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스트라이크 아웃!”
이닝을 끝내는 마지막 삼진.
주심이 우렁차게 콜하자, ‘아아’하는 약간의 신음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홈팬들이다.
계속 기회를 날리더니.
결국 이번에는 KKK.
이쯤 되면 깨달았을 거다. 자신들의 흐름이 끝났다는 걸.
기회를 살리지 못한 대가지.
‘그러게 계속 X무만 할 게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땐 갈겼어야지.’
오늘 트윈스 타선의 문제점은 간단하다. 찬스메이킹은 되는데, 클러치를 못한 거지.
무사 주자 2루 이상의 기회가 제법 있었는데도, 결국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니까.
물론 방법 자체는 통했다.
5회까지 안타를 몇 개를 때렸는데, 이 정도면 인정이지.
저번 달에 맞은 안타가 아홉 갠데, 오늘은 단 한 경기 만에 그에 근접했으니 말이야. 그래놓고 점수를 내지 못한 게 문제지만.
‘계속 느릿하게 던진 덕분에 타이밍은 잘 흔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 위험해.’
다만 아직 위기가 끝난 건 아니다. 타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일부러 속도를 조금 늦췄고, 이번 이닝부터는 바짝 조이면서 때려잡긴 했는데.
타자의 감각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거든. 이미 손맛을 제법 봤기에, 설사 타이밍이 빨라지더라도 맞춰내긴 할 거다.
실제로 5회에도 첫 타자에게 초구 안타를 맞기는 했고. 그러니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
“Suck, 다음 이닝도 던질 거냐?”
생각을 정리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 스티븐 보그트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내가 내려갔으면 하는 눈치인데, 그럴 만하지. 타이기록도 세웠고, 그럭저럭 5이닝도 채웠으니까.
경기 초반부터 내내 난타당하는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불안하기도 할 거고.
‘아마 말은 안 해도, 내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평소와 비교하면 약간은 저조한 게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X나게 처맞은 거고.
정상적인 컨디션이었다면, 이 정도로까지 얻어맞지는 않았겠지. 제아무리 상대가 카운터 전략을 들고나왔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약간 운이 나빴던 것도 한몫했다, 2개 정도는 행운의 안타였으니까. 내 기준으론 불행의 안타지만.
“더 던져야죠.”
허나 그렇다고 해도, 난 절대로 벌써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젖 먹던 힘들 다해가며 간신히 버텼으니, 이제 달달한 열매만 취하면 되는데, 왜 내려가?
여전히 조금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8부 능선은 넘었고, 또 벌써 내려가는 건 좀 그렇지.
‘5이닝 딱 막고 내려가는 1선발이 어딨어?’
일종의 쇼케이스다.
새로운 1선발, 에이스로서 앞으로 어떤 피칭을 해나갈지 팬들에게, 그 외에도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지.
그런데 딱 5이닝 막고 내려가면, 심지어 여전히 0대0이라서 승리투수 요건도 갖추지 않았는데 내려가면.
그게 뭔 1선발이고, 무슨 놈의 에이스야?
‘투구수도 제법 아꼈고.’
많이 얻어맞아 놓고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그러면서도 투구수가 조금 절약됐다.
상대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타격해준 덕분에 승부가 길게 끌린 적이 없거든. 물론 그냥 많이 맞으면서 투구수가 소모되긴 했지만.
이제 한 91~2개쯤 되나?
평소라면 바로 커트다.
100구가 제한이라고는 하지만, 이닝이 끝났을 때 이 정도면 바로 끊어버리거든.
다만 투구수 자체는 평소보다 많지만, 어깨는 여전히 괜찮다. 보통 110구 정도가 내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잡아도 되겠는데?
‘구속도 안 떨어졌고. 제구도 아직 괜찮아. 구위도 여전하고. 생각보다 과부하가 덜 걸렸어.’
몸 상태도 좋겠다, 이대로 내려가기는 조금 아쉽지.
‘다만 문제는 벤치에서도 같은 생각이냐는 거겠지만.’
투구수는 아직 아슬아슬하게 괜찮지만. 문제는 내가 좀 많이 맞았다는 거다.
스티븐 보그트와 마찬가지로 벤치 역시 아슬아슬하다고 여길 테니까.
