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69화 (69/316)

69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쳤습니다! 쭉쭉 뻗어가는 공! 중앙 담장을~ 넘어갑니다!

꼴찌 놈들을 화끈하게 털었던 게 바로 어제였는데, 겨우 하루 만에 서로 전세가 역전됐다.

개막전을 하필이면 원정 시리즈로 한 터라, 내리 스윕을 당한 거지, 홈에서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 상대가 애슬레틱스, 15년과 16년, 2년 연속 서부지구 꼴찌라는 대업을 이룬 오클랜드기에 더욱더 쉽게만 여겨졌고.

헌데 웬 루키에게 5.2이닝 동안 퍼펙트를 당하더니, 13개의 삼진을 내줬고, 6회를 끝으로 그 망할 루키가 내려갔는데도 타자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레인저스는 이후 5점을 추가로 내줬고.

심지어 홈런까지 한 방 맞았다.

“내가 이딴 거나 보려고 직관 왔는 줄 알아?”

“돈만 많이 쓰면 뭐해?”

“이래가지고 월드시리즈 우승은 어떻게 하려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4만 4천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관중이 몰렸기에 그런 불만의 목소리는 더욱더 클 수밖에 없었고.

경기가 거의 끝나갈 분위기에 이르자, 꽤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우습게 여겼던 팀에게, 루키에게 꼴사납게 발린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역하기에, 굳이 패배하는 순간마저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애슬레틱스 벤치를 잡아주는 전광판 카메라는 마치 그런 자신들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응?

커다란 화면 가득이 채워진 선수는 뒤늦게야 카메라에 자신이 잡혔다는 걸 깨달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도 한손으론 열심히 바나나를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니 더욱더 허탈했다.

저런 놈한테 발렸다고?

루키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아니면 동양인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게 보이는 얼굴은 텍사스 레인저스 팬들에게 약간의 현타를 선사했다.

그에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위협감이 샘솟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으니까.

멍청하게 바나나를 처먹고 있는 저 애송이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이제는 잘 알겠다.

“···우리 팀에 있었으면-”

“쟤도 망했겠지. X같은 코리아 새끼들은 텍사스만 왔다 하면 그렇게 되니까.”

“그래, 그랬겠네.”

다른 구단이었다면, 탐이라도 나고, IF 스토리라도 떠올랐을 텐데, 자신들이 텍사스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망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잡힌 거야?

입 모양을 보아, 주변 동료들에게 그렇게 묻던 개자식은 이내 카메라를 향해 보란듯이 씩 웃으며 따봉을 날렸다.

“가자, X발.”

“어우, 쪽팔려.”

“저저 미친 새끼···”

상대팀 투수가 저런 짓거릴 한다면 보통 때는 욕이라도 옴팡지게 날렸겠지만, 마치 더러운 오물을 피하듯 홈팬들은 애써 무시했다.

####

“···너 제정신이냐?”

“아직 한 경기 더 남았는데, 왜 도발을 하고 지랄이야.”

“어우, 내일 난 경기 나가기가 무섭다. 구단 버스에다가 돌이라도 던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냥 멍하니 바나나만 먹고 있기가 조금 뭐해서 아무 제스처나 했더니, 다들 이 난리다. 이렇게 담이 작아서 어떻게 메이저리거가 됐나 몰라.

내 스스로 잘했다는 의미에서 엄지 좀 세울 수도 있는 거지. 브라질에선 욕으로 통한다고 하던데, 미국은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런 분위기에 번호 따면 욕먹겠지?’

그래도 나도 눈치는 있다.

처발려서 그런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네. 비록 나는 투수고, 저분은 타자셔서 포지션은 다르지만,

내가 고딩이었을 때부터 빅리그에서 뛰셨던 분이고, 중계를 보며, 메이저의 꿈을 키웠던 선수라서.

경기 끝나면 오늘은 번호라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힘들겠네.

어제는 반대로 우리가 탈탈 털려서 못 만났는데, 오늘은 정 반대가 됐구만.

‘하긴, 선발투수가 상대팀 타자랑 번호 나누는 것도 그림이 좀 그렇긴 하겠네.’

자기네들한테 삼진만 13개를 잡은 투수가 대뜸 경기 끝나고 다가오면 집단린치를 하지 않을까?

본인 성적이라도 좋았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그 성적을 내가 삼진 하나에 땅볼 하나로 손수 박살 냈으니···

‘아쉽네.’

괜히 입맛을 쩝쩝, 아니 바나나를 쩝쩝 다시며 경기를 지켜봤다.

‘무난하게 이겼네.’

