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저 새끼 뭐야?”
“이제 데뷔한 놈이라고 안 했어?”
홈팬들이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3회 말부터였다.
1,2회를 시원스럽게 마친 애송이 투수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을 찍어 눌렀으니까.
그에 전날의 대승에 흥겨웠던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에인절스 새끼들도 X나게 털렸다더니, 제법 한가락 하는 것 같은데?”
“아, 쟤가 걔야? 그, 개막전 나왔다던 놈. 오클랜드 놈들이 X신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실력은 있나 보네.”
저 투수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시끄러운 투수잖은가? 독특한 이름이 기억에 딱 남았지.
시범경기부터 여기저기서 말이 나오더니, 덜컥 개막전에서 선발투수로 데뷔전을 치른 녀석.
그 개막전에서 에인절스를 때려잡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녀석이기에 모를 수가 없다.
물론 이름을 안 다는 거지, 실력을 인정한다거나, 위협적으로 여긴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약간은 무시에 가까웠다. 저런 애송이에게 모든 걸 기대며, 난리를 치는 오클랜드 머저리들도 우스웠고.
일단 이제 빅리그에서 겨우 한 경기 뛴 놈에 불과한데다가···
‘그래봤자 오클랜드잖아?’
‘애슬레틱스 새끼들 투수가 잘해 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성적 말아먹으니까, 애새끼 가지고 호들갑이나 좀 떠는 거겠지.’
작년 압도적인 서부지구 꼴찌와, AL 13위, 리그 전체를 통틀어 뒤에서 3등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올렸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팀에 대한 무시도 있었으니까.
저 투수가 개막전에서 제법 잘했다고는 하나, 그 상대였던 에인절스 역시 레인저스 팬들에겐 똑같은 놈들이었다.
“에인절스나, 애슬레틱스나. 둘 다 비슷한 놈들이야.”
“X밥끼리 투닥거리다가 루키가 운 좋게 잘한 거 아닌가?”
“에인절스 같은 X밥한테는 루키 투수가 통할 수도 있지만, 우린 다르지.”
작년 시즌을 처참하게 말아먹은 건 애슬레틱스와 매한가지기에, 그 놈들을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둔 건 그리 어필이 되지 못했다.
그런 허접한 놈들과 텍사스 레인저스는 명백히 다르다. 작년 AL 전체 1위를 기록하며 당당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강팀이니까.
그 포스트시즌의 결과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에인절스에게 일어났던 불행이 자신들에겐 닥치지 않을 것이라며 확신했던 레인저스였지만···
“스트라이크!”
상황이 뭔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자랑스러운 레인저스 타자들이 루키의 거품을 꺼트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왜 우리 타자들이 서로 내기라도 한 것처럼 타석에서 꺼지고 있는 걸까?
홈팬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저렇게 느려터진 공을 대체 왜 못 치는 건데?”
“X발 니들 지금 장난하냐? 제대로 안 해?”
8번타자, 라이언 루아가 삼진을 당하면서, 벌써 이번 경기에서만 여섯 번째 삼진이 올라갔다.
“잘 좀 해봐!”
“뭐 하는 거야! 애새끼 기라도 살려주냐?”
“야이 x신들아! 좀 보고 쳐, 보고! X발 선풍기질 좀 그만하라고!”
더 놀라운 건, 그 여섯 개의 삼진 중에서 헛스윙 삼진이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자랑스러운, 아니, 이 저 무식하게 힘만 쎈 놈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냅다 배트를 휘둘렀다.
아롤디스 채프먼 같은 놈처럼 100마일 이상의 강속구를 펑펑 던지는 파이어볼러였다면 이해가 됐겠지만.
100마일은커녕, 90마일도 채 못 미치는 하찮은 구속의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헛스윙 삼진을 내주는 모습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비스! 네가 한 방 날려!”
“너 간만에 손맛 좀 보자!”
