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76화 (76/316)

76화

마운드를 내려오며 관중석을 곁눈질했는데, 적당히 기준선은 통과한 것 같다.

“그렇지 X발! 이래야 My Suck이지!”

“다음 이닝도, 그다음도, 그다음의 다음도 계속 지금처럼만 가자!”

“오늘도 두 자릿수 삼진 찍어야지! 앞으로 7개 남았다!”

“티켓 값에 50%는 이미 뽑았으니까, 앞으로는 편하게만 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쳐다보네.

정말이지 볼 때마다 살벌한 모습이기는 한데, 계속 보니까, 은근히 적응된다. 이제까지 야구장에서 보지 못한 모습이라서 그런가, 약간 색다르기도 하고.

‘페이스페인팅 정도는 제법 멋스럽긴 하네. 저 해골은 아무리 봐도 좀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저 괴상망측한 복장 덕도 조금 봤지. 1회 초, 상대 타자들이 타석으로 나오면서, 저건 뭔가 싶은 표정으로 흘끔흘끔 쳐다봤거든.

‘관중들 죄다 저러고 있으면, 원정팀 사기가 팍팍 떨어지기는 하겠네.’

물론 나 역시도 시야 가장자리에 보일 때마다 집중이 깨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일단 1회는 잘 막았지만, 오늘은 좀 타이트하게 가야겠지.’

덕분에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1회 초를 잘 막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타선에 위험한 타자들이 제법 있거든.

“다음 이닝은 조금 조심하자. 이번에는 공이 좀 몰리더라.”

“조심해야죠, 타자가 타자인데.”

오늘도 호흡을 맞추게 된 조시 페글리도 같은 생각인지, 덕아웃으로 들어가며, 나에게 살짝 주의를 줬다.

관중들이 부담감을 팍팍 주는 통에 삼진 잡느라고 전력투구하면서 제구가 조금 쏠렸는데, 다음 이닝에는 그러면 안 되거든. 특히 첫 타자에게는.

‘다행히 로빈슨 카노는 쉽게 잡았지만···’

시애틀 매리너스는 약간은 애매한 팀이다. 작년,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은 아쉽게 실패했지만, 지구 2위를 기록했으니, 약팀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또 확실하게 강팀으로 분류하기에도 조금 부족하거든.

타선만 놓고 따진다면,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는 저번 경기 상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조금 더 짜임새가 좋고.

‘클린업 트리오가 좀 빡세긴 하네.’

다만 휴스턴과 비교하면 지뢰가 될 만한 타자는 있다.

1회 초에 잡았던 3번타자 로빈슨 카노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4번과 5번타자 넬슨 크루즈와 카일 시거까지.

넬슨 크루즈는 43홈런을 쳤고, 로빈슨 카노는 39홈런, 카일 시거는 30홈런을 기록하며.

오늘 클린업 트리오로 나온 세 명 모두 작년 30홈런 이상을 찍었으니까.

‘셋 다 파워툴이 막강하니, 컨택만 잘 되면, 콜리시엄에서도 내 공을 담장 너머로 보낼 수 있는 타자들이야.’

또한 오늘은 저번 휴스턴 경기처럼 컨디션이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니라서, 찍어 누르기는 힘들다.

‘그래도 그 셋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나마 좀 쉬워서 다행이네.’

넷을 제외하면 다른 타자들은 상대적으로 파워가 떨어지니 그나마 괜찮겠지만, 클린업의 파괴력이 워낙 강력한지라, 방심할 수는 없다.

혹시라도 클린업 트리오 앞에서 주자가 쌓였다간, 간 떨리는 승부를 해야 할 거고.

‘아차 하면 무실점 깨지겠어.’

1회 초를 잘 마쳤으니, 오늘까지 포함하여, 연속 무실점 이닝은 22이닝까지 늘었다.

사실 30이닝 이하로는 무실점 기록 축에도 못 끼지만, 언론에선 엄청나게 띄워줬지. 데뷔 직후로만 따지면 역대 3위라면서 말이야.