경기는 우리가 이겼다.

6대0으로 게임이 끝나면서.

전날의 대폭발이 무색하게도, 레인저스는 영봉패를 맞이했다.

“쟤들 좀 이상한데?”

“어, 완전 맛이 갔더라.”

“어제 힘을 많이 써서 그런가?”

“감을 못 잡는 것 같더라.”

“아니, 그보다는 타이밍이···”

경기가 끝난 뒤, 나갈 준비를 할 때, 내 뒤로 줄줄이 올라갔던 불펜투수, 리암 헨드릭스와 산티아고 카시야, 라이언 매드슨은 서로 대화를 나누더니 대뜸 내 쪽을 봤다.

뭐요. 바나나?

“그건 됐고, 어떻게 한 거야? 타자들 맛이 갔던데.”

혹시 이게 탐이 나나 싶어서 슬쩍 바나나를 내미니, 라이언 매드슨은 손을 휘저으며 그렇게 물었다.

“루키한테 삼진만 열세 개를 당했는데, 멘탈이 멀쩡하겠어요?”

“그렇기는 한데··· 뭔가 좀 더 있는 것 같은데, 한번 풀어봐, 지니어스.”

얼씨구? 맨날 썩썩 거리면서 놀리더니, 궁금한 게 있으니까 지니어스라고 하네. 타자들이 맛이 간 이유? 별거 없다.

‘내가 타이밍을 다 조져놓고 내려갔는데, 새로운 투수를 정상적으로 상대할 수 있겠어?’

쉽게 말하면 타자들은 이미 두 번의 변화를 겪었다. 경기 초반의 슬로우 피칭. 그리고 4회부터 시작된 퀵 피칭.

“세 명은 딱 평균이잖아요? 타이밍이 망가질 수밖에 없죠.”

“무슨 말인진 알겠네. 그럼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중간부터 인터벌 빨라지는 거 말이야. 혹시 무슨 훈련법이라도 있나? 한 달간 저녁 사줄 테니까, 좀 말해봐.”

집중력이랑 투구감각이 올라가면서 알아서 투구동작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집중해서 던지면 됩니다. 진짜로 X나게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투구감각이 올라와서 동작에 가속이-”

“그래, 잘 알겠어.”

순수하게 진실을 말해줬더니,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진짜라니까?

“···이 망할 리그는 천재가 너무 많단 말이야. 그래,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지니어스 너는 바나나나 열심히 먹어. 오늘, 수고했어.”

“유투.”

음, 천재소리 듣는 건 처음이구만. 어렸을 때 야구 배우면서 영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천재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걸 미국에서, 그것도 같은 메이저리거한테 다 들어보네.

‘천재라···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늘로 확실하게 느꼈거든.

‘자신감이야 늘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잘 먹히네.’

내 실력이, 어쩌면 내가 최대한 높게 평가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걸.

메이저리그라는 꿈의 무대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할 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네 경기라고 했던가?’

첫 데뷔전이자 개막전을 마쳤을 때, 브라이언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앞으로 네 경기만 더 지금처럼 활약한다면. 애슬레틱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거라고 했었지. 지금의 인기가 거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이제 세 경기 남았네.’

일단 한 경기는 해치웠다.

내 목표까지는 한··· 서른 경기쯤 더 남았고. 앞으로 한 서른 경기 정도만 지금처럼 하면,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수 있다.

기왕이면 애슬레틱스의 대표 선수보다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더 멋있잖아?

목표는 크게 가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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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스 타선을 짓누른 Go의 퍼펙트 피칭!>

<루키의 매직은 언제까지? Go, 레인저스마저 격파!>

경기가 끝나고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시범경기에서 엄청나게 삼진을 잡았던 고유석이었는데. 그의 피칭이, 그 엄청난 삼진이 빅리그에서도 가능하다는 게 드러난 경기였으니까.

<정규시즌까지 이어진 ‘Mr.Zero’ 13이닝 연속 무실점>

미스터 제로.

이제 겨우 13이닝을 던진 투수에게 붙이기는 조금 미묘한 별명이지만, 그렇게 지칭하는 기사도 적지는 않았다.

시범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탓에 붙었던 별명이었는데. 어쨌든 그 모습이 레귤러 시즌에도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신드롬이지. Go라는 이름의 신드롬.’

원래 특이하고 생소한 선수의 경우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낯선 만큼 팬들에게 크게 어필이 되지 못하는 거지.

브라이언이 보기에 고유석은 그것에 부합하는 선수였다.

‘모든 게 독특하니까.’

작년 여름부터 급격하게 떠오르기 전에는 아무런 정보도, 소식도 없었던 선수.