“홈런 쳐, 홈런. 다른 X신들 대신 너라도 쳐줘!”
그렇기에 홈팬들은 확신했다. 저 투수가 운이 좋던지, 타자들 정신이 빠졌던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제정신으로만 친다면 분명이 두들겨 눕힐 수 있을 거라고. 그런 기대감을 업고서 올라온 9번타자 엘비스 앤드루스.
아직 개막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는 타자다. 그렇기에 홈팬들은 그가 이 황당한 퍼펙트를 마무리 지어 주리라고 믿었지만.
“아웃!”
그가 다른 대다수의 타자들과 달랐던 건, 그나마 삼진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꼴사납게 배트를 휘적이다, 1루의 코앞에서 아웃을 당하며 이닝 종료.
아홉 명의 타자가 나란히 줄지어서 처리되었고, 그중 여섯 명은 삼진을 당해버린 상황에 홈팬들은 허탈한 웃음만 흘렸다.
믿기지 않았으니까.
멍청한 타자들이, 저 망할 투수가 지금 우리 홈에서 대체 무슨 짓거릴 벌이고 있는 거지?
관중들은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내려가서 선수들에게 묻고 싶었다.
“우우우우우!”
“쪽팔리지도 않냐?”
“X발 그러니까 어제 왜 몰아쳐서 지랄이야! 오늘까지 좀 나눠서 쳤어야지!”
“애새끼한테 3이닝 동안 퍼펙트나 내주고, 참 잘하는 짓이다!”
아직 경기 초반에 불과했지만, 전날과 달리 너무도 허무했기 때문인지, 이른 시간부터 분노를 토해낸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애써 감정을 진정시켰다.
“오히려 이제 데뷔한 루키니까 더 힘든 거야.”
“그래, 원래 타자들이 처음 보는 놈은 생소해서 잘 못 잡아.”
“진짜는 두 번째 타석부터지.”
이제 겨우 한 타순이 돌았다.
죄다 퍼펙트로 잡히고, 삼진도 여섯 개나 내준 건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아직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남았지.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그저 탐색전에 불과했다고 스스로를 달래듯 중얼거렸지만.
“코리안 새끼들, 다른 팀에서는 저렇게 잘하면서···”
“기세등등한 것 좀 봐라.”
“타자 새끼들이 배가 처 부른 거지. 저런 놈 하나 못 두들기는 거 보면.”
적지의 한복판에서 활짝 웃으며 내려가는 투수는 불쾌감을 자아내면서도, 약간의 공포심을 조성했다.
어쩌면, 국적 때문에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저 애송이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경기 역시, 에인절스가 당했던 것보다 조금 더 굴욕적일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도 떠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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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닝은 몇 초에요?”
“22초에서 23초 정도.”
“더 느려졌네.”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투수코치에게 물었다. 이게 뭐냐고? 내 인터벌 시간이다.
오늘 내가 공 하나 당 평균적으로 22~3초 정도의 시간을 소모했다는 건데, 리그 평균으로 봐도 꽤나 인터벌이 느린 거지만.
‘내 기준으로 하면 더 느리지.’
내 인터벌은 보통 18초에서 19초 정도다. 마이너 때는 이것보다 좀 느렸는데, 타자들을 분류해서 그 이하는 편하게 상대하라는 그렉의 조언 덕분에 시범경기 중간부터 조금 빨라졌지.
거기에 경기 중간부터 투구감각과 집중력이 올라서, 가속이 붙기 시작할 때면 그것보다도 훨씬 빨라지고.
그러니 22초대가 찍힌다는 건, 다른 투수들 평균으로도 살짝 느리지만, 내 기준으로는 심각하게 느린 건데.
‘적절하네.’
오히려 딱 좋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니까. 갑자기 느려진 거라면, 나도 조금 당황했겠지만. 오늘은 명확한 이유가 있거든.
애초에 문제가 있었다면 당장 투수코치부터 물었겠지. 혹시 어디가 아프냐고.
