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88화 (88/316)

88화

“스트라이크 아웃!”

바짝 긴장한 채 스윙한 앤드류 로마인은 높은 하이 패스트볼을 크게 헛친 뒤, 덜커덕 작동을 중지했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You-Suck!”

“유우우우우-써어어어억! 그래, 멍청한 놈 너 말이야! 니 타격이 Suck이라고!”

귓구녕에 관중들의 조롱이 때려 박힌 뒤에야 다시 재가동되었는데, 저거 미는 건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내 팬들, 레이더스들이 타자한테 유석유석 거리는데, 그들 외에도 제법 많은 관중이 동참했다.

‘다음 타석은 조심해야겠네.’

첫 번째 타석은 루킹삼진.

이번 타석은 헛스윙으로. 두 타석 연속으로 삼진을 기록하고, 조롱까지 당했는데도, 타자는 여전히 기세가 좋다.

어느 정도 타이밍도 잡은 것 같으니, 다음 세 번째 타석부터는 꽤나 조심해야겠지.

물론 그다음 타석이 돌아온다면 말이야.

‘뭐, 그거야 나중에 걱정할 일이고, 일단은 나쁘지 않네.’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온 1번타자까지 삼진으로 잡으면서 3회 초 역시 무실점.

이전 타석에서 5번타자, 저스틴 업튼에게 2루타를 내주긴 했지만, 그 외의 나머지 타자들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크보 출신 약쟁이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시원찮았고. 약빨이 떨어졌나보다.

‘누가 보면 기록원인 줄 알겠네.’

그렇게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갈 때, 관중석 한쪽이 부산스러워서 쳐다보니.

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웬 숫자가 적힌 커다란 판넬이 눈에 띄었다.

‘음, 42?’

언뜻 보면 뜻 모를 숫자지만, 척하면 척이지. 내 연속 이닝 무실점이잖아.

이번 이닝까지 무실점이 이어지자, 그걸 챙겨온 것 같은 관중은 기쁜 얼굴로 뒤의 숫자를 가방에서 꺼낸 3으로 교체했다.

또 그 옆에 앉은 사람은 이미 나열된 KKK 옆에 K 하나를 더 추가했고. 저건 오늘 경기 삼진이네.

‘누가 보면 팀에서 돈 주고 고용한 줄 알겠네.’

이닝이 끝날 때마다 그때그때 새로 꺼내서, 세워두는 게 귀찮을 법 한데도 그들은 웃는 얼굴을 했다. 그런 행위가 자기 삶의 유일한 낙이라는 것처럼. 점점 인기가 올라가더니, 약빨이 저기까지 갔구만.

“One More! One More!”

내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자, 자신들을 본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그쪽 방면에 있던 관중들이 큰 소리로 원 모어를 외쳤다.

한 번 더 하라는 건데, 그 한번 더가 무실점을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삼진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겠지.

‘무실점은 모르겠고, 삼진은 뭐, 한 3~4개 정도는 더 가능하겠네.’

여전히 0대0이지만,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삼진도 제법 잡고, 무실점도 진행 중이니 기대하던 피칭일 테니까.

그 덕에 아직까지는 타자들을 향한 호통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의 대치 상황이 조금 더 길어진다면 그때는 또 말이 다르겠지만.

“좀 힘들어 보이던데, 손목은 괜찮아?”

“어? 어, 당연히 괜찮지! 하하, 날 뭘로 보고! 12이닝쯤 받아도 멀쩡하니까, 마음껏 던져, 마음껏. 괜히 내 걱정하지 말고. 절대로 발목은 안 잡을 테니까.”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시큰거리는 건지, 손목을 주무르고 있는 브루스 맥스웰에게 물으니 제 가슴을 땅땅 쳤다.

뭔지는 몰라도 서열 정리는 확실하게 돼서 말은 잘 듣는데, 이젠 또 다른 게 걱정이네.

뭐, 그래도 명색이 포수인데, 공 좀 몇 개 받았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지금까지는 좋긴 한데, 저쪽도 살짝 간을 보는 느낌이란 말이야.’

브루스 맥스웰에 대한 걱정은 거 정도쯤 하고, 상대 타선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관중들 반응에서 알 수 있듯 잘 막고 있기는 한데, 아직은 전초전에 가까운 것 같거든.

