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당장 던질 건 아니지?”
“아직은 좀 그렇죠. 좀 어색하기도 하고, 제어도 안 되고.”
허탈하게 웃던 불펜코치는 불쑥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황급히 물었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매커니즘 잘 짜여 있는데, 갑자기 레퍼토리 하나를 더 추가하는 건 좀 위험하니까.
제법 좋아 보이기는 해도, 이거 하나 때문에 모든 투구 밸런스가 다 망가질 수도 있고.
너무 과한 생각인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피칭이라는 게 생각보다 민감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것 하나로 다 바뀌기도 하거든.
당장 나만 봐도, 손가락 마디가 아니라, 그 위로 좀 던졌다고 십 년을 똥볼만 던지고 살았잖아?
‘당장은 좀 그렇지만, 더 완숙해진 뒤에는 쓸만하겠어.’
그래도 포텐셜은 높아 보였다. 브레이킹도 예사롭지 않지만, 구속도 꽤 빠르니까.
벌써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장착하고 나서는 슬라이더랑 비슷하거나, 더 빠를 수도 있겠는데?
‘그리고 생각보다 손에도 잘 맞고. 역시 짬이 있으니까···’
손가락 끝으로 던진 짬 덕분인지, 처음 던진 것 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손맛도 있었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허나 이제 곧 등판이 다가오기에, 그 이상 너클커브를 던지지 않았다.
하나 맛보기 정도는 괜찮아도, 그 이상 던지면 휴식일 동안 잡아 놓은 감각이 흔들릴 수도 있거든.
‘너클커브 본 다음에 내 커브 보니까, 급이 다르네. 아니, 숙련도 자체는 이쪽이 더 높을 텐데···’
잠깐 쉬면서 조금 식었던 어깨를 다시 달구다, 혹시나 싶어 기존의 슬로커브를 던져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서클이 긁혔을 때처럼, 이번에는 커브 쪽이 긁히는 건가 기대해봤는데, 어림도 없네.
미국 막 넘어오고, 루키리그에서 동료한테 배웠던 건데, 그때랑 별 차이가 없구만.
그냥 나랑 안 맞는 거야.
‘그래도 오프 스피드 용도로는 괜찮으니까. 의외성도 좋고. 너클커브를 본격적으로 장착하면, 효과가 더 커지겠지.’
위력 자체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나름의 효과와 이걸로 삼진을 잡았을 때의 짜릿함은 확실하니까.
던지기 전부터 기대감을 주면서 멘탈을 관리해주는(?) 공인데, 얼마나 좋아?
“Go, 집중하자. 슬슬 시작이야.”
“아, 예.”
예상치 못한 위력을 봐서 그런가, 계속 잡념이 떠오르는 걸, 불펜코치가 정확하게 캐치했다.
그의 지적에 다시 집중을 올리며 불펜피칭을 마쳤고, 곧 시간이 다가왔다.
“준비는 잘 됐어?”
“네, 충분합니다. 바로 가시죠.”
불펜을 나설 때는 항상 두근거린다. 오늘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게 야구고, 피칭이니까.
“Suuuuuck! 오늘도 무실점 가자! 한 47이닝까지 늘려!”
“오늘도 삼진 알지? 한 15개만 잡아!”
“완봉 찍자, 완봉! 상대 타자들 셧아웃 해버려!”
문이 열리자, 나를 발견한 관중들이 소리쳤다. 아직 다 들어차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약발이 떨어진 건지.
조금은 빈 좌석이 보이는데, 그럼에도 응원 소리 하나는 확실하다. 기대감도 대단하고.
터무니없는 목표를 이야기하며 눈동자를 반짝거리는데, 내 죄지, 내 죄야.
상상 이상의 성적을 찍으면서 팬들 눈을 확 높여버렸으니까. 에이스라는 타이틀도 한몫했고.
‘뭐, 상대팀이 맞춰준다면야 못할 것도 아니긴 한데···’
마운드로 올라서며,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듯 배트를 붕붕 휘두르는 타자들을 봤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오늘 경기 상대팀인데.