‘헛스윙을 유도하려고 머리를 많이 썼으니, 시간이 질질 끌릴 수밖에.’
1번부터 9번까지 타자 한 명 한명을 최대한 신중하게 온 집중을 다해서 잡았으니, 인터벌이 느릴 수밖에.
‘그렇게 한 덕분에 첫 번째 타순은 깔끔하게 날렸어.’
보통 한 타순쯤 돌면, 타자의 실력에 따라서 타이밍을 잡거나, 아니면 타이밍에 실마리를 얻거나 한다. 그걸 토대로 상대 투수를 차근차근 공략하는 거지. 하지만 오늘 레인저스 타선은 그렇지 못했다.
죄다 헛스윙을 남발하며, 한 타석을 시원하게 날린 탓에, 오히려 경기가 막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욱더 꼬였을 테니까.
‘죄다 땅볼을 의식해서 생각보다 더 쉬웠지. 저쪽 분석팀이 헛다리를 짚은 것 같네.’
날 어떻게 본 건지는 몰라도, 타자들 스윙을 보면 아닌 척해도 땅볼을 의식했다. 내가 그렇게 피칭할 줄 알고 미리 준비했던 거겠지.
저쪽 전력분석팀의 작품일 텐데, 레인저스에겐 내부의 적이 된 셈이지만, 그 덕에 조금 더 수월하게 첫 타순을 막았다.
여기까진 참 좋은데···
‘그렉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잘 알겠네. 마이너 때보다 심력 소모가 더 커.’
삼진이 많은 만큼, 투구수가 조절돼서 체력은 아직 거뜬하건만, 이제 3이닝을 던진 것 치고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
이런 종류의 피칭이야 마이너에서도 줄곧 해왔던 거지만, 빅리그, 그리고 수만 명의 원정팀 관중의 무게감이 문제겠지.
내가 관중들 반응에 의연한 편이라고는 해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마도 직접적으로 거슬린다거나, 긴장되진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조금씩 부담이 쌓이겠지.
‘적당히 조절하기는 해야겠어.’
모든 경기를 이렇게 던졌다간, 그렉의 말처럼 중간에 퍼질 것 같다. 어쩌면 번아웃이 올 수도 있고.
그래도 오늘은 그토록 머리 아프게 던진 덕분에 타이밍이 망가진 타자들과는 달리, 나는 상대 타선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파워가 좋고 타격이 좋긴 하지만, 어제 경기나 개막전 시리즈의 파괴력이 제 실력인 건 아닌 것 같은데···.’
텍사스 레인저스의 타선, 분명 강한 것 같기는 한데, 오늘 내 감상은 쭉정이에 가까웠다.
엄청 못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좀 걱정했던 것보다는 덜하다는 거지.
이전 경기들까지는 시원스런 타격감을 보여줬기에 이렇게 말하면 의아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타격 사이클이다.
흔히 말하는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져서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뽐냈던 거지.
메이저리그 전체 5위에 해당하는 페이롤이 합당할 정도의 위협감은 오늘 느끼지 못했다.
‘노마 마자르야 좌상바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루크네드 오도어도 공갈포끼 심해. 그나마 엘비스 앤드루스가 밸런스가 잘 잡혀서 까다롭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지.’
그나마 괜찮은 타자가 있다면, 생각보다 파워가 더 묵직했던 조이 갈로 정도인데. 그 외에는 대부분 기대 이하다.
거기다 내 스스로 열심히 골머리 썩혀가며 타자들을 망쳤으니, 이젠 공든 탑 위에서 편하게 던질 차례지.
“스티븐.”
“어, Suck. 왜?”
“다음 이닝부터는 속도를 좀 높이죠. 사인 내는 즉시 바로 던질 거니까, 잘 잡아줘요.”
“···그래.”
원래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많은 편은 아닌데, 오늘은 스티븐 보그트가 조금 더 조용했다.
