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하퍼 같은 타입이었던 건가.’
동료들이 전해준 말을 들은 마이크 트라웃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투수의 행동은 마치 하퍼 같다고.
브라이스 하퍼, 함께 최고의 유망주로 주목 받았던 동료이자, 라이벌 비슷한 녀석.
사실 언론에서 라이벌리를 만들긴 했지만,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원래는 제법 친밀했었고.
최근 들어 하퍼 쪽에서 조금 쳐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연락은 주고받는 편이니까.
어쨌든 그런 좋은 선수에게서 느꼈던 향기가 갓 데뷔한 오늘 상대팀 선발투수에게도 느껴졌다.
‘뭐, 사람마다 성향은 다른 거니까.’
트라웃 자신은 그다지 이런 종류의 행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인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항상 있는 법이니까.
‘실력이 좋은 것도 비슷하네.’
Go You-Suck.
이름만큼이나 강렬한 피칭을 했었지. 지난 3일, 개막전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알기는 이전부터 알았다.
같은 지구 팀에 새로이 등장한 신성이고, 거기다 투수이니, 타자인 트라웃에겐 확실하게 적이니까.
개막전에서 상대했던 피칭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 타석의 헛스윙은 완벽한 패배였다..
경기 시작부터 차근차근 깔아뒀던 한 수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을 완벽하게 속였으니, 깔끔하게 인정해야겠지.
물론 그의 팬들은 그것을 그저 초심자의 행운이 탄생시킨 굴욕정도로 여기며, 이번 경기에서 설욕하길 바랐지만 말이다.
“헤이, 마이크. 저쪽 애송이가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경기까지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너도 한마디 하지 그래? 기자들이야 고맙게 달려올 텐데.”
“뭐 하러 굳이 그런 짓을··· 그냥 열심히 경기에 집중하는 게 낫습니다.”
알버트 푸홀스.
한때는 우상이었던 타자,
아니, 트라웃 그 혼자만이 아니라, 비슷한 나이대의 야구선수 모두의 우상.
생각에 잠긴 모습에 그는 은근히 싸움을 부추겼지만, 트라웃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신의 방식이 아니다.
그저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면, 결국 승자는 알아서 가려지는 법이니까.
다만 한 가지 애매한 건···
‘그냥 한 말이겠지만, 무시할 수는 없지. 굉장히 영악하니까.’
대체 숨겨둔 수가 뭘까?
이번엔 뭘 감추고 있는 걸까?
휴스턴을 상대로 뜬금없이 위력적인 커터를 꺼내서 경기 중반을 지워버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투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남몰래 숨기고 있던 무기를 하나씩 꺼내지.
시범경기 중간에 꺼내며, 투수에게 체인지업 마스터라는 별명을 가져다준, 두 가지 종류의 서클처럼 말이야.
딱히 반응하고 싶지 않은 언론플레이지만, 워낙 뜻밖의 선수이기에, 마냥 무시하는 것 또한 조금 껄끄러웠다.
‘아니, 아니. 그저 눈앞에 놓은 정보에 집중하자.’
모든 것을 다 잡으려다가는 모든 걸 놓치는 법. 머리를 털은 트라웃은 다시 워밍업에 집중했고.
기분이 나쁠 법한데도 평소처럼 딱딱 움직이며, 감정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흥미를 잃은 듯, 푸홀스는 혀를 내두르며 자리를 비켰다.
‘매리너스전에서는 바깥쪽 승부를 했었지. 오늘도 그런 방식으로 하려는 건가? 아니면···’
주변은 다시 평소처럼 위밍업의 여파로 그가 가볍게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가득해졌지만, 그런 고요함 속에서 가슴 안쪽에 심어진 씨앗은 조금씩 크기를 불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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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초, 경기 시작부터 2득점이 올라갔다. 득점지원 달달하네. 우리 타선도 은근히 퐁당퐁당이란 말이야.
‘파워는 있는 것 같은데, 한 경기에 몰아치는 느낌이 없지 않아.’
그래도 신기한 건 최소한 내가 등판한 경기에선 점수를 잘 내주는 편이기에, 기분 좋게 불펜을 나서니, 1회 초를 달궜던 타자들이 이제는 야수로서 다가왔다.
“Suck, 너 안 쪽팔리도록 점수는 열심히 올려뒀으니까, 편하게 던져, 오늘도 승수 올려야지.”
“겸사겸사 네 팬들한테 말 좀 해주고. 우리도 잘하니까, 어제처럼 욕하지 말라고.”
전날 지지부진했던 경기를 욕했던 팬들의 말이 가슴에 남았구만.
타점을 올린 욘더 알론소는 마치 잘 봤냐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원정팬들을 보기도 했고.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수비도 잘하면 한번 말은 해볼게..”