뭔가 좀 미묘~하지. 애매하고.
‘이걸 강팀이라고 봐야 하나?’
약팀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강팀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한 3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라는 팀은 조금 애매하다.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컨탠더급 전력을 갖추며, AL 중부의 강팀으로 군림했지만.
‘슬슬 내리막이지.’
원래 한 팀의 사이클이라는 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거든.
한번 치고 올라갔으면, 어쩔 수 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한창 올라갈 때 바짝 우승 같은 업적을 이뤄야 하는 거지.
화려한 스타급 플레이어.
풍부한 구단주의 지원.
막강한 팀 전력은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윈나우를 하면서 조진 팜, 전성기가 저물어가는 늙은 코어로 바뀌었다. 그런 주제에 우승도 없지.
지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라는 팀은 망하는 강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무시할 만한 전력은 아니지.’
뭐, 이런 것들이야 저쪽 단장이 고민할 일이고, 투수에게 타이거즈는 여전히 껄끄러운 팀이다.
아무리 망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작년 팀 안타, 타율, 출루율, OPS 2위인 팀이니까.
그 전력이 대부분 남아있고.
그 타선의 중심에는 저~기 계시는 저 양반.
두툼하니, 살집이 좀 있어서 괜히 살가운 사람이 있다.
‘미겔 카브레라.’
통칭 ‘미기’
앞으로의 누적이 중요하긴 하지만, 대부분 전문가들에게 이미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을 거의 확정 지었다고 평가되는 천재타자.
작년에도 38홈런-108타점,3할 타율에 9할 OPS를 찍으며, 통산 10번째 30홈런-100타점을 찍었던가?
이제 ‘졸스’하지만 않고, 말년을 잘 보내고, 3000안타 500홈런을 채우는 것만 남은 리빙 레전드인데.
‘제일 까다로운 타입이지.’
괜히 천재타자가 아니야.
솔직히 투수 입장에선 매 년 50홈런씩 날리는 괴물보다 저런 타자가 더 껄끄럽다.
타자의 컨택이 훌륭한데, 선구도 좋고, 파워툴까지 갖췄다고? 그럼 뭐, 마운드에 공 대신 총 들고 올라가야지.
투구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방아쇠를 당기는 거고.
그런 스타일 타자의 완성형이라고 할 만한 푸홀스처럼 저 양반도 좀 내리박았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멀쩡해 보인다.
‘작년보단 좀 떨어졌지만, 그 떨어진 것조차 아직은 괜찮아.’
현재까지 2할 7푼의 타율과 8할 2푼의 OPS를 찍으며, 시즌 초반을 적당~히 보내시고 있다.
특유의 천재성을 무시할 수 없기에, 위험성은 성적보다 조금 더 높게 잡아도 될 거고.
그런 미기를 중심으로 한 디트로이트의 타선은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 완벽한 것까진 아니나, 무시할 수는 없지.
‘그나마 JD 마르티네즈도 없는 게 다행이네.’
미기와 더불어, 타선의 핵심인 J.D 마르티네즈는 작년은 부상으로 경기를 날리더니, 올해는 시즌 초반에 사라졌다.
마이너에서 폼을 올리면서, 슬슬 복귀시기를 잡고있는 것 같은데, 다행히 오늘은 못 나왔네.
상대 타선의 핵심이 하나 빠진 것이니 참 고맙기는 한데···
“GO! 아니, Suck이라고 부르던가? 아무튼 오늘 잘해보자! 에이스 발목 잡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게! 너도 루키고 나도 루키니까, 우린 멋진 파트너가 될 거야!”
어우 시끄러워.
멀~리서부터 달려온 포수가 힘껏 소리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익숙한 녀석은 아니다.
브루스 맥스웰.
팀의 3옵션인 백백업, 서드 포수로, 두툼한 살집과 보기 드문 독일 국적이 특징인 녀석이다.