또한 폼이 안 좋은 날에 계속 등판시켜서, 이제 타이까지 올라온 기록을 굳이 망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거고.
“Go, 수고 많았어. 그리고··· 아무튼 잘했어.”
덕아웃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스콧 에머슨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기록을 언급하려고 했던 건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방향을 꺾었다.
아직 신기록을 수립한 것도 아닌데 언급하는 건, 괜히 부정 탄다고 생각했겠지.
수염난 아저씨들이 이런 미신을 믿는 게 조금 웃기긴 한데,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조심하는 편이라, 뭐라고는 못 하겠네.
“한 이닝만 더 던질 게요. 딱 6회까지만.”
그러더니 조금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대뜸 선빵일 날렸다. 아마 교체를 언급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과감하게 지르자, 스콧 에머슨은 한숨을 쉬면서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투구수는 알고 있어?”
“네, 91개 아닌가?”
“92야.”
안 통하네. 사실 나도 92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한 개 깎아봤더니, 칼 같구만.
“루키에게 100구 이상을 맡기는 것도 사실은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
“네,”
사실 원래 루키 선수들은 100구 제한도 아니지. 한 85구에서 90구 정도로 끊는다.
한 이닝에 30구 이상 던지면 바로 교체시키는 게 대부분이고. 그러니 어찌 보면 100구까지 제한이 늘어난 것만으로 날 어느 정도는 팀의 중심 투수로 생각한다는 거겠지만.
솔직히 나는 좀 억울하다.
내가 무슨 성장기 청소년이나, 갓 성인된 어린이도 아니고. 미국 나이로 스물넷.
한국 나이로··· 몇이더라?
미국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까, 한국 나이를 까먹네. 아마 스물다섯이겠지.
아무튼 이 정도면 성장은 이미 진즉에 다 끝난 나이인데, 그리고 내가 무슨 120구, 130구 던진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한 110구 아래쪽으로 끊으면 안 되나?
물론 구단에서 날 아껴준다는 것이니 감사히 여겨야겠지만···
‘그래도 감질나게 던지고 싶지는 않아.’
솔직히 말하면, 신기록 수립, 에이스 증명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내려가면 잠을 못 잘 것 같다. 내가 원래 못해도 6이닝은 던져야 꿀잠자는 사람이거든.
X나게 털렸는데 제대로 복수도 못하고 내려가는 건 좀 억울하잖아?
“딱 6회까지만 던질 게요. 그리고···”
그런 염원을 가득 담아, 과감하게 도박수를 던졌다.
“타자가 한 명이라도 출루하면 바로 교체되겠습니다.”
내 선언에 두둥! 하는 듯한 효과음이 들렸다. 뇌에서 재생된 건 아니고, 오늘은 쉬었던 마커스 시미언이 낸 소리다.
“캬~ 멋진데? 그래, 이래야 에이스의 에이스지! 좋은 마음가짐이야. 안 그래요, 코치?”
“경기도 안 뛰는 녀석이···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귀찮게 굴지 마.”
스콧 에머슨의 따끔한 질책에 마커스 시미언은 입을 삐죽 내밀며 덕아웃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그러게 오늘 경기 나오지도 않는 놈이 왜 나대고 그래. 대충 눈치보고 얌전히 있어야지.
뭐, 어쨌든 일종의 도박수인데, 사실 어느 정도는 계산을 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난 안 될 것 같은 일에는 대가리 박는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이대로 경기를 끝내면, 프런트나 구단도 좀 애매하지.’
저~기 계시는 소니 그레이를 밀어내면서까지 루키에게 1선발을 맡겼는데.
그 첫 경기가 지금처럼 무실점이기는 해도 열심히 얻어맞으면서 끝나버리면, 구단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반대파에 명분을 주는 셈이거든. 약간은 곤란해지는 거지.
그러니 보다 더 깔끔한 마무리를 원할 거다.
물론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건 프런트나 구단이 아니라, 투수코치와 그 뒤에 있는 감독이지만, 어쨌든 거기서 거기지.
“좋아, 교쳬투수는 준비 중이니까, 딱 한 이닝만 더 던지는 거야. Go, 네가 말한 대로 한 명이라도 출루하면 바로 교체할 거고.”
