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에인절스 타선에서 마이크 트라웃은 큰 산이다. 그것도 홀로 우뚝 솟은 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웃!”
일단 그 산의 정상만 찍으면 그 뒤는 오직 내리막길이라는 거다.
그 뒤로 역대급 10년을 지나, 마찬가지로 역대급이라고 할만한 에이징 커브를 맞은 4번타자 알버트 푸홀스.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5번타자 제프리 마르테는 타율이 1할 대의 타율과 5할을 간신히 넘기는 OPS를 기록 중인 4월의 최악의 타자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6번타자 안드렐톤 시몬스가 트라웃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밥값을 하는 축이지만, 그조차 낮은 서클 체인지업에 크게 헛스윙하며 2회 말 역시 무난하게 지워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데니 에스피노사를 5구째 슬라이더로 삼진 처리합니다! 세 타자 연속 삼진!
-자, 4구, 던집니다, 바깥쪽! 대니 에스피노사 쳤습- 3루수에게 걸립니다!
-마틴 말도나도 1루 방향 파울, 욘더 알론소가 따라가서- 잡아냅니다! 3회 말마저도 삼자범퇴로 지워버린 Go! 그의 피칭 앞에서 에인절스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뒤이어 7-8-9번타자로 이어지는 3회 말 역시, 참담한 에인절스 타선에서도 하위타선에 위치한 타자들답게 나란히 아웃당하며 깔끔하게 지워졌다.
“···”
첫 타순이 시원하게 삭제되자, 홈팬들의 심기가 더욱더 불쾌해졌고, 묵직한 침묵이 에인절 스타디움에 맴돌았다.
“뭐야, 에인절스가 겨우 이거밖에 안 돼? 더럽게 못하네.”
“Suck, 살살 해! X밥들한테 너무 체력 낭비하지 말라고!”
아, 물론 대다수의 이들이 침묵했다는 거지, 소수 중의 소수는 오히려 더욱더 신이 나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홈팬들의 속을 사정없이 긁었다.
“저저- 무식한 새끼들, 여기가 자기네 집 안방이야?”
“하··· 기껏 경기보러 왔더니 오클랜드 놈들한테 조롱이나 당하고···”
“실컷 떠들어라, 다음 이닝부턴 닥쳐야 할 테니까.”
똑같은 수준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분노를 참았다.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억지로 꾹 참고 기다리다보면, 지금의 굴욕을 기분 좋게 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
“한 타석 제대로 봤으니까, 다음 타석부턴 대책을 내놓겠지.”
“마이크 표정도 좋던데, 바로 한 방 날릴 걸?”
“아까 전에 보니까, 감을 잡았다는 눈치던데, 그럼 끝난 거지.”
한 타순이 돌았으니, 다음 이닝부터는 다시 상위타선이고, 그 마지막에는 트라웃이 있기에, 그들은 굳게 믿었다.
비록 1회 말에는 헛스윙 삼진을 당했지만, 분명 트라웃이라면 무언가 방법을 찾아내거나, 통쾌하게 되갚아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중에 웃기 위해 그들은 당장의 분노를 억눌렀다.
####
“나이스 캐치!”
“마이크! 오늘 폼 좋아보이는데? 그 폼 그대로 공격에서도 하나 해줘!”
“아직 2점차니까, 금방 따라잡자!”
4회 초 애슬레틱스의 공격은 쉽게 무산됐고, 1번타자 재프 데커(Jaff Decker)가 날린 높은 플라이볼을 넉넉하게 캐치하며.
이닝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손수 올린 트라웃은 자신을 향한 온갖 종류의 칭찬에 피식 웃었다.
‘못 잡으면 이상한 타구인데 말이야.’
높은 외야 플라이.
타구의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기에, 내야였다면 잡기도 전에 미리 아웃이 선언됐을 타구다.
겨우 그런 것 하나를 잡아냈다고, 저렇게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조금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팬들은 기분이 상했겠지.’
원래 항상 그렇지.
하퍼와 자신의 라이벌리가 만들어졌을 때도 가장 불쾌해 했던 건 팬들이다.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선수에게 감히 누군가가 비교가 되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건데.
경기 시작 전, 상대팀 선발투수가 대놓고 이길 수 있다며 선언했으니, 그에 걸맞은 응징을 원하는 거겠지.
