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86화 (86/316)

86화

싱커. 독특한 구종이지.

빠른 구속과 역회전.

그리고 땅볼유도능력으로 수많은 투수들, 특히 사이드암 계열의 투구폼을 가진 투수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구종이다.

그냥 싱커라고 부르기도 하고, 싱킹 패스트볼이라며, 패스트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슈트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쪽은 테일링 강한 포심을 슈트라고 부를 정도로, 싱킹 무브먼트가 있으면 죄다 슈트라고 부르는 편이지.’

어쨌든 그렇게 여러 명칭이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분류가 모호하다는 뜻이다.

이게 조금 애매하거든.

그냥 역회전 강한 투심이라는 의견도 있고, 다른 구질로 명확하게 분류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립이 똑같거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투심과 싱커의 그립은 거의 비슷하다.

누구는 싱커라고 하고, 누구는 투심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립이 아예 똑같기도 하고.

보통은 떨어지면 투심, 꺾이면 싱커라고 하기도 하는데, 또 사람마다 그런 무브먼트가 정반대인 경우가 많지.

어쨌든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역회전이 강한 변형 패스트볼을 싱커라고 부르는데···

‘내가 그런 걸 던졌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됐든 내가 싱커 같은 걸 던졌던가? 그런 의문을 담고서 리암 헨드릭스를 바라보자, 그 역시 의아한 듯 쳐다봤다.

“혹시 투심 말하는 거예요?”

“아··· 그게 투심이었던 건가? 그··· 가끔 약간 낙차도 있으면서 싱키어도 하는 패스트볼을 던지던데. 그립도 싱커였고. 아, 그립 훔쳐본 건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역시 투심이었구만.

내 말에 바로 그거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리암 헨드릭스는 조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립을 배우는 거야 자기 마음대로고, 의외로 다들 잘 가르쳐주는 편이지만, 몰래 훔쳐보는 건 또 다르거든.

그러니 혹시 내 기분이 상했을까, 염려하는 것 같은데,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

그럼 뭐 어떡해, 내가 공 던질 때마다 눈을 감을 수는 없잖아? 또 투수의 그립 정도야 방송에서도 자주 분석되는 편이고.

“아뇨, 그건 상관없는데, 왜 굳이 투심을···?”

싱커로 착각한 거야 그렇다 치고, 그걸 들으니 드는 생각은 ‘굳이 왜?’였다. 아니, 더 좋은 구종들도 많은데 굳이 투심을?

지금 내 서클 무시해?

내 오리지널 구종이자, 훨씬 더 좋은 녀석인데,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건 사실 농담이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투심은 솔직히 별로 대단한 구종은 아니다.

‘그냥 딱 레퍼토리 중간에 넣기 좋은 정도지.’

떨어지는 무브먼트도 그리 강하지 않은 데다가, 그렉 매덕스라는 거인에게서 배운 것 치고는 역회전은 아주 밋밋하기 그지없으니까.

물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손에 덜 익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하지.

당장 종종 던지는 슬라이더만 봐도 서클보단 훨씬 못하지만, 투심보다는 훨씬 완성도가 높고.

그냥저냥 포심 던지다가 몰래 하나씩 던져서 땅볼 만드는 용도로 투심이 제격이라 종종 던진 건데, 그게 왜 탐이 난 걸까?

“그게··· 그렉 매덕스한테 배웠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야. 염치없는 건 아는데, 혹시 안 될까?”

음, 답은 언제나 매덕스구만.

하긴, 매덕스의 투심(싱킹 패스트볼)은 탐스럽긴 하지.

내가 잘 못 던져서 그렇지, 메이저리그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구종이다. 매덕스의 투심은.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서클이나,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처럼.

그러니 이해야 가지만···

나는 슬쩍 리암 헨드릭스를 봤다. 원래는 포심, 슬라이더, 싱커 쓰리피치였는데.

초반에 자주 얻어맞더니, 최근에는 결국 싱커의 비중을 줄이고, 내가 탐스러워했던 너클커브를 자주 던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 등판들에선 결과가 나쁘지 않았고.

‘결국 싱커가 문제였지.’

가장 모났던 싱커가 결국 문제였던 건데, 아직 싱커에 대한 사랑은 여전한 것 같다.