“이야~ 이거 완전 도둑놈이네.”
“그래, 타자가 점수 내는 건 당연하지. 투수가 실점 막는 것도 당연하고. 그치?”
애새끼들도 아니고, 칭찬 좀 안 해줬다고 금방 삐지는 것 좀 봐.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관중석을 훑으니,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관중들이 보내는 눈빛이.
내가 입을 제대로 털긴 털었나봐. 분위기 살벌하네.
“애너하임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오기도 하는구나.”
“한편으론 대단한 일이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Suck 네가 해낸 거야.”
야수들 역시 혀를 내두르거나, 대단하다는 듯이 엄지를 추켰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홈팬에게 어필하듯 은근히 나한테서 멀어지기도 했고.
그런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장은 마치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사납고 따가웠다.
비록 직접적인 야유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전날과 달리 대단히 적대적인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내려 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노려봤다.
경기 전에 했던 인터뷰가 관중들 사이에서도 금방 퍼져나간 거겠지.
기자들의 반응을 보아, 바로 기사를 올렸을 테니까.
어제는 원정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잔잔했었는데, 오늘은 정 반대구만. 내가 큰일을 하기는 했어.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트라웃을 건드렸으니까.’
에인절스라는 팀의 상징이자, 부족한 다른 타자들의 몫을 꽉꽉 채워주는 히어로.
지금 당장 은퇴하더라도 수십 년은 회자될 기록을 올린 역대급 타자에게 이제 갓 데뷔한 애송이가 먼저 도발을 했으니, 에인절스 팬들로선 고까울 수밖에.
불편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가 에인절 스타디움에 흘렀지만···
“You-Suck! You-Suck!”
“크핳하핳, 애너하임 새끼들, Suck한테 바짝 쫄아서 눈만 껌뻑이는 것 좀 봐!”
“개막전 보니까 트라웃인지 뭔지 X나게 못하더만? 오늘도 우리 Suck한테 Suck당할 거니까, Suck it 할 준비나 해라!”
언제 어디서나 용자는 있는 법. 저 양반들은 눈치라는 걸 거세한 건가.
내 ‘악성’ 개인 팬들은 페이스페인팅한 얼굴을 뽐내며, 절대적인 소수인 주제에 아주 열심히도 홈팬들을 놀렸다.
그에 몇몇 홈팬들은 울컥한 건지 노려보는 시선을 내가 아니라, 그쪽으로 바꾸기도 했고.
나도 나지만, 저분들도 참 대단하네. 오클랜드 사람이라서 그런가, 웬만한 위협에는 눈도 깜짝 안 하는군.
‘든든하긴 하네. 원정 경기에서 저런 팬들이 딱 버티고 있으니까.’
자신들을 보며 피식 웃으니, 딱 알아챈 건지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고, 마찬가지로 내가 비웃는다고 판단한 듯, 분위기도 더 험악해졌다.
어우, 뭘 하지를 못하겠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구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얌전히 마운드에 올랐다.
“간만에 파트너네요.”
“그러게, 넌 조시가 더 편했지?”
“솔직히 말하면, 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솔직해서 좋네.”
오늘 파트너는 스티븐 보그트다. 지난 두 경기에서 조시 페글리랑 호흡을 맞췄는데, 그걸 꼬집는 말에 정직하게 답변하니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조크지 조크.
조시 페글리가 말을 잘 듣는 편이라서 좋기는 한데, 사실 이젠 스티븐 보그트도 마찬가지라서, 공만 잘 받아준다면야 누구든 상관없지.
또한···
‘오늘은 포수 역할도 있으니까. 노련할수록 더 좋고.’
“그런데··· 정말 통할까? 너도 알겠지만, 저 자식 눈치도 장난이 아닌데.”
“뭐, 밑져야 본전이죠.”
“흐음··· 일단은 오케이. 그럼 다른 타자들은 그냥 평소처럼?”
“네, 타격감을 봐야겠지만, 보아하니 찍어 눌러도 되겠어요. 아, 시몬스는 조금 주의해야겠네.”
간략하게 의견을 주고받은 뒤 스티븐 보그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홈 플레이트로 향했고, 뒤이어 모든 준비를 마치자, 타자가 올라왔다.
‘유넬 에스코바.’
개막전에서 쉽게 처리했던 타자다. 홈이고, 내가 입을 털어서 그런지, 루키라고 무시하는 기색없이, 승부욕이 제법 강력한데. 그리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다.
애초에 파워툴 자체가 그리 강력한 타자가 아니라서, 구위로 찍어 누를 수 있고, 성적만 봐도 컨택이 좋은 타자도 아니거든.
‘어쩔 수 없지. 82년생이면, (기록상) 80년생인 푸홀스랑 비슷한 연배인데, 에이징 커브가 쎄게 올 나이니까.’