오클랜드 지역 언론에서는 한술 더 떠서, 시범경기까지 포함하여, 40이닝 넘게 무실점 중이라며 호들갑 떨고 있고.

사실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팬들도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는데,

‘까딱하면 오늘로 끝나겠어.’

타자들이 열심히 고군분투 중인 그라운드를 지켜보며, 기괴한 관중들로 인해 조금 풀어졌던 정신을 다시 바짝 조였다.

‘특히 넬슨 크루즈는 어설프게 몰리면 큰일나겠지. 파워도 파워지만, 타격 기술도 좋으니까. 제구로 승부를 봐야겠어.’

####

└화장실 가느라 1회 초 못봤는데 어케됨?

└갓유석 KKK했음

└ㄷㄷㄷㄷ 갓유석 오늘도 삼진쇼 시작됐네

└삼진 벌써 37개네 페이스 미쳤다

└이제 37삼진이니까, 이번 시즌 풀타임 출장한다 치면, 한 370개쯤 찍겠네.

└기적의 수학자 등판ㅋㅋ

└진지하게 370삼진하면 사이 영이랑 MVP, 신인왕 3관왕 가능?

└만장일치도 쌉가능ㅋㅋ

현지팬들의 열광도 대단하지만, 당연하게도 한국의 야구팬들 역시 고유석에게 주목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팀 자체가 머니볼이라는 영화로 인해 알려진 걸 제외하면.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기도 없고, 인지도 자체가 부족한 팀인데도 모든 경기가 생중계가 될 정도로.

류영진과 더불어, 단 두 명밖에 없는 한국인 선발투수인데다가, 관심을 받았던 개막전 이후로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2회 초, 고유석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앞서 1회 초 투구수 13개로 탈삼진 3개를 올렸습니다.

-올해 처음 데뷔한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정말 대단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이닝도 삼진 가자잇!

└오늘 40삼진은 무난하게 찍을 듯?

└이미 세 개나 잡았으니까, 무조건 가능함

└남은 이닝동안 13개 더 잡아서 16삼진 찍고 시즌 50삼진도 찍었으면 좋겠다.

└그건 불가능임

그렇기에, 미국 서부기준 오후 7시에 경기가 시작한 만큼, 한국과의 시차를 따지면 한창 등교하거나, 출근했을 시간대인데도 제법 시청자가 몰렸고, 남몰래 중계를 시청하며, 사람들은 호성적을 기대했다.

└약물추진 미사일 입장!

└크루즈 약빨 좀 빠짐?

└지난 경기까지 해서 이번 시즌 14안타 2홈런 타율 .237에 장타율 .390임 슬슬 약기운 빠진 듯?

└이번 달은 안 드셨네ㅋㅋ

└갓유석 약쟁이 참교육 가자!

2회 초 첫 타자로 올라온 넬슨 크루즈를 보며 사람들은 그의 도핑 경력을 꼬집었지만, 그러면서도 긴장을 늦추진 않았다.

당장은 조금 저조한 것 같아도, 바로 작년에 43홈런이나 기록한 거포였으니까.

이름에 빗대어 홈런을 크루즈 미사일이라고 부를 만큼 강력한 타구를 날리는 타자이기도 하고.

-자, 초구 던집니다. 볼, 살짝 빠졌죠?

-음, 저번 이닝에선 주심이 저 코스를 잡아줬었는데··· 네, 살짝 아쉽네요.

초구는 아쉽게 볼.

바깥쪽으로 살짝 나가버린 공에 해설자는 괜히 스트라이크존이 이상하다며 주심을 원망했지만.

곧이어 나타난 사각형의 스트라이크존과 라인 너머에 찍힌 초구에 머쓱한 듯 말을 삼갔다.

-지난 이닝에서 굉장히 공격적으로 존 안쪽으로 던진 고유석 선수인데, 이번 이닝은 보더라인을 체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야구 게임에 나오는 투수처럼 핀포인트 제구를 갖춘 선수라서 가능한 피칭이죠.

└혐유석한테 핀포인트 이지랄ㅋㅋ 무식하게 던지는 새낀데ㅋㅋ 운빨 똥볼새끼 참교육 가자!

