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해져서 놀러왔다-5화 (5/227)

5화

“그,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일진 노릇을 한다는 것은 체면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냥 나 일진이오, 해 봐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일진을 일진이게 만드는 것은 반항적인 태도와 적절한 희생양, 그리고 다른 학생들을 향한 위압적인 태도 같은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건 교실 내에서는 강민을 깔보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강민도 물론 알았다.

“그래. 적당히 나를 깔보는 모습을 보이는 정도는 봐주지. 그래야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기어오르듯이 굴면 죽는다.”

말을 끝내면서 강민은 으름장을 놓았다.

뱀 앞의 토끼처럼 벌벌 떨며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진이랍시고 애들한테 돈 뜯고 그러다 걸리면…… 알지?”

강민은 눈을 번쩍이며 경고했다. 일진 노릇을 허락한다는 것이지 일진이랍시고 애들 삥 뜯는 걸 허락하는 건 아니었다.

“네!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너희 지은 죄가 정말 많다는 건 알지?”

셋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최대한 불쌍하고 친근한 표정을 하며 셋 모두 머리를 긁적였다.

“네. 철이 없다 보니……. 헤헤.”

“이제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새사람이 됐습니다.”

강민은 혀를 찼다.

자기가 두들겨 패서 새사람을 만들긴 했지만 역시 인간이란 참 고통에 약했다. 한 번 맛을 보여주니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한 태도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반항심을 품고 있더라도 평생 저런 태도를 유지하게 되리라. 강민이 부여할 수 있는 고통을 실제 맛보고 말았으니까.

강민은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됐고, 앞으로 일요일마다 봉사 활동을 해라. 졸업할 때까지 그걸로 이제까지 쌓은 죄악을 조금이나마 보상하는 거다. 알겠냐?”

“그, 그건 좀…….”

셋 모두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강민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뭐?”

셋은 다시 벌벌 떨었다. 하지만 이건 양보하기 어렵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강민에게 부탁했다.

“아니, 형님. 저희도 저희 생활이라는 것이 있는데 매주는 어렵습니다.”

“네. 한 달에 한 번 안 될까요?”

“그래. 그렇군.”

어조에 담긴 친절함에 고개를 숙였던 세 일진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설득이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강민은 셋이 생각한 대로 웃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너희가 덜 맞았단 소리구나.”

“히익!”

셋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고개를 아래로 박고 감히 들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뒤이어진 말은 뻔했다.

“아, 아닙니다! 하고말고요. 하고말고요!”

“졸업할 때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맡기신 바를 실행하겠습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 갔는지 보고 듣고 확인 전화도 할 테니까 빼먹을 생각은 말고.”

“네, 네…….”

셋은 그저 강민의 말에 복종을 맹세했다.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깜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범접할 수 없는 폭력의 세계를 알아버렸다.

상상조차 아득히 넘어서는 폭력의 세계였다. 영화에서 보는 깡패들의 과장된 폭력조차도 강민이 보여준 폭력의 세계 앞에서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그런 폭력을 앞에 두고, 자존심 같은 걸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강민은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 꿇은 강민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침중한 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사람의 우울한 시선은 방바닥의 한곳에 몰려 있었다.

그 방바닥에 놓인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으음.”

“휴우…….”

“…….”

강민의 부모님 두 분은 한숨을 쉬었고, 그것은 바늘처럼 강민의 가슴을 찔렀다.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역시 아무말도 못한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종이의 정체는 바로 성적표. 며칠 전 치른 모의고사 성적표가 집으로 날아온 것이다.

점수는…… 당연히 처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십 년이나 공부를 손에서 뗀 채 검을 휘두르던 최고의 전사에게 갑자기 돌아와서 모의고사를 치르라고 해 봐야 더러운 점수밖에 나올 수 없었다.

‘내가 레이라도 아니고…….’

레이라는 강민의 동료 마법사다. 짜증 날 정도의 천재였다. 훑어보듯이 읽은 책을 통째로 씹어 먹은 듯이 기억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강민아.”

“네.”

“요즘 힘든 일이 있었다는 건 짐작하고 있다.”

“네.”

“하지만 학생의 본분은 뭐지?”

아버지의 물음은 무거웠고, 강민은 물론 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건 문답이 아니다. 그냥 네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려 주겠다는 설명이다.

“그게…… 고, 공부입니다.”

“그래, 공부지.”

그러면서 강민의 아버지는 성적표를 강민의 앞에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무겁게, 또한 노기를 그 어두운 무게 뒤에 감춘 채 물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성적표에는 각 과목의 점수가 나와 있었다. 모의고사이기 때문에 등급과 점수가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평균 내서 30점. 등수는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압도적으로. 뒤로 센다면 전교에서도 최상위권이다.

