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강민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일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물론이죠.”
강민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원하는 바야 물론 명백했다. 성적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자신만만한 태도에 흡족하게 웃으며 두 사람은 말했다.
“그럼 다음 시험 기대하마.”
“우리 아들, 파이팅!”
“네!”
강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탕.
문이 닫혔다. 방 안에 들어온 강민은 성큼 걸어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려놓았다.
“휴우.”
성적표를 바라보자니 역시 한숨이 나왔다.
성적이 나쁠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나쁠 줄이야.
오랜만에 시험을 치니 까먹은 내용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복구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께 성적을 복구시킬 거라고 약속을 했으니…….
“뭐,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나.”
강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공부는 할 생각이었으니 문제없었다. 휴가 와서 공부라니 억울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휴가인 동시에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드리기 위한 것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사실 왕따 이야기를 꺼내 위기를 모면한 것도 그런 기준에서 보면 꽤 불효인 셈이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강민는 교과서를 꺼내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셈이었다.
따라잡으려면 어지간히 공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기댈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강민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은 마그누스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강자. 그가 휘두르는 검은 그야말로 대지와 하늘을 가를 정도였다.
말하자면 검이 전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에 아주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마법은 응용 범위가 넓어 배워두면 편리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쉽고 유효했던 것이 바로 집중력과 암기력에 관계된 마법이었다.
집중력은 강력한 상대와 싸워 싸움이 길어질 걸 대비해 사용하는 데에 아주 편리했기 때문에 배워뒀다. 힘든 격전이 이어지면 한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암기력을 높이는 마법은 던전을 돌아다닐 때 특히 좋았다. 길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 암기력을 높이는 마법으로 철저하게 외워두면 복잡한 미궁이라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마법들이었는데, 현대의 한국에서는 아마도 한층 그 실용성이 높아질 것 같았다.
‘이렇게…….’
강민은 종이 위에 복잡한 진식을 그렸다.
지구는 마나의 양이 적기 때문에 이세계에 있을 때처럼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명확한 형태를 가진 진식을 만들고 그 위에서 마법을 활성화시켜야 마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슥삭슥삭.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강민은 첫 마법진을 작성할 수 있었다.
“후우.”
강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만든 마법진을 바라봤다.
영화나 게임 같은 곳에 나오는 마법진과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을 중심으로 그 내부에 여러 도형과 복잡한 기호를 새겨 넣는 것이었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지만 그런 기호와 도형들이 마법의 힘을 이끌고 변환시켜 원하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한다.
강민은 그것을 손에 쥐고 의식을 집중하며 발동을 위한 주문을 짧게 외웠다.
웅!
주변에 떨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노이즈 가득한 TV 화면에서 나는 지직소리가 순화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 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강민이 눈을 떴다.
반짝.
정말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눈을 감았다 뜰 때 강민의 눈동자는 거기 담긴 생기가 전혀 달랐다. 강민 역시 오랜만에 마법을 사용해 몸에 상쾌함을 느끼며 교과서를 펼쳤다.
‘어디 보자…….’
공부해야 할 범위는 물론 미리 기록해 뒀다. 우선 위기를 모면하는 데는 그 정도만 공부해도 충분하리라.
하지만 마법이 성공적으로 작동하자 조금 욕심이 났다.
‘뭐, 어차피 해야 하는 거니.’
강민은 웃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마법이 부여한 집중력 덕분에 강민은 남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훨씬 더 뛰어난 효율로 공부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모험을 해 오며 몸에 익힌 다양한 경험까지 곁들여져서, 강민의 학습 성취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까지 상승했다.
‘그래도 재미는 없어.’
강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휴가까지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아주 약간.
*
토요일, 휴일이 되었다.
“후아암.”
침대에 누운 채 강민은 사지를 쭉쭉 폈다. 휴가랍시고 지구로 돌아왔지만 그동안 별로 놀질 못했다. 부모님도 구해야 했고,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시비 거는 것도 살짝 손봐주고, 또 무엇보다 공부를 해야 했다.
기껏 휴가를 왔지만 정작 놀 시간은 충분치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정말로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강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집안은 조용했다.
“나가셨나.”
강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부모님 두 분은 호프집을 운영하고 계신다. 그래서 사실 휴일이 없다. 남들의 휴일이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때고, 반대로 남들이 일할 때가 쉬는 시간이다.
