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타자를 잡아내는 삼진 아웃. 그것으로 3회 초가 끝났다.
텍사스 때처럼 퍼펙트는 아니다. 7번타자 브라이언 맥캔에게 안타 하나 맞았거든. 괜히 여섯 번이나 실버 슬러거가 된 게 아니야.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타자는 깔끔하게 아웃 처리됐다. 아, 타순이 돌아서 다시 타석이 돌아온 조지 스프링어는 삼진만 두 개 잡혔네.
“오늘 진짜로 좋은데?”
“Suck, 잘하고 있어. 이대로만 가자.”
“난 힘들어 죽겠어··· Suck 그냥 텍사스 때처럼 삼진만 잡으면 안 돼?”
그렇게 이닝을 마치고 다시 벤치로 돌아가는 길, 분위기는 좋았다. 2회 말에 우리가 한 점을 내면서 앞서고 있거든.
다만 내내 바빴던 마커스 시미언은 우는소리를 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쪽으로 타구가 많이 가더라고. 장난기 있고 느긋한 녀석이지만, 오늘은 약간 부담스러운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You-Suck!”
“Suck It!”
“이런 날에 실책이라도 했다가는, 어우, 상상만으로 끔찍하네.”
우리 팬들이 별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열광하고 있으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특히나 투수는 잘 던졌는데 수비가 망쳤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바로 역적으로 몰릴 테고.
“정 부담스러우면 홈런이라도 하나 날려. 그럼 실책 하나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게 말처럼 쉽나.”
“그니까, 삼진 잡는 건 쉽냐고. 그냥 열심히 잡기나 해.”
“···타당한 말이군.”
“마커스! 괜히 Go 괴롭히지 말고 얌전히 들어와!”
마커스가 자꾸 선발투수 옆에서 알짱거리는 게 불안했던 타격코치의 호통에 그마저 떠나가고, 포수인 조시 페글리도 화장실로 뛰어가면서, 내 주변은 부쩍 조용해졌다.
‘시범경기 때는 그렉이라도 있어서 이럴 때 좀 덜 적적했는데.’
그라운드에서 벤치로 돌아올 때야, 잘했다며 여러 립서비스가 넘쳤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내 주변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가 보면 결계라도 있는 줄 알겠네. 아니, 있긴 하네, 잘하고 있는 선발투수는 그 성적이 결계가 되는 법이니까.
난 오늘 X나게 잘하고 있으니, 다른 선수들이 주변에 오는 걸 부담스러워 할만도 하네.
“Suck, 체력은 얼마나 남았어?”
멍하니 간식이나 까먹고 있을 때, 적적함을 깨줄 사람이 왔다. 똥싸개가 드디어 돌아오셨네.
“손은 씻었어요?”
“···나 그렇게 추잡한 놈 아니야. 당연히 씻었지.”
그렇다면 통과,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니 조시 페글리는 영광이라는 듯 호들갑을 떨며 앉았다.
“아무튼 체력은 어때?”
“좋죠, 투구수도 적당하고. 이제 41개인가?”
“아니, 42개. 음, 적당하긴 하네.”
3이닝 동안 소모한 투구수는 그냥저냥 적절했다. 10타석 동안 41개니, 타자 당 4.1개꼴로 던진 셈이네.
내 최대 투구수는 보통 110개 정도. 팀에서 지정한 제한선은 아마도 100개일 거다.
어느 쪽을 기준으로 하던지, 아직 반도 못 채운 거지.
거기다 오늘은 컨디션까지 발딱 서서 더욱더 힘이 남아돌았고.
“공은 계속 좋던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갈 거야? 아니면 더 빠르게? 다른 경기들처럼.”
이제 경기 초반이 지나갔으니, 다음 계획을 세울 차례지.
조시 페글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슬쩍 물었다.
보통 4회를 기점으로 속도를 높이는 편이잖아? 그때쯤 되면 집중력이랑 감각이 올라오니까.
