 간부인 홍동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홍동구는 귀빈실의 넓은 방에 홀로 앉아 고급 양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형님, 한성질 형님이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지배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홍동구는 반가운 표정을 했다.
“어, 들여보내라.”
“형님, 반갑습니다.”
한성질이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반갑다. 오랜만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다 생업에 바빠 인사도 잘 못 올렸습니다.”
홍동구가 한성질에게 손짓했고, 손짓에 따라 한성질은 홍동구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굴었다.
“다 그렇지 뭐. 자, 우선은 좀 즐기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지배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방 안으로 헐벗은 여자 둘을 들어오게 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었다. 오래도록 물장사를 한 분위기가 있어 경박해 보인다는 점 정도가 단점일 뿐이었다.
“지금 우리 가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애들입니다.”
“나이트 와서 일하는 애들 만나면 뭐가 좋다고…….”
한성질이 혀를 찼다.
룸살롱도 아니고, 나이트에서 업소에서 일하는 애들 데려다 놓고 놀면 골뱅이 주워 먹기보다 못하다고 한성질은 생각했다.
“모르는 말씀을. 요새는 물이 중요해서 바람잡이로 다 애들 데려옵니다. 그리고 일반인 홈런 쳐 봐야 얘들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야 그렇지.”
그러나 홍동구는 한성질과 생각이 달랐다.
장사는 요령이다. 이런 애들 데려다가 좋은 소문 퍼지도록 하는 것이 나이트로 장사하려면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실례합니다.”
여자들은 웃으며 두 사람의 곁에 앉았다.
이후 한성질과 홍동구 두 사람은 각자 화장이 진하고 예쁜 여자들을 옆에 앉히고 여자들의 옷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민감한 부분을 만질 때마다 여자들은 비음을 내며 좋은 듯 싫은 듯한 소리를 냈다.
둘은 한참 여자들의 몸 감촉을 즐기고 음악과 함께 옷을 벗도록 시켰다. 젊은 아가씨들은 싫은 눈치 없이 지시에 따랐다.
그들은 다시 벗은 몸매를 실컷 즐긴 다음 다시 옆에 앉혀 감촉을 즐기고 타액을 교환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2차를 약속하고서 먼저 그곳에 가 있으라 말해 뒀다.
이후 한성질과 홍동구, 둘만 남았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