삼진을 당하거나, 아쉬운 범타가 나왔을 때도, 타자들은 대부분 순순히 물러났다.

‘타격감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으니까. 잘하면 하나 맞겠네.’

“브루스.”

“어? 어, 왜? 뭐 시킬 일이라도 있어? 음료수? 아몬드?”

아니, 그래고 왜 자꾸 음료수 타령이야. 차라리 물어보지 말고 그냥 가져다주던가.

경기 시작 전과 달리, 이제는 좀 이상한 곳에서 의욕을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그에게 주의했다.

“중간에 속도를 높일 수도 있으니까, 단단히 준비해라.”

“속도를··· 높인다면?”

“구속은 아니고, 그냥 좀 빨라질 수도 있어. 중간에 신호 줄 테니까, 그때부터는 재깍재깍 공 넘겨. 바로바로 포구 준비하고.”

그렇게 말하자, 멀쩡하다며 소리칠 때는 언제고, 브루스 맥스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진짜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네. 아니, 너 포수 아니야? 공 잘 받으라고 인마. 밥값은 해야지.

‘아무튼 조심 좀 해야겠어.’

####

“진짜, 뉘 집 자식인지는 몰라도, 잘하긴 잘하네.”

“그러니까, 루키 주제에 1선발씩이나 하는 거겠지.”

“뭐, 에이스 같긴 하더라. 공이 장난이 아니야.”

덕아웃으로 돌아온 타자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눴다. 지난 타석들로 확인한 상대 투수는 제법 강력했다.

물론 기존에도 루키라고 방심했던 건 아니고, 단단히 준비하고 타석에 나섰는데, 그런데도 기대이상이다.

이제 스물넷이라고 하던가?

엄청나게 빠른 나이는 아니다. 대부분의 선수가 저 나이쯤에 처음 빅리그를 밟으니까.

진짜 천재라고 할 만한 놈들은 이것보다도 2년, 더 빠르면 3~4년 정도 이르게 데뷔하기도 하지.

허나 어찌 됐든 첫 데뷔 시기가 저 즈음이라는 거지, 진짜 메이저리거급의 실력을 갖추는 건 그렇게 한번 경험을 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물넷에 빅리거, 아니, 거의 올스타급 피칭을 선보이는 저 투수는 데뷔가 이른 건 아니더라도, 제법 조숙한 편이다.

“어린놈이 생각보다 노련하더라.”

“오, 미기가 보기도 그래요?”

“투수도 그렇고, 포수도 제법 싹수가 좋아 보여. 꿈쩍도 안 하더라고. 좀 긁으려고 했더니.”

“쯧쯧, 에이스는 애들 관리를 개판으로 하네. 이런 대선배 노땅한테 그런 푸대접을 하게 만들고.”

그리고 포수도 조금 묘하다.

미겔 카브레라는 지난 1회 초의 타석을 돌이켜봤다.

배터리가 쌍으로 루키라서, 포수쪽을 한번 긁어보려고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잘 먹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공을 받는 것에만 집중했었지.

‘완벽하지는 않아도, 쟤도 나쁘지는 않네.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웃기게 생겨서 재밌을 줄 알았더니 말이야. 입을 꾹 다문 채 집중하는 모습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저렇게 치고 올라오는 어린 녀석들을 볼 때면, 자신도 슬슬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싶었다.

요즘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기도 하고.

‘물론 아직은 아니지.’

“딱 한 점만 내면 돼, 한 점만.”

“트윈스 놈들처럼 쓸데없이 스킨쉽만 계속 하지 말고, 딱딱 두 방으로 끝내자고.”

“그건 조루 아니냐?”

“조루든 뭐든, 그전에 끝나는 놈보다는 본방까진 가는 놈이 더 낫지.”

“오, 그게 정답이네.”

은근한 웃음기가 덕아웃에 흘렀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없을 수가 없는 약간의 짓궂은 농담이 그런 분위기를 띄웠고.

오늘의 목표는 간단했다.

딱 한 점. 무실점을 이어나가고 있는 저 선발투수에게 딱 한 점만 내는 것.

물론 찌질하게 무실점 기록이나 깨려고 하는 건 아니다. 그거 하나면 끝이니까.