└*먹이주지 마시오.

└근데 진짜 고유석 제구 지리긴 한다, 아직 볼넷 하나밖에 없지 않음?

└ㅇㅇ 볼삼비 쳐돌았음 오늘 삼진 세 개 더 잡아서 이제 37이네

└사람새끼 맞냐? 눈에 스트라이크존 판별기 달린 거 아님?

└사람이라니, 신이시다.

바깥쪽으로 던진 초구가 아쉽게 볼이 되긴 했지만, 지난 이닝 미처 하지 못했던 스트라이크존 테스트 정도로 생각했기에, 대부분 개의치 않았다.

-2구, 이번에도 바깥쪽 스트라이크입니다! 크게 휘둘렀는데, 떨어졌죠?

-네, 서클이네요. 고유석 선수의 주력구인데, 미국 현지에서도 수준급의 구종으로 평가합니다.

└네, 지금 선보인 떨어지는 종류의 서클 체인지업과 역회전성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을 구분해서 던지는데, 그에 대한 칭찬이 많습니다.

두 번째는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바깥쪽이지만, 기대했던 대로 타자의 배트를 시원하게 끌어내는 모습에 중계진은 물론 시청자들 역시 만족했고, 몇몇은 다음 구종을 예상하기도 했다.

└레퍼토리 떴다, 이제 몸쪽임.

└혐유석 볼배합 ㅈㄴ뻔함 바깥쪽 좀 던지다가 몸쪽으로 윽박지르기. 그거 원툴임

└그게 쩌는 거 아니냐? 로케이션이 한쪽에 몰리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제구한다는 건데.

└먹이주지 말라니까.

몸쪽 공. 특히 패스트볼.

좌우를 자유자재로 공략하며, 타자를 뒤흔드는 피칭을 자주 보여주는 고유석이고.

또한 서클로 헛스윙을 끌어내어, 타이밍을 흔들었을 때는 주로 패스트볼을 자주 던지기에 대부분 그것을 예측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음··· 볼이네요. 조금 멀었습니다.

└패스트볼이었는데, 타자가 살짝 움찔거리기만 하네요.

└카운트는 이제 원 스트라이크 투 볼입니다.

바깥쪽 패스트볼.

초구와 달리 이번에는 명백히 제법 멀었기에 해설자 역시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판정을 인정했다.

-다시 4구, 이번에는- 음··· 이걸 안 잡아주나요? 들어온 것 같은데요?

└아, 이건 많이 아쉽네요. 슬라이더로 찔렀는데, 이건 명백히 오심입니다.

그리도 다시 4구까지 바깥쪽으로 날아가며 볼로 기록되자, 흥겨웠던 분위기는 조금 이상해졌다.

분명 존에 걸쳤기에 주심의 재량하에 스트라이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볼 판정이 나왔으니까.

└아 심판 새끼 쳐돌았나 저게 왜 볼이야?

└닌텐도한테 잽머니 좀 짭짤하게 받은듯

└닌텐도 이제 시애틀 구단주 아니다, 뭐 좀 알고 말해라

└저것도 안 잡아주면 뭘 던지란 거임? 눈깔 ㅂㅅ같네

└애매하긴 해도 잡아줄만 했는데 좀 아쉽다

당연히 시청자들 역시 불만을 토로하며 저마다 자신이 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불만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고, 몇몇은 주심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과격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야 이 x새끼야! 그게 어떻게 볼이야!”

“X발 내가 야구 본지 한 달 좀 안 되긴 했지만, 나도 안다, 나도 알아!”

“우우우우, 꺼져라!”

곧바로 시각화된 스트라이크존을 볼 수 있는 중계방송 시청자들마저 불만을 토로할 정도면, 현장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특히 전직 레이더스 출신 애슬레틱스, 아니 고유석의 팬들의 격렬한 항의는 중계 카메라에 잡혀 소소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하하, 현지의 관중들도 이번 판정이 못 마땅한 것 같네요.

-고유석 선수가 오클랜드 현지팬들에게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네요.

