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선수의 가치와 성적을 더욱더 완벽하게 만드는 건 홈구장이다.
콜리시엄도 상당한 투수 친화 구장이지만, 애너하임도 만만치는 않거든.
오클랜드 콜리시엄이 홈런을 심하게 억제하는 대신, 넓은 외야 때문에 3루타가 잘 나온다는 단점이라도 가졌다면.
에인절 스타디움은 홈런도 어느 정도 억제하는데, 어느 한 곳 모난 곳 없이 전체적으로 투수가 유리한 구장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그렇다고 쳐도 홈런은 애너하임 쪽이 더 잘 나오는 것 같긴 하네.’
전체적인 위험이 감소한 대신, 홈런의 위험은 더 올라갔다고 봐야하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투수 입장에선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원정지다.
“애너하임은 좀 어때? 나름 우리랑 라이벌로 알고 있는데, 좀 빡센가?”
“애너하임? 음··· 딱히 그런 느낌은 없어. 생각보다 잔잔하거든. 원정 경기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라이벌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 우리 쪽이 일방적으로 경쟁심을 가지는 거니까.”
직접 봐야겠지만, 일단은 대충 구장은 알겠고, 혹시 다른 주의할 점은 없는지, 주변에 묻자, 딱히 별거 없나 보네.
뭐 캘리포니아 남부와 북부의 지역감정이 어쩌구저쩌구, 라이벌이 어쩌구해서 사이가 나쁘다고 아는데, 심하지는 않은가 보구만.
“아, 근처에 디즈니랜드가 있어서, 저녁에는 폭죽도 터지니까, 그건 좀 위험할 수도?”
“디즈니랜드는 못 참지.”
“그치, 꿈의 나라인데.”
“원래 애너하임은 미키가 제일 위험한 동네지.”
오, 좀 치네.
시니컬에게 툭 내뱉는 크리스 데이비스의 말에 다른 선수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좋은 펀치라인이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스웩이 있었어, 나도 인정한다.
미키가 넓적한 귀가 달린 자본주의 쥐새끼도 있지만, 마이클(Michael)의 애칭도 마이크(Mike) 혹은 미키(Mickey)거든.
‘미키가 제일 위험한 동네라··· 틀린 말은 아니네.’
꽤나 중의적이면서도, 애너하임 원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치, 미키가 제일 위험한 동네지. 그 괴물 미키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는 내가 고민해야 하는 거고.
‘나도 나지만, 만만찮게 미친놈이네 진짜.’
어제 토론토 경기의 성적까지 기록된 따끈따끈한 자료를 슬쩍 훑어보니,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타율은 3할 중반에, 출루율은 4할, 장타율은 6할이다.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야.
에인절스에서 이런 성적 찍을 사람 한 명 밖에 더 있어?
트라웃은 이번 달 동안 OPS가 10할을 넘었다. 새삼 개막전의 내가 신기해지네. 이런 양반을 어떻게 잡았나 몰라.
‘그땐 확실한 노림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패가 이미 까발려졌다. 원래 묘수라는 건 의외성이 있어야 통하는 거지, 한번 까발려진 걸 다시 쓰면, 그건 묘수가 아니라, 그냥 허접하기 그지없는 잡수다.
다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질 때까지 푹 묵혀뒀다가, 아무도 모를 때 나 혼자서 쓱 꺼내들어야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같은 방법을 다시 쓸 수는 없고, 다른 걸 찾아봐야 하는데, 이게 참 까다롭단 말이야.
상대할 타자는 아홉 명인데, 너무 트라웃 한명에게만 과하게 집중하는 거 아니냐고? 맞아 트라웃만 집중하는 거. 근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기서 딱 트라웃 한 명만 빠지면 진짜 재밌게 야구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볼수록 참 아쉽거든.
웬 괴물 새끼 한 명만 사라지면, 내가 정말로 행복하게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직 시즌이 시작한지 한 달이 채 안 되긴 했지만, 에인절스 타선은 처참하다.
트라웃과 시몬스를 제외하면, 주전타자들 중에서 OPS가 7할이 넘는 놈이 없을 정도로.
그나마 안드렐톤 시몬스가 수비도 진국이면서 타격도 상당히 잘하고 있기는 한데, 나머지는 진짜···
‘졸스신도 대단하네.’
우리의 (구)천재타자께선 타율은 2할 3푼에 OPS는 6할 3푼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 중이시다. 홈런? 2개다. 한 개당 1,250만 달러지.
역시 믿을 건 푸홀스밖에 없어. 놀리냐고? 지극히 진심이다, 트라웃 다음에 푸홀스가 딱 있으니 얼마나 든든해? 물론 순전히 내 입장에서.
에인절스 팬들은 복장이 터지겠지.