“아까 좀 타이밍이 빨라졌지?”

“저스틴이 안타 치니까, 갑자기 확 올라왔어요.”

“듣던 대로, 집착이 심하네.”

“아마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좀 출력을 높이는 건 같긴 합니다.”

저 루키, 아니 A’s의 에이스는 실점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런 기색이 역력하지.

지난 트윈스전만 봐도, 안타는 의외로 쉽게 내주면서, 실점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막았지.

주자 견제처럼, 기존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딱 한 점이면 충분하지. 그 뒤는 그냥 파티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의 영역이지만. 그렇기에 한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실점을 싫어하는, 어쩌면 두려워하는 성향. 데뷔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무실점 기록.

‘실점에 대한 내성이 없겠지.’

사실 이건 저 녀석만의 문제는 아니고, 루키들이 흔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타자 같은 경우는 삼진을 당하면 죽는 것처럼 구는 녀석들이 있지.

물론 저 녀석도 그럴지는 모르나, 어쨌든 가능성은 충분했다.

첫 실점이 올라가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깨지는 순간, 생각보다 금방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그러니 한 점이면 충분하고.

늙은 호랑이 타이거즈라고 해도, 그 한 점을 낼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쓰읍, 우리가 먼저 맞았네.”

“선취점은 좀 아쉽지만, 이번 공격에 다시 역전하면 되겠지.”

먼저 선취점을 낸 건 홈팀이었다. 수비를 마치고 돌아오며, 선수들은 아쉬운 듯 혀를 차거나 입맛을 다셨다.

기왕이면 이쪽에서 먼저 때리려고 했는데, 한 바퀴를 돌면서 시간을 허비한 것 때문인지, 저쪽이 먼저 2득점을 올렸다.

앞서나가는 경기에 홈팬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올라갔지만, 적어도 타이거즈 덕아웃 안에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깔끔하게 스윕 가자!”

“오클랜드 정도는 가볍게 밟아줘야지!”

“닉! 먼저 하나 때려! 다음은 미기가 알아서 할 거니까!”

공수교대 후 시작된 공격.

4회 초의 리드오프로 나가는 닉 카스테야노스에게 동료들의 응원이 쏟아졌고.

뒤지고 있는 주제에 기세등등한 꼴이 못마땅했던 건지, 홈팬들도 더욱더 소리쳤다.

“One More!”

원 모어.

아까 전부터 들렸던 단어.

그 단어가 이상하게 불쾌했다. 우릴 진짜 개X으로 보는 건가? 루키의 기록에 제물이나 될 정도로?

분명 그런 기세에 지지 않으려고, 투수를 격려하기 위해 내지른 목소리였겠지만, 오히려 그것에 반응한 건 타이거즈였다.

“아웃!”

2번타자, 닉 카스테야노스는 아쉽게도 2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You-Suck!”

지금은 삼진도 아닌데도, 조롱이 쏟아졌다. 아니, 투수의 이름을 외친 건가?

물러나는 타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걸 보면, 조롱이 맞는 것 같다.

동료들의 응원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민망한 듯 머쓱한 표정으로 벤치로 돌아가면서도, 그 역시 힘껏 박수를 쳤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딱 한 점이 나오는 순간, 반대로 우리가 조롱해줄 테니까. 딱 한 점만 나온다면 말이다.

‘패스트볼은 버려야 돼. 그건··· 솔직히 좀 힘들어. 그럼 뭐가 좋을까, 구종은 더럽게 많은데.’

그 다음으로 타석에 올라온 미겔 카브레라는 노릴 공을 정했다.

예전이라면 굳이 목표를 정하지 않더라도 타격감만 잘 맞으면 아무거나 날릴 수 있었는데···

세월이 야속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하나를 노리고 있다면, 저 묵직한 공조차도 충분히 칠 수 있고.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투수는 카운트를 좁혔다.

한 번 흐름을 끊을까, 싶었으나, 오히려 그는 투수가 리듬을 유지하게끔 유도했다.

마지막 위닝샷을 알 것도 같으니까. 자신에게 던지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겠지만.

‘왔다.’

그래도 아직 머리는 죽지 않은 건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제대로 찍었다.

그는 바깥쪽으로 낮게 날아오는 공을 똑바로 지켜보며, 그대로 배트를 휘둘렀고-

“그렇지!”