이전 경기까지 포함해서 출루율이 3할조차 안 되는 타자인데, 그런 타자가 1번타자, 리드오프라는 것 자체가 에인절스 타선의 심각함을 이야기해줬다.
나이 때문인지 배트 스피드도 그리 빠르지 않고, 파워는 애초부터 약했던 타자.
“플레이볼!”
어떤 의미에선 피칭을 시작하기에 딱 좋긴 하다.
“스트라이크!”
처음부터 손맛을 볼 수 있으니까.
몸쪽으로 묵직하게 포심을 찌르자 타자는 가만히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슬라이더.
딱 걸치는 공에 타자는 이번에도 얌전하게 참았다. 그렇게 투 스트라이크.
스윙을 낼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최대한 투구수를 뽑아내려는 건가?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지.
‘요즘 사무국에서 경기 시간을 줄이려고 한다던데, 나도 한 명의 메이저리그 선수로서 야구의 흥행을 위해 열심히 도와야지.’
난 그쪽을 상대로 그리 긴 시간을 끌고 싶지 않거든.
불펜에서부터 씹어서 그런지 한껏 끈적끈적해진 껌의 촉감을 느끼며 3구를 던졌다.
다시 몸쪽 패스트볼.
초구로 스트라이크가 잡혔던 코스와 유사하기에 타자로선 참을 수 없겠지.
커트라도 하려는 듯, 타자는 황급히 짧게 스윙했지만, 곧 둔탁한 타격음이 흘렀다.
투심이었거든.
‘일단 아웃 하나.’
살짝 스친 배트에 공은 힘없이 유격수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워낙 쉬운 타구였기에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은 불안한 모습 없이 가볍게 공을 낚아채, 1루로 휙 던졌고.
“아웃!”
타자는 최대한 열심히 달렸지만, 1루 베이스까지 넉넉한 거리를 남겨두며 아웃 당했다.
“어차피 아웃당할 거면서, 스윙을 왜 해? 닥치고 삼진이나 당할 것이지!”
“스윙이 그게 뭐야? 내가 해도 더 잘하겠네! 방망이질 좀 가르쳐줘?”
안 그래도 속이 쓰릴 텐데, 우리 팬들의 조롱까지 듬뿍 이어지니,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데, 하나라도 맞으면 다 업보로 돌아오겠네. 조심해야겠어.’
긴장을 바짝 조이며 뒤이어 올라온 타자와 눈을 맞췄다.
콜 칼훈. 같은 테이블 세터라서 그런가, 유넬 에스코바와 성적은 또이또이하다. 이쪽이 살짝 더 높은 정도?
파워는 유넬 에스코바보다는 훨씬 좋지만, 그리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다.
‘최근 성적이 비슷해도 이쪽이 조금 더 위험하긴 하지.’
유넬 에스코바야 나이가 있으니까, 갑자기 확 좋아진다거나, 반등하는 게 힘들지만. 콜 칼훈은 조금 다르지.
서른, 아니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29세라서, 아직 꺾일 나이는 아니니까.
타격감만 좋다면야 갑자기 폼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기에, 앞선 타석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승부에 임했다.
“볼!”
먼저 바깥쪽 포심.
배트가 움찔거렸지만, 스윙이 나오지는 않았다. 고른 건가?
“파울!”
확인을 위해 낮게 던진 포심에 타자는 곧바로 받아쳤다.
85마일. 느린 구속이니 맞추는 거야 쉽지만, 컨택도 제법 좋았다. 아슬아슬하게 라인을 넘긴 했으나, 잘하면 페어가 됐을 테니까.
‘컨택은 좋지만, 파워는 오히려 개막전 때보다 더 떨어졌네.’
괜찮은 코스로 공을 보낼 만큼, 컨택은 폼이 올라온 것 같지만, 배트가 가볍다.
마지막 순간 공에 충분한 임팩트를 주지 못한 것 같은데, 이걸로 대충 감은 잡혔다.
‘저번 경기보다 더 쉽겠네.’
컨택이 올라오긴 했지만, 부족한 힘을 대신해서 정타를 만들 정도로 기술적인 건 아니다.
컨택이 아니라 파워가 올라왔다면 뽀록샷의 위험이라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
‘바로바로 갑시다.’
슬쩍 사인을 보내니, 스티븐 보그트도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서로 역할이 바뀐 것 같지만, 뭐든 간에 결과가 좋으면 상관없지.
“스트라이크!”
“아웃!”
4구, 역시나 밀린 배트에 빗맞은 타구가 1루 라인 너머로 높이 떴고, 1루수 욘더 알론소가 파울플라이를 잡아냈다.
‘최소한 앞에 주자는 안 쌓이겠네. 이쪽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1회 말 투아웃.