‘나이 속였다는 말이 돌던데, 혹시 진짜 아니야? 좀 노안이긴 해보이던데.’
그게 아닌 이상, 아무리 에이징 커브가 심하게 와도 그렇지. 역대 10위 안에 들던 타자가 이렇게까지 처박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성기의 푸홀스는 정말 사람이 아니었는데, 확실한 건 지금도 사람 새끼는 아니네.
‘여기세 트라웃까지 딱 빠져주면 진짜 좋을 텐데.’
완벽할 수 있었던 타선을 트라웃이 망쳐버렸다. 다르게 말하면 트라웃까지 잘 잡는다면, 완벽해진다는 거지.
그 트라웃을 어떻게 잡을 거냐는 게 문제인 건데···
“괜히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시는 게 아니네요. 비행기 안에서도 자료를 보시다니, 굉장히 성실하십니다, Mr. Go.”
“제가 딱히 멀미 체질은 아니라서,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도 누구세요?
데이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슬쩍 처박았던 고개를 드니 중년까지는 아니고 그보다 조금은 어려 보이는 남자가 나를 내려보며 무언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지? 기자?
“아, 저는 애슬레틱스의 마케팅팀 소속 직원인 칼 제퍼슨이라고 합니다.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경기에 등판하시기 전에 간략한 인터뷰가 가능할까요?”
“인터뷰요?”
자신을 마케팅 팀 소속이라고 밝힌 남자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질문했고, 어느샌가 나타난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은 선발등판할 투수를 괴롭히는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그를 흘겨봤다.
그런 시선에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땀까지 뻘뻘 흘리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네. 물론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인터뷰라···’
클럽하우스에는 간략한 인터뷰룸이 있다. 간혹 경기 전에 간략한 기자회견 비슷한 게 열리고는 하지.
나도 인터뷰 요청이야 엄청나게 빗발쳤지만, 루키이기에 괜히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건지, 구단에서 적절히 커트해줬는데, 이번엔 아니구만.
‘인터뷰거리가 많긴 하지. 소니 그레이야 그렇다 쳐도, 이달의 투수나 이달의 신인도 걸려 있으니까.’
신인이 그 두 개를 다 거머쥐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거든. 역대 최초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아무튼 희귀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니 계속되는 요청에 아무래도 구단도 더 이상은 막지 못하는 것 같은데, 등판 전에 딱히 방해받고 싶지는 않아서, 거절하려다가,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인터뷰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네, 음 일단 이달의 투수 가능성과 신인 가능성. 그리고 4월동안 Mr. Go께서 보여주신 퍼포먼스가 주류이고, 그 외에는 이번 경기에 대한 포부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아,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은 모두 커트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전에 미리 전달해드릴 테니, Mr. Go가 원하시는 질문 다섯 가지를 뽑으시면 됩니다.”
“이번 경기에 대한 포부라···”
머리가 돌아갔다.
막힌 혈이 뚫린 것처럼 시원하게 쌩쌩 돌아가네. 이거 써먹을 수도 있겠어.
“좋습니다, 하죠, 인터뷰.”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에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스콧 에머슨은 더욱더 미간을 좁혔고.
내내 불안한 듯 쳐다보던 마케팅 팀 직원은 활짝 웃었지만, 내 입가에 걸린 음흉한 미소를 발견한 건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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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하임, 부자동네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야.
같은 캘리포니아인데, 오클랜드랑 공기부터가 다르네.
“나도 은퇴하면 여기서 살까? 분위기도 좋고, 치안도 좋지?”
“아마도. 오클랜드보단 훨씬 좋겠지. 나쁘진 않겠네.”
몇몇 나이 든 선수들은 머지않을 미래를 그리며,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애너하임은 플로리다와 함께, 나이 지긋한 부자들이 은퇴하고 노년을 보내는 도시라고도 하더라고.
솔직히 어디든지 간에 오클랜드보다야···
“어? 저거! 맞지?”
“와··· 대단한데?”
“따라온 거야 설마?”
“이야~ 우리도 이젠 원정팬이 다 있네. 그것도 아주 열성팬들로.”
마침 경기장에 도착하니, 저~기보이네. 이 조용한 도시와 정 반대되는 오클랜드를 잘 표현하는 양반들이.
“죄다 79번인데? 저거 Suck 등번호 맞지?”
“어, 마킹도 딱 돼 있네. Suck!이라고.”
“특이하다, 특이해. 다른 팬들은 Go인데, 당당하게 Suck인거 보면.”
“Suck 넌 진짜 좋겠다. 벌써부터 저런 팬들이 다 있고.”
“응, 좋아서 죽겠어, 그냥.”
저번 경기에서 봤던 양반들.