손맛이 느껴지는 즉시 배트를 내동댕이치고, 힘껏 내달렸다.

바깥쪽 낮은 서클 체인지업.

역회전이 강한 놈으로 하나 던질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급격하게 꺾이는 공.

그걸 억지로 쫒아가서 때린 그는 손목을 유연하게 꺾으며 타구를 날려 보냈다.

‘어우, 아슬아슬했네.’

간신히 2루수를 넘긴 타구.

가볍게 툭 밀어쳤는데, 잘못했으면 잡힐 뻔했다. 어쨌든 우전안타.

1루 베이스에 우뚝 선 그는 동료들에게 박수를 쳐주며 그들을 응원했다.

“자자, 바로 홈인 가자! 나 아직 쌩쌩해!”

잘 알겠다는 듯 동그랗게 말아올린 손가락. 4번타자와 눈을 맞추던 그는 투수를 살펴보며 입맛을 다셨다.

“웬만하면 붙어 있어, 저번 경기를 보니, 견제 동작도 좋아.”

“주자노릇은 해야죠. 그래도 너무 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만류하는 1루 코치를 뒤로한 채 슬금슬금 리드를 넓혔다.

솔직히 말하면 투수를 괴롭힌다거나, 도루한다거나 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약간의 노력, 그리고 성의였다.

‘어느 정도는 미리 준비해야 돼. 안 그러면··· 좀 힘들다.’

한창 팔팔했을 때도 발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도루도 별로 안했고.

그의 천재성은 어디까지나 ‘타자’의 역할에 제한되어 있으니까.

원래도 그리 좋지는 못했던 주력이 나이를 만나면서 조금 더 느려졌고, 그것을 잘 알기에, 그는 과거보다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어떻게든 한 점이면 돼, 한 점이면.’

그 한 점을 벌기 위해, 이 정도는 해야지. 적당한 리드를 유지하며 노려보자, 투수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뭐, 자신이 도루를 잘 안 하는 거야 죄다 알고들 있으니까, 그래도 루키면 좀 거슬릴 법도 할 텐데, 현명하긴 하네.

그렇게 생각한 미겔 카브레라 역시 투수와 마찬가지로 홈 플레이트의 상황에 집중했고, 조금씩 승부가 길어졌다.

“파울!”

“파울!”

연이은 파울.

빅터 마르티네즈.

원래는 포수였지만, 타이거즈에서는 지명타자로 주로 나오는데, 미겔 자신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양반이나, 오늘은 제법 배트가 좋다.

큼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파워도 좋고, 노련한 타격능력이 마침 좋게 발휘되는 거겠지.

‘타이밍이야.’

그런 타자가 투수의 타이밍까지 거의 잡았으니-

“뛰어! 뛰어!”

한방이 나오기는 충분하다.

큼직한 장타. 빨랫줄처럼 타구는 쭉 날아갔고, 생각보다 조금 더 멀리 뻗는 타구에 외야가 요동쳤다.

미겔 카브레라는 폐가 터지도록 달리면서도, 수시로 타구를 확인했고, 곧 어금니를 꽈악 물었다.

‘됐어!’

멀어서 희미하게 보이기는 하나, 분명 타구는 우익수를 넘겼고, 그건 곧 찬스를 의미했다.

‘펜스까지 갈 테니까, 그 정도면 아무리 나라도 충분하지!’

오클랜드 콜리시엄.

투수에게 유리한 구장이고, 극도로 홈런을 억제하는 구장으로 유명한 곳인데.

난공불락의 거성은 아니다. 명확한 약점이 존재하니까.

외야가 넓은 탓에 3루타가 자주 나오는 구장이거든. 그 말인즉슨, 일단 야수만 넘기면 그 뒤는 무인지대라는 거다.

“뛰어! 그냥 계속 가!”

2루를 지나치자, 그를 맞이하듯 손을 휘적이던 3루 주루코치는 흘끔 외야를 확인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비록 좋은 주자는 아니나, 충분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를 믿으며, 굳이 뒤를 확인하지 않은 미겔 카브레라는 오로지 홈 플레이트만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이걸로···’

차오르는 숨, 두툼한 몸 때문인지 더럽게 힘들기는 한데-

‘끝이다!’