그 단점을 채우려는 거니까.

당장의 결과도 좋으니, 나라면 그냥 싱커를 안 던질 것 같은데 말이야.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음, 네, 알려드릴 게요.”

“어, 어? 바로 보여주려고?”

“그립 한 번 잡는 게 뭐 어렵다고, 대신 저도 너클커브 그립 좀 알려줘요.”

뭐, 이유야 어찌 됐든 알려달라는데 알려드려야지. 겸사겸사 나도 물물교환 삼아서 탐스러웠던 너클커브를 배우고.

그립을 확실하게 보여준 뒤, 불펜피칭의 연장으로 하나를 던지자, 그는 시종일관 조심스러웠던 것과 다르게, 한껏 진지해진 눈으로 동작을 눈에 담았다.

“그냥 평범한 투심 던지듯이 던져요. 손목을 비튼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렉 매덕스가 직접 가르쳐 준 거니까, 믿을만 할 겁니다.”

“진짜- 진짜 고마워! 혹시 뭐 마시고 싶은 건 없어? 입이 심심하다거나? 음료수 좀 가져다줄까?”

“내가 그 정도로 후레자식은 아닙니다.”

환하게 웃은 그는 허둥지둥거리며 여러 가지를 권하다, 내 말에 간신히 진정했다.

이 양반이 누굴 후레자식으로 만들려고. 뭐든 간에 나보다 선배인데 음료수 심부름까지 시키면, 1선발 되더니 루키 주제에 잘난 척한다며 욕먹기 딱 좋다.

‘그렇게 좋나?’

그렇게 진정한 뒤에도 그는 마치 길을 찾은 사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약간의 짜릿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싱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다. 뭐, 투수라면 좋아하는 구종이 하나씩은 있으니까. 나도 서클을 가장 좋아하고.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한 리암 헨드릭스는 문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마치 그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아깝지 않아? 무려 그렉 매덕스에게 직접 배운 걸, 다른 사람한테 가르쳐 준다는 게.”

“뭐 어때요? 그렉도 별말 안 할 걸요?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공이든지 간에, 나랑 잘 맞는 게 가장 중요하죠. 그립이나, 던지는 방법이 아니라.”

사람마다 타고난 신체조건이 다르고, 근육이 다르기에 같은 그립, 같은 방식으로 던지더라도, 똑같은 공을 던지리란 법은 없다.

애초에 그랬으면 다른 투수들도 죄다 던지지, 뭐하러 투피치니, 쓰리피치니 하고 있겠어? 그냥 똑같이 던지면 되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건데, 리암 헨드릭스는 조금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미약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게 당연하겠지. 아무튼 고마워.”

내가 뭔가 잘못 말하기라도 한 건지, 리암 헨드릭스는 조금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러면서도 성심성의껏 너클커브를 가르쳐줬다.

“난 이렇게 그립 잡아. 아마 처음에는 좀 어색할 거야. 일반적인 그립이랑은 많이 잖아? Suck 너도 커브 던지지?”

“예, 뭐, 아주 가끔?”

“그거랑 감각이 많이 다를 거야. 손에서 챈다는 느낌보다는, 검지의 끝으로 볼을 꾸욱 찍거나, 누른다는 느낌이니까.”

너클커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너클볼의 그립과 많이 닮았다. 너클볼이 손가락을 세우는 것처럼. 너클커브도 검지를 세우거든.

다는 아니고 딱 검지만.

‘세운 검지손가락의 끝으로 공을 누른 다면···’

어? 나 그거 잘하는데?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십년 넘게 손가락 끝으로‘만’ 피칭했던 사람이거든.

‘너클커브라, 느낌이 나쁘지는 않네.’

그리고 뭔가 알 것도 같았고.

분명 싱커라고 했었지.

최소한 리암 헨드릭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건데···

“리암, 혹시 싱커는 어떤 식으로 던져요?”

“싱커? 혹시 배우고 싶어?”

그는 내 말에 조금 어둡다 싶더니, 눈에 띄게 밝아졌다. 콧김도 흥흥 뿜어댔고. 이 양반, 진짜 싱커에 뭐라도 있나?