시범경기에서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이런 캐릭터였던가?
‘그때도 쾌활해 보이기는 했지만, 하긴, 타이밍이 좋으니까.’
약간 활기차 보이는 게 꼭 락하운즈 포수들을 보는 것 같아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4월 초반에는 선수단에 있었지만, 그 뒤로 트리플A로 내려갔거든. 그러다 이번에 다시 올라온 거고.
그러니 어떻게든 빅리그에 붙어 있고 싶을 테니, 의지를 불태울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락하운즈 애들도 경기에선 말 잘 들었으니까. 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혹시 내 스타일은 알아?”
“알아, 알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모를까. 내가 아량이 넓은 편이라, 최대한 배려해줄 테니까, 열심히 던져.”
그러니 그런 마음가짐이야 이해하는데, 조금 걱정스러웠다.
스티븐이나 조시야, 시범경기부터 지금까지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이젠 날 포기한 건지,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지만, 얘는 아니잖아?
또한 그만큼 어떻게든 팀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서 계속 빅리그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진할 거고.
포수가 의욕이 넘쳐서 좋을 건 없다. 타오르는 활화산 같이 과하게 열정적인 것보다는, 차라리 이가 시린 만년설처럼 싸늘한 게 더 나으니까.
‘말이 조금 묘하네.’
이제 콜업한 팀 내의 세 번째 옵션인 포수와 에이스 투수.
사실 평범한 경우는 그 입지의 차이가 까마득하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내 경우는 조금 특이하지.
데뷔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은 애송이가 1선발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다른 에이스 투수들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최소한 이번 시즌은 만족스럽게 보내야 인정받겠지.
“···아무튼 오늘 잘해보자. 공만 잘 받아줘.”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그거니까. 너클볼을 던져도 다 잡아낼 자신 있거든!”
불안함에 주의를 주자, 다시금 호언장담하는 브루스 맥스웰에, 그 자신감이 오히려 더 걱정스러웠지만···
‘뭐, 혹시라도 개기면, 포심으로 조지면 되겠지.’
언제나 최후의 방법이 있으니까.
일단은 믿고 던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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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주심의 스트라이크콜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조금 아려오는 손과 비교하면.
묵직한 몸쪽 포심.
이번 경기의 초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겁고, 강력했다. 손목에 충격이 올 정도로.
‘이 정도라고?’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브루스 맥스웰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구속이 느린 것치고는, 스터프가 좋다는 거야 이미 익히 들어왔고, 또 시범경기에서 직접 받으며 느끼기도 했지만. 그때랑 달랐으니까.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던 시범경기이기에, 그게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어··· 미친.’
애초에 마이너리거들에게 시범경기는 단순히 폼을 올리는 정도가 아니다.
메이저 캠프에 초청받을 경우, 자기 인생에서 가장 좋은 공을 던지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저 투수 역시 최대한 몸을 올리고 와서, 최고의 공을 던졌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시범경기를 지나, 4월을 거치며 더욱더 확실하게 올라온 폼은 충분히 무거웠던 그때보다도 더욱 막강한 충격을 선사했다.
‘허, 이런 결 경기 내내 받아야 한다고? 100구 넘게?’
물론 전부 이렇지는 않을 거다. 포심의 구사율이 가장 높다고는 해도, 죄다 포심만 던질 수는 없지.
또한 89마일이 최고구속이라고 했는데, 전광판에 찍힌 게 88.1마일이니, 전력투구일 거고.
100구를 전부 다 전력투구로 하는 투수는 없으니, 평균적으로는 이보다 더 약하겠지만, 어쨌든 예상보다 더 강력했던 초구는 의욕적이던 정신에 긴장감을 선사했다.
‘놓치면 끝이야.’
“Suck! 바로 삼진 하나 가자!”
“원래 첫 타자는 삼진으로 잡아야지! 그래야 Suck이지!”
관중들의 목소리.