삼진 많이 잡을 거라는 내 말에 코웃음 쳤던 게 무안할 만큼, 아직 경기 초반이기는 해도 엄청나게 잡았잖아?
본인도 민망했던 건지, 고분고분 순한 양처럼, 내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완봉할 것도 아니니, 열심히 던져 보자고.’
슬쩍 눈을 돌려 상대팀 그라운드의 야수들, 아니, 타자들을 봤다. 벤치에도 지명타자로 한 분 더 계시네.
‘단단히 착각하고 있겠지.’
아슬아슬한 헛스윙을 유도했다. 여섯 개의 삼진을 잡았고, 세 개의 범타를 유도했지.
그 과정에서 타자들은 아쉬움을 느꼈을 거다. 정말로 아주 약간이 부족했다고.
그래도 타이밍은 얼추 익숙해졌으니, 다음 타석부터는 칠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을 텐데···
“마커스! 껌 하나만 줘.”
“지금 씹고 있잖아?”
“단물이 다 빠져서 그런가, 영~ 씹는 맛이 안 나네.”
“···어휴, 선발투수라 화도 못 내겠고. 아주 상전이네, 상전이야. 자, 딸기맛. 애새끼 같은 네 입맛에 딱이지?”
“땡큐.”
나는 그들을 보며 단물이 다 빠져서 새하얗게 변해버린 껌 대신, 마커스 시미언이 손수 건네준 새로운 껌을 입안에 욱여넣어, 잘근잘근 씹었다.
‘타이밍도 조져 놨고, 상대 타자들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머리를 열심히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피칭감각이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네.
“계속 조지면 되겠네.”
이제부터 2페이즈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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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난 만만한 투수다. 만만하게 보이는 투수지. 구속이 느리니까.
패스트볼 최고구속이 89마일로 리그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고, 평균적으로는 그보다도 더 느리다. 85마일대니까.
그러니 최대한 방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타자의 입장에서 나는 만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화도 나겠지. 그런 만만한 놈한테 아쉽게 삼진을 당하면.’
자기자신의 문제로 돌릴 거다. 내가 너무 방심한 나머지, 이런 공도 못 쳤다고.
물론 무브먼트를 직접 눈으로 봤으니, 그렇지 않다는 걸 타자 스스로도 잘 알겠지만. 어쨌든 바짝 집중하겠지.
앞선 타석에서 스스로 얻어낸 정보를 믿으면서. 그리고 이제는 깨달을 거다. 볼썽사나운 첫 타석에서 유일하게 얻어낸 그 정보, 타이밍조차···
“스트라이크!”
무가치하다는 것을.
한 타순이 돌았고, 4회 말부터는 다시 1번타자, 카를로스 고메즈부터 시작된다.
첫 타석에서도 냅다 휘두르다가 헛스윙 삼진을 당해 놓고, 이번에도 초구부터 휘두르네.
초구부터 하이 패스트볼.
구속은 87마일이다. 전력투구도 아니고, 완급조절도 아니고. 그냥저냥 적당~하지.
훨씬 아래로 멋지게 헛스윙한 타자는 생각보다 눈치가 좋은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느낌이 다르지?’
구속이 더 빨라진 건 아니다. 갑자기 무브먼트가 더 좋아진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다를 거다.
이제부턴 아쉬운 코스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은 뒤, 나는 쉬지 않고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아웃!”
이미 망가진 타이밍으로는 당겨진 인터벌을 따라가지 못한다. 물론 아직 가속이 다 붙은 건 아니기에, 평소와 비교하면 그저 약간 빠른 정도겠지만···
‘오늘은 엄청나게 빨라진 거지. 22초대에서 갑자기 몇 초가 줄었으니까.’
4구째, 바깥쪽으로 쭉 빠져나가는 서클 체인지업에 타자는 타격동작을 다 이행하지조차 못하며 자세가 무너졌다.