“그립은 대충 이렇게 잡아. 투심이랑 비슷하긴 한데, 엄지로 실밥을 받쳐줘야 돼. 그래야 회전이 잘 걸리거든, 그리고····· 엄지를 안쪽으로 밀면서 던지면- 듣고 있어?”

“예? 아, 예예.”

“그래, Suck 넌 스터프가 좋고, 무브먼트가 강하니까, 잘만 하면 좋은 싱커를 던질 거야. 그러니까-”

봇물이 터졌구만.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다.

자식 자랑하는 아버지처럼 잔뜩 흥분해서 설명하는 걸 보면 말이야.

수염 난 아저씨가 침까지 튀겨가며 잔뜩 흥분한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어쩌겠어. 내가 먼저 버튼을 눌렀으니, 그냥 얌전히 들어야지.

그의 싱커에 대한 설명과 예찬은 그 뒤로 약 5분간 더 이어진 뒤에야 마무리 지어졌다.

####

‘싱커···’

주력구다. 가장 사랑하는 공이고, 가장 많이 던진 공이다. 과거 선발투수였을 때부터 총애했던 구종이고.

그런 오랜 친구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은 힘들더라도, 다시 날아오를 테니까.

야구에선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주에서, 이곳 빅리그까지 자신을 인도해줬던 것처럼.

“리암, 포심 비중을 더 높이는 건 어때? 싱커를 조금 줄이고, 커브를 던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코치는 은근하게 권유했다.

포심이 좋으니, 커브가 좋으니, 슬라이더가 좋으니, 좋은 것들을 주로 던지라는 식의 이야기이나.

그는 본질을 알았다.

좋은 걸 던지라는 게 아니라, 별로인 걸 버리라는 뜻이라는 걸.

‘잠깐 흔들리는 거야. 아직 멀쩡해.’

인정한다, 당장의 결과는 안 좋지.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의 싱커는 쉽게 공략됐고, 쉽게 난타당했다.

그라운드볼 유도에도 그리 효과를 보이지 못했고.

결국 떨어지는 성적과 마이너 강등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잠시 내려놓기 시작하자, 다시 성적이 올라갔었지.

그러한 결과가 말해주는 바는 간단했다. 싱커를 버려라, 그럼 성적이 오를 것이다.

‘싱커의 문제가 아니야.’

최소한 리암 헨드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자신이 잘못 던지고 있는 것이고,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숙련된다면, 조금만 더 보강한다면 분명 다시 강력해질 거다.

선발투수도 포기했는데, 싱커마저 놓고 싶지는 않았다.

‘싱커···인가? Suck도 싱커를 던졌구나.’

떨어지는 성적과 그에 대한 고민에 시달렸을 때, 문득 피칭이 눈에 들어왔다.

시범경기 때부터 리그를 휩쓴 녀석. 본인은 차라리 퍼스트네임인 Go라고 부르라고 하나, Suck이라는 이름이 더 정감 가는 녀석.

그 녀석이 던지는 싱커는 적절했다. 약간의 싱킹 무브먼트와 그보다는 살짝 더 강한 편인 낙차.

주력구까지는 아니지만, 그라운드볼을 유도하기엔 나쁘지 않겠지.

‘포심 덕분이야. 워낙 스터프가 강력하니까, 싱커도 자연스럽게 반사이익을 누릴 수밖에. 영리하게 던지기도 했고.’

허나 싱커 그 자체는 그리 탐스럽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싱커만 따지면 자신이 더 나았으니까.

물론 결과로는 자신이 더 나쁘지만, 그건 솔직히 싱커의 위력보다는 받쳐주는 다른 구종들과 피칭의 차이였다.

그렇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다른 동료들의 말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저거 싱커인가?”

“투심 아니야? 그렉 매덕스한테 배웠다고 하던데.”

“이야~ 부럽다, 부러워. 매덕스한테 그런 걸 다 배우고. 나도 그런 인스트럭터 붙여주면 X나게 잘할 자신 있는데.”

‘그렉 매덕스?’

그렉 매덕스, 투수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지. 스프링 트레이닝 시기에도 봤었고.

다른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부러운 눈으로 보고는 했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누릴 수 없는 사치니까.

어쨌든 그런 전설적인 투수에게 직접 배웠다고?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매덕스의 공···’

욕심이 자라났다.