잠시 격앙된 분위기가 진정되자, 다시금 고유석은 투구동작을 취했다.

-파울! 어우, 제대로 때렸는데, 라인을 넘었습니다. 투심인가요?

-음··· 네, 투심입니다. 살짝 떨어지는 무브먼트가 있었네요.

-이제 투 쓰리. 풀카운트입니다.

다시금 바깥쪽으로 던진 공.

투심 패스트볼을 맞춘 스윙에 강력한 타구가 나왔지만, 다행히 파울라인을 넘었고, 담장도 넘어갔다.

-ㄷㄷㄷㄷ 약빨 빠진 거 맞음? 타구속도가 미쳤는데?

-오늘 드신 날 같은데?

-잘못하면 홈런 나올듯

-와, 고유석 구위도 어디서 안 꿇리는데, 그냥 직선으로 쭉 날아가네

비록 강력한 타구이기는 하나, 어쨌든 파울이기에 풀카운트가 완성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위닝샷을 추측했지만, 몇몇은 고유석의 피칭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번 타석은 코스가 죄다 바깥쪽이네.

-고유석 원래 이렇게 바깥쪽만 던지는 스타일 아니지 않음?

└이번 타석에 던진 코스 보면 존에 들어온 게 없음. 제구 문제 있는 건가?

초구부터 파울을 뽑아낸 5구까지, 모두 다 바깥쪽, 그것도 죄다 보더라인에 걸치거나, 나간 코스였기에, 제구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들었으니까.

1회 초 호쾌하게 연속 삼진을 끌어냈을 때는 반대로 존에 몰리는 느낌이 들었기에, 더욱더 불안했고 말이다.

물론 제구로 유명한 고유석이기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건 무슨 개소리냐는 반응이었지만, 곧 그들도 깨달았다.

-자 6구, 고유석이 던졌습니다! 스트라이크! 풀카운트에서 루킹삼진을 끌어내는 고유석!

-역시 서클이네요, 위닝샷은 항상 서클입니다.

-이번에도 낙차가 있는 걸 선택했는데, 바깥쪽 코너에 딱 걸렸습니다.

바깥쪽 낮은 코너에 정확하게 찍힌 공. 이번에도 애매한 코스였지만, 더는 그것을 제구이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고바깥이다, 고바깥.

└와, 계속 간보더니, 저걸 딱 집어넣네

└제구 미치긴 미쳤다, 진짜 눈에 스트라이크존이 보이나?

6개 모두 노린 게 확실한 코스였고, 뒤이어 올라온 타자, 카일 시거에게도 똑같은 식으로 공을 던지며, 내야땅볼을 끌어냈으니까.

####

“스트라이크!”

“아,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네.”

6회 초, 선두타자로 타석에 올라온 로빈슨 카노는 주심의 판정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번엔 잘 봤네!”

“내가 두 눈 딱 뜨고 감시하고 있으니까, 판정 잘해라!”

“계속 그렇게만 잡아! 혹시라도 볼이라고 말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반대로 우리 팬들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그를 한껏 위협했고, 양쪽에서 치인 주심은 억울한 듯 입을 삐죽였다.

이해는 한다.

2회 초 이후로 지금까지, 내내 저런 협박을 들어왔으니, 멘탈이 털리기도 하겠지.

거 살살들 좀 하쇼. 그러다 괜히 밉보여서 판정 이상하게 하면 어쩌려고.

‘머리는 좀 아프지만, 그래도 잘 박히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네.

6회 초까지, 안타 세 개만 내주며, 볼넷 없이 잘 막고 있었으니까. 삼진도 일곱 개나 잡았고.

‘역시 이게 답이구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저 무지막지한 놈들을 어떻게 조져야 할까? 컨택도 좋고, 파워도 강한 놈들을 말이다.

가만히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답은 쉽게 나오더라고.

넬슨 크루즈, 그리고 카일 시거, 그리고 로빈슨 카노까지. 셋 다, 거포치고 타율이 제법 좋은 만큼, 컨택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구안마저 수준급인 건 아니다. 약간은 손색이 있지.

