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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71화 (71/316)

71화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지금의 에이전트가 편하고 좋아서요. 또 괜히 변화를 줬다가, 루틴이 망가질 수도 있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선수가 가장 편한 방향으로 가야죠. 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깔끔한 거절에 남자는 한 차례 눈썹을 씰룩였다. 의외였으니까.

‘생각보다 관계가 더 깊었던 건가?’

파격적인 대우였기에 바로 넘어올 줄 알았더니···.

어쩌면 이 어리고 가치가 높은 고객과 부하직원 간의 관계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끈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별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난 셈이니까.

‘유망주 선점이 성공했다는 걸 알면··· 다른 직원들도 요동치겠군.’

회사에 소속된 에이전트들이 자신이 맡은 고객을 데리고 독립하는 경우는 꽤나 흔한 일이다.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회사의 주요 고객들을 빼내는 것이니, 산업 스파이나 다름없지.

에이전트로 일하면서 그런 경우를 숱하게 봤기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은 회사를 세우며 철저하게 방지했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유지됐었지만, 결국 댐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다 그저 그런 유망주가 아니니, 더욱더 파장이 크겠지.’

Go. 겉으로 보이는 실링 자체는 대단히 매력적인 선수는 아니다. 구속이라는 가장 확실한 스타성이 떨어지는 선수니까.

하지만 그런 스타성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나머지를 갖췄기에, 그는 단 두 경기 만에 이번 시즌의 주연이 되었다.

포스트 매덕스나 좌완 매덕스처럼 다소 황당할 정도의 예측과 별명이 나올 정도로.

‘그리고 보통 이런 스타일이 리그의 트렌드나 메타와 상관없이 롱런하지.’

체인지업 마스터 혹은 변화구 마스터. 그렇게 불릴 만큼 다양한 구종과 구질을 갖춘 선수.

오랫동안 메이저리그를 배회하며, 수없이 많은 시즌과 선수를 봤기에, 가장 잘 안다.

구속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가진 선수가, 타자를 잡는 자기만의 방식마저 가지고 있다면, 100마일의 파이어볼러보다도 훨씬 더 단단해지지.

그런 선수이기에 파장이 작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선수를 선점한 동료이자 경쟁자를 질시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겠지.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런 기회를 노리려고 할 테고.

‘이 정도로 자라날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빼냈어야 하는 건데.’

더블A에서 제법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플루크성이 강하고 약점이 너무도 확실한 스타일의 선수기에 크게 주의하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마이너 전담팀이나, 유망주 케어 쪽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그저 부하직원이 야망에 휩싸여 위험한 도박을 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런데 잠깐의 시간 만에 쑥쑥 자라나 이렇게 될 줄이야.

만약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만, 아무래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한 선수라, 쉽게 회유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당장은 에이전시 소속이기에, 아쉬움을 접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려던 남자는 아직 통화가 끊기지 않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다시 한 번 더 눈썹을 씰룩였다.

-매니저는 조금 그렇고, 말씀처럼 에이전트에게 계속 픽업을 부탁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니. 차량 지원만 받겠습니다.

이거, 한방 제대로 먹었군.

그는 무슨 소리냐며 되묻거나 하는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빈틈을 드러낼수록 내 스스로의 수익과 고객의 이득이 줄어드는 게 에이전트기에 생긴 직업병이지.

가만히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본 그는 이내 실책을 깨달았다.

‘내가 실수했군.’

금방 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구단을 상대로 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를 저질렀다.

에이전트를 지킬 것이냐, 아니면 지원을 받아들일 것이냐. 그것을 정확하게 or로 잘라놓는 게 아니라.

고객을 압박하지 않기 위해서, 둘 다 은근히 권유하는 형식으로 말했는데. 그게 실착이 됐다.

‘아니, 분명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거군.’

영리하게 피칭한다는 거야, 직접 경기를 보고 보고서를 보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경기장 밖에서도 그 영악함이 유지되는 것 같다.

분명 잘 알아들었을 거다.

지원을 받으려면 에이전트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의리를 지키려면 지원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정확하게 이해했을 텐데, 모르는 척 부정확했던 말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고객에 보라스는 피식 웃었다.

‘내 실수니, 받아들여야지.’

구단과의 협상이었다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구단이 상대였다면 이런 실수조차 안 했겠지. 자신은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허나 에이전시에 소속된 선수이고, 이제 갓 데뷔한 유망주이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굴었던 것이 문제가 됐으니.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굳이 고객과 열을 올려서 좋은 것도 없거니와.

‘엄청난 손해까진 아니니까.’

물론 그 약간의 손해마저 철저하게 방지하는 것이 에이전트지만, 이번의 경우는 고객과 회사 간의 관계가 상하는 것만큼의 가치는 없다.