(전)오클랜드 레이더스 팬덤 출신 바바리안들이 경기장 곳곳에서 보였다. 원정을 온 거겠지.
레이더스 출신인 건 어떻게 아냐고? 여기서도 페이스페인팅을 했거든. 그래도 비행기 타고 오느라 해골은 안 챙겨왔네. 그나마 다행이야.
‘점점 나아지고 있네. 나쁘지 않아. 조금만 더 지나면 그럭저럭 평범하게 보이겠어.’
증상이 호전되고 있으니, 나쁜 소식은 아니다. 구단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어! 애슬레틱스다!”
“Suck? Suck은 어딨어!”
“오늘도 잘해라! 꼭 잘해!”
“저번 경기들처럼만 해! 이 부르주아 새끼들을 짓밟아버려!”
지난 매리너스 시리즈에서 3승1패로 위닝 시리즈를 기록해서 그런가, 외형은 좀 잔잔해졌지만, 흥분은 더 올라갔네.
두 눈을 부릅뜨고 사인을 요청하는지라, 평소에는 대충 어린애들 정도만 상대했던 선수들마저 식은땀 흘려가며 펜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냐고?
“어허! 쓰읍! 손 쓰지마. 투수는 손 쓰는 거 아니야.”
“어? 그래? 나는 사인 받으려고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들었어.”
“뭐, 그러면 손목 아플 수도 있으니까, 사인은 됐고, Suck- 아니, Go, 사진이나 한방 부탁해요.”
아주 극진하시네.
선수가 사인을 안 해주는 건 봤어도, 팬이 사인 거절하는 건 처음이구만.
마이너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일을 메이저에서, 그것도 원정 경기에서 다 겪어보네.
펜을 꺼내드니, 가볍게 제지한 그들은 한 장씩 사진을 찍고 나서야 만족한 듯 웃었고.
열심히 사인펜을 놀리던 선수들은 헛웃음을 흘리며 우리 쪽을 봤다.
“하하하! 토미 새끼, 이거 보면 부러워서 죽겠지?”
“그 새낀 진짜 팬도 아니야. 예전부터 에이스의 팬이었으면 뭐해? 그래봤자, Suck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없는데.”
“그럼그럼, 우리가 진짜지. 기간은 짧아도 이렇게 행동력이 넘치는데.”
듬직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그래도 괜히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래, 외형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 좋아해주는 팬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
“항상 응원하고 있으니까, 오늘도 멋지게 던져! 사람 좀 적다고 기죽지 말고! 우리가 이 동네 샌님들보다 백배는 더 세니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 내일 등판인데요.”
“어? 그래? 언제 그렇게 됐대?”
“1선발이라며? 그럼 시리즈에 맨 처음 등판하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는 첫 번째 경기에 등판하지 않았나? 나도 그래서 1선발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뭐야, 그럼 오늘 경기 티켓 괜히 샀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단 야구팬은 아닌 거 같다.
매 시리즈 첫 경기마다 등판하는 투수가 있다면, 보통 1선발이나 에이스가 아니라, 노예라고 부르지.
내 말에 인생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난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전 안 나오지만, 오늘도 우리가 이길 거니까, 재밌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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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우우!”
“Suck! 이 나쁜 자식아! 이러기 있냐! 왜 팬한테 구라를 쳐! X발 진작 나갈 것을 괜히 기대하면서 끝까지 봤잖아!”
“내가 이래서 야구 안 보는 거야! X나게 재미없네!”
“질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지던가! 3대1이 뭐야, 3대1이!”
“내가 이딴 거나 보려고 오클랜드에서 이 X같은 동네까지 내려온 줄 알아?”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기대감을 가지고 억지로 몸에 맞지도 않는 야구경기를 봤을 텐데, 3대1의 아슬아슬한 패배에 단단히 빡돌았네.
오죽하면 저 작은 무리 사람들이 내지른 야유가 경기장을 꽉꽉 채운 홈팬들의 승리의 환호성을 뚫고 쩌렁쩌렁 울렸다.
애너하임이 원래도 조용한 편이라고 하던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진짜 일당백이네, 일당백이야. 거짓말이 아니었어.
“Suck, 부탁인데 네 팬들 좀 가라고 해라. 욕이야 야구하다보면 늘 듣는 거지만, 그냥 좀···”
그런 관중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은 마커스 시미언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우리 팬인데, 차마 쪽팔린다는 말은 못 하겠지.
“내일 이기면 또 다를 거야. 그니까, 내일은 좀 잘해라. 실책하지 말고.”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에 내일 조지기라도 하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네.”
끔찍한 상상을 했다는 듯 마커스 시미언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몇몇은 새삼 신기한 듯 관중석을 바라봤다.
“필리스 자식들, 앞으로 무시하면 안 되겠어.”