그 이상은 없다는 듯 단호한 스콧 에머슨의 표정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타자는 셋, 오늘 마지막 타자들이니, 성심성의껏 조져야겠네.’
원래 마지막만 좋으면 되는 거야.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고.
####
“어··· 어?”
“Go가 오늘은 좀 맞는데?”
“에이, 저건 좀 그렇지. 럭키샷 수준인데. 그냥 좀 운이 없네.”
애슬레틱스 팬들은 경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유석이 시작부터 얻어맞았으니까.
실점은 물론, 안타조차도 생소한 투수기에, 대부분 반응은 쟤가 저렇게 맞기도 하는구나 정도였다.
그래도 저러다가 털고 일어나서, 신기록을 수립하리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허나 그런 위기가 지속되면서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A’s]
[아··· 이러면 좀···]
└오늘 Suck이 좀 불안하네
└무실점 가능한가?
└원 아웃에 주자 1,2루면 좀 힘들 것 같긴 하네.
지속적으로 위기에 노출됐고, 실점이 도저히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까지 몰렸으니까.
[#A’s]
[그러게, 왜 루키한테 1선발을 맡겨, 괜히 부담감만 심해졌잖아.]
└Go가 저렇게 맞는 걸 보면 좀 무겁기는 한가봐.
└Chicken새끼들이 아직 실점도 안 했는데 벌써 징징거리고 있네. 닥치고 경기나 봐라.
└내가 지금 Go를 욕하는 것 같냐? 그냥 좀 불안하다는 거지.
└그냥 올해는 풀시즌 정도로 만족하다가, 내년부터 스무스하게 넘겨줬어야지. 신인 투수한테 뭐하는 짓이야.
평소와 다른 고유석.
그리고 불안한 경기.
많은 팬들은 그 원인을 1선발에서 찾았다. 특히 이전부터 신인에게 에이스라는 과업을 맡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은 더더욱 그랬고.
그렇기에 그들은 이런 선택을 내린 구단을 비판하며 자충수라고 칭했고, 몇몇은 곧 무실점 기록이 깨질 거라며 불안감에 떨었지만.
-2루 아웃! 잡아서 1루로~~ 아웃! 1사 주자 1,2루에서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며 위기를 넘기는 Go!
-지난 경기들과 달리, 아슬아슬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네요.
다시 한번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명 평소보다 많이 얻어맞는데도 꾸역꾸역 막아냈으니까.
└그렇지! 세이프!
└제발 5회까지만 무사히 넘기자! 타이기록이면 충분해!
└이미 선발투수로는 1위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마. Go.
그리고 뒤이어 4회 말.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는 고유석을 보며 팬들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상대의 흐름을 끊었고, 분위기도 탄 것 같으니, 고유석이 조금 더 힘을 낼 것 같았으니까.
-아··· 지난 이닝에서 위기를 억지로 막아낸 Go였는데··· 지금은 조금 위험하네요. 무사 주자 1,3루입니다.
-웬만하면 점수가 나오는 상황이죠. 내아 그라운드볼로도 충분히 득점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난 이닝도 그렇고, 꾸준하게 위기를 잘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준 Go였기에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자 1,3루. 심지어 아웃도 없다. 이쯤 되면 공격팀이 점수를 못 내는 게 이상하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땅볼 하나로도 득점이 가능한 상황이니까. 주자들 모두 다 발이 좋기에, 장타면 2실점도 가능했고.
그렇기에 다시 살아났던 기세는 확 꺾였고, 몇몇은 이미 미래를 실감한 듯.
37이닝 연속 무실점도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며, 실점을 감내하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중계진 역시 그나마 캐스터만이 아쉬운 한숨을 삼키며 억지로 긍정적인 말을 내뱉었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지금의 삼진은 좋네요. 위기 상황일수록 이런 삼진 하나하나가 소중하죠.
-네, 첫 스타트를 잘 끊었습니다.
허나 이번에도 틀린 건 그들이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빅리그 커리어를 통틀어 최악의 위기에도 마운드는 굳건했다.
다시금 흐름을 뒤집어 놓는 삼진. 뒤이어 절묘한 견제구로 투 아웃.
순식간에 투아웃이 올라갔고, 전광판과 중계화면에 들어온 빨간 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불이 켜졌다.