또한 이 영악한 고객 역시 에이전시 입장에서 그리 큰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저렇게 부담 없이 대담하게 나서는 걸 테고.

-차량 지원은 저한테 렌트비를 지원해주는 방식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제가 골라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홈경기에서 등판하시는 걸로 아는데,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그렇게 통화가 끝난 뒤, 간만의 깔끔한 패배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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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차전은 졌다.

스윕을 못하네, 스윕을.

그래도 텍사스 레인저스전을 포함해서 원정 6연전에서 적당히 3승3패의 성적을 거둬서 그런지. 돌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개막전까지 포함하면 6승 4패로, 초반 스타트를 괜찮게 끊었잖아? 물론 나도 기분이 좋고. 다른 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기는 하지만.

‘다행히 웃고 넘어가줬네. 이 정도는 용납할 수 있다는 거겠지.’

경기가 끝나고, 다시 전세기에 오르기 전에 바로 연락을 했다. 거절하겠다고. 그러면서도 차량 지원은 지원대로 뜯어냈으니, 이만하면 협상은 성공적이구만.

물론 순수하게 내 역량은 아닐 거다. 솔직히 말꼬리 잡고 싸운다면, 내가 스캇 보라스라는 슈퍼 에이전트한테 상대가 되나. 처절하게 발리겠지.

그냥 귀엽게 여기고, 굳이 얼굴 붉히지 않고 넘어가 준 덕분이다.

‘일단 차는 구했고, 면허도 빨리 따야겠네.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었지? 2주마다 한번이라던데. 날짜 계산 잘해야겠네.’

앞으로 쭉 아홉 경기가 홈경기이니, 시간이야 넉넉할 거다. 그 안에 대충 처리가 되겠지.

운전면허 시험은 문제없다. 한국에서 머물 때마다 종종 아빠 차 몰아봤었거든. 나름 짬이 찬 베스트 드라이버지.

이 문제는 대충 이 정도로 일단락됐고, 이제는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좀 나중에 찔러 봐야겠네. 눈치를 봐선, 지금은 마음이 심란한 것 같으니까.’

너클커브.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다짜고짜 리암 헨드릭스를 찔러보지는 않았다.

얻어맞은 것과 더불어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리암 헨드릭스가 부쩍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니까.

굳이 이런 때에 괜히 뭐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불편한 말 듣는 것보다는 나중에 기회를 보는 게 낫지.

“Suck, 너 진짜 이렇게 던지는 거 맞아? 아무리 봐도 너무 평범한데··· 이건 나도 던질 줄 안다고.”

반대로 내가 서클을 가르쳐준 션 마네아는 징징거리기 바빴다. 아니, 그러면 하루아침에 나처럼 던질 줄 알았어?

그리고 애초에 말했잖아.

“원래 평범해. 사실 다른 구종들도 투수마다 다른 거지 어차피 다 똑같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달라서 그렇지. 너 낙차가 큰 것도 같은 그립으로 던진다고 했지? 이해가 안 되네.”

물론 나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확 좋아지기는 했다. 작년에 슬라이더랑 서클이 갑자기 긁히기 시작했잖아? 제구도 확 올라갔고.

‘구위야 이유가 명확하지만, 이건 나도 원리를 모르겠네. 알면 다른 구종에도 한번 응용을 해볼 텐데.’

그냥 내 개인적인 예측으로는 오랫동안 쌓인 경험이 한 번에 터진 것 같다는 것이다.

특히 서클은 구력만 따지면 과장 좀 많이 보태서 거의 10년쯤 던졌으니, 그만큼 숙달될 만하기는 하지.

“계속 연습해봐. 어느 순간 감이 잡힐 수도 있으니까. 정 안 되면 그냥 버리고.”

버리라는 말에 내 자리까지 와서 찡찡거리던 션 마네아는 마치 그건 절대로 안 된다는 듯 은근하게 욕심을 내비쳤다.

그래, 내 서클의 위력을 옆에서 직접 지켜봤으니, 욕심이 나기는 하겠네.

“이제 좀 가라, 나 바빠.”

“아, 그래, 쏘리. 곧 등판하는 투수한테 내가 너무했네. 진짜 미안.”

“그럴 것까진 없고.”

대충 손을 휘저으니 션 마네아는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과한 사과를 남기기도 했고.

별로 개념 찬 행동은 아니지. 곧 등판인 투수를, 그것도 원정길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등판해야 하는 투수를 귀찮게 한 거니까

‘전세기라서 그나마 다행이지, 마이너처럼 버스였으면 살벌했겠네.’

상대는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만만한 팀은 아니다. 타선이 꽤 까다롭지.

성적은 우리랑 똑같이 6승 4패로, 초반부터 적당히 치고 나가고 있는데, 그 역할에는 타선의 힘이 크거든.