그렇게 첫 타석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삼진아웃. 이번 경기 7번째 탈삼진이다.
‘이번엔 바깥쪽으로.’
그 뒤로 올라온 우리 선배님께서도 바뀐 타이밍에 영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첫 타석은 몸쪽으로만 쑤셔 박았는데, 이젠 좌우를 가리지 않으며 빠르게 집어넣으니.
“던져, 던져!”
“아웃!”
좋은 선구안마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채 마운드 앞 땅볼로 1루를 한참 남기고 아웃.
그다음 노마 마자라. 얘는 뭐, 제일 쉽지. 이번 경기에서. 최근 타격감이 좋아가지고 좀 걱정했었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그보다는 타고난 기질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바깥쪽에서 쭉 들어오는 서클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걸 보면.
불안한 기운이 그라운드에 감돈다. 근원지는 그라운드 위의 관중석.
그곳을 꽉 채운 사람들이 내뿜은 기운이 그라운드까지 침범했다. 이제 슬슬 진짜로 불안하거든.
“퍼펙트 당하는 거 아니야?”
한 타순이 돌고, 두 번째 타석이 왔는데도, 저 사람들 입장에서 어글리 코리안일 내가 여전히 자기네 타자들을 잘만 때려잡으니까.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경기 초반보다도 더욱더 철저하게 찢어발기고 있고.
이젠 진짜로 불명예를 당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거기다 내가 시범경기에서 엇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으니, 더 불안할 테고.’
화이트삭스전에서 7이닝 퍼펙트를 했었다. 물론 그때는 타자들이 좀 마이너가 많이 섞였었지만.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지.
전국적으로 내 인기를 확 끌어 올리고, 팀을 위한 이타심을 보여서 1선발을 확정지었던 경기이기에.
텍사스 관중들 중에서 아는 양반이 몇몇 있을 거다. 시범경기기는 해도, 엄청난 이슈였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더욱더 불안하게 나를 보고 있을 테고.
‘할 만한 것 같지만, 솔직히 힘들지. 지금 같은 속도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나는 그런 삿된 욕심을 갖지 않았다. 오늘 내 목적은 그저 원정 경기를 잘 마치는 것.
그리고 삼진을 많이 잡아서 굳이 글로브 라이프 파크의 위용을 느끼지 않는 거니까.
‘나야 아무 생각없지만, 관중들뿐만이 아니라, 타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일이 더 쉬워지기는 하겠네.’
마운드를 내려가며 상대팀 벤치를 봤다. 그들도 나를 봤고. 이글이글 눈빛이 타오르는데, 그 모습을 보니 궁금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조급하게 굴까? 아니면 어떻게든 나가겠다며 신중해질까?
‘어느 쪽이든지, 나는 그냥 받아먹으면 되는 거지.’
####
벤치는 조용했다.
“···멍청한 분석팀 새끼들.”
“어딜 봐서 땅볼을 노린다는···”
개개인이 내는 한탄 비슷한 말이 감돌기는 했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더 조용했다.
위협적인 루키 투수.
그 단어 앞에 긴장한 선수는 없었다. 분석실에서 그 실력이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잘 실감나지는 않았으니까.
경기 초반, 3이닝을 내리 막혔을 때까지도 벤치에는 활기가 감돌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열이 올랐다.
“공이 좀 좋기는 해도, 칠만 하던데?”
“존 안으로 몰리는 것 같지 않아?”
“제구가 좋다고 해도 그래봤자 루키잖아?”
공격적으로 치기 좋은 곳 위주로만 날아오는 공. 솔직히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애송이답게 원정경기라는 무게감에 공이 몰리는 것 같았으니까.
다만 적극적으로 삼진을 잡는 모습에, 맞춰 잡으려는 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지만.
“누가 먼저 칠 거 같냐?”
“나는 고메즈에 한 표.”
“추도 슬슬 타격감 올라오지 않았나?”