그것을 언급한 건데,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준비는 이미 거의 다 됐다. 좋은 컨디션 덕분에 집중력도 쉽게 올라왔으니까. 껌도 열심히 씹었고.
그러니 이제 스위치만 켜면 되는 건데, 나는 그걸 의도적으로 억눌렀다. 다른 계획이 있거든.
‘애스트로스··· 빅마켓인데 스몰마켓의 야구를 하는 팀이지.’
오늘 나한테 털리고 있고, 내가 안 좋은 말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관점을 조금 다르게 본다면, 애스트로스는 혁신적인 팀이다.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기술이나 메타의 발전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편이지.
‘스탯캐스트도 일찌감치 당장 작년부터 적극적으로 분석을 했었지.’
가장 먼저 스탯캐스트의 데이터를 기반으로한 분석팀을 만들 정도로 변화에 능숙한 팀이지.
‘그러니 이제 겨우 두 경기 등판했다고는 해도, 나도 제법 분석이 됐겠지.’
오늘은 컨디션이 갑자기 급상승하면서, 그런 데이터조차 무용지물이 됐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최소한 내 구종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평소라면 까다로웠을 거다. 내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다양성이다.
구종이 많은 덕분에 상황에 맞춰 하나씩 골라서 던지면, 타자들은 미칠 지경이겠지.
그 다양성이 약간은 간판된 상태라는 건데, 좋아진 컨디션 덕분에 그걸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회랑 5회는 편하게 가죠. 속도를 높이는 건 6회부터 하고.”
“그래도 괜찮겠어? 애스트로스에는 선구안 좋은 놈들이 많아서, 좀 힘들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오늘 네 공은 최고지만···”
조심스럽게 묻는 조시 페글리에 나는 행여라도 말이 새어나갈까, 비밀스러운 동작을 취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오늘의 비밀병기를 그립으로 알려줬다.
“오··· 그것도 올라온 거야?”
“적당히 좋은 정도? 통하겠죠?”
“통하지. 무조건. 전혀 모르고 있을 텐데.”
“내가 사인 낼 테니까, 잘만 잡아줘요. 혹시 모르니까 시프트도 좀 만져주고.”
“오케이, 다음 이닝은 더 재밌겠네.”
이렇게나 컨디션이 좋은 날을 그냥 평범하게 보낼 수가 있나. 이 기분을 최대한 오랫동안 느껴야지.
그렇기에 속도를 높이는 건 나중을 위해서 참았다. 그건 경기의 막바지를 장식해야 했으니까.
‘지금 42구라고 했었지. 4회랑 5회는 더 짧게 끊자.’
약간은 까다롭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목표다. 말했다시피 비밀병기가 있거든.
나에 대해서 능통하고, 내 구종을 잘 아는 애스트로스기에, 결국 당할 수밖에 없는 비밀병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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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말, 에이스의 공격은 아쉽게 무산됐다. 점수는 여전히 1점차.
“우우우우우!”
“또 삼진 잡힐 준비나 해라!”
“Go의 X이나 Suck해라!”
수비를 마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길, 불쾌한 말들이 휴스턴 선수단에 쏟아졌다.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이 정도 비난이야 원정 경기에선 흔하니까. 특히 같은 지구팀이라면 더욱더 그렇고.
지역 라이벌인 레인저스와 맞붙을 때는 아예 가족을 건드리는 욕설을 내뱉기도 하니, 그보다는 훨씬 낫지.
“아주 신이 났네, 신이 났어.”
무덤덤하게 돌아가는 선수들을 반기던 타격코치는 상대 덕아웃에서 나오는 선수들 중, 포수와 시시덕거리는 투수를 보며 혀를 찼다.
여유롭다 못해, 웃음기마저 띤 모습은 전혀 선발투수답지는 않았으니까.
대부분 선발투수들이 감정을 감추거나, 그게 힘들다면 그런 척이라도 하는 편인데. 저 녀석은 오히려 더욱더 제 자신을 드러내며, 뽐냈다.