“세이프!”

그래도 이 정도면 그렇게 노력할 만한 가치는 있다.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송구. 허나 터치가 빨랐다.

주심이 세이프를 선언하는 순간, 흥겨웠던 경기장은 마치 장례식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곧이어-

“X발 X까지마!”

“그게 어떻게 세이프야!”

“눈깔 X신이냐! 제대로 안 봐!”

“비디오 판독! 챌린지인지 뭔지 그거 빨리하라고!”

압도적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43이닝 연속 무실점, 아니, 이번 이닝의 원 아웃까지 포함해서 43.1이닝 동안 이어졌던 무실점은 깨졌다.

갓 찍어낸 새하얀 도화지 같던 저 투수의 실점 기록에도 1이라는 숫자가 콕 찍혔고.

“이거이거, 좀 더 나이 들면 대주자해도 되겠는데?”

“완전히 나는 수준이던데, 좀 젊을 때 이렇게 뛰었으면 30-30도 했겠어?”

“30-30? 딱 5년만 젊었어도 별것도 아니지~ 그런데 내가 도루까지 해버리면 너무 밸런스가 안 맞잖아? 뭐든지 적당~히 봐주면서 해야 재밌어.”

반응과 상관없이 후련하게 돌아온 그는 동료 한명 한명과 하이파이브했고, 농담스런 칭찬에 너스레를 떨면서도 마운드를 확인했다.

챌린지를 요청한 것 같은데. 확실하게 베이스를 먼저 찍었기에, 그건 상관없고, 가장 중요한 건 투수의 반응이다.

약간 고개를 숙인 탓에 모자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는데, 알만했다.

‘그렇지, 그래야지. 이제 좀 루키 같네.’

“세이프!”

만족스럽게 웃었을 때, 판독 결과도 나왔다. 원심유지. 전광판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정 못하는 건지, 불만 가득한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이 흘렀고, 그런 모습에 화가 난 듯, 그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2루까지 뛰었던 타자, 빅터 마르티네즈가 크게 외쳤다.

“One More! One More!”

방금 전 그들이 투수를 응원하면서 내뱉었던 말. 그것을 한 점 더 내자는 의미로 외쳤고, 그에 피식 웃은 미겔 카브레라는 곧 싸한 기운을 느꼈다.

“어?”

다시 1사 주자 2루.

득점찬스인데다가, 계획대로면 투수도 망가졌을 테고, 타자도 타격감이 좋은 저스틴 업튼으로 이어지니, 분명 대량득점일 내야, 그들의 예상에 맞는 건데···

‘망했네.’

고개를 쳐올린 투수는 무덤덤하게, 아니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서 어깨를 돌렸다.

그 얼굴에선 그 어떠한 종류의 당혹감도, 좌절감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순간 미겔 카브레라의 의심은 더욱더 짙어졌다.

‘저거 아무리 봐도 루키 아닌 것 같은데?’

####

‘느낌이 안 좋더니, 아 X새끼들 결국 하나 치네.’

입안이 쓰다.

진짜로 실점을 해버렸네.

이걸로 43이닝 연속 무실점은 끝났다. 진짜로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깨지니까, 좀 아쉽네.

패착은 노인네들이다.

지난 타석에서 힘이 없어 보여서 약간, 진짜 약간 방심했는데, 늙은 고추? 생강? 아무튼 뭐시기가 맵다더니.

늙었다고 생각한 미기에게 하나 맞은 뒤,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양반에게 장타를 내줬구만.

‘새삼 콜리시엄 X같- 아니, 아니지. 홈런 안 맞는 게 어디야?’

미기의 주력이 느리니, 다른 구장이었다면 실점까진 아니었겠지만, 오늘은 콜리시엄의 특수성이 독으로 작용했다.

괜히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쟤가 막아준, 앞으로 막아줄 홈런이 몇 갠데, 그럴 수야 없지. 사랑한다, 콜리시엄! 홈런만 잘 막아줘!

‘어? 왜 나와?’

대충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준비하려고 할 때, 벤치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홈 플레이트에서도 올라오고.

투수코치와 포수가 오는 건데. 왜? 아, 왜는 아니지. 실점하고, 주자도 2루니까, 위험상황이기는 하네.

“무슨 일이에요? 저 내려가요?”