“그러게, 걔들은 매 경기가 이런 풍경이라는 거 아니야?”
“인터리그 때 붙을때는, 오히려 상대팀 팬이라서 괜찮았는데, 우리 팬이 저러니, 타격이 더 크네.”
반성의 시간이구만.
메이저리그 최강의, 최악의 극성 팬덤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떠올리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필리스를 만나면 잘해줘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올해 인터리그 필리스랑 붙지 않나? 내셔널리그 동부지구랑 매치업이니까.”
“Shit! 필리건이랑 저 사람들이 맞붙는다고?”
예정된 미래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네. 하긴, 저런 열정(?)팬들과 만만찮은 필리건들이 만나면, 누가 됐든 진 팀 선수단은 아주 작살이 나겠네.
‘필리스도 필리스지만, 당장 내일이 문제지.’
화도 나고, 나에 대한 원망감도 느껴지는데, 내일 잘 못하면 나까지 한 소리 듣겠군.
‘입 좀 잘 털어야겠네. 효과가 직빵으로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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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원정팀 인터뷰룸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였지만, 충분히 만족한 모습인데, 당연하다.
꽤 자극적이었거든.
“···”
감독 신분으로 옆자리에 앉아,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된 밥 멜빈 감독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약간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차마 곧 등판할 투수에게 한 소리하지는 못하는 건지, 긴 한숨만 내뱉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Suck, 넌 진짜···”
“정상은 아니야.”
“아니지, 절대로 아니지.”
“아니, 홈에서는 마이크 근처도 안 가는 놈이 왜 원정에서-”
다시 라커룸으로 돌아가니까, 인터뷰가 전해진 건지, 동료 선수들도 말을 잇지 못하네.
그만큼 멋진 인터뷰였다는 거지~
사실 별다른 말은 안 했다.
이달의 투수와 신인상은 자신 있냐고 해서,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좋다고 답했고.
4월 간 보여준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노력한 게 실전에서도 잘 나와서 기쁘다고 했다.
얼마나 정석적이야?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기자들은 하품을 다 했다.
매 질문마다 정석대로, 너무 재미없이 대답했으니까.
아마 시범경기에서 7이닝 퍼펙트를 했을 때처럼, 뭔가 가슴에 확 와 닿거나, 아니면 임팩트가 강해서 이슈가 될만한 말을 원했던 거겠지.
‘음, 대충 기사 제목이 예상되네. 오만한 신인, 패기로운 신인, 자신감 만땅, 뭐 그런 종류겠지.’
그리고 4월의 마지막 등판인데, 자신 있냐고 묻길래, 있다고 대답했다. 개막전에서도 이겨봤던 팀이니까.
그러니, 예상처럼 트라웃 얘기가 나오길래 그것도 자연스럽게 대답했지.
-제 머릿속에는 트라웃을 잡을 방법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역시 개막전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신인의 패기! 자신감! 하나같이 미국인들이 환장하는 것들이지.
아니나 다를까, 저렇게 말하자마자 죄다 자지러지면서 황급히 수첩이나 휴대폰에 옮겨 적더라.
그걸 끝으로 인터뷰는 끝났고, 대충 경기까지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50분쯤 남았으니···
‘얼추 경기 시작할 때쯤 되면 에인절스 쪽에도 전해지겠네.’
알아, 조잡하기 그지없는 언론플레이인거. 포스트시즌도 아니고, 너무 가긴 했지.
내용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냥 무식하게 자신 있다고 한 거나 다름없고.
트라웃이야 이젠 경험도 많고, 영리한데다가 침착한 타자이니, 나 같은 애송이가 입 좀 털었다고 홀라당 넘어가진 않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약간 거슬리게 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원래 언론플레이는 듣는 이의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선동은 사람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야 한다.
고등학생 때 사회 선생님이 말해줬던 건데, 이거 하나는 아주 잘 배웠어,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거 보면, 수업시간에 잠만 늘어지게 자던 놈한테 잘 가르쳐주셨네.
그 배움을 이용하여, 오늘 나는 트라웃이라는 타자의 마음속에 의심을 심었다.
당연히 무시하겠지만,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할 거다. 왜? 이미 한 차례 나한테 당했었잖아. 아주 꼴사나운 헛스윙 삼진으로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명백한 팩트지.
구글에 Go You-Suck vs Mike Trout이라고 검색하면 지금도 제일 위에 그 장면이 나올 걸?
‘그러니까, 흔들리지는 않더라도, 아주 티끌 같은 의심이라도 생길 수밖에 없어. 그게 가장 중요한 거고.’
그 씨앗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키울지는 내 몫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심은 씨앗이 최대한 맛 좋은 과실로 자라나도록 내 스스로도 성실하게 준비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