‘저런 행동이 이해가 되는 퍼포먼스기는 하지.’
3이닝 동안 탈삼진 4개를 잡고, 피안타 하나만을 내주며 우리들을 압도했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리라.
분명 경기 초반의 흐름은 상대에게 넘어갔다. 선취점을 내줬고, 타선은 꽁꽁 막혔으니까.
거기다 적지의 한복판이기에, 적대적인 기운이 선수들에게 날아들며, 계속 신경을 긁어댔고.
“이제 슬슬 좀 쳐야겠네.”
“한 3이닝 내줬으니까, 이젠 우리 차례지.”
“레딕, 니가 선두타자지? 공 좀 많이 끌어줘.”
“그래그래, 한 10개 정도 뽑아낼 테니까, 홈런 하나 날려.”
하지만 애스트로스의 사기는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경기 초반에 불과했고, 겨우 1점차니까.
물론 상대 투수의 퍼포먼스는 놀랍다. 몇몇 선수, 특히 삼진만 두 개를 잡힌 조지 스프링어는 질린 듯한 눈빛을 할 정도로.
‘데이터랑 조금 달라. 더 강력하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홈에서는 거기에 약간의 이득을 더 취하는 방식으로 상대 투수를 공략하는 애스트로스이기에.
기존의 정보를 아득히 넘어버린 상대 투수는 분명 위협적이나, 그들은 데이터를 잘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빨랐다.
“쟤 지금 구종 비율이 어때? 포심을 많이 쓰는 것 같긴 한데.”
“포심, 서클, 슬라이더, 쓰리핑거, 이 비중이더라.”
“오늘 투심인 별로 안 쓰던데 맞나?”
“아냐, 종종 던졌어.”
“몸쪽 코스가 많았지? “로케이션이 그렇게 잡힌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좌타우타 둘 다 그런 거 보면. 종종 바깥쪽 보더라인에 꽂기도 하고.”
덕아웃에 돌아오는 즉시 그들은 3이닝 동안 열심히 털리면서 얻어낸 데이터를 교환했다.
그들은 믿었다. 이렇게 차곡차곡 정보를 얻고, 적응을 하다보면, Crazy 모드에 들어간 투수조차 공략할 수 있다는 걸.
특히 이미 한 차례 타순이 돌았기에, 두 번째 타석이 시작되는 만큼, 어느 정도는 타이밍을 읽은 편이기에, 앞선 3이닝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경기 중반부터 인터벌 빨라지는 건 다들 알고 있지? 너무 휘둘리지 마. 그러기 시작하면 제구가 스트라이크존에 몰리는 편이니까, 그거 잘 공략하고.”
타격코치의 마지막 당부를 뒤로한 채 시작된 4회 초. 선두타자로서 조시 레딕이 나갔고, 이번 타석에서 그의 역할은 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비록 첫 타석에서는 상상이상으로 강력한 공에 박살 나기는 했으나.
“컨택이 좋으니까.”
“좀 빡세기는 해도, 어떻게든 쳐내기는 하겠지.”
묵직한 무게가 실린 공이라 배트가 쉽게 밀려, 장타는 힘들겠지만, 컨택으로 어떻게든 쳐낼 수는 있으리라.
그렇게 믿으며 그라운드를 지켜보던 타격코치였지만, 이내 하나 같이 눈썹을 씰룩였다.
“볼!”
“파울!”
“아웃!”
높은 하이 패스트볼.
허나 치기 좋은 코스에다가, 노리고 있었던 건지 조시 레딕도 가볍게 스윙했는데 결과는 2루수 땅볼.
가볍게 처리된 조시 레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약간 빗맞았네. 아, 쪽팔려.”
“10개쯤 뽑아준다더니?”
“10구 같은 3구니까, 힘은 충분히 뺏어. 그래도 인터벌이 빨라지진 않았고, 타이밍은 같으니까, 침착하게 쳐봐.”
“오케이.”