“난 추에 30달러.”
그렇기에 서로 내기를 하기도 했다. 다시 타순이 시작됐을 때, 누가 먼저 출루할지에 대한 것으로.
그토록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4회 말이 지난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메이저리거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저 투수가 달라졌다는 걸.
“스트라이크 아웃!”
5회 말이 시작되고, 다시금 삼진 쇼가 이어졌다. 이번 경기 아홉 번째 삼진.
크게 헛스윙한 4번타자 마이크 나폴라는 험악한 표정으로 덕아웃에 오는 즉시 헬멧을 내동댕이쳤다.
오늘만 헛스윙 삼진을 두 번이나 당했으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겠지.
“···어때?”
평소라면 흥겹게 놀리거나, 장난을 쳤겠지만, 타자들은 그에게 몰려들었다. 앞서 4회 말 때와 마찬가지로.
“그냥··· 빨라. X발 저게 80마일대라고? 스피드건 고장난 거 아니야?”
“인터벌이 엄청 빠르던데, 타이밍은 어때?”
“타이밍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른 투수가 올라온 느낌이야. 저 새끼 쌍둥이 아니야?”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비웃을 수는 없었다. 벤치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4회 말을 기점으로 달라졌으니까.
심지어 탄력을 받은 듯, 동작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졌다.
“무슨 마크 벌리도 아니고···”
“아, 그래 그런 느낌이네.”
“구속도 비슷한데? 다른 건··· 쟤가 더 나은 것 같지만.”
재작년에 은퇴했던 마크 벌리보다 살짝 느린 인터벌. 허나 기존에 훨씬 느리게 던졌기에 어떤 의미에서 인터벌의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삼진이 많이 나왔던 것 치고는, 1회부터 3회까지는 제법 시간을 잡아먹은 투수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5회 말은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10번째 삼진과 5이닝째 퍼펙트를 채우고 다시금 내려가는 투수를 보며, 그리고 그런 투수에 경악하고, 또 분노하는 관중들을 보며, 타자들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지금 우리가··· 정말로 퍼펙트를 당하고 있는 건가? 이제 빅리그에서 두 번째 경기를 치르는 애송이한테?
그것도···
“이게 무슨 개망신···”
“에인절스 새끼들 루키한테 개막전에서 처발렸다고 비웃었는데···”
알링턴에서?
멍한 심정으로 주섬주섬 수비를 위해 나가던 타자들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뭐라도 좀 해보라며 독촉하는 홈팬들의 눈빛이.
아이러니하게도, 투수의 퍼포먼스가 일정치를 넘어서자, 관중들의 비난은 투수가 아닌, 타자들에게로 향했다.
잘하는 상대팀 투수보다, 허무하게 털리는 타자들이 더욱더 못마땅하게 느껴진 거지.
“한 점만 내라고 새끼들아!”
“어제는 X발 X나게 쳐놓고 오늘은 왜 그 모양이야!”
그나마 아직 폭발하지 않은 건, 우리 쪽도 투수가 잘 막고 있다는 거였다.
매 이닝마다 안타를 하나씩 내주기는 했지만. 아직 실점은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잘 막고, 다음 이닝은 제발 좀-”
그렇기에 아직 폭발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어- 어어-”
“홈! 홈!”
“세이프!”
6회 초. 결국 애슬레틱스가 먼저 0대0의 살얼음판을 깨트렸다.
지난 경기, 서로 엄청난 점수를 조가 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겨우 한 점에 불과하지만. 전광판 높이 떠오른 1이라는 숫자가 주는 압박감이 레인저스를 짓눌렀다.
야구에서 1점차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마운드를 막아서고 있는 게 퍼펙트 중인 투수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어떻게든 쳐야 돼.”
다행히 추가 실점은 막았지만, 균형은 무너졌다. 퍼펙트, 거기에 점수마저 뒤지는 상황.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굴리기만 하면 기회는 있어.”