“마이크, 내가 이번 타석은 어떻게든 나가 볼 테니까, 하나 날려서 바로 동점 만들자.”
“쟤 오랫동안 무실점 중이라며? 콧대가 더 높아지기 전에 깨줘야 저 녀석도 성장을 하겠지.”
의지를 불태우는 건 팬들만은 아니었다. 지난 경기에 이어 오늘까지 막히고 있으니, 승부욕이 생긴 거겠지.
비록 3이닝이 지워졌고, 2점차 뒤지는 상황이지만, 덕아웃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최근 팀의 전체적인 타격이 심하게 저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2점 정도는 한 이닝만에 역전할 수 있는 점수니까.
그렇기에 의지를 불태우며 당당하게 선언했고, 몸소 주자가 되겠다는 이들을 보며 피식 미소지은 트라웃은 뒤이어 다시 그라운드로 나온 투수를 봤다.
‘아직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실마리는 얻었다. 이번 경기에서 저 투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무수히 많은 방법이라고 했었지.’
전해들은 인터뷰를 곱씹으며, 그는 배트 손잡이에 파인타르를 칠했다. 곧 돌아올 두 번째 타석을 위해서. 약간의 실수조차 있어선 안 된다.
만약 이번마저 막힌다면, 덕아웃의 분위기도 지금보다는 많이 떨어질 테니까.
‘최소한··· 레인저스처럼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는 건 막아야지.’
자신들의 홈에서 루키에게 5.2이닝 동안 퍼펙트를 내주고, 처절하게 털렸다는 이유로 레인저스는 꽤나 심각한 비난을 받았었다.
트라웃 자신이야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최근 성적도 그리 좋지 못한 다른 동료들에겐 치명적이겠지.
어쩌면 타선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게 훨씬 더 힘들어질 수도 있고.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적당히 승부욕이 생기는 정도의 불쾌함일 때 끊어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 배팅장갑까지 착용한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덕아웃의 출구에 섰고.
“마이크 기다리고 있어!”
“퍼펙트는 우리가 먼저 깨고 올 테니까, 넌 무실점 날려버려.”
당찬 말을 남기며 동료들이 먼저 타석에 올라갔지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첫 회와 똑같았다.
아니, 이번엔 콜 칼훈이 삼진까지 당했으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봐도 되겠지.
“어우, 시미언 쟤 요새 수비 너무 잘한단 말이야.”
“쓰읍- 딱 1인치, 아니, 0.5인치 차이로 이게 안 맞네.”
멋쩍은 듯 웃으며 괜히 농담했지만, 트라웃의 눈에는 보였다. 그런 장난스러운 모습으로도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기다리고 있어, 무실점 끝내고 올 테니까.”
“그래, 루키한테 우리 몫까지 빅리그의 참맛을 좀 보여줘.”
그래, 여기서 끊어야 한다.
만약 조금 더 이어진다면, 당혹감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상성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만들어진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슬럼프가 시작될 만큼 예민한 게 야구선수니까.
실력적으로는 이미 완성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메이저리거들이기에 오히려 그런 문제에 쉽게 휩쓸리지.
‘지금 끊지 못하면, 당혹감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겠지.’
그것을 잘 알기에 조금 더 집중을 더하며 타석에 올랐고, 방금 전까지 삼진에 기분이 좋아 보였던 투수와 포수는 이번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뭔가 숨기는 게 있겠지.’
저 투수의 표현대로면 자신을 잡을 무수히 많은 방법. 아마도 그중에서 하나일 거다.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약간의 확인이 더 필요했기에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타격에 임했고, 곧 승부가 시작됐다.
“볼!”
먼저 볼 하나.
저번 타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초구는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그것도 똑같은 녀석으로.
‘한번 더 찔러본 건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지난 첫 번째 타석에서 초구를 적극적으로 스윙했으니, 이번에도 브레이킹볼을 던져본 건데.
미동도 없는 자신의 모습에 Go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일단 카운트는 하나 벌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스타트.
짧게 숨을 마신 트라웃은 최대한 투수를 관찰하며 그의 속내를 가늠했다.
“스트라이크!”
2구째는 몸쪽 포심 패스트볼.
경기가 중반에 이르렀지만, 투구수를 많이 소모하지 않아서 그런지, 무브먼트는 여전히 좋다.
약간 떠오르는 듯한 착시효과도 여전했고. 강속구는 아니기에 의외로 타이밍을 잡기는 쉽지만, 이런 착시효과와 무브먼트 때문에 함정에 빠지기도 쉽지.