비록 선두타자가 아쉽게 물러나긴 했지만, 그래도 우려했던 것처럼 인터벌이 갑작스럽게 빨라져서, 타이밍이 당겨지거나 하진 않았기에, 여전히 분위기는 긍정적이었지만.
“아웃!”
“아웃!”
곧 호세 알투베와 카를로스 코레아가 이전타석들처럼 나란히 아웃당하며, 조금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투심··· 섞는 것 같던데요?”
“투심?”
“약간 떨어져요. 변형 패스트볼 계열 같은데···”
“포심처럼 엄청 무거운 건 아니지만, 묘하게 볼 끝이 더러웠어요.”
처리되어 돌아온 그들은 곧바로 이제까지처럼 정보를 전달했다. 변형 패스트볼.
사실 선택지는 하나다.
저 투수가 던지는 변형 패스트볼은 투심 밖에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 약강 하강하며 땅볼을 만드는 것도 분석팀의 자료와 동일하고.
‘일부러 투심을 자제하더라니···’
“투심을 섞는다고 하니까, 다음 이닝 때 조심해.”
5회 초에 나갈 타자들에게 타격코치는 당부했고, 그것으로 데이터라는 이름의 독이 타자들에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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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말을 잘 틀어막고 다시 5회 초. 대기타석에 오른 브레그먼은 묘한 시선으로 마운드를 봤다.
‘저 정도였던가?’
기억하고 있다.
워낙 독특한 이름이잖은가?
Go You-Suck이라니. 세상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직접 본 이상 절대로 잊을 수가 없겠지.
또한 이름과는 별개로, 경기에서 역시 깊은 이상이 남기도 했고.
‘처음이었지, 그런 완패는.’
완벽하게 정복했던 더블A, 우습게 여겼던 그곳에서 첫 패배감을 선사해준 투수니까.
삼진만 세 개.
완벽하게 자신감을 구겼었지.
허나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엄청난 서클을 던지기는 했지만, 단점이 너무 확실한 투수였으니까.
절대로 빅리그에는 도달하지 못할 테니, 불쾌한 기억으로 남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기량 자체가 차원이 달라졌어. 그리고··· 짜증 나는 피칭도 여전하고.’
머리 위에서 노는 것만 같은 피칭은 여전히 똑같았다. 지난 첫 번째 타석에서 그렇게 농락당하다가, 세 번째 삼진의 주인공이 됐을 정도로.
허나 같은 건 그것 하나뿐. 그 외의 나머지는 모든 게 달랐다. 같은 투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홈런은··· 힘들겠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그저 아쉬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옆처럼 가벼운 공이기에, 딱 내가 원하는 스윙 한 번이면 담장 정도는 우습게 넘길 수 있는 투수에게 털렸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정타를 때리더라도 과연 저 뒤의 담장 근처에라도 보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공이 무거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때린다.’
다만 목표치가 낮아졌을 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했다.
공은 엄청나게 묵직했지만, 자신의 파워 역시 아예 밀릴 정도는 아니고, 비록 한 타석뿐이지만, 타이밍도 거의 잡으니까.
‘투심을 섞는다고 했었지. 인터벌은 여전히 빨라지지 않았고. 서클이 강력하지만, 의외로 하이 패스트볼을 자주 던져. 그리고···’
그는 투수의 정보를 하나하나 다시금 되짚어보며 차례를 기다렸고, 곧 애스트로스가 바라던 모습이 이뤄졌다.
“세이프!”
깔끔한 안타.
5번타자, 지명타자인 카를로스 벨트란이 3구째에 유격수를 넘기는 안타를 기록하며 출루했다.
무사 1루.
이번 경기에서 가장 좋은 찬스가 자신에게 돌아오자, 알렉스 브레그먼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타석으로 향했다.
‘할 수 있어.’
다시금 스스로에게 그렇게 암시를 걸며 홈 플레이트로 들어서자, 포수는 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다시 정면을 봤다.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불쾌하나, 더 큰 목표가 있기에 알렉스 브레그먼 역시 정면을 바라보며.