[#A’s]
[오늘··· Go는 뭔가 다르네.]
└집념이 느껴져.
└진짜 악착같이 막네. 저게 우리 투수라고?
분명 경기 내용은 안 좋다.
데뷔 이후 모든 경기를 통틀어서 가장 안 좋다고 봐도 된다. 이번 시즌 최악의 상황이지.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 그리고 정식 에이스. 그 두 가지가 겹쳐져 발생한 기대보다는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 그런 위기 속에서도 꾸역꾸역 막아내는 고유석의 모습에 사람들 마음에 생겨난 건, 실망이나 아쉬움이 아닌, 전율이었다.
-자, 9구, 길게 끌린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을지- 쳤습니다! 마운드! Go가 직접 잡아서 1루로- 아웃! 무사 주자 1,3루의 위기를 완벽하게 넘기는 Go! 또 한번 막아냅니다!
정말 열심히 얻어맞았는데.
미치도록 털렸는데, 끝끝내 실점을 내주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평소와 달리 내용이 안 좋았기에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제까지는 그저 완벽했기에, 오클랜드의 희망, 구세주, 그런 단어들로 표현됐던 선수였는데.
끝끝내 굳건하게 버티는 모습은 아무리 포격을 퍼부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철벽처럼 보였으니까.
“그래! X발 경기 내용이 어떻든 간에 점수만 안 주면 되는 거지!”
“이대로 쭉 가자!”
“백날을 때려봐라! Suck이 무너지나!”
가슴속에서부터 열기가 차올랐다. 분명 그들이 기대했던 에이스의 모습은 아니다.
이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화끈하게 삼진을 잡으며, 상대 타자들을 찍어 누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이것 역시 에이스다.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절대로 실점하지 않는 투수가 에이스가 아니라면, 누가 에이스인가? 최소한 오클랜드 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점점 더 달아오른 분위기. 그리고 위기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믿음.
-안타! 또 다시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한 Go!
-트윈스 타선도 정말 열심히 때리고 있지만, 문제는 마무리입니다. 클러치가 필요해요.
그렇기에 다시금 선두타자 안타가 나왔을 땐, 전과 달리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또 틀어막을 테니까.
그 믿음은 실현됐다.
그것도 가장 바라던 방향으로.
-스트라이크 아웃! KKK!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트윈스를 잠재우는 Go!
-네, 결국 올 것이 왔네요.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서, 오히려 흐름이 넘어갔습니다.
세 타자 연속 삼진.
버티고 떠 버티며 철옹성처럼 막아내던 고유석이 지친 상대에게 펀치를 날린 순간.
“이예에에에에에!”
“이게 Go지! 이게 Suck이지!”
“신나게 때리면 뭐하냐?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Go라고!”
타깃 필드의 원정팬들과 오클랜드가 하나 되어 소리쳤다.
[#A’s]
[Go가 해냈어! 이제 타이야, 타이라고!]
└불펜 1위도 오클랜드고, 선발 1위도 오클랜드다!
└오늘 진짜 손에 땀을 쥐고 봤다. 많이 불안했는데, 결국 Go가 해냈네.
└아무려면 어때! 기록도 세웠고, 삼진도 제법 잡았고, 5이닝도 던졌는데, 이거면 된 거지!
데뷔 직후 39이닝 무실점.
기존의 기록이었던 브래드 지글러와의 타이기록은 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결국 해냈으니까.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팬들은 이제 교체투수가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0대0이라, 고유석이 6경기 연속 승리를 달성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여전히 무실점이 이어진 6회초가 끝난 뒤 다시 6회 말.
올라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투수였다.
[#A’s]
[그래, Go가 겨우 5이닝 가지고 만족할 리가 있나!]
└기록이고 나발이고, Go한텐 상관없지!
└이래도 에이스가 아니야?
다시금 전율이 솟았다.
엄밀히 말하면, 굳이 올라올 필요는 없다. 이미 타이기록도 세웠고, 5이닝도 채웠으니.
굳이 폼이 안 좋고, 잦은 안타를 맞은 날에 더 무리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허나 그렇기에 완벽했다.