‘인터벌을 높이지는 않는군.’
4~5회쯤 되면 Go는 인터벌이 빨라진다. 그러면서 다른 투수가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을 타자들에게 선사하지.
기존의 타이밍이 완전히 망가지기에 다른 타자들은 꽤나 꺼려하는데, 지금은 이전과 똑같았다.
종종 경기 후반이나 중반에도 컨트롤에 집중하거나 수싸움에 집중할 때는 타이밍을 당기지 않는 편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볼!”
고민 끝에 던진 3구는 다시 한번 빠졌다. 바깥쪽, 제법 멀리 던진 패스트볼. 포심은 아니다, 무게감이 덜했으니까.
투심일 가능성이 높지.
‘저번 경기와 비슷하군.’
지난 개막전에서도 이랬었다. 두 번째 타석에선 최대한 컨트롤에 집중해서 던지다가, 볼넷으로 내보냈었지.
똑같은 레퍼토리,
개막전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려는 건가? 마지막 타석을 위해 차곡차곡 밑밥을 던지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볼!”
뒤이어 던진 보더라인에 걸치는 슬라이더와 낮고 멀게 꺾여나간 서클 체인지업 트라웃은 흘려뵀다.
그렇게 풀카운트, 그는 곧바로 타임을 요청했다. 얻어낸 정보를 조합해야 했으니까.
‘여전히 쓰리핑거는 없다.’
지금까지 쓰리핑거를 던지지 않았다. 저번 경기와 마찬가지로. 그러니, 트라웃 자신에겐 단 한번도 던지지 않은 셈이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제법 폼이 올라왔다던 커터 역시 던지지는 않았으니.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경기에서만 조금 던진 거지, 다른 경기들에서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은 구종이니, 아마 그날 하루만 커터의 컨디션이 좋았던 거겠지.
‘좋아, 잘 알겠어.’
그는 투수를 봤다.
여전히 포커페이스.
무언가 노림수를 감추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인데, 그것으로 확신을 얻었다.
“···시간 너무 끄는 거 아니야? 아무리 스타라도 그렇지.”
흐름을 끊는다는 포수의 투덜거림에 주심 역시 은근히 눈치를 줬을 때쯤, 그는 재빨리 타석에 들어왔다.
이젠 확신이 생겼다.
‘무수히 많은 방법. 그리고 노림수.’
다시금 숨을 고르고, 동작을 준비한 그는 투수와 시선을 맞췄고,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며 투수는 공을 던졌다.
‘그래 그거였어.’
물 흐르듯이 이어진 투구동작. 그리고 손끝에서 날아오는 공. 그것을 보며 그는 침착하게 배트를 움직였다.
‘커브.’
이게 투수의 생각이다.
무언가를 감춘 것처럼, 무언가 대단한 묘수가 있는 것처럼 인터뷰를 하고, 스스로를 뽐내면서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 거지.
그에 집착하고 고민하도록 유도한 거고. 그렇게 의심을 심어두려고. 치졸한 방법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치졸한 것 치고는 꽤나 머리를 많이 썼으니까. 쓰리핑거라는 또 다른 덫을 놓을 정도로.
“흡-”
느릿한 커브. 기억이 난다, 지난 개막전에서도 하나 던졌었지. 그리 효과가 좋지는 않으나, 오프스피드로서의 가치는 뚜렷하다.
또한 그의 기억이 맞다면, 시범경기에서 삼진을 하나 뽑아냈었지. 그것의 타이밍에 맞춰 스윙한 순간, 황토를 바른 공이 유유히-
‘아···’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첫 번째 타석과 마찬가지로 하이 패스트볼. 89마일이라는 최고구속치고 심각하게 느린 패스트볼이나.
그보다 20마일 가량 더 느린 커브를 노리고 있던 타자에겐 100마일 이상의 강속구와 맞먹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는 공의 한참 아래를 헛돌았고,
‘제대로 속았군.’
간신히 밸런스를 잡은 트라웃은 처음부터 끝까지 투수에게 놀아난 상황에 헛웃음을 흘리며, 조금 강하게 입술을 씹었다.
####
‘제대로 낚였네.’
느리게 휘둘러져서, 크게 헛도는 배트를 보며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움찔했다.
커브도 생각을 했었거든.