안타에 기분이 상한 건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투수와 시선을 맞췄다.
‘첫 번째 타순에서 초구는 대부분 몸쪽 코스. 거의 패스트볼이지만, 우타자에게는 종종 서클을 던지기도 하고.’
복수를 하겠다거나, 굴욕을 갚아주겠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다. 기억에는 남더라도, 그런 것 하나하나에 흥분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더욱더 철저하게 상대 투수의 스타일을 떠올리며 타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이클부터는 바깥쪽으로도 종종 던진다. 마찬가지로 서클이나 패스트볼, 하지만 간혹···’
와인드업, 그리고 피칭.
간결한 동작으로 휙 던지는 투수의 투구폼을 똑똑히 눈에 담으며 차분하게 공을 기다렸다.
‘슬라이더도 던지지.’
“볼!”
초구는 볼.
들어오는 것 같으면서도 약간은 짧은 슬라이더를 그는 가만히 내버려뒀다.
지금처럼 우타자에게도 종종 슬라이더를 던져서, 살짝 걸치는 스트라이크를 만들고는 한다.
시범경기 때부터 겨우 두 경기이기는 하나, 정규시즌에서도 종종 보여줬던 패턴이지.
저 녀석의 주력구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칠 만한 구종이지만, 아쉽게도 코스가 나빠서 참았다.
‘후우··· 딱 하나, 하나만 와라.’
볼로 시작하는 기분 좋은 스타트. 허나 진짜는 이제부터타.
저 빌어먹을 머리통엔 수없이 많은 노림수가 담겨져 있으니까. 자신도 그것에 당했었지.
여전히 인터벌을 빠르게 하지 않는 건지, 약간의 고민을 거친 뒤, 조금 느리게 던진 2구.
배트를 꽉 틀어쥔 그는 코스를 파악한 뒤 휘둘렀다.
‘몸쪽 포심.’
“파울!”
좌우를 공략하며, 타자를 흔드는 투수이기에 그것을 예상하며 휘둘렀고, 코스는 맞았지만, 구종은 살짝 달랐다.
“쯧.”
투심 패스트볼.
오늘 볼 끝이 더럽다고 하더니, 살짝 더 꺾이는 변화와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스윙이 빗맞았다.
파울라인을 넘어간 타구에 혀를 찬 알렉스 브레그먼은 아쉬움을 털어내며 다시 준비했다.
‘이제 서클 타이밍인 것 같은데···’
세 가지의 체인지업.
저 투수의 시그니처다.
적어도 앞선 두 경기, 그리고 오늘 절반 가량의 경기 동안 타자들을 농락했었지.
‘쓰리핑거라면 좋겠지만··· 절대로 던지지 않겠지.’
과거 더블A에서 마지막 타석 때는 꽁꽁 숨겼던 쓰리핑거에 당했었다. 그 쓰리핑거를 지금도 가끔 던진다고 했지.
다만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때와 거의 비슷한 정도.
한 차례의 패배로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에 오기만 한다면 무조건 쳐낼 자신이 있지만, 절대로 좋은 공을 주지는 않으리라.
‘서클, 역회전이 강한 건지, 아니면 낙차가 심한 건지 애매한데.’
쓰리핑거를 제외하더라도 체인지업은 둘. 같은 그립이나, 구질이 다르다.
마음이 읽히지 않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곧 움직이는 투수에 정신을 바짝 부여잡았다.
‘바깥쪽으로 낮다. 역시 체인지업. 그렇다면···’
역회전을 고려하여 조금 길게 휘두르는 스윙.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는 간신히 마지막까지 휘두르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공. 그대로 휘둘렀다면 무조건 헛스윙이었겠지.
허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체크스윙에 대한 판단이 남았으니까. 공을 캐치한 포수는 곧바로 1루심을 가리켰다.
“하프스윙.”
결과는 하프스윙.