‘그러니 아슬아슬하게 왔다갔다하는 공까지 정확하게 고를 정도는 아니야.’

거기다 로빈슨 카노를 제외하면 컨택도 제법 준수한 거지,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니, 바깥쪽으로 정확하게 제구된 공을 손쉽게 때려낼 정도도 아니다.

‘거기다가 난 지금 홈 경기에 등판한 1선발에, 저~기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팬들도 볼 판정 하나하나마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지.’

즉 약간의 어드밴티지가 있다는 거지. 실제로 방금 공도 솔직히 주심의 재량권이었는데, 냉큼 스트라이크를 잡아줬잖아.

‘또 아직 루키 찌그레기이긴 하지만, 내 제구력이 제법 좋다는 게 제법 알려졌지. 지금까지 볼넷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 칼같이 판정해야 하는 게 심판이지만, 그게 또 막상 쉬운 게 아니야.

제구력이 좋은 투수나, 선구안이 좋은 타자가 있으면, 약간은 애매해지거든.

특히 관중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됐으니, 톰 글래빈 놀이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고, 나는 충실히 이행했다.

‘내가 그런 수준의 제구력은 없지만, 그래도 똥배짱은 제법 있거든.’

자칫 볼넷을 내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컨트롤 가능하고.

또 지난 경기들에서 볼넷 많이 아꼈으니 오늘 몇 개쯤 내줘도 상관없기에 클린업트리오 세 명에게만 열심히 바깥쪽으로 던졌는데, 다행히 볼넷 없이 잘 잡았다.

로빈슨 카노에겐 지난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내주긴 했지만, 이만하면 남는 장사지.

‘그리고 슬슬 약빨도 돌고 있고.’

도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심에게 친 약을 말하는 거다.

이게 또 사람 마음과 관련된 건데, 애매한 코스가 한번 스트라이크로 잡히면, 존은 거기까지로 늘어난다.

이미 한 차례 잡아준 코스이니, 다시 볼을 판정하는 것도 뭐하거든. 앞서 말했듯 홈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아슬아슬한 곳에 넣고, 다시 스트라이크가 잡히고, 다시 넣고, 이짓거리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스트라이크!”

‘존이 늘어나지.’

6회 초, 지금의 스트라이크존을 경기 초반과 비교하면 바깥쪽으로 약 볼 반 개 정도가 늘어났다.

야금야금 넓혀지다 보니, 어느덧 말도 안 되는 코스까지 스트라이크가 되는 거지.

바깥쪽에 걸친, 아니 사실 약간은 빠진 코스의 슬라이더에 로빈슨 카노는 이젠 별다른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을 뿐. 그러게 꼬우면 쳤어야- 아, 이 양반은 안타 하나 쳤었지, 참.

‘이걸로 투 스트라이크 잡았고, 마지막은···’

그렇게 존이 늘어나면 판정도 판정이지만, 타자의 멘탈도 망가져서, 수싸움이 유리해진다, 예를 들어···

“스트라이크 아웃!”

지금처럼 명백히 빠진 공조차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배트를 휘두르거든.

시원스런 헛스윙 삼구삼진,

마치 울분을 토하듯 냅다 휘두른 로빈슨 카노는 주심을 한 차례 노려본 뒤, 거친 발걸음으로 덕아웃에 돌아갔다.

화가 아주 많이 나셨네.

‘이 양반도 마찬가지고.’

4번타자 넬슨 크루즈.

우리 약쟁이께서도 표정이 꺼릭칙하시다. 사실 바깥쪽 승부가 가장 효과를 발휘한 게 이 양반이거든.

첫 타석의 루킹삼진에, 두 번째 타석에선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파워는 최강이지만, 은근히 배트를 막 휘두르는 타입이지.’

그래도 배트 스피드가 빨라,서, 웬만한 공은 죄다 공략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조금 맥없는 모습을 보였다.

‘WBC 후유증이겠지.’