개막전 때 트라웃에게 하나 던지긴 했지만, 의미 없이 바닥에 처박은 수준이었으니, 기억 못 할 것이기에, 잘하면 통할수도 있지만.
‘트라웃 같은 타자에겐 아니지.’
불쑥 제정신이 들었다.
내 커브가 은근히 강타자들에게 잘 통하지만, 약간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거포일 것, 둘째는 선구안이 심하게 좋은 타자는 아닐 것.
‘트라웃도 거포라면 거포지만, 선구안이 문제지.’
왠지 알아챌 것 같더라고. 커브의 경우 손에서 빠져나올 때 약간 뜨는 듯한 움직임이 있는데, 트라웃처럼 선구안이 좋은 타자들은 종종 그걸 포착하거든.
스윙을 봐서는 커브를 노린 것 같으니, 만약 정말로 커브를 던졌다면 바로 넘어갔겠네.
“이게 통하네.”
“입도 좀 털었고, 연기도 잘했잖아요? 스티븐도 잘했어요.”
그래서 방향을 꺾어서, 일부러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척, 노림수가 있는 척만 했다. 나도, 스티븐도.
말 그대로 척만한 거지. 묘수 같은 건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좋은 타자라서 스스로 제발에 걸려 넘어졌네.
‘여기까진 참 좋지만, 이제 다음이 문제인데···’
이걸로 노림수는 써먹었고, 이제 다음 타석에선 진짜 꽝 붙어야 하는 건데. 다음에는 진짜로 커브를 던져볼까? 아니, 바로 알아채겠지.
‘6이닝만 던지고 내려갈까?’
6이닝 정도면 선발투수로서 적절하게 잘 막은 거기는 한데··· 약간 유혹이 느껴졌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예쁘게 던지려고만 했네. 간 좀 보다가, 그때 선택하면 되겠지.’
타석 두 번 다 승부가 제법 길어서 그런가, 제법 타이밍을 잡은 것 같은데. 그런 타자에게 걸맞은 마지막 비장의 방법이 있지.
“다음 이닝부터는 속도 좀 올리죠.”
“그래, 열심히 던져봐. 손바닥 터지도록 잡아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깔끔하게 트라웃을 잊었다.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남은 건 나머지 여덟 명을 얼만큼 효과적으로 조질 수 있느냐는 것뿐.
####
퍼펙트는 다음 이닝 곧바로 깨졌다.
“그렇지!”
“간만에 돈값 좀 하네!”
“계속 그렇게만 해줘! 그럼 X발 조금 먹고 튀어도 용서해줄 테니까!”
어찌 보면 이것도 흔치 않은 풍경이다. 에인절스 팬들이 무려 푸홀스에게 환호하고 있으니까. 나 때문에 별짓을 다하네.
“푸홀스도 하나 쳤는데, 너도 제발 좀 쳐라!”
“3할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2할이라도 치라고! 2할이라도!”
연봉 2500만 달러짜리 먹튀보다는 그래도 내 퍼펙트가 깨진 게 더 좋은 건지, 힘껏 환호한 에인절스 팬들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갑자기 대역전극이 일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푸홀스, 요즘 한국식 표현으론 졸스신의 노력이 뒤에 타자들이 나란히 처리당하며, 5회 역시 금방 끝났고, 6회도 딱히 수확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7회 말.
오늘 마지막 이닝에 오른 나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홈팬들에게? 아니 대기타석에게.
‘엄청 노려보네.’
2-3-4로 이어지기에, 이닝 시작부터 대기타석에 들어선 트라웃의 눈동자에는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언의 열망이 가득했다. 약간의 자신감도 엿보였고.
비록 꼴사납게 헛스윙 삼진만 두 개를 당했지만, 그래도 볼 수 있는 건 죄다 봤으니, 한방 날려줄 생각이 가득하겠지.
‘타이밍을 잡은 것 같더니··· 좀, 아니, 많이 위험하겠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마이크 트라웃이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건 투수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두려운 상황이겠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나한테는 그저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을 더해줄 뿐이었다.
피부가 따갑긴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먼저 차분하게 2번타자 콜 칼훈을 처리한 뒤. 당당하게 타석에 올라오는 그와 눈을 맞췄다.
“홈런 날려!”
“X발 그냥 장외로 가자!”
“저 새끼 별거 아니니까, 하나만 톡 해버려!”