나란히 아웃당한 테이블 세터를 뒤로한 채, 그토록 기다렸던 타자가 타석으로 올라왔다.
####
“어때?”
“힘이 좋아. 컨트롤도 딱딱 맞고. 그냥··· 개막전이랑 비슷해.”
터덜터덜 벤치로 걸어가던 콜 칼훈의 힘없는 말에 트라웃은 입맛을 다셨다.
데뷔하는 루키에게 처참하게 난도질 당한 개막전은 과거를 연연하지 않는 그에게도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특히 그날 저 투수가 보여줬던 피칭은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한데, 그때와 비슷하다면 쉽지는 않으리라.
“마이크! 하나 날려!”
“저 건방진 새끼한테 MVP가 누군지 제대로 보여줘!”
타석으로 향하니, 응원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아니, 응원보다는 분노에 가깝겠지.
관중들의 목소리는 트라웃 자신이 아니라, 저 투수에게 향했으니까.
그래, 트라웃 자신도 알고 있는 만큼, 경기 전의 인터뷰가 팬들에게도 금방 퍼진 거겠지.
그들은 트라웃이 손쉽게 애송이를 때려눕히길 바라겠지만, 그는 상대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유넬과 콜에겐 패스트볼을 위주로 던졌어. 유넬에겐 투심을 던진 것 같고.’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앞선 타석들에서 투수는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선택지는 많다.’
느리지만 강력한 무브먼트를 가진 포심과 땅볼을 잘 만드는 투심, 그리고 휴스턴을 상대로 등장했던 커터까지.
패스트볼만 세 가지에 체인지업도 마찬가지로 셋이나 된다. 슬라이더도 잘 던지고.
선택지가 많아도 심하게 많은 투수다. 웬만한 선발투수들은 보통 포피치 정도에, 쓰리피치도 적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남들보다 약 두 배가량 더 구종이 많은 셈이다.
쓸데없이 구종만 많은 게 아니라, 그것들 모두 다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기에, 더욱더 위험한 거고.
숨을 고르고 타격자세를 취한 그는 투수를 봤다. 오늘은 어떻게 던져올까? 뭘 노리고 있을까?
“스트라이크!”
날아온 초구.
그는 곧바로 크게 휘둘렀다.
허나 뚝 떨어지는 공. 그래 낙차가 심한 서클 체인지업이다. 지난 경기에선 이거에 당했었지.
그때와 비슷한 풍경이 연출됐다. 그는 이번에도 헛스윙을 했으니까.
다만 그땐 상대의 노림수에 놀아난 거라면, 지금은 그의 실책이었다.
‘예상했던 건가?’
초구를 참는 성향이 짙은 자신이고, 개막전에서 Go 역시도 그것을 이용했었기에 이번에는 한번 휘둘러 본 건데. 딱 알아채는군.
첫 번째 수싸움에선 깔끔하게 패배했지만, 어차피 길고 길 승부의 전초전에 불과하기에 그도 투수도 겨우 스트라이크 하나에 연연하지 않았다.
“볼!”
“스트라이크!”
“볼!”
“파울!”
투수는 쉬지 않고 던졌고, 그 역시 공을 놓치지 않았다.
급격하게 꺾이는 서클 체인지업을 간신히 커트한 트라웃은 투수를 봤고, 곧 머리가 복잡해졌다.
‘뭘 노리는 거지?’
포커페이스를 유지중인 투수.
그렇기에 더욱더 의심스럽다.
투수치고는 꽤나 감정표현이 솔직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로 아니까.
지난번, 개막전에서도 삼진을 올릴 때마다 기쁨을 여실하게 표출했었고.
물론 승부 중에는 다른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그 감정절제가 다소 과했기에, 마치 저 가면의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한 듯 말없이 투수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는 포수도 마음에 걸렸고.
‘뭐지? 뭘 노리는 거지?’
복잡한 머릿속, 빠르게 기억과 모든 정보를 되짚으며 고민했을 때, 투수는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와인드업마저 생략하고서 공을 던졌다.
“씁-”
평소보다도 더욱더 절제된 투구동작. 그것을 눈에 담으며 트라웃은 재빨리 스윙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전력으로 던진 하이 패스트볼을 한 박자 느린 스윙으로 따라가는 건 제아무리 트라웃이라도 버거웠고.
그나마 마지막 순간 간신히 스윙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것 역시 너무 늦었다.
“아아아···”
기대와 달리,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트라웃에 안타까운 탄식이 그라운드에 흘렀지만, 잠깐 투수를 눈에 담은 그는 미련 없이 타석을 비웠다.
‘잘 알겠어. 뭘 노린 건지.’
삼진을 하나 내준 대신, 투수의 생각을 읽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교환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