‘좋은 타자들이 많지.’

호세 알투베라는 작은 거인부터, 카를로스 코레아와 조지 스프링어까지, 걸출한 타자들이 많고,

내가 마이너에서 만났던 놈들 중에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놈, 알렉스 브레그먼도 있다.

작년까지 우리 팀이었던 조시 레딕도 있네. 어?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 쎈데?

‘그래도 엄청난 거포는 없고, 경기도 우리 홈에서 하니, 큰 거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까딱하면 난타당하겠네.’

레인저스랑 비교하면 타선의 짜임새 자체는 애스트로스쪽이 더 좋다.

비록 홈런의 위험성은 적겠지만, 어차피 웬만한 타자들한테는 홈런 안 맞을 자신 있다. 특히 우리 콜리시엄에서는.

그렇기에 내 입장에서 진짜로 까다로운 건, 컨택이 준수해서 내 공을 잘 맞히고, 그렇게 맞춘 타구를 적당히 날릴 수 있는 타자들이다.

특히 알투베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쓰는 배드볼 히터라서 더욱더 위험하고.

‘컨택이 좋아서, 어설픈 투심으로는 힘들 것 같고. 차라리 포심 비율을 높여서, 제구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확실하게 넣는 게 낫겠네.’

데이터를 살펴보면서 대략적으로 계획을 잡았다.

‘먼저 카탈로그부터 뽑아볼까? 세단이 나으려나? 장비 실어야 하니까 SUV?’

다른 계획도 열심히 잡았고.

나도 양심은 있으니까, 벤치에 포르쉐 같은 건 바라지도 않고. 여긴 미국이니 미국차가 괜찮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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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 오클랜드에 도착한 뒤, 브라이언이 곧바로 픽업을 왔지만, 딱히 서로 뭔가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언급하는 것도 조금 뭐한 주제이니, 그냥 묻어두는 게 낫지.

다만 말은 안 해도 약간은 고마운 눈치이기는 하네.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이유요?”

“분명 Go에게는 이로운 일이었을 텐데, 굳이 포기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닌가? 바로 말을 하네?

그는 고마운 한편으로 약간은 의아한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서로 비즈니스로 시작한 관계니까.

브라이언은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졌을 거고, 나도 보라스 코퍼레이션이라는 뒷배가 필요했던 거고.

‘스캇 보라스가 전담 에이전트면 좀 간지는 나겠네.’

나도 조금 아쉽기는 하다.

매니저야 어차피 내 쪽에서 거절이지만, 그런 거물이 내 뒷배가 돼주는 건 꽤 좋은 일이잖아?

하지만 그렇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대단한 거물이 지금의 브라이언만큼이나 집중해줄까?

‘절대로 아니지.’

나보다 훨씬 더 잘 벌고, 훨씬 더 오랫동안 관계를 가진 선수가 수두룩할 거다. 가장 쩌리가 되는 거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대가리가 낫거든요.”

더군다나 지금 나는 연봉조정도 까마득하게 남은 상황이니, 더욱더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고.

‘반대로 말하면 어차피 계약할 일이 별로 없으니, 지금 나한테는 거물급의 슈퍼 에이전트보다, 브라이언처럼 확실하게 올인해주는 전담 에이전트가 낫지.’

그가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한, 보라스 코퍼레이션이라는 뒷배는 여전할 거고, 일도 열심히 해주는데, 전담 에이전트를 갈아치울 이유는 없다.

“드래곤? 스네이크?”

“우리나라 속담인데, 음··· 메이저리그 꼴찌보다는 마이너리그 1등이 낫다? 아니지, 이건 절대로 아닌데.”

“아, 예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속담을 영어로 말하니 알아듣지를 못하는구만. 그래도 부연설명을 곁들이니, 대충 뜻은 이해한 것 같네.

물론 언젠가는 지금처럼 요령으로 넘기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선택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어차피 그때가 되면 나도 뱀이 아니라, 용의 대가리가 될 테니까 상관없지.’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애초에 다음 선택의 기회조차 안 올 테니 더욱더 상관없고.

“그리고 좋은 찬스가 왔다고 냉큼 갈아치우면 너무 정이 없잖아요?”

“···”

뭐, 낭만이라거나 그런 걸 추구하는 건 아니고. 약간의 의리 정도는 지키는 거지.

딱히 모난 곳 없이, 열심히 일 잘해준 에이전트인데, 그 정도의 정은 있어도 되잖아?

그렇게 간략한 대회가 끝난 뒤, 분위기는 조금 더 누그러졌고, 브라이언은 몇 차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열심히 해야겠군요. 그 정이라는 걸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려면.”