강민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 엄마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메모 한 장이 남아 있었다.
/김치찌개 해 놨으니 먹어라./
메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강민은 빙그레 웃고는 김치찌개를 데우고 어머니가 이른 아침에 마련해둔 음식을 먹었다. 기분 좋은 맛이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강민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과거 모험을 하며 겪었던 일 중 하나였다.
모험을 하면서 식사 준비는 당번제였다. 그렇게 돌고 도는데 한 동료가 만드는 순서가 돌아왔다.
그날 사실 같이 모험을 하던 동료들은 굶으려고 한 이가 많았다. 정말 배고픈 건 못 참겠다 싶은 이만 식사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주변에서 안 만들어도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청개구리 근성이 있어선지, 평소 악명을 회피하려는 것인지 억지로 만들었다. 그 강한 의지 앞에서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사실 강민도 굶으려고 했다.
하지만 완성된 음식을 앞에 내밀고 만든 이가 먹으라고 윽박질렀다. 피할 길이 없었다.
차라리 대악마 발로와 싸우라고 하지!
그렇게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민은 각오하고 먹었고, 놀라고 말았다.
맛있었으니까!
평소 요리 솜씨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맛이었다.
당장 그 맛은 화제가 되었고, 다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어진 것은 찬사였다. 정말 맛있었다. 개중에는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고 한 이도 있었다.
평소 요리 솜씨가 없다고 놀림 받던 동료는 우쭐해졌다.
그리고 동료들은 모두 저녁 식사에 만족했다.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모두 배탈이 났다. 모험을 2~3일 중단해야만 했다.
원인은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었다. 모두 합심해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요리를 만들었던 동료를 닦달했다.
어지간하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겠지만 다들 배탈이 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밝혀진 진실은 어처구니없었다. 실패한 요리라는 것이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맛도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황홀한 맛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마법이었다. 그 실패한 음식에 마법을 걸어 황홀한 맛을 느끼도록 했다는 것이다.
모두들 어처구니없게 여겼고, 다시는 그 동료가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대신 설거지를 비롯해 허드렛일을 전담시켰다.
그 동료는 억울해했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처분을 받아들였다.
“후후.”
다시 그 일이 생각나니 벌써 그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지구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좀 더 효자 노릇을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강민은 밖으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사실 효자가 되려는 게 아니라 해도 이 일은 해 두는 게 좋은 것이기도 했다.
***
강민 부모님의 가게는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크게 번화 한 곳은 아니지만 강민이 사는 곳 주변에서는 나름 사람이 많이 모이고 술집도 많이 있는 번화가였다.
강민은 버스를 타고 가게 근처에서 내렸다. 휴일이기 때문인지 도로변에 사람이 많이 보였다.
그들을 헤치며 강민은 한 빌딩 앞에 섰다. 빌딩은 여러 가게가 모여 구성된 곳이었고 1층 역시 가게였다.
바로 이 가게가 강민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좋은 친구’라는 이름의 호프집이었다.
크게 매상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삼인 가족이 살아 가는데는 문제없을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곳이었다.
‘아, 맥주…….’
가게에 들어가기 전 잠시 가게를 바라보던 강민은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였다.
사실 그는 상당한 주당이다. 겉보기야 고딩이지만 실체는 스물 중반을 넘은 청년이고, 실제 많은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었다. 모험을 마치고 마시는 술 한 잔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오고 난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음 기회를 봐서 한 번 마셔 봐야지.’
이계의 술은 다양했고 맛있었다. 현대 지구의 술은 어떨지 살짝 기대도 됐다.
강민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종소리가 났다.
가게 안은 낮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었다. 사실 아직 열 시간도 아니었다. 준비에 바쁠 시간이다. 실제 가게 안에서 곧장 누군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장사 안 합니다.”
강민의 아버지였다.
“아빠.”
강민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가게 안쪽 주방에서 강민의 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나왔다.
“아니, 네가 여기 웬일이냐?”
“그냥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들러봤어요.”
아들을 반가운 표정으로 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그러냐. 밥 먹었어? 식사 만들어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심심해서 들른 거니까요.”
식사는 나오면서 했다. 가게를 찾은 것은 다른 용건 때문이다.
“뭐하려고. 재미도 없을 텐데.”
“자식이 부모 찾는 데 이유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