“그럴 리가! 잘 던지는 투수를 왜 내려? 그것도 4회 만에. 그런 코치는 미친놈이지! 그리고 내 미스야. 내가 볼배합을 잘못했어. 이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Suck, 내 실수야. 아무래도 내가 타자한테 읽힌 것 같아. 또 빅터 마르티네즈는 원래 포수출신이니까···”

갑자기 올라오더니, 왜 내 앞에서 간증회를 하고 그러십니까.

깨지기 쉬운 취급주의 물품을 다루는 것처럼 굉장히 조심스러운 모습들인데, 조금 우습기도 했다.

‘뭐가 볼배합 미스고, 뭐가 자기 실수야? 그냥 실투구만.’

어쩌면 날 돌려서 까는 건가?

좀 과하게 위로하니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올라온 김에 좀 있다 가요. 어우, 야구는 작전타임 안 만드나? 쉬니까 좀 살 것 같네.”

솔직히 말하면 난 조금 후련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기록이고, 그래서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사람이라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웠던 건지, 막상 기록이 깨지니까, 화도 좀 났지만, 어깨도 가벼웠다.

“슬슬 속도 좀 올리죠. 브루스, 아까 말해준 대로 갈 거니까, 준비해.”

“어? 어! 무조건 다 잡을게! 마음 놓고 던져!”

“Go, 무리하는 건 아니지?”

“몇 개나 던졌다고··· 거뜬하니까, 코치나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내가 흥분한 건가, 걱정어린 눈빛을 한 그들을 다시 내려보낸 뒤,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이미 하나는 신기록이야! 한 100년은 갈걸?”

“Suck, 잘하고 있어! 앞으로 삼진이나 X나게 잡자!”

홈팬들의 위로 혹은 응원.

슬쩍 관중석을 훑으니, 아까 전에 봤던 무실점 이닝을 알리는 판넬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삼진을 알리는 K는 여전히 남아 있고.

판넬을 준비했던 양반은 주변에 눈총을 사고 있는데, 아마 나한테 괜히 부담을 줬다는 거겠지.

후련한 나랑은 다르게, 팬들은 조금 실망한 것 같은데, 그런 얼굴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날 위로했다.

‘재밌네.’

조금 우습다.

이제 첫 실점이고, 기록도 깨졌으니, 혹시라도 내가 크게 흔들렸을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누가 그래, 첫 실점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얻어맞은 안타가 몇 개고, 그중 홈런이 몇 갠데, 무슨 이게 첫 실점이야?

다 합치면 넉넉잡아서 한 300점? 아니 그보단 더 적으려나? 아무튼 세 자릿수는 될 텐데. 겨우 실점 하나 정도는···

“스트라이크!”

우습지도 않지.

과감하게 몸쪽 포심.

타자가 조금 놀란 표정이다.

뭔지 몰라도 자기 예상이랑 다르다는 기색인데, 계속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래, 루키 무실점 좀 깨겠다고 어르신들 동원해서 두들겼다 이거지? 둘 다 딱 보니까 게스히팅이었고.

“스트라이크!”

“볼!”

이젠 대가리 굴릴 여유를 주지 않을 생각이다. 조금 씹다가 볼 한쪽에서 굴리던 껌을 마구잡이로 질겅거리며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속도를 높이고, 타이밍을 좁힌다. 적절하게 올라온 집중력과 경기감각이 그런 가속을 도왔다.

다시 삼진 하나.

아마도 관중석에는 K하나가 더 추가됐을 거다. 그걸 확인할 여유는 없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이젠 여섯 개가 됐겠지. 피안타 두 개에 실점 하나. 잔루는 2루.

한 점을 내기는 했지만, 찬스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못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난 거 아니지?”

“내가? 뭐, 실점 하나 가지고.”

직접 공을 받은 얘도 그렇고.

브루스 맥스웰은 바짝 긴장했는데, 날 뭘로 본 거야?

난 겨우 이런 걸로 화 안 내. 그냥··· 합당한 대가를 바라는 거지.

‘X발 내 기록 돌려내 Cat새끼들아.’

그래, 솔직히 말하면 화났다.

굳이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이거 곱씹을수록 빡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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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부터 이어왔던 연속 이닝 무실점 행진이··· 결국 깨지는군요. Go의 기록이 43.1이닝으로 종결됩니다.

