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하,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강민의 아버지가 강민이 보고 있던 방송에 눈길을 주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 쟤 수란이 아니냐?”
“맞아요. 아시네요?”
아머지가 수란을 안다니, 의외였다.
“그야 너희 학교에서 유명한 애잖니.”
“드라마도 보고 있는 사람 많고. 내가 아는 아줌마들도 보는 사람 여럿 있어.”
강민의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민은 정말로 수란이 유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정말 예쁘긴 하구나.”
아버지가 아름답고 섹시하게 춤을 추는 수란을 비롯한 아이돌의 모습을 보고 감탄해 말했다.
“우리 아들 여자 친구도 저런 애가 되어야 할 텐데.”
“하하하…….”
그 옆에서 강민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부모님 두 사람은 그것이 너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말을 해서 당황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강민은 저기 비친 소녀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여럿 알고, 그중 몇몇은 실제로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로까지 발전했었다.
사실 강민의 입장에서는 그녀들의 몸 감촉이 아직도 손아귀에 남아 있는 것처럼 가까운 느낌일 정도였다. 왠지 오늘 밤은 잠자리가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기랄.”
학교 뒤쪽 공터 빈자리에서 부하들과 점심을 깨작거리며 재철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진짜 짜증 나.”
“어휴.”
수구와 만수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주말에 놀지 못한다는 것이 주요인이었다. 인연도 없던 보육원 봉사 활동이니 경로당 봉사 활동이니 같은 짓을 하려니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었다.
안 하면 강민에게 들킬 테고, 그러면 처음 얻어맞았던 것처럼 얻어맞고 말 것이다.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표시라도 나면 경찰한테 가서 고발이라도 할 텐데, 그것조차 아닌 것이다.
수구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새끼 대체 뭐지?”
“몰라. 어디서 뭐 신비무공 같은 거라도 배웠나.”
만수는 우울하게 허황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재철도 수구도 그걸 단순히 바보 같은 소리로 치부하진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진 않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강민 같은 찌질이가 어떻게 갑자기 그리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재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탈출할 길이 없다. 따라야지.”
“에효~.”
그들은 매점에서 사온 빵과 우유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사실 학교에선 모든 학생들에게 급식을 무료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생돈을 들여가며 해결하는 것은 교실과 일 초라도 더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강민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강민은 일전에 이야기한 대로 거의 관여하지 않고 지내고 있지만, 피해자가 된 입장에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정말 공포였다.
‘내가 괴롭힌 새끼들도 다 이랬겠지?’
옛날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며 재철은 그렇게 생각했고, 이어 훌륭하게 괴롭혔던 것 같다고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진 노릇을 못하니 좀이 쑤셔서 금단증상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니 예전 괴롭혔던 전과들을 떠올리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웅~.
재철의 교복 주머니가 떨렸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가 떨리고 있는 것이다.
“뭐야.”
재철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폰을 꺼냈다.
하지만 번호를 확인하고 굳은 표정이 됐다.
“무슨 일이야.”
-전에 부탁한 거 있잖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철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왜.”
-요즘 그만뒀다고 하는데. 이유가 뭐야?
친절한 어투였지만 내용은 명백히 따지는 것이었다.
잠시 재철은 할 말이 없었다. 부탁을 받고,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보수도 받았다.
그런 것을 아무 말도 없이 중간에 때려치웠으니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재철은 내던지듯이 말했다.
“그냥.”
-그게 말이 돼?
돌아오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섞여 있었다.
재철은 일그러진 표정이 됐다.
“내가 네 부하냐? 좋으면 하고 싫으면 마는 거지.”
-너, 후회한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음산하게 말했다.
“좆까는 소리하네. 끊어!”
재철은 움찔 떨렸지만 결국 강한 척을 하며 전화를 탁 닫았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수구와 만수의 표정은 불안했다. 수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야?”
“아무것도 아냐.”
재철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비웃으며 전화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재철과는 꽤 오래 사귀어 왔으니 그 성격은 충분히 알고 있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만수가 불안하게 물었다.
“혹시 호성이냐?”
수구도 같은 의문을 담아 재철을 바라봤다.
재철이 지금처럼 대할 상대는 적어도 두 사람이 아는 바로는 호성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재철은 손을 흔들었다.
“아, 시끄러우니까 밥이나 먹자. 그리고 호성이면 어쩔 거야? 그놈 말하는 대로 할 거야?”
재철의 물음에 수구와 만수의 표정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그렇긴 하다. 호성은 쉽게 상대할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러면 강민은 상대하기 쉬운가?
절대 그렇진 않았다. 도리어 호성 열 마리를 상대하면 상대했지 강민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심이다.
