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설사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이세계로 넘어가서 몬스터들을 썰고 다닌 세월만 10년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강민은 당장 사과했다.
“미안. 워낙 그런 건 안 보다 보니…….”
“그건 의외네.”
“뭐, 그리고 전엔 그럴 만한 사정이 좀 아니기도 했고.”
머쓱하게 웃으며 강민이 말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말했듯이, 지금은 괜찮아.”
강민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나도 다행이라 생각해.”
“그러면 순항 중이라 이거지?”
수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좀 있으면 또 새로 앨범도 만들 거야.”
강민은 놀란 표정이 됐다.
“오오. 나오면 한 장 사 주지.”
“음원 다운도 부탁해.”
“물론.”
둘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서로 웃음을 교환했다.
각자의 커피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강민이 물었다.
“그런데 그런 바쁘신 몸께서 여긴 웬일이야?”
“글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까?”
수란은 아련한 시선으로 학교를 쭉 둘러봤다.
누가 들어도 지금 수란의 말에는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학교의 평범한 학생이라는, 지금은 버린 선택을 그리워하진 않을 테니까.
“힘든 모양이구나.”
“솔직히 그렇긴 해. 하지만 뭐 그런 건 알고 하는 일이니까.”
“응원할게.”
수란의 씩씩한 미소를 보면서 강민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수란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어 강민의 응원에 대답했다.
그 미소를 보면서 강민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참.”
“왜?”
“내가 주문을 걸어주지.”
“주문?”
“그래. 피로한 게 싹 날아갈 거야.”
“하하, 그게 뭐야.”
강민이 자신만만하게 하는 이야기에 수란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강민은 마주 미소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자자, 속는 셈 치고. 손을 줘봐.”
“좋아.”
수란은 잠시 생각하고는 강민에게 손을 건넸다.
강민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다 가지고 온 펜으로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마법진이었다.
수란은 손바닥 위로 미끄러지는 볼펜의 감촉이 간지러웠던 듯 킥킥댔지만 강민이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꾹 견뎠다.
“자, 다 됐다.”
강민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마치자마자 속으로 시동어를 외우면서 그렇게 말했다. 수란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면서 신기한 듯이 말했다.
“헤에, 이게 뭐야.”
“피로가 사라지는 마법.”
“후후, 기대할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수란이 말하자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란은 장난인 줄 아는 것 같았지만 강민이 그린 마법진은 진짜였다. 당장은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힘든 일정을 소화하면 이전보다 훨씬 피로감이 덜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효력은 길지 않아 며칠 정도라는 거지만, 손바닥에 대충 그린 마법진 따위로 그 이상의 효력을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수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 앉았다.
“응. 하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 본 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있긴 한데……. 솔직히 속을 터놓긴 어려우니까. 아직은 낯설다는 인상이 더 짙기도 하고, 또 사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란 면도 있고…… 편한 사이는 아냐.”
투덜거리듯 말하는 수란을 강민은 응원했다.
“뭐 너라면 잘할 거야. 항상 뭐든 잘해왔잖아.”
“고마워. 그런데 너 대단하다.”
“뭐가?”
갑자기 수란이 한 말에 강민은 놀란 표정을 보였다. 사실 대단한 사람이 맞긴 해도 오늘 수란에게 대단하다 여겨질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진 수란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사실 데뷔하고 나서 나랑 알던 아이들 중에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한 친구는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잖아.”
“그게 대단한 건가?”
수란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하면 좀 건방지게 들릴 수 있지만, 유명해지고 나서 친구들 만나면 다들 좀 어려워하는 기색도 있거든. 안 그러려고 하는 아이들도 전부 연예계 이야기만 하고. 근데 너는…… 아니잖아. 특이해.”
“그건 그럴까나…….”
가볍게 웃으며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민은 다른 또래 학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수란의 존재에 대해 신기해하거나 대단하다 여기는 면이 없었다. 그녀가 연예인으로서 이제 성공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는 것을 듣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강민 자신이 그런 특별한 계층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했던 입장이기 때문이다.
강민은 단순한 스타 정도가 아니라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과 동격일 정도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만큼 주변에 있던 이들도 누구 하나 녹록하다 싶은 이들이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강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란은 그냥 유명한 광대나 음유시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강민은 축제 같은 때에 그런 광대나 음유시인을 불러다 고용해 쓰는 위치다.
그런 지위에 오래도록 있었던 강민이 수란에 대해 특별함을 느끼고 대하는 데 과장되게 반응한다거나 어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딱!
대화 중에 배트가 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응?”
수란과 강민 모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던 학생들이 공을 쳤는데 그게 둘이 있는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수란의 얼굴은 벌써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구공이 정확히 강민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한 손으로 잡아냈다.