거기다 아시아, 코리아 선수기에 생소함과 특이함은 더욱더 진해진다.

느린 구속과 강력한 스터프, 뛰어나면서 다양한 변화구와 제구도 대단히 특이하고.

그런 특이한 피칭에 Go You-Suck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이름이 어우러지기까지 했지.

‘그러니 원래라면 조금은 낯설게 느껴져야 정상이지만, Go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났지.’

특이하고 생소한 선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고유석은 그리 낯선 선수가 아니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이후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의 메인 이벤터로서 미디어를 장식한 선수니까.

꾸준하게 스포트라이트가 몰렸기에 오히려 그 짧은 시간 만에 고유석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모두에게 쉬이 받아들여졌다.

‘거기에 완벽한 성적까지 곁들여졌으니···’

특이하고 생소한 선수.

그 단어를 살짝 바꾼다면.

‘특별하고 신선한 선수’가 된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은 언제나 신드롬을 일으켰지.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폼으로 메이저리그를 휩쓸며 인기스타가 되었던 노모 히데오처럼.

레귤러 시즌의 두 경기, 그것도 개막전을 포함한 두 경기에서 기대감을 120%, 아니 200% 충족시킨 고유석 역시 신드롬에 근접한 인기를 끌며, 폭풍의 핵이 되었다.

‘탐이 안 날 수가 있나.’

반응이 나올 정도로.

브라이언 그는 지금 보스턴에 있었다. 4월간은 오클랜드에서 지내는 거였지만, 어쩔 숭 없이 돌아왔지.

그나마 텍사스 원정 이후 다시 캔사스시티 원정 일정이 있는 애슬레틱스기에 픽업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브라이언, 너무 오랜만에 회사에 나온 거 아니야?”

“루키 운전기사 한다더니, 좀 쉬엄쉬엄해. 자넨 에이전트잖아? 매니저가 아니라.”

“루키 집까지 알아봐 줬다면서? 대단한데? 그러다 나중에 독립하는 거 아닌가 몰라.”

어쩌면 그 픽업조차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입질이 왔으니까.

마주친 에이전트들은 웃음기 띤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그래, 에이전트의 업무는 아니지. 계약과 관계없는 일들이니까. 이건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겠지.’

진짜 문제는 브라이언 자신이 앞서나간다는 거다.

사옥에 들어오는 순간 여러 가지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놀라움, 경이로움. 그리고···

‘질투.’

고유석이라는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핵이 되었다면, 보라스 코퍼레이션의 핵은 브라이언 그였다.

놀라운 선견지명을 보여서, 현시점 최고의 유망주를 선점했으니까.

그런 동료들, 아니, 하이에나들을 지나 그를 호출했던 문 앞에 우뚝 선 브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너무 빨라.’

향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건 잘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딱 제시간에 왔어.

사무실 안. 한 남성이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 그를 흘끔 봤다. 자신의 상사이자, 보스.

그리고 하이에나들.

“앉지. 아, 자네들은 이만 나가보게.”

선객들을 내보낸 사장의 손짓에 브라이언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역시나 달려들 오셨군.’

선객들은 동료들, 아니 승냥이들이다. 고객이라는 만찬을 놓고 서로 다투는 관계니, 승냥이가 맞겠지.

예상이 됐다.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누가 침을 흘렸을지.

“일단 먼저 축하부터 하지. 브라이언 자네 덕분에 좋은 선수가 우리 품으로 들어왔으니까. 좋은 선견지명이었어. 만약 Go의 활약이 계속된다면, 에이전시의 얼굴이 되겠지.”

시작은 역시나 칭찬이다.

원래 안 좋은 일은 뒤로 미루는 법이니까. 그게 협상의 시작이다.

“그런데 요즘 자네의 업무가 너무 과중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Go를 직접 픽업한다고 하던데.”

“···아직 개인 차량이 없는 선수이고, 이제 갓 데뷔한 선수니, 최대한 그가 메이저리그에 빠르게 적응하는 걸 돕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오클랜드라는 도시의 특수성도 있고요.”

길었던 서론이 끝난 뒤. 본격적인 주제가 떠올랐다. 그래, 이것으로 먼저 찌를 줄 알았지.

“에이전트로서 좋은 자세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지금 자네가 맡은 선수가 몇 명이지?”

“···Go와의 계약 이후 보스의 배려 덕분에 다섯이 줄어서, 지금은 Go까지 포함하여 여섯 명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강하게 어필했다.

나는 이 선수를 위해서 내 정당한 몫을, 고객을 포기했노라고. 그것을 과감하게 언급하자, 낮은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그래, 민망하겠지.