돌았다고 판단한 건지, 단호한 1루심의 판정에 스트라이크가 올라갔고, 알렉스 브레그먼은 억울했지만, 간신히 꾹 참았다.
비록 몰리기는 했지만,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으니까.
‘X발. 눈을 어떻게 뜬 거야? 이게 하프스윙이라고?’
물론 짜증이 안 난 건 아니다. 그저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을뿐.
간신히 울화를 가라앉힌 그는 다시 타격자세를 취하며 마지막 결정구를 예상했다.
‘체인지업을 연달아 던지기도 하고, 백도어 슬라이더도 있지. 포심도 무시할 수 없고.’
선택지는 여럿이다.
말했다시피, 노림수가 무수하게 많은 투수라서, 승부를 끝내는 방식도 여러 가지니까.
‘하지만 삼진을 잡을 때, 의외로 가장 많은 방식은···’
그중 하나를 선택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타격폼을 취했다. 저 투수, 분명 삼진을 노릴 거다.
공격적인 성향이 짙은 녀석인데다가, 벨트란의 안타로 인해 약간은 살아난 우리의 기세를 꺾고 싶을 테니, 삼진이 제격이지.
‘온다.’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건지,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던진 공. 손끝에서 나온 공을 보며 그는 곧바로 배트를 휘둘렀다.
삼진을 노릴 때 생각보다 많이 던지는 코스, 그리고 방식. 느린 구속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이 패스트볼.’
저 투수, 은근히 하이 패스트볼을 좋아한다. 특히 낮은 서클 체인지업 뒤에는 더욱더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나 적중했으나, 그는 마지막까지 철저했다.
‘투심이야.’
거기서 끝나지 않고,하나를 더 깔아놓았겠지. 그런 스타일의 투수니까.
그 마지막 한 수마저 예측하며 휘두른 스윙. 역시나 포심이 아니다. 오늘 경기, 진지하게 떠오른다는 착각이 들만큼 엄청났던 무브먼트가 없었으니까.
배트와 공이 정확하게 맞기 직전,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지만, 곧 믿을 수 없는 손맛이 배트를 타고 올라왔다.
‘투심···’
틱-하는 맥없는 소리.
공은 바닥을 굴렀고, 그는 억울했다. 분명 변형 패스트볼은 투심 밖에 없다고 들었으니까.
‘뿐이라며?’
마지막 순간의 무브먼트.
투심처럼 떨어지면서도,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이 미묘한 무브먼트가 땅볼을 만들었다.
그래, 이건 분명···
“아웃!”
“아웃!”
커터다.
무사 1루를 지워버리는 병살타. 그것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알렉스 브레그먼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위로하듯 자신을 토닥이는 타격코치였지만, 오히려 더욱더 울컥했다. 잘못된 정보가 원망스러웠으니까.
“···커터 던져요.”
“커터?”
그래도 간신히 불만스럽게나마 정보를 전달한 알렉스 브레그먼은 벤치에 털썩 앉아 멍하니 그라운드를 봤다.
마이너였다면 헬멧을 부수거나, 배트를 내리쳤을 거다.
하지만 여기선 막내 중의 막내라서 감히 그럴 수는 없다.
“브라이언, 하나 더 날려!”
“멀티히트 가자!”
그렇기에 그저 속으로 화를 삭이며 다른 이들처럼 후속타자, 브라이언 맥캔을 응원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는 삼구삼진으로 물러났고. 그렇게 5회 초가 끝났다.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수비를 준비하던 알렉스 브레그먼은 뒷목을 건드리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투수 지금 투구수가···’
이번 이닝 시작 시점에서 투구수는 53개였다. 4회 초에 11개로 알뜰하게 막았으니까.
그리고 이번 이닝은 벨트란이 3구, 자신이 4구째 병살, 마지막으로 브라이언 맥캔이 삼구삼진이었으니···
‘63개.’
아직 한참도 더 남은 투구수.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게 웃으며, 목을 휘휘 돌리면서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투수의 모습이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것 같잖아.’
어쩌면 진정한 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