“와아!”
그 모습을 보고 수란이 감탄했다.
“어떻게 한 거야?”
“아, 별거 아냐.”
손에 잡은 공을 보면서 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날아온 공의 속도는 고작 시속 100km를 약간 넘긴 정도였다. 아무리 약해졌다곤 하나 그런 속도에 대응 못할 리가 없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달리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공 좀 던져 줘!”
게임을 하던 학생 중 하나가 글러브 낀 손을 들고 크게 외쳤다.
강민은 그들에게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
크게 자세를 잡지 않고 어깨만으로 공을 던졌다.
하지만 강민이 던진 공은 마치 프로 선수가 던진 것처럼 놀라운 속도로 깨끗한 직선을 그리고는 학생이 든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빡 소리가 크게 났고, 그 학생의 몸 전체가 무거운 충격에 뒤로 밀렸다.
학생은 놀라서 강민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강민 옆의 훨씬 더 놀라운 것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수란이다!”
글러브 낀 학생 옆에 있던 학생이 외쳤다. 그러자 마치 파도가 일 듯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이 수란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저마다 수란 근처로 다가가며 소란을 피웠다.
“와! 언제 온 거야?”
“수란? 유리 말이야?”
“그래! 뷰티걸의 유리!”
이내 파도처럼 밀려든 인파가 강민을 헤치고 수란을 중심에 둔 인간의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걸신 들린 아귀들처럼 외쳤다.
“사인 좀 해줘!”
“알았어. 해줄게.”
곤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수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인간의 벽 뒤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야, 뭐하는 짓이야!”
갑자기 외친 이는 키가 크고 잘생긴 강민 또래의 학생이었다.
강민도 그를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남학생이었으니까. 여학생 중에 수란이 있다면 남학생 중에는 그가 있다고 할 정도다.
이름은 이호성.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미남에다 심지어 집도 부자였다. 그야말로 엄친아의 표본이라 할 만했다. 덤으로 나름 싸움도 잘해서 학년에서 유명한 일진에 속한다던가.
수란의 주변에 인간의 벽을 만들고 있던 학생들이 겁먹은 표정이 됐다.
“아, 호, 호성아…….”
“유리가 왔길래…….”
“매일 바빠서 오랜만에 쉬러 학교를 찾는 친구를 이렇게 괴롭히는 게 할 짓이야?”
찌푸린 얼굴로 호성이 말하자 다들 물러났다.
“미, 미안.”
“아니 괜찮아. 다들 사인해 줄게. 걱정하지 마. 같은 학교 친구들인데 그 정도도 안 해주면 그것도 얼마나 꼴불견이야.”
수란이 웃으며 그들을 말렸다.
찌푸린 얼굴로 참견했던 호성이 금세 웃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뭐 수란 네가 해주겠다면 뭐라 할까만…… 수고가 많네.”
“응, 뭐 몰래 쉬다 가려 했는데 다들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호성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강민을 바라봤다.
“그런데 둘이 아는 사이야?”
“뭐, 조금.”
“응. 중학교 때부터 알았어.”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호성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강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고개를 끄덕인 호성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계에서 무수히 받아왔고, 받을 때마다 하나하나씩 도망침 없이 상대해 모조리 까부쉈던 그 느낌.
바로 적의였다.
강민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수란에게 인사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응. 다음에 또 이야기해.”
수란은 밝은 얼굴로 강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민은 그곳을 떠나가면서 호성을 생각했다. 자신의 감이 둔해진 것이 아니라면, 그 공은 분명히 강민을 직접적으로 노리고 날아온 것이었다.
실수나 사고가 아니라.
‘재밌는데.’
강민은 웃었다.
강민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된 다음 호성은 줄을 선 학생들에게 사인을 하는 수란의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다가가서는 물었다.
“친한 모양이야?”
“약간 인연이 있었어.”
껄끄러움을 느끼며 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의 표정이 짧은 시간이지만 불쾌감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표정이 되어서는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그랬구나. 그런데 어때?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제안, 받아들이지 않겠어?”
“아…… 고맙지만 그땐 행사가 있어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해.”
수란은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호성의 제안은 곧 자신의 아버지가 생일이라 작은 파티를 여는데 거기 초청 가수로 와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보수는 넉넉히 주겠다고 했다. 호성은 한국에서 유명한 재벌 집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수란이 거절한 이상 의미 없는 말이었다.
“아니야.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호성은 짜증을 느꼈지만 티 내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신사적으로 말했다.
요즘 뜨고 있는 걸그룹의 아이돌이라면 좋은 액세서리처럼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아 유혹하려 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니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 같은 완벽한 남자를 무시하고 시시한 놈팽이와 낄낄거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