브라이언 자신은 고유석을 얻기 위해 정당한 대가를 치렀다. 마이너 선수와 계약하려고, 메이저 고객 다섯을 포기했지.

“그래, 그렇지.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네. Go가 대단한 선수인 건 맞지만, 과하게 집중하고 있어. 다른 고객에게··· 소홀해질 정도로.”

첫 수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지, 사장은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고. 역시나 예상했던 주제다.

“물론 지금 당장 불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만약 알려진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기지.”

그에게 더욱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사비를 털어가면서까지 오클랜드에 머물며, 직접 구장에 픽업해줄 정도로.

하지만 형평성을 논한다면 브라이언 역시 할 말이 있었다.

‘에이전트가 언제부터 고객들을 평등하게 대우했다는 거지?’

지금 제리 맥과이어 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천하의 스캇 보라스가?

돈 되는 고객에게 집중하는 건 에이전트에겐 당연한 일이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값어치가 오를 선수와 친분을 쌓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애초에···

‘스캇 당신도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고객들이 있을 텐데?’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잡힐 테니까. 스스로 고유석과 친분을 쌓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인정합니다만. 신인 선수이기에 그가 적응할 때까지 돕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Go는 에이전스의 간판이 될 선수니, 회사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하니까요.”

“그래, 나도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자네 같은 고급인력이 신인 선수를 전담하는 건 회사에도 큰 손실이야.”

그래, 그 얘기를 왜 안 하는가 싶었다. 에이전시 회사라고는 하지만, 보라스 코퍼레이션은 내부의 시스템이 정확하게 확립되어 있다.

‘철저하게 분담하지.’

루키 전담. 베테랑 전담. 마이너 전담. 그리고 아시아 전담까지. 에이전트들은 저마다 업무가 나눠져 있다.

소속 에이전트가 자신의 고객을 데리고, 회사를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브라이언 자신은 베테랑 선수를 주로 전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 업무는 계약이다.

스캇 보라스가 전략병기로서 구단을 쥐고 흔들고, 터트린다면, 자신은 이후 제안을 조금 더 다듬어서 깃발을 꼽는 역할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신인 선수의 케어를 전담하는 건 모건과 타일러야. 자네가 Go를 열심히 키워낸 공로는 나도 인정하지만. 난 사장으로서 회사의 내부 시스템을 고려해야 하네.”

아니, 브라이언 자신이 이 이상 Go라는 원석과 친분을 가지는 걸 막으려는 거겠지.

만약의 사태를, 아니, 브라이언 자신이 품은 야심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허나···

‘난 이미 도박을 했어.’

그는 Go를 가지기 위해, 과감하게 도박을 했다. 기존의 고객들을 시원하게 바쳤지.

‘그리고 그 도박의 판돈으로 바친 고객들보다, 지금 Go의 가치가 더 높지.’

투자라는 건 미래가치를 보고 하는 것이고, 그 미래가치에서 현재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 선수들 중 고유석을 능가하는 선수는 없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Go의 경우 이제 갓 데뷔한 선수이니, 갑작스럽게 에이전트가 바뀐다면, 그에 영향을 받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브라이언은 고유석이라는 원석, 아니 보석을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었다.

모건과 타일러.

신인선수 혹은 유망주 케어를 전담하는 이들이다.

선수와 친해지기 가장 쉬운 만큼, 보스는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충견들에게 그 역할을 맡겼지.

방금 전, 그가 들어오자 나갔던 선객들이기도 하고.

‘그래, 그런 작당 모의를 하시고 계셨다?’

어떻게든 자신에게서 원석을 빼앗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느껴졌지만, 브라이언 역시 어차피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러니-”

한번 더 반박하려는 순간. 스캇 보라스가 칼을 꺼내 들었다.

“당장 그들에게 맡기자는 게 아니야. 자네 말처럼 갑작스럽게 에이전트가 바뀐다면, 선수도 불안해지겠지. 그러니 한동안은 내가 직접 맡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혼란도 덜하지 않겠나?”

비아냥거리며 침을 흘리던 하이에나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장이 직접 전담할 만큼 본인에게 에이전시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면, Go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은데.”

오랫동안 메이저리그에 떠돌며 슈퍼에이전트로서 군림했던 사자가, 직접 이빨을 드러냈으니까.

“또한 자네 말처럼 그가 문제를 겪고 있으니. 자네가 픽업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인 지원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회사에서 차량을 지원하거나, 매니저를 붙이는 방식으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은 말들이 브라이언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들었다.