사실 오늘만 그런 건 아니고, 내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올해 초, 시범경기 중에 열렸던 WBC에 도미니카 소속으로 출전했었는데, 아마도 그로 인해 소모된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거겠지.

어쩌면 길~게 유지됐던 약효가 드디어 떨어진 걸지도 모르고.

‘그래도 1회에 나온 파울홈런을 보면 파워는 좋아 보이니까,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잡자.’

오늘은 이닝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바깥쪽으로만 던지다 보니까, 투구수가 평소보다 많거든.

투수코치 눈치를 봐서는 이번 이닝이 마지막인 것 같으니, 남은 체력 다 털어 넣어야지.

“스트라이크!”

초구가 박히자, 넬슨 크루즈는 내 눈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처럼. 뭐긴 뭐야, 당신 조지는 거지.

‘바깥쪽에 익숙해졌으니···’

이젠 몸쪽이지.

초구 몸쪽 패스트볼.

그리고 쉬지 않고 2구를 던졌고, 빠른 타이밍에 날아온 공에 넬슨 크루즈는 크게 헛돌았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파울!”

낮게 깔은 투심을 간신히 커트했지만, 1회처럼 큼직한 장타가 되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억지로 쳐낸 것에 불과하니까.

‘마지막으로···’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체인지업.’

다시 몸쪽으로 유유히 날아드는 공.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넬슨 크루즈는 멍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타이밍도 딱 좋네.’

제구에 집중해서 던지느라, 오늘은 인터벌을 빠르게 좁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몰리면 어떡하려고?

내내 적당~한 속도로 던지다가 막판에 속도를 높이니, 역시나 잘 통하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카일 시거는 그나마 큼직한 타구를 외야로 날려 보내며 반항했지만, 중견수 라제이 데이비스에게 넉넉하게 잡혔다.

‘세 경기 연속 10탈삼진은 못했네.’

경기 초반부터 삼진만 세 개를 올린 것 치고는 쪼끔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진 않지.

“You-Suck! You-Suck!”

“앞으로 12이닝, 아니 13이닝만 더 가자!”

“삼진이 없어서 아쉽기는 한데, 오늘도 죽여줬다! 앞으로 계속 보러올게!”

관중들도 다시금 무실점을 기록하는 경기에 만족한 것 같고.

특히나 살벌한 외형으로 열심히 응원하던 이들은 술을 마신 건지, 아니면 흥분을 한 건지는 몰라도 목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얼굴은 마스크를 쓰거나, 페이스페인팅을 한 것 때문에 잘 안 보여서 모르겠고.

“이예에에에에에!”

“저거 우리한테 한 거 맞지?”

“캬! Suck이 역시 뭘 좀 아네! 누가 제일 열심히 응원했는지 딱 아는 거야!”

“우리도 사랑한다!”

“소니인지 뭔지가 돌아오든 말든 간에 네가 무조건 에이스야! 1선발이라고!”

그런 꼴로 열심히 악다구니를 질러대며 응원하던 게 마음에 들어 마운드를 내려가며 살짝 따봉을 날려줬다.

경기 내내 열심히 고함을 내지르며 주심을 압박해준 덕분에 판정에서 이득을 봤으니, 어찌 보면 오늘 일등공신이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떨떠름하게 보더니, 좀 마음에 든 것 같다?”

“계속 보니까 적응이 돼서요. 그리고 열심히 응원하던데 이 정도는 해줘야죠.”

삼진을 잡을 때보다도 더욱더 크게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네.

괜히 1선발을 거론하며 주변의 다른 관중들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뭐, 그만큼 감동했다는 거겠지.

원래 이렇게 관리를 해줘야, 계속 남아있는 법이지. 집토끼라는 생각에 방치하다 보면 금방 목줄 풀고 도망가거든.

적절~하게 당근을 좀 주면서 관리를 해야 계속 사랑해주는 법이지.

‘보아하니, 앞으로도 종종 보겠네.’

따봉 하나로 3루를 저 양반들을 콜리시엄에 주저 앉혔으니, 이만하면 남는 장사지.

부디 다음에 볼 때는 조금 더 평범한 차림으로 왔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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