“말 나온 김에 해줄 일이 하나 있는데···”

“네, 뭐든 말씀하십시오.”

“혹시 렌트카 카탈로그 같은 것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잘 이야기가 돼서, 렌트비까지는 뜯어냈는데. 직접 발품 팔기는 좀 뭐해서.”

“···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브라이언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보슈.

기껏 머리 열심히 굴려서 장한 일 했는데, 칭찬이라도 해줘야지.

‘그러고 보니 집은 구단에서 렌트해주고, 차는 에이전시에서 렌트해주네.’

심지어 대니얼 월급도 에이전시인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지불해주니, 인생 공짜로 살고 있네.

‘아니지, 열심히 공 던져서 얻어낸 것들이니까, 이것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봐야지.’

아무래도 올해는 돈 나갈 곳이 없는 것 같은데, 미리 적금이라도 들어둘까.

차곡차곡 열심히 모으다 보면 진짜로 내년에는 내 집 마련 가능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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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뒤, 대니얼이 준비한 식단에 맞춰 식사하고, 아무 이상없는지 꼼꼼하게 신체검사(?)를 받은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등판에 맞춰, 최적의 수면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억지로 참다가 자서 그런지···

‘좋은데?’

전날 비행기를 탄 것 치고는 몸이 상쾌했다. 아니, 굳이 여행의 피로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몸 자체가 맑았다.

“Go, 딱 맞춰서 일어나셨네요. 식사는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컨디션은 어때요?”

“너무 좋은데요? 혹시 잘 때 마사지라도 했어요?”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사람이 조크를 모르네.

그래도 컨디션이 좋은 건 명백한 사실이다. 평소보다 좀 피곤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이런 경우 이유는 보통 하나다.

‘그냥 좋은 거지.’

왜? 살다보면 그런 날 있잖아? 이상하게 햇살이 맑고,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몸이 개운하고 그런 거.

신체 사이클이 잘 돌아갔다던가, 바이오리듬이 딱 맞아떨어졌다던가 하는 거. 아, 바이오리듬은 사이비라고 했던가?

아무튼 간에 일어났을 때부터 준수한 몸 상태에 사실 그것만으로 준비는 거의 끝났다.

‘루틴만 잘 지키면 되겠네.’

억지로 몸을 달아 올릴 필요 없이, 그냥 평소대로 루틴만 이행하면 된다는 뜻이니까.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간략하게 몸을 푼 뒤, 곧장 브라이언의 픽업을 받아 경기장으로 향했고.

“어때요?”

“음··· 네, 평소보다 힘이 좋기는 하군요. 확실히 나쁘지 않습니다.”

단순히 느낌만인 건 아니었던 건지, 본격적인 워밍업에서도 확실히 몸은 가벼웠다. 대니얼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고.

‘긁히는 날인가?’

가장 최근의 경기들 중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때를 꼽는다면, 작년이다. 무사사구 완봉했을 때가 딱 이랬거든.

‘그때 지금 던지는 서클 V2랑 비슷하게 서클이 날아갔었지.’

좋은 몸 상태에 구위도 좋아져서, 역회전이 강한 서클을 직접 보고, 두 가지 종류의 서클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었는데. 오늘 컨디션은 그때와 비슷했다.

“Suck, 오늘은 좀 어때?”

“너무 좋아요, 진심으로.”

그래서 그런가, 불펜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흥겨웠고, 설레기도 했다.

‘손가락 끝으로 던질 때도 그 정도였는데, 만약 지금 컨디션이 좋으면···’

부푼 꿈을 안고서 들어간 불펜. 내 호언장담에 투수코치는 그저 자신감의 발로 정도로 생각한 건지 피식 웃었지만.

“오···”

첫 공이 날아갔을 때, 묵직한 가죽 소리에 이어 나직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언제나 첫 시작은 서클.

두 가지 서클을 시작으로 공은 하나둘씩 포수 글러브 안으로 박혔고.

평소라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립서비스가 가득했을 불펜 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그저 계속해서 묵직한 투구음만이 흘렀을 뿐.

마지막 점검을 위해 전력으로 쏘아 보낸 포심은 레이저처럼 글러브 안쪽으로 쏘아박혔고, 간신히 캐치한 불펜포수는 평소처럼 나이스볼을 외치는 대신, 말없이 엄지를 세웠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멍하니 연습피칭을 지켜보고 있던 투수코치를 흘끔 쳐다봤다.

“컨디션 좋다니까요,”

“그래 보이네.”

이걸로 확실해졌다.

‘공 긁힐 때 나대다가 얻어터지는 일이 많지만··· 그 정도는 스스로 컨트롤 가능하지.’

일단 오늘 경기에서 내 공이 외야로 나갈 일은 없다.

웬만한 스윙은 죄다 뒤로 밀려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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