비록 당장 Suck이 던지는 위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어쨌든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 특별함을 내 싱커에 담으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누구든지, 어떤 타자든지 이길 수 있었던 그때처럼.

‘한번··· 가르쳐 달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루키에게 뭔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 조금 자존심이 상했기에 애써 무시했는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Suck! 너 그립 좀 다시 한번만-”

“오~ 에이스, 오늘 일찍 나왔네?”

그가 눈물을 머금고 싱커를 잠시 놓았을 때, 잘나가던 루키는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당당하게 자신을 증명했고.

마찬가지로 자존심에 눈치를 보던 동료들은 더는 거리낌이 사라졌지. 그러니 자신 역시 자존심을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또한···

‘지난 경기, 재미를 봤었지. 더블 플레이도 싱커로 유도했었고.’

다시금 적절하게 제몫을 해낸 싱커. 욕심이 더욱더 커졌고, 결국 자존심을 무릅쓰고 배웠다.

‘매덕스의 싱커, 아니 투심이라고 했던가.’

Suck은 투심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그가 기억하는 매덕스의 공은 분명 싱커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그냥 비슷하겠지.

가슴이 떨렸다. 이제 뭔가 달라질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랑 잘 맞는 게 중요하다고···’

머리가 복잡했다.

기껏 매덕스의 것까지 배웠는데,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말이 정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맞는 말이지, 어떤 공이든, 얼마나 대단하든, 나랑 가장 잘 맞고, 결과가 좋아야 하는 거겠지.

문득 지금까지 억지로 숨겨뒀던 생각이 떠올랐지만, 더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리암, 준비해.”

경기가 시작됐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자렐 코튼은 5회까지 2실점을 내주며 그럭저럭 적당히 막았지만, 6회 초, 다시금 흔들렸다.

원 아웃 이후 연이은 안타를 내주며 크게 무너졌으니까.

작년에 트레이드가 된 뒤, 막 데뷔했던 루키이니, 굳이 그가 망가지게 하지는 않겠지.

곧바로 불펜에 콜이 왔고, 주자, 1,2루에서 그는 마운드로 올라갔다. 오늘은 느낌이 좋다.

지난 두 경기에서도 무안타를 가져가며, 철저히 틀어막았었고. 물론 그게 싱커를 내려놓고 만든 결과물이란 게 마음에 걸렸지만.

“리암! 어떻게 갈까? 오늘 뭐가 좋았어? 아니, 그냥 다 좋나? 최근 성적 죽이던데.”

익숙한 포수는 아니다.

브루스 맥스웰, 서드 포수쯤 되겠지. 주전인 스티븐 보그트는 오늘 지명타자로 물러났고.

아마도 팀에 깊은 이상을 남기고 싶을 텐데, 힘차게 묻는 포수에게 그는 짧게 답했다.

“싱커, 싱커가 괜찮을 거야.”

“으음···”

표정이 미묘하다.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그의 싱커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어쩌면 그가 싱커에 대한 기묘한 열망을 품은 사실을 잘 아는 투수코치가 미리 언질을 준 걸지도 모르고.

허나 단호한 표정에 결국 포수 브루스 맥스웰은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흔들리는 거야. 오늘은 느낌이 좋아.’

단순히 매덕스의 그립을 배워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믿었다, 오늘은 좋을 거라고.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을 애써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홀로 되뇌며 마운드의 감각을 점점 끌어올렸다. 그렇게 연습피칭이 끝난 뒤, 최적의 상황에서 타자가 올라왔다.

‘아웃 두 개야 별거 아니지.’

이닝 종료를 위해선 빨간 불이 두 개가 더 켜져야 한다. 자렐 코튼이 아웃카운트 하나를 올린 뒤에 내려갔으니까.

1이닝도 채 안 되니, 어렵지도 않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감을 가지며 던졌고.

“스트라이크!”

기분 좋은 초구가 들어갔다.

포심 패스트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 내 공인데 어떻게 싫어하겠나? 또한 이젠 자신의 주력구인데.

단지 싱커가 더 좋았을 뿐.

스트라이크 하나를 잡았지만, 좌타자이기에 약간은 까다롭다. 그는 우투수니까.

‘슬라이더는 힘들겠네.’