누구에게 향한 건지는 명확하다. 현시점 오클랜드 최고의 슈퍼스타가 마운드에 있으니까.
그렇기에 긴장됐다.
만약 이렇게 시선이 집중된 경기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범한다면, 아마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겠지.
‘어쩐지, 노친네들이 순순히 주도권을 넘겨주더라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런 공을 받고 있으니, 다른 생각이 들 수가 있나. 얌전히 공을 받는 것만으로-
“스트라이크!”
이렇게 힘겨운데.
시범경기와 비교해서 포심이 더 묵직했다면, 서클은 더욱 날카로웠다.
타자의 큼직한 헛스윙이 코앞에서 지나갔고, 역동적으로 꺾이는 공을 간신히 캐치한 브루스 맥스웰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엔 진짜로 놓칠 뻔했다.
변화도 엄청나게 심한데, 그 속도마저 급격하고 가파르다. 눈으로 따라가는 게 버거울 정도로.
“···뭐 해?”
벌써 투 스트라이크.
코너로 몰린 타자의 말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캐치한 것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미처 투수에게 공을 던져주지 못했으니까.
‘···집중하자, 벌써 1스택이야.’
눈썹을 씰룩거리는 투수에게 별일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고서 공을 던져준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경기에서 멍청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흘끔 조심스럽게 덕아웃을 곁눈질한 그는 다행히 별다른 반응이 없는 벤치에 안도하며 투수를 봤따.
‘어?’
드디어 나온 사인.
주도적으로 피칭을 해나가는 타입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정말로 직접 사인을 내는구나.
간혹 트리플A에서도 고집이 센 투수들이 저러기도 하는데, 그건 사인을 거부하는 차원이지, 본인이 직접 볼배합을 하는 건 아니다.
‘투수에게 리드를 내주다니···’
조금은 자존심이 상한다.
막말로 볼배합과 투수 리드까지 내준다면, 포수는 그냥 공 받는 기계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으나, 일단은 처음이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통할까?’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영리한 투수라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그 효용성은 의문스러웠으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저 멀리 떨어진 마운드의 투수보다는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앉은 포수가 타자의 타이밍이나, 생각을 읽기 더 좋지 않은가?
그렇기에 의문스러우면서도 얌전히 준비한 그는 공을 기다렸고, 간결한 투구동작이 이어지며, 3구가 날아왔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조심해서···’
직전과 거의 비슷한 코스.
허나 조금 더 낮다.
타자는 잠시 공을 확인한 뒤, 배트를 참았고, 방해 없이 공을 잡은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코스의 보더라인에 정확하게 걸친 공은 루킹 삼진을 만들었다.
‘여기가 스트라이크 존이야.’
아마 딱 경계일 거다.
제대로 걸친 거겠지.
이걸 의도했다고? 아니, 그보다도 이 정도로 컨트롤 할 수가 있다고?
루킹 삼구삼진에 타자, 앤드류 로마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주심을 흘겨봤으나, 별다른 어필 없이 내려갔다.
뒤이어 올라온 2번타자, 닉 카스테야노스.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위닝샷은 투수의 선택이었다. 느릿한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크게 헛스윙한 타자는 탄식을 내뱉었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미기.’
이미 잡은 타자에게 신경쓸 여유는 없고. 그런 방심이 절대로 금물인 타자가 올라오니까.
“미기! 애송이한테 야구 좀 가르쳐줘!”
3번타자 미겔 카브레라.
그가 올라오자, 디트로이트에서 오클랜드까지 날아온 용자들이 요동쳤다.
디트로이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으니까. 주변의 눈빛이 흉흉하긴 하나, 디트로이트 역시 오클랜드와 마찬가지로 험악한 곳이기에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Hello Kid,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스티븐은 방출됐어?”
“···”
“말 잘하게 생겼는데, 생긴 것과 다르게 입이 무겁네. 선배 대접도 안 해주고.”
올라온 타자는 능글맞게 굴며, 서운하다는 듯 눈을 흐렸지만, 그는 여전히 입을 닫았다.
