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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서 놀러왔다-7화 (7/227)

7화

아버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허! 기특한 소릴 하는 거 보니 용돈이 부족하구나.”

“헤헤.”

강민은 그렇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강민의 모습을 자상하게 바라보며 아버지는 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자, 아껴 써라.”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요?”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은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 생각하는 강민은 스스럼없이 받으며 물었다.

“장 보러 갔지.”

“제가 도울 건 없어요?”

주변을 기웃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됐다. 그냥 놀다 가라.”

“네. 그럼 뭐 좀 이따가 가볼게요.”

“그래라.”

그리고 강민의 아버지는 주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곧 가게 문을 열 시간이니 그때까지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사실 매일매일 신선한 재료를 들이고 준비해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강민은 아버지의 노력을 생각하며 이제 좀 편해지실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아 참, 펜하고 종이 없어요?”

“여기 있다. 뭐하려고?”

계산대 근처에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 강민에게 주며 아버지가 물었다. 강민은 멋쩍게 웃었다.

“뭐 그야 쓸 데가 있는 거죠.”

아버지는 더 묻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들어간 다음 강민은 근처를 기웃거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어 메모지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작성하던 마법진과 비슷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어려워 보였고, 다 만드는 데는 십여 분 정도가 걸렸다.

“이제…….”

진을 완성한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갔다. 안쪽에서는 아버지가 장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강민은 근처에 있는 맥주 창고로 갔다.

강민의 부모님은 호프집을 하는 만큼 일반 병맥주 외에도 생맥주도 팔고 있었다. 강민은 생맥주 통 뒤쪽에 진을 그린 메모지를 붙였다.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한 곳에.

메모지를 통해 붙인 다음 그는 마음속으로 시동어를 외웠다.

팟!

종이가 잠시 빛이 나더니 곧 가라앉았다.

“됐다.”

작업을 끝낸 강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떼고 맥주 통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 붙인 메모지는 일루전이 변형된 것으로 술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상대에게 인지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강민은 그것을 통해 이 통에서 나오는 맥주를 마신 이들이 대단히 맛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 뒀다.

“뭐, 원래 먹을 만한 걸 그냥 맛있게만 한 거니까.”

과거 이 마법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못 먹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양 사기(?) 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마법 자체가 딱히 음식을 상하게 하거나 하는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밋밋한 음식을 먹는 데 쓴다면 향신료 하나도 쓰지 않고도 최고의 음식을 먹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스파탐이니 사카린이니 하는 조미료를 쓴 것처럼 어딘가 미묘하게 설탕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응용하면 음식 혁명도 일어날 수 있겠지.’

분명히 그랬다. 생각만 있다면, 강민은 이 방법을 응용해서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는 것도 노릴 수 있으리라.

당장 다이어트 산업에만 접합해 이용해도 포브스 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

강민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그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부와 명예의 극치에 서 봤고, 그러한 부와 명예가 가져오는 부작용도 잘 알았다.

없는 입장에서는 있으면 그저 행복할 것 같지만, 인간이란 쉽게 익숙해지는 동물이라 그 만족은 오래가지 못하다.

대신 커진 덩치만큼 많은 것들이 옆에 달라붙어 귀찮게 한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처럼 멍청한 것이,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중간이 좋은 거야, 중간이. 뭐 적당히 뭘 하는 데에 장애가 없을 정도면 충분하지.’

강민은 그렇게 생각했고 자신이 한 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법진이 영원히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다시 붙이면 된다. 휴가야 가끔 와야 하니까.

강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

가게를 나온 강민이 간 곳은 학교였다.

휴일에 학교라니 청승맞다고 생각했지만 주 5일제가 시작된 이후 주말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쯤 찾아오는 것도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 가보니 주말임에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나와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농구, 축구, 달리기 등의 육체적인 활동을 물론, 승마 교실까지 열리고 있었다. 이 학교가 이렇게 재정이 좋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에. 저런 것까지 했군.”

이계로 떠나기 전 강민에게 학교란 고통스러운 장소일 뿐이었다. 주말에 무언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일 초라도 더 떨어져 있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자진해서 학교에 더 남아 있게 되는 활동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학교생활도 여유롭다.

‘아니, 공부가 빡세졌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여유롭다.

성적이 문제긴 해도 사실 그것도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부담이 되지 않는다. 마법을 써서 공부하고 있는데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은 이미 강민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으니까.

‘도서관에나 가 볼까.’