또한 컨택도 좋아 보이니.

어설프게 슬라이더를 넣었다간, 존 안으로 들어가는 무브먼트를 그대로 받아치겠지.

같은 생각인지 나온 사인에 그는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이크!”

너클커브. 코치의 권유에 싱커를 조금 내려놓은 뒤, 파격적으로 구사율이 늘어났지.

예전에는 시즌을 통틀어도 얼마 던지지 않았었으니까.

다만 결과는 좋았다.

포심, 슬라이더, 커브.

짜임새가 좋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싱커도 좋지.’

여기에 역회전까지. 완성도 자체는 완벽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포수를 봤지만, 그는 초구와 마찬가지로 포심을 요구했다. 구속과 스터프가 좋으니, 믿고 던지라는 거겠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재차 요구하는 사인에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마침 좌타자인데, 딱 던지기 좋잖아?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포수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으나 그는 애써 못본 척했다.

결국 못 이긴 듯 나온 사인.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투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잘 먹혀!’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역회전하는 공. 약간의 낙차. 손끝에선 익숙한 손맛이 감돈다.

타자를 삼진 시킬 거다. 어쩌면 땅볼을 유도해서 더블 플레이를 만들 수도 있고. 분명히 그럴 거라고 그는 굳게 믿었지만···

‘···Dammit’

공은 아주 반듯하게 날았다.

깔끔한 라인드라이브성 안타.

2루 주자 홈인. 그의 자책점은 아니다. 승계주자가 득점한 거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싶지만.

가장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도 있었지. 그렇기에 입안이 썼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그 뒤로 그는 사인을 거부하지 않았다. 얌전히 볼배합대로 공을 던졌고, 포심과 슬라이더, 커브는 조화롭게 타자들을 찢었다.

순식간에 올린 삼진 두 개.

이닝이 끝났고, 1실점을 하기는 했지만, 등판 당시에 이미 1,2루였으니, 이만하면 나쁘지는 않은 성적이겠지.

허나 이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아침, 그의 머리에 충격을 줬던 말을. 이젠 확실해졌으니까.

싱커는 그와 맞지 않는다.

성적을 내려면 그것을 내려 놓아줘야 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것처럼.

“괜찮아?”

“뭐, 그냥 자렐한테 미안하지. 나중에 저녁이나 사야겠네.”

“비싼 걸로 사줘.”

“그래야지.”

그가 자조적으로 웃자, 슬쩍 옆의 동료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조금 우스웠으니까.

‘기껏 배웠는데, 의미가 없어졌네.’

그토록 탐스러웠던 매덕스의 투심 혹은 싱커를 오늘 아침에 막 배웠는데. 정작 저녁이 되니 그 이유가 사라졌다.

‘Suck한테 기부만 했어.’

####

“Suck, 오늘은 이길 거지?”

“무조건 이겨야지!”

“타자 새끼들 오늘도 점수 못 내면, 그냥 방망이로 궁둥이를 때려버려!”

차에서 내리니, 선수 전용 주차장인데도 제법 팬들이 보인다. 하긴, 홈이니까.

꽤나 성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어제 경기를 시원하게 졌으니, 오늘은 승리를 바라겠지.

우리 레이더스분들이야 그냥 내가 잘하고,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니, 기대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

“오늘 등판한다잖아. 받으면 안 돼. 그렇다고 했어.”

“그래, 나중에 경기 끝나고 이겨서 기분 좋을 때 받자고.”

몇몇은 사인을 받으려고도 했는데, 가장 열정적인 레이더스 출신들이 가만히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알아서 자제했다.

효과 확실하네. 저 괴상망측한 차림들이 보디가드처럼 딱 버티고 서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알아서 기가 죽는구만.

“15분, 자, 다음 차례입니다.”

평소처럼 대니얼의 지도하에 15분 단위로 끊어서 루틴을 이행하며, 천천히 몸을 달아 올렸다.

중간에 벤치코치(수석코치)와 투수코치가 와서 컨디션을 묻기도 했는데, 오늘은 그럭저럭 좋다.

“Suck, 오늘도 크게 하나 던져 봐.”

워밍업을 마친 뒤, 불펜으로 들어가자, 불펜포수가 글러브를 팡팡 치며 나를 반겼다.