오랫동안 빅리그를 정복하며, 숱한 전설을 만들어낸 괴물에게 말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저 친구 요즘 말이 많던데, 직접 받아보니까 어때? 솔직히 좀 별로지? 구속도 느리고. 89마일이 뭐야~ 내 고향에선 10살짜리 애들도 저 정도는 던질걸?”
리빙 레전드의 앞에서 잔뜩 긴장했던 브루스 맥스웰은 그 말에 긴장이 탁 풀렸다.
구속이 느려? 별로야?
직접 공을 받은 포수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웃기고 있네, 이 노친네야. 어디 여기 앉아서 직접 받아보든가. 그런 말이 나오나.’
그것으로 타자에게 완전히 신경을 끊자, 미기는 조금 묘한 눈으로 포수를 봤다.
로스터를 보니, 익숙한 놈들 대신 따끈따끈한 애송이가 있어서 가지고 놀려고 했더니.
애송이답지 않게, 딱 끊었으니까.
‘진짜? 진짜 그렇게 가?’
그런 미겔 카브레라의 생각과 상관없이, 브루스 맥스웰은 머리가 복잡했다. 이번에도 투수가 먼저 사인을 냈다.
조금은 미묘한 코스.
자신은 지난 타석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포심을 생각했는데···
흘끔 타자를 곁눈질한 그는 얌전히 포구를 준비했다. 앞서 결과가 좋았으니, 자신이 거부할 명분이 없다.
‘이번엔 제대로 집중해서. 아까 전처럼 쪽팔리지 말고.’
한껏 준비한 그는 투수와 눈을 맞췄고, 페이크를 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던지겠다는 지 몰라도, 고개를 끄덕인 투수는 곧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유유히 날아오는 공.
슬라이더가 바깥쪽 깊숙이 박혔고, 미겔 카브레라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스트라이크 하나를 내줬다.
이번에도 칼 같은 제구.
그는 마치 눈에 라인이 보인다는 것처럼 던지는 투수가 이해가 안 됐고, 타자도 눈썹을 씰룩거렸다.
“오, 역시 유명세처럼 한가락 하네. 아니지, 운이 좋은 건가? 어때? 의도한 대로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한편으론 긴장감이 올라갔다.
투수의 컨트롤과 커맨드가 예상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타자의 긴장을 똑바로 느낀 브루스 맥스웰은 사인을 내려다, 이번에도 얌전히 공을 받았다.
“파울!”
가볍게 커트.
허나 어쨌든 카운트는 잡았다. 몸쪽으로 낮은 투심. 땅볼을 유도한 걸까?
그는 마치 타자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명색이 포수인데, 투수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으니까.
‘위험한 타자는 직접 처리하는 건가?’
세 번째 사인.
굉장히 적극적이다.
앞서 두 타자를 상대로는 그래도 자신의 사인을 받아줬는데, 이번엔 낼 틈도 없었다.
“아웃!”
거의 눈과 비슷한 높이로 던진, 하이 패스트볼.
툭 밀어친 타자였지만, 가볍게 수비에 걸렸다.
“에이, 좀 빗맞았네.”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서 아웃당한 미겔 카브레라는 아쉬운 듯하면서도 묘한 눈으로 투수를 보며 미련 없이 물러났지만.
브루스 맥스웰은 여전히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냥 제멋대로 막 던지는 것 같은데-
‘왜 결과가 좋은 거지?’
조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이게 돼? 진짜로? 아니, 이렇게 쉽게?’
범타 하나와 삼진 두 개로, 깔끔하게 1회 초를 지운 투수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있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다른 포수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건지를.
먼저 공으로 보여주고, 그 뒤에는 결과로 증명하니, 반항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할 수밖에 없지···.’
젊은 에이스와 새 시대를 이끌어나갈 뉴페이스 포수.