학교에서는 연중무휴로 도서관을 개방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느긋이 책이나 보면서 마음에 끌리는 활동이 있다면 참여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도서관은 학교 동관 건물 1층에 있었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런 좋은 주말에 책이나 읽고 있을 쏘냐 라고 외치는 것 같은 공허함이었다. 하긴 시험도 끝났기 때문에 도서관에 학생들이 붙어 있을 이유는 별로 없었다.

강민은 느긋하게 신간 코너에서 책을 하나 골라 읽고 있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역시 문명 수준은 지구 쪽이 훨씬 높다.

이계에서 책이라 하면 감상적인 연대기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아무렇게나 고른 책 또한 철저한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마법서 같은 것은 너무 철저하게 정합적이라서 강민이 읽을 수 없는 수준이기까지 했지만 그거야 일종의 전공서이니 당연한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즐겁게 책을 읽는데 등을 탁, 치는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눈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예쁜 소녀였다. 강민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혹하고 말리라 여겨질 만큼.

하지만 강민은 어디서 봤던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 그녀의 아름다움에 혹하진 않았다.

그것은 강민이 이계에서 오래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미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에 비하자면 눈앞의 소녀는 가능성은 있되 아직 최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강민이지?”

“넌…….”

속삭이듯 반갑게 인사하는 소녀를 보며 강민은 희미하게 기억 한편에서 이미지를 떠올렸다.

“오랜만이야.”

손을 드는 소녀를 보며 강민은 마침내 기억해냈다.

소녀의 이름은 김수란이다.

중학교 때 같은 학교였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같은 반이기도 해서 대단치는 않지만 아는 사이였다.

일찍부터 고운 용모로 학교 내는 물론 인근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졌던 수란은 공부도 잘했다. 강민이 알기에 그녀의 성적은 전교에서 10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던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고, 강민의 처지가 시궁창에 빠진 꼴이 되어서 신경 쓸 수 없었지만, 솔직히 말해 강민이 과거에 살짝 연모하던 소녀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그보다 그녀에 대해 학교에서 이야기 듣기로는 연예 기획사에 들어갔다던가 해서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는다 하던데 웬일로 이런 주말에 학교에 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건 상대가 웃는 얼굴로 나오는데 강민 역시 웃는 얼굴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인데.’

‘잠깐 같이 나갈래?’

수란이 권했다.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일부러 권한 걸 내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그러지.’

둘은 함께 도서관을 나서서 운동장 근처의 공원 파고라에 갔다. 파고라 곁에는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란은 그 자판기에서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강민에게 던졌다.

“자.”

“음, 이런 신세를 질 수야.”

수란이 던진 자판기 캔 커피를 강민은 머쓱한 얼굴로 받았다.

수란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오랜만인걸. 게다가 내가 나오자고 했고.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럼 고맙게 먹을게.”

한 모금 커피를 들이켜는 강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란이 말했다.

“흠, 표정이 밝네.”

“그래 보여?”

강민은 살짝 웃으며 얼굴을 만졌다. 지금은 고민이랄 게 없이 홀가분한 신세이니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게 당연하긴 했으나 그게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 보이나 싶었다.

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실은 좀 걱정했거든.”

“네가?”

“그래. 나름대로 아는 사이잖아. 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래도 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지.”

수란은 눈가에 걱정의 빛을 띠고 말했다.

짐작 가는 일은 있었다. 바로 왕따를 당한 일이다. 그 전까지는 강민도 학교에서 쾌활하고 나름 친구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갑자기 왕따가 되고 말았었다.

하기야 왕따가 되는 데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일진이랍시고 깝죽대는 놈들의 마음에 안 들면 그걸로 게임 세트다.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강민은 웃었다.

“아…… 이거 영광인걸. 하지만 걱정마. 이제는 괜찮으니까.”

“다행이다.”

강민의 웃는 표정에 그늘이 없는 것을 보고 안심한 표정으로 수란은 말했다.

이번에는 강민이 반대로 수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너야말로 어때?”

“나?”

수란은 놀란 표정이 됐다.

그녀의 표정에서 강민은 수란의 생활이 소문으로 들리는 것처럼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 뭐 연예인 한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잘되고 있어?”

“얘는…… TV 안 봐?”

섭섭한 표정으로 수란이 물었다.

“어……. 안 보는데.”

“나름대로 유명해. 앨범은 괜찮은 성적을 냈고, 큰 히트작은 아니지만 드라마에도 나왔고. 그런데 그런 걸 몰랐다는 듯 묻다니, 실망인데.”

정말 그렇다면 실례를 한 셈이다. TV를 잘 보지 않다 보니 그런 건 알 도리가 없었다. 소문이라도 들으려면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2학년 들어와서 왕따를 당하면서 친구 관계도 괴멸당하다시피 해서 그런 이야기 들을 일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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