“스트라이크! 좋은데? 오늘도 무실점 이어가겠어? 이러다 신기록 세우는 거 아니야?”

“그러면 소원이 없죠.”

여느 때처럼 립서비스가 가득했고, 무실점도 가능하겠다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슬슬 털리겠지. 지난달이랑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저번 트윈스전에서 탈탈 털린 게, 컨디션 탓이나 전략의 차이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하는 타자들 마인드의 차이도 있을 거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루키니까 조금은 방심하거나, 얕잡아봤다면, 이젠 이달의 투수까지 타버렸으니, 그런 메리트가 사라진 거지. 피칭이 분석되기도 했을 거고.

그러니 지난 4월처럼 계속해서 무실점을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뭐, 이쪽 부분에선 1등 기록 세웠으니까. 그 정도면 된 거지.’

그렇기에 나는 굳이 무실점을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기록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긴 시즌을 잘 던지는 게 더 중요하지.

막말로 모든 경기를 다 무실점으로 할 수도 없잖아? 그건 매덕스가 아니라, 역대 최고의 투수로 불리는 사이 영과 월터 존슨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길게 봐야지, 길게.’

그렇게 길게 보는 의미에서, 어쩌면 언젠가 새로 추가할 지도 모르는 공의 그립을 살짝 쥐었다.

어제는 배우기만 하고 미처 확인해보지는 못했는데,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이미 말했듯, 난 이미 그런 방식으로 공을 던져봤으니까.

‘검지 손가락 끝으로 찍어누르라고 했지.’

“새로운 거 하나 던질 테니까, 감상이나 말해줘요.”

“뭐야, 비밀병기가 또 남았어? 진짜 기록 세우려고?”

내 말에 불펜포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던지는 구종만 해도 더럽게 많은데, 거기다 하나를 더 던질 거라고 하니, 황당하기도 하겠지.

“그냥 감만 보려고요, 감만. 막 배운 거라서 좀 별로일 테니까, 보고 비웃지나 마요. 참고로 커브계열이에요.”

“오케이, 하나 던져 봐.”

설명을 붙이자,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씨익 웃었고, 반대로 지켜보던 불펜코치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 잘 던지는 투수가, 갑자기 뭔가를 추가했다고 하니, 코치 입장에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만류해야 하는지 그가 살짝 고민할 때, 나는 곧바로 던졌고, 리암 헨드릭스가 가르쳐줬던 대로 바짝 세운 손가락 끝으로 공을 꾹 눌렀다.

그리고···

“억-”

잘 날아가다, 급격하게 궤적이 바뀌는 공에 글러브로 따라가던 불펜포수는 결국 캐치하지 못하며 외마디 비명을 남겼다.

“막 배운 거라며!”

그는 억울한 건지, 아니면 쪽팔리는 건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며 소리쳤지만. 나도 억울하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거든.

이제 처음 던지는 건데, 이 정도라고?

날아간 공은 일반적인 커브의 궤적과는 달랐다.

너클커브와 커브는 애초에 구질이 다르긴 하지만···

‘약간 느낌이 슬러브 같은데?’

회전각이 생각보다 컸고, 떨어지는 것도 생각보다 더 빨랐다.

슬러브, 정식 구종은 아니고, 커브의 구질 중 하나인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투심 하나 주고 이런 걸 받았다고?’

물론 제구가 제멋대로 튀고, 약간은 어색한 손맛이 느껴지니, 당장은 쓰기 힘들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랑 잘 맞아.’

어쩐지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확 오더라고. 공을 손가락 끝으로 던지는 거야, 모르긴 몰라도 내가 메이저리거를 통틀어서 제일 잘할 테니까.

투심 그립 하나 보여주고 얻어낸 것 치고는 값이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어때요?”

여전히 심각한 눈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불펜코치에게도 감상을 물으니, 그는 허탈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세상 참 불공평하네.”

그렇지,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법이지. 사람마다 자기한테 잘 맞는 공이 있다지만, 난 그게 좀 많은 것 같네.

그렇게 기분 좋은 가능성을 엿본 채, 모든 준비를 마쳤다.

미래에 대한 기대 혹은 보험도 생겼으니.

이젠 경기에 집중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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