특히 그때 얻어맞았던 당시의 느낌을 되살리자면…… 그야말로 몸서리가 쳐진다!
“걱정 안 해도 돼. 꼴값 떨다가는 그놈들이 먼저 작살날 테니까.”
별거 아니라는 투로 재철이 말했다. 수구와 만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
호성이 찌푸린 표정이 됐다.
“이놈이…….”
“왜 그래?”
호성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물었다. 호성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돌리면서 말했다.
“내 말을 씹는데?”
“왕따 시키던 거 그만뒀다더니 진짠 거 같은데.”
피식 웃으며 그 학생이 말했다. 옆의 또 다른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도 파다하고. 돈이라도 먹었나?”
호성을 중심으로 모인 학생의 수는 열 명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북쪽산이라는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중 3명은 빨간색을, 다른 아이들은 파란색을 입고 있었다.
색은 일진으로서 그 아이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빨간색을 입는 아이들은 각자 반 일진 가운데 최고라는 뜻이었다.
호성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일진이지만 일진이란 걸 티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반에서 호성은 그냥 훌륭하고 친절한 학생이었다.
일진들과 사이가 좋긴 하지만 그건 성격이 좋다 보니 교우 관계가 넓다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고, 반에서도 다른 반 일진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긴 하나 그 반 학생들은 도리어 호성이 있어서 일진 같은 것들이 설치지 못한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찌푸린 얼굴로 휴대전화를 노려보는 호성의 지금 모습은 학교에서 널리 알려진 모범생의 것과는 달랐다. 이곳에 있는 다른 어떤 일진보다도 흉악한 표정이었다.
“쓸 만하다 싶어서 용돈도 줘가며 예뻐해 줬더니…….”
“어쩔래? 밟을 거야?”
옆에서 물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밟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진 모르겠지만 재철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나중으로 미뤄둬야 했다.
“지금은 됐어. 정리해야 하겠지만 급한 건 아니니까. 우선은 바퀴벌레 쉐리부터 손봐야지.”
먼저 손봐야 할 것은 짜증 나는 바퀴벌레 같은 강민이란 후레자식이다.
호성은 작년부터 그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다.
수란은 예전부터 점찍어둔 상태였다. 기회를 만들려고 여러모로 손썼는데 그놈이 기어들어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올해 들어 왕따로 만들어서 전학을 가든, 자살을 하든 여하간 수란과는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로 몰아넣으려 했는데, 재철 이놈의 배신 때문에 계획도 틀어졌다.
이제는 별수 없다. 직접 나서야지.
“그건 그렇지.”
사정을 아는 일진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은 무서운 눈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 준비했지?”
“뭐 동원할 수 있는 애들은 일단 다.”
“좋아.”
호성은 비릿하게 웃었다.
***
강민이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강민은 몇 번 골목을 꺾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 그 길이 평소와는 달리 많이 북적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강민은 웃었다.
정확하게 기대했던 대로의 움직임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도리어 조금 늦은 셈이었나.
그는 겁먹은 것처럼 서둘러 움직였다.
뒤따라오는 그림자의 숫자가 늘어났고, 골목을 울리는 발소리의 수도 늘었다. 쫓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주어 겁먹게 하는 방식이다.
강민은 속으로 감탄했다. 본의 아니게 이세계로 건너가 험한 인생을 살아오게 되어 다양한 경험을 했고, 이런 꼴도 자주 당해 봤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이고, 그리고 호성은 고등학생이다.
한데 프로의 조폭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을 모아 교묘하게 상대를 위협하는 방식을 구사한다는 건, 상당한 정도의 ‘악의 재목’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야지.’
그게 강민을 한층 기쁘게 만들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싸움을 오래도록 경험한 강민은 지구로 돌아와 자극에 굶주린 상태였다.
이전처럼 성대하게 활약할 수는 없겠지만, 몸을 신나게 움직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이어 골목 하나를 꺾어 들었을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험상궂은 얼굴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자였다.
한 눈에 정체를 간파한 강민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얼굴 정중앙에 주먹이 꽂혔다.
퍽!
“악!”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피를 흘리며 새하얀 옥수수를 토해내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이 새끼가!”
같이 튀어나오려던 깡패 하나가 강민을 향해 욕설을 하며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강민은 다음 공격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주먹이 날아 가슴팍에 꽂혔다.
퍼퍽!
“꾸억!”
강민의 주먹을 얻어맞은 깡패는 일그러진 얼굴로 뒤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둘을 해치우자 강민의 앞으로 길이 열렸다. 강민은 어둠 속을 향해 달렸다.
“야, 잡아!”
“저 새끼가!”
요란한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터지더니 추적이 시작됐다.
하지만 정말 함정에 빠진 것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