그런 모습을 이번 기회에 보여주고, 또 어느 정도는 저런 에이스를 자신이 컨트롤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첫 이닝이 끝난 순간, 욕심은 고승의 번뇌처럼 멀끔하게 사라졌다.
‘경기 동안, 공이나 놓치지 말자.’
그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생겼으니까. 묵직한 포심을 받느라,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
‘파워가 떨어진 건가? 아니면 내 공이 그만큼 좋은 건가?’
마지막 공은 도박수였다, 그것으로 파악한 미겔 카브레라는 예상과 조금 달랐다.
저쪽 4번타자가 약하니, 안타 하나를 맞더라도, 가장 위험한 타자의 타격감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결과는 범타.
컨택은 잘했지만, 배트가 밀렸는데, 이름난 괴물치고는 배트의 무게감이 생각보다 조금 떨어졌다.
‘어쩌면··· 미기도 푸홀스를 따라가는 걸지도.’
그래, 그 양반이랑 좀 비슷하네.
푸홀스보다는 그래도 컨택이나 선구안이 더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느낌은 비슷하다.
‘그래도 컨택은 아직 살아 있으니까, 최대한 조심해야 돼. 타격 기술이 대단해서, 힘에서 밀려도 안타 정도는 만들 테니까.’
상대 타선에서 가장 위험한 타자의 폼이 떨어졌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왕년에 한가락 했던 양반들이 또 한번 삘 받으면 미친 듯이 치거든.
다른 타자들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고.
“아아아···”
“좀 잘 해봐라! 또 Suck한테 승 안 챙겨줄 거야!”
이번엔 우리 타자들이 못했나 보다.
팬들의 야유가 덕아웃까지 들리는 걸 보면.
아무튼 그건 그렇다치고. 계속 디트로이트 타선을 분석하자면, 미기를 제외한다치면, 5,6번이 현시점에선 가장 강력좋다.
원래는 JD 마르티네즈인데, 그 양반은 오늘 없으니까.
‘저스틴 업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짐 아두치도 당장은 성적이 좋아.’
5번타자 저스틴 업튼과 6번타자 짐 아두치.
당장의 성적만 보면, 둘 다 파워가 좋고 컨택도 좋아 보이네.
뭐, 저스틴 업튼이야 작년에 31홈런 날린 타자니 그렇다 치고. 짐 아두치는··· 지난달 말에 콜업해서 경기수는 적지만, 지금까지는 괜찮다.
컨택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고, 장타를 잘 만드는 걸 보면 적당히 갭파워는 있는 것 같은데.
‘크보 약쟁이를 메이저에서 다 보네.’
조금 묘하구만.
짐 아두치, 작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팀은 ‘꼴’으로 유명한 부산팀이고.
도핑 적발 이후, 징계가 떨어진 뒤.
그대로 방출되고 다시 미국으로 온 것 같은데.
크보 약쟁이를 메이저에서 볼 줄이야.
어쨌든 이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하위 타선은 뭐, 그냥 하위타선인데···
“넌 타격 준비 안 하냐?”
“나? 에이, 나까진 오지도 않지.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뭐 마실 거라도? 아니면 아몬드? 바나나?”
“···괜찮으니까, 그냥 앉아.”
얜 갑자기 왜 이럴까.
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과하게 의욕이 넘쳐서 불안불안했던 녀석인데, 지금은 뭔가, 다른 의미로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내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누가보면 내가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겠네.
야야, 웃어라, 내가 너 괴롭혔냐?
자신감이 과한 것보다는 낫지만, 이젠 좀 다른 의미로 부담스럽구만.
“편하게 있어, 편하게. 상대 투수도 잘 지켜보고. 오래 있으려면 빠따도 좋아야지.”
“그렇지··· 그래, 타격이라도 좋아야지. 그렇고말고.”
바짝 쫄아 있는 게 보기 안쓰러워서 말했더니, 조금 표정이 묘해졌다. 약간 납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말은 잘 듣겠네.’
뭔지는 몰라도, 서열정리는 확실하게 된 것 같으니까, 그러면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