“오클랜드 새끼들 수비 더럽게 못 하니까, 그냥 억지로라도 때려 맞추면 돼!”
관중들마저 독촉하고 있기에,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들도 이 균형을 깨야 했고. 그러지 못한다면 최소한 퍼펙트라도 망쳐야 했다.
“스트라이크!”
6회 말이 시작되고.
공격적인 투수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레인저스 타자들 역시 보다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스윙했다.
“스트라이크!”
포수마저 눈이 동그래질 만큼 위협적인 스윙이 홈 플레이트를 갈랐고, 7번타자 조이 갈로는 어떻게든 맞추겠다는 듯이 악소리를 내질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스트라이크.
철저히 농락당하며 동료가 쓰러졌는데도, 오히려 더욱더 큰 조급함이 점점 더 타자들을 옭아맸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뒤이어 8번타자 라이언 루아 역시 삼진.
“엘비스 제발 좀 쳐줘!”
“하나만 날려, 하나만!”
“홈런도 필요 없고, 안타 하나, 1루타만 하나 쳐!”
앞의 동료들이 모조리 쓸려나간 상황에서, 이번 이닝의 마지막 희망이 된 엘비스 앤드루스가 팬들의 염원을 짊어진 채 타석에 올랐다.
‘후우, 침착하게 하자, 침착하게. 조급해져서 좋을 게 없어.’
앞에 삼진을 당했던 동료들이 반면교사가 되어줬던 덕분인지, 그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타석에 올랐다.
‘앞선 정보는 잊자, 새로 타이밍을 쌓는거야.’
마치 처음 보는 투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첫 번째 타석에서 했던 노력의 의미가 사라지는 셈이지만, 그는 이게 정답이라고 믿었다. 어차피 아예 다른 투수나 다름없으니까.
“스트라이크!”
‘포심, 생각보다 더 빠르다. 타이밍이 훨씬 당겨졌어. 거의 94~5마일 정도 수준이야.’
치기 좋게 들어온 공을 애써 꾹 참은 그는 억지로 공을 눈에 담으며 차근차근 타이밍을 쌓았다.
“볼!”
“파울!”
“볼!”
“파울!”
하나씩 커트. 손목이 아릴 정도로 묵직한 공들이나, 가까스로 파울라인 너머로 쳐냈고, 타이밍은 서서히 잡혔다.
비록 인터벌은 빨라졌다지만, 정말로 새로운 투수가 올라온 것은 아니기에, 동작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똑같은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됐고.
‘왔다. 낮은 체인지업.’
노리고 있던 낮은 서클 체인지업을 퍼올린 그는 기분 좋은 손맛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뛰어! 뛰어!”
“이예에에에에에에!”
좌중간을 가르는 타구.
비록 힘이 실린 장타는 아니지만, 적절한 위치에 떨어진 공에 관중들은 마치 홈런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쳤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홈런 그 이상의 값어치를 가졌지. 퍼펙트는 물론 노히터까지 깨트렸으니까.
“우리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바로 역전 가자!”
“엘비스! X발 사랑한다! 넌 King이 될 거야! 이름값을 할 거라고!”
사랑이 듬뿍 담긴 환호성에 엘비스 앤드루스는 기분 좋게 웃었고, 글로브 라이프 파크 인 알링턴에는 다시금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쨔스!”
모두가 취한 사이 순식간에 올라간 삼진과 그것을 끝으로 기분 좋게 웃으며 내려가는 투수에 불현듯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
퍼펙트라는 거대한 굴욕 앞에서 잊었던 것이 떠올랐으니까.
다행히 루키에게 퍼펙트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제 갓 2번째 등판을 한 녀석에게 6이닝 13탈삼진이라는 성적을 내줬을 뿐.
그토록 바랐던 퍼펙트가 깨졌고, 꼴보기 싫었던 투수도 마운드에서 내려갔지만, 그 뒤로도 경기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