“뒤에 푸홀스도 있으니까, 믿고(?) 차분하게 스윙해!”
이젠 아주 노골적이네.
점잖게 노려보기만 하더니, 결국 7회까지 내가 날뛰자, 신사 코스프레는 던져버린 건지, 경기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트라웃은 그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조금이라도 넣으면 바로 넘어가겠는데?’
오늘 경기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서서 배트를 장전하는, 그래 장전하고 있는 트라웃을 보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고.
스티븐 보그트도 느낀 건지, 먼저 사인을 보냈다. 리드하는 건 아니고, 이번 타석은 어떻게 할 거냐 묻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계획대로 가야지.’
타자는 내 피칭에 익숙해졌고, 타이밍도 잡았다. 인터벌을 당기긴 했지만, 통하지 않겠지. 커브를 던질 수도 없고.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괴물이 저렇게 완벽하게 준비됐는데, 별수 있나.
“볼!”
“파울!”
“볼!”
“볼!”
차분하게 하나씩 던지자.
그는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는 듯, 애매한 코스에는 눈도 깜짝 안 하며 타자는 천천히 카운트를 조였다.
1-3, 삐끗하면 볼넷.
아무리 제구력에 자신있는 투수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카운트다.
그걸 잘 알기에 타자도 배르를 쥔 팔에 힘을 조금 더 불어넣었고. 존 안쪽으로 집어넣는 순간 바로 날려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네.
‘쓰읍, 결국 하나를 안 따라와주네. 한번 노려볼 만했는데.’
조금 아쉽구만.
투 앤 투만 됐어도 나도 욕심내고 던졌을 텐데 말이야.
칼 같은 선구안은 유인구에 넘어오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갑시다.’
슬쩍 사인을 보내니, 스티븐 보그트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흘끔 트라웃을 살펴본 뒤 포구를 준비했다.
5구. 오늘 그에게 던지는 마지막 공이기에 모든 집중을 다했다.
‘위험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서-’
그렇게 가볍게 동작을 이행하며 캐치볼을 한다는 느낌으로 공을 던졌고, 서서히 날아가는 공에 승부욕으로 이글거리던 트라웃의 눈동자는-
“볼!”
곧 분노로 돌변했다.
내가 트라웃을 화나게 했다! 난 트라웃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베이스 온 볼!”
낮게 아주 낮게 처박혀서 날아온 공에 주심마저도 허탈한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으니까.
어우, 컨디션 좋고, 타이밍도 다 잡은 타자, 그것도 MVP를 뭐하러 상대해? 뒤에 타자가 빡센 것도 아닌데, 대충 눈치보다가, 그냥 걸러야지.
시종일관 진지했던 포커페이스는 깨졌고, 트라웃은 분노와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다소 거칠게 1루로 걸어 나갔다.
“우우우우우우우!”
압도적인 야유.
트라웃과 마찬가지로 관중들 역시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한 건지, 묵직한 야유를 토해냈고.
“Pussy! Pussy!”
“이 X같은 Cunt새끼야!”
“지금 장난쳐! 이 X같은 새끼가!”
속에서 우러나온 진득한 욕설이 애너하임을 가득 덮었다.
나이도 지긋해 보이는데, 거 어른이라는 양반들이 입이 너무 험하시네.
컨트라니, 영어 욕 중에서는 최상급의 욕이잖아. 저~기 있는 내 팬들도 그런 욕은 안한다.
나 혼자 재미는 다 봐놓고, 트라웃에겐 복수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니,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맞아 비겁한 거.
‘정확하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비겁한 거지.’
이미 원아웃에 뒤에 푸홀스랑 1할대 타율의 제프리 마르테가 있는데, 뭐하러 독이 바짝 오른 트라웃이랑 붙어?
내가 가진 손패도 이미 다 써버렸으니. 그냥 얌전~히 보내줘야지.
‘삼진 두 개에 볼넷 하나. 이 정도면 아주 효율적으로 막았네.’
뭐라고 떠들든 간에, 결국 이게 팩트지. 난 오늘 트라웃이라는 타자를 아주 현명하게 막았고, 그건 곧···
“스트라이크 아웃!”
에인절스를 막았다는 것과 동일하다.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올라온 알버트 푸홀스와 제프리 마르테를 나란히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 종료.
7이닝 11탈삼진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의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채 4월의 마지막 마운드를 유유히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