그만큼 끔찍한 점수였다.

“그게…….”

강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야 있지만 이계에서 십 년간 용사로서 강대한 적과 싸우느라 공부를 할 틈이 없었습니다, 라고 설명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가슴 아픈 부모님의 마음에 한층 대못을 박는 대답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용한 병원을 수소문하실지도 모른다.

강민의 어머니 역시 우울한 표정이 되어 한몫 거들었다.

“성적표 보고 정말 속이 상해서…….”

“나도 가능하면 아무 말도 안 하려 했다만 이런 성적표가 날아오는 데야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강민은 머리를 굴렸다.

전사로서 지내며 무수한 싸움을 거치며 단련되었던 임기응변의 통찰력이 지금도 빛을 발했다. 강민은 서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착상을 변명으로 완성했다.

“죄, 죄송합니다. 요즘 걱정거리가 많아서 공부를 통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걱정거리길래 성적을 이 꼴로 만들었다는 거니!”

납득 할 수 없다는 듯 어머니는 속이 상한 얼굴로 질책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강민은 원래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최상위권 대학은 좀 어려워도 ‘인 서울’은 가능한 정도랄까.

하지만 지금 성적은 지방대는커녕 받아줄 대학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꼴통스러웠다.

강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솔직히 말해봐라.”

뭔가 변명이라도 듣지 않으면 이 경악스러운 성적을 납득할 수 없었던 강민의 두 부모님은 어서 그럴듯한 변명을 해 주길 바라며, 동시에 그 변명이 어처구니없으면 크게 혼을 낼 생각을 하고 기다렸다.

강민이 답했다.

“왕따를 당했습니다.”

“뭐?”

“와, 왕따?”

한 번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 강민의 부모님은 새 학기 시작 후 강민의 태도가 우울해진 데 대해 걱정이 많았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왕따라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네. 학교에서 운이 없어서…… 잘나가는 애들한테 찍혔거든요.”

사실이긴 하다. 강민은 심지어 그 때문에 자살까지 했을 정도이니, 왕따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쁜 왕따를 당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아마 이계로 건너가는 게 아니었더라도 성적은 꽤 가파르게 떨어졌으리라.

일그러진 얼굴로 강민의 아버지가 이를 갈았다.

“이놈들을 내 당장……!”

“그, 그래서? 요즘은? 지금도 그래?”

어머니는 분노보다는 강민이 걱정되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왕따를 당하고 있다 치면 이미 성적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다.

왕따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이미 TV나 신문을 통해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 문제라면 아무리 떠들어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황하는 부모님을 보며 강민은 서둘러 말했다.

“아니아니, 침착하세요. 아직도 당하고 있는 중이라면 말씀드리기 어려웠겠죠.”

강민이 그렇게 말하자 당황하던 강민의 부모님은 다소 침착을 찾았다.

“아, 그렇구나. 흠!”

“그러면 이제는 아니라는 거야? 정말이니?”

강민은 과장되게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으로 생각한 왕따가 생각보다도 위력이 강했던 만큼 서둘러 부모님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네. 어떻게 다 해결됐어요. 제가 우울해 보였던 게 그거 때문이었거든요.”

“아, 그러면 요새 표정이 좀 밝아졌던 것도.”

강민의 어머니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죠.”

“휴우…….”

“천만다행이구나.”

강민의 부모님 두 사람은 강민의 설명을 듣고 안도한 표정이 됐다.

강민은 후속 설명이 필요하단 생각에 간단히 덧붙였다.

“네. 이 악물고 걔들하고 직접 담판을 지었어요. 그랬더니 의외로 선선히 물러나던데요.”

“음! 멋지구나, 내 아들!”

아버지는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따 문제라는 게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랴.

그걸 자력으로 해결했다는데 대견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정은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그래서 성적이 떨어졌던 거라면야, 어쩔 수가 없지.”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고 보니 성적이 떨어진 정도에서 끝난 게 천만다행일 사연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해결됐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엄격한 표정으로 강민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상담 하나 없이 이 녀석이.”

아버지로서 아들이 그런 일을 겪고도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암시조차 없었다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물론 왕따 문제라는 것이 어른이 끼어들어 어떻게 되기 힘든 것이란 건 알고 있긴 하나, 부모 마음이란 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두 분 다 요즘 힘드신 걸 뻔히 아는데 저까지 우는소리 할 수는 없잖아요. 전 장남인걸요.”

강민이 멋쩍게 하는 말에 두 사람 모두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그래. 그렇지.”

“그래…….”

벌써 이렇게 컸나.

강민의 부모님은 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의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강민의 모습에서는 고등학생이란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이미 세상을 깊게 맛보고 당당히 제 몫을 해내는 한 사람의 어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대견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강민 자신을 위해 이야기할 것은 이야기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