“우리와 연결된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가 몇몇 있으니, 그쪽으로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어떻게 생각하나?”

“···선수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그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말밖에는 없었다.

‘Go가 이 기회를 놓칠까?’

자신처럼 야망이 큰 선수에게 스캇 보라스라는 그늘은 훨씬 더 아늑하게 느껴질 테니까.

####

3차전은 시원하게 졌다.

루징 시리즈지.

2차전에 털렸던 걸 터트린 건지. 레인저스는 홈런만 두 개를 쳤다.

시즌 첫 경기를 무사히 마쳤던 켄달 그레이브맨도 6이닝 4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찍지 못했고.

‘번호는 결국 못 땄네.’

우리가 졌지만, 그래도 번호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필 3차전에 불출장 했던지라, 결국 추민수 선수 번호는 못 땄다.

같은 서부지구라서 자주 만나니까,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원정 뛰고 다시 원정이라니··· 대체 일정을 누가 짠 거야?”

“캔자스는 그나마 좀 가깝잖아? 토론토나 보스턴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지.”

“난 집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시리즈를 마치고, 다시 오른 전세기 안은 몇몇 선수의 투덜거림이 나직하게 울렸다.

아무리 전세기고 좌석이 좋다고 해도, 연이은 원정이 싫은 건 메이저도 마찬가지인가 보네.

뭐, 사실 캔자스시티 정도면 댈러스랑 거리도 별로 안 멀기에, 메이저리그 기준으로는 그리 힘든 원정은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별로 안 힘들다고 해도 싫은 일이 두 번 겹치면 좀 짜증나는 법이잖아?

‘한번 털어서 그런가, 귀찮게 안구네.’

그래도 그런 투덜거림 정도를 제외하면, 비행기 안은 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저번 원정처럼 마커스 시미언이나 제드 라우리가 판에 끼라면서 귀찮게 굴지는 않았거든.

오히려 내가 테이블 앞을 지나갈 때마다 기겁하더라. 밀머니가 소중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겠지.

‘조용해서 좋네.’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사실 로열스전에 내가 등판할 일이 없으니, 그냥 오클랜드로 돌아가고 싶기는 한데···

‘짬밥이 딸리는 걸 어떡해?’

베테랑쯤 되면 자기가 출장 안 하는 원정은 그냥 씹을 수 있지만, 난 아직 꼬꼬마에 불과하니, 닥치고 따라가야지.

그래도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는 덕분에 명작 영화를 감상을 할 수 있었다.

원래는 노래를 듣거나 한숨 자지만, 가끔은 문화생활도 하고 그래야지.

“왔어? 좀 땄나 봐? 표정이 좋네.”

“나? 다 털렸지. 캔자스시티에선 굶어야돼.”

꿩 대신 닭인 건지, 루키에게 당한 굴욕을 루키에게 풀어주겠다는 듯, 도박판에 끌려갔던 프랭키 몬타스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작년에 다저스에서 자렐 코튼이랑 같이 넘어온 녀석인데.

털린 놈치고는 심하게 밝네

심지어 3차전에 교체투수로 등판해서 홈런도 맞았는데 말이야.

돈 털리고 홈런도 털렸는데 저렇게 웃는 거 보면 멘탈 갑이네, 멘탈 갑.

“영화 재밌어? 옛날 영화 같은데, 뭐야?”

같은 루키라서 그런지 동승하게 된 녀석은 심심한 듯 몸을 뒤척이나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왜 너도 보려고?”

“재밌어 보이는데. 혹시 스페인어 자막도 있나? 직접 듣는 건 알아듣는데, 스피커로 나오면 잘 안 들리더라고.”

“아마도 있을 걸? 대박 난 영화니까, 찾아보면 있겠지.”

“이름이 뭔데? 나도 봐야겠네.”

“제리 맥과이어.”

“Show me the money?”

“그래 그거.”

“난 로맨스는 별로 안 좋아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줬더니, 프랭키 몬타스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왜? 얼마나 재밌는데.

낭만을 모르는 녀석이구만.

처음 미국 오고나서, 영어를 빨리 배우려고 많이 봤던 영화들 중 하나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까 재밌네. 여주인공도 예쁘고.

‘그나저나 우리 제리 맥과이어께선 지금 오클랜드에 있으려나?’

에이전트가 홈에서는 직접 경기장까지 픽업까지 해주는데, 톰 크루즈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그 정도면 제리 맥과이어지.

‘연봉조정이나 FA 할 때 되면 나도 쇼미더머니라고 외쳐볼까?’

어차피 내가 등판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원정길에 별 잡생각이 다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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