-그가 루키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로 어메이징한 기록이죠. 또한 데뷔 직후부터 따지면 역대 1위의 대기록인데, 과연 우리 세대 안에 이게 깨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기록이 깨졌다.

그 순간 시청자들이 탄식하거나, 환호성을 내지를 때, 중계진은 황급히 수습에 들어갔다.

아니, 사실 수습할 것도 없다.

그냥 딱 봐도 무지막지한 기록이 갑작스럽게 깨졌는데, 뭘 어떻게 수습하겠나?

그저 최대한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상황을 전달만 하는 거지.

└타이거즈 새끼들 진짜 더럽게 눈치 없네.

└저 Mother F-word-새끼들!

└뭐야, 루키가 기록 이어간다고 해서 기껏 찾아봤더니, 벌써 끝났어?

└X발 43이닝이나 이어갔는데 이게 벌써냐? 너 X신이야?

└쳐맞은 건 너네 루키인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다만 중계진의 수습과는 별개로 현장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역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분노한 오클랜드 팬들과 이때다 싶어 조롱하는 타팀 팬들이 어우러져 개판이 만들어졌으니까.

└언제는 ‘불독’ 기록 깨겠다며? 택도 없는데?

└어디보자~ 오렐보다 16이닝이나 못하네, 이 정도론 어림없어.

└오클랜드 거지들, 신기록 수립이라며 설레발 떨더니lololol

└데뷔 직후 기록? 그게 무슨 기록이야!

└그러고 보니 그거 예전 1위도 에이스였지? 너넨 가짜 기록밖에 못하냐?

기록마저 깨졌는데, 조롱까지 당하는 게 조금 억울할 법도 하나, 사실 이유는 있었다.

트윈스전에서도 꾸역꾸역 무실점을 이어가는 고유석을 보며, 기세가 등등해졌던 오클랜드 팬들이 먼저 여기저기 시비를 걸었으니까.

특히나 진짜 연속 무실점 기록인 오렐 허샤이저를 언급하며 다저스 팬들의 심기를 긁었었고. 그에 대한 업보가 돌아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을 잡는 Go! 일곱 번째 삼진입니다!

-분노의 피칭이네요. 실점이 나온 직후부터 엄청난 속도로 타자들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비아냥과 조롱, 그리고 좌절감 속에 속이 부글부글 끓던 그들을 위로하듯 고유석은 마치 무실점 대신이라는 것처럼 삼진을 올렸다.

-또 다시 삼진! 삼진! 탈삼진 여덟 개째! 지난 이닝부터 지금까지 네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A’s]

[난 Go가 이래서 좋아, 뭐든 대신 하나를 해주거든.]

└그래, 실점 그까짓거, 한번 할 수도 있지. 애초에 실점 없는 투수가 어딨어? 그리고 그래봤자 겨우 1실점이야. ERA는 여전히 0점대네.

└난 원래 무실점보다 Suck이 시원하게 삼진 잡는 게 더 좋아.

└진짜?

└지금부터는 그럴 거야.

└그렇다면 나도.

그런 위로에 팬들은 애써 아쉬움을 접고서 경기에 집중했고, 조금 분위기가 미묘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또 다시 삼진을···

-삼진! 삼진! 열 번째 삼진을 올립니다!

뭐랄까, 만족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삼진 쇼는 위로라기보다는···

-Go! 7회 초를 KKK로 끝내버립니다! 실점 이후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13K!

징벌에 가까웠으니까.

실점 이후, 고유석은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삼진을 잡았다.

5회부터 7회까지, 중간에 나온 피안타 하나를 포함, 열 명의 타자에게서 일곱 개의 탈삼진을 올렸으니까.

└어··· Go도 생각보다 많이 아쉬웠던 것 같은데?

└그러게, 무덤덤한 것 같더니, 속마음은 아니었나봐.

└진짜 작정하고 조지네··· 화 많이 난 것 같은데?

└보통은 화나면 흔들려야 정상 아니야? 근데 왜 더 잘하냐. 헐크도 아니고.

7이닝 13K 3피안타, 그리고 길고 길었던 1실점.

비록 기록은 깨졌지만, 고유석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어냈다. 아니, 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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