끝끝내 시련을 이겨냈던 히어로가, 이제 에이스로서 올라온 거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탈삼진 두 개를 더 곁들이면서! Go가 6회 말을 마무리합니다!
-내내 불안했던 Go이지만, 결국 증명해냈네요. 구단이 어째서 자신을 선택했는지를.
반대했던 이들도, 걱정 혹은 의심했던 이들도. 그리고 당연히 지지했던 이들까지. 이젠 모두가 인정했다.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했음을.
####
경기는 우리의 패배로 끝났다. 9회 초에 간신히 한 점을 내는 게 그쳤거든.
진짜 좀 퐁당퐁당이라니까.
칠 때는 화끈하게 치는 양반들이, 못 칠 때는 아예 못치니···
그나마 트윈스는 내내 X무만 하다가, 막판에 3점이라도 올렸으니, 우리보단 양반이지.
“어우··· 쪽팔려.”
“어제 귀 머는 줄 알았어, 원정팬들이 어찌나 욕하던지···”
“욕 먹을만 하기는 하지. Suck 얘가 그렇게 꾸역꾸역 막았는데, 승리도 못 챙겨주고.”
경기가 끝나고, 타자들은 얼굴을 붉혔다. 화난 건 아니고, 본인들 입으로 말했듯 쪽팔리잖아.
선발투수가 그렇게 열심히 막았는데, 고작 1점, 그것도 9회에 달랑 내고 말았으니···
“X같은 놈들아!”
“Suck 승리 돌려내!”
“X발 니들이 타자냐!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냐고!”
그래서 욕도 좀 들었다. 특히 페이스 페인팅이 인상적인 내 개인 팬들, (전)레이더스 팬들에게.
그따구로 야구할 거면 꼬추 떼라고 했던가? 한 경기 못 한 것 치고는 좀 심한 형벌 같은데, 어쨌든 죄인은 죄인이지.
“난 오늘 출장도 안 했는데 같이 싸잡혀서 욕 먹네···. Suck, 네가 네 팬들한테 난 무죄라고 좀 말해주라.”
오늘 출장하지도 않았던 마커스 시미언은 타자라는 이유로 같이 욕먹은 게 억울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 넌 좀 억울하겠네.
‘그래도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네.’
비록 경기는 패배로 끝났고, 나도 승리는 챙기지 못한데다가, 좀 많이 얻어맞기는 했지만, 인상적인 피칭이었던 건지.
1선발이 확정된 이후로 조금은 미묘했던 라커룸의 분위기가 경기가 끝난 지금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 더 인정을 받았다. 시범경기 때는 레귤러 선수로서 인정받았다면, 이번에는···
“Hey Suck! 내일 벤치에 자리 깔고 눕지 그러냐. 한번 시위라도 해봐.”
“그래, 네가 총대 메고 타자 놈들을 압박해야 우리도 편하지.”
얼추 에이스로 인정받았구만.
다른 선발투수들도 그렇고, 고깝게 보던 고참들도 그렇고. 피로한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인정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자, 여기 앉으시지요, 선발투수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잘못한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지난달의 5승은 저희가 노력한 결과물이란 걸 알아주십시오.”
약간은 장난에 가까운 대우도 받았다. 특히 오늘의 죄인인 타자들에게. 그렇게 만담을 나누고 있을 때.
라커룸에 내일 선발투수가 들어왔다. 화장실을 가는가 싶더니, 좀 오래 걸렸네.
“소니, 컨디션은 좀 어때? 내일 잘 던질 수 있겠어?”
“나쁘진 않아. 나쁘지는.”
약간은 싸해진 분위기.
어쩔 수 없다.
내가 에이스로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그런 나한테 밀려난 입장이니까.
거기다 오늘 내가 잘 던지기까지 했으니, 상황이 좀 그렇지.
나도 조금 궁금하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의 기준으로 오늘 내 피칭은 통과점이었을까?
“Go, 아니, Suck, 오늘 수고했어, 역시 괜히 이달의 투수가 아니네.”
그런 분위기를 읽은 건지, 씨익 웃은 소니 그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라커룸에 드리운 긴장을 풀었고.
“어우, 간만에 빅리그인데, 나도 내일 이 정도만 했으면 좋겠네.”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한줌의 미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인정한다는 듯 조금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