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67화 (67/316)

67화

편하게 자고 일어났다. 대도시의 호텔이 좋긴 좋아. 침대가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집보다 훨씬 더 푹 잔 것 같네.

깔끔하게 목욕재계를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니, 먼저 온 건지, 몇몇 선수들이 보였다.

오클랜드에서부터 같이 왔던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이들도 있었고. 조식을 받아들고 기웃거리니, 크리스 데이비스가 손을 흔들었다.

“Suck! 여기 앉아.”

온 동네에 다 들릴 정도로 크게 Suck이라고 외치니, 익숙해진 우리 선수들이나 스태프들은 그러려니 했지만.

일반 고객들은 흘끔흘끔 쳐다본다. 분명 내 이름인데 괜히 좀 부끄럽네.

“사람 많은 곳에서는 Go라고 해요, 쪽팔리니까.”

“허, 네 스스로 이름에 자부심을 가져야지! 난 누가 크리스라고 외쳐도 상관없다고?”

그건 니가 크리스라서 그렇지 이 새끼야. 한숨을 푹 내쉬니 크리스 데이비스와 다른 선수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낄낄거렸다.

진짜 개명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표기 정정 신청이라도?

처음 미국 넘어오면서 무식한 탓에 여권에 이름을 잘못 표기했던 게 여기까지 올 줄이야.

아니 그보다도 이상한 것 같으면 여권 발급해줄 때 말을 해줘야지. 이건 미국에서 이러이러한 뜻입니다, 라고.

‘사실 정상 표기는 Yoo-Suk이니까 고친다고 하면··· 여전히 썩썩 거리겠네.’

사실 안다.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 이름 자체가 영어랑 쪼오끔 안 맞는다는 걸.

뭘 어떻게 표기를 하든지 어차피 발음은 거기서 거기니, 다 똑같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이름이라도 하나 만들고 왔어야 하는 건데.

“크리스, 절 이제부터 데이비드라고 불러 줄래요?”

“응? 그건 또 무슨 Suck같은 소리야, Suck. Suck 네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하라고. You-Suck, 얼마나 웃긴- 아니, 좋은 이름이야?”

“그래그래, Suck 네 이름은 정말로 멋지다고! S-U-C-K, 썩! 얼마나 아름다운 발음이야?”

저저 일부러 Suck을 강조하는 것들 좀 봐라, 저거. 이제 와서 영어 이름을 짓는 것도 글러먹었겠네.

한숨을 내쉬며, 대충 접시의 음식을 긁어먹었다. 사실 나도 진짜로 빈정이 상했다거나,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진지하게 놀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평소에도 종종 이름 가지고 장난치는 편이기는 한데, 이 정도는 아니거든.

‘긴장이 조금 더 풀렸네.’

루키의 첫 원정경기.

나도 아예 긴장이 없지는 않았고, 저 양반들도 그걸 잘 알 거다. 그러니 적당히 농담이나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는 거지.

“Suck, 혹시 너 아는 사람 중에는 이름이 Fuck인 사람 없어?”

“S에서 F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 한 명쯤 있을 수도 있겠는데?”

아닌가? 그냥 놀리는 건가?

어쨌든 잡담을 나누다보니, 일말의 긴장감마저 말끔하게 해소됐다.

이제 남은 건 그런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준비하는 것.

‘대니얼은 경기장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대니얼은 같이 못 왔다.

구단이 기자들은 전세기에 같이 태워주고 다닌다지만, 선수의 가족이나 개인 스태프들은 전세기 대신, 선수 본인이 알아서 개별적으로 챙겨야 하거든.

그렇기에 대니얼은 다른 비행편으로 오늘 막 도착할 예정이다. 내 등판에 맞춰서.

‘슬슬 도착했겠네. 경기장 가면 딱 만나겠어.’

내 돈으로 지불했냐고?

아니, 아직 그런 여유는 없다.

메이저리거 연봉은 시즌 기간에 맞춰서 2주에 한번 씩 주급 꼴로 지급이 되는데, 난 아직 못 받아서 개털이거든.

또 브라이언에게 손 벌린 거지.

‘진짜 잘해야겠네. 대니얼 연봉도 브라이언이 지원해주는데, 그거 다 본전 뽑아주려면. 진짜로 잘해야겠어.’

주변에 물어보니까, 선수 한 명에게 에이전트가 이 정도로 지원해주는 건 드물다고 하던데.

그만큼 브라이언이 나한테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거겠지.

음, 어깨가 무겁구만.

‘빅리그 올라가면 버스 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네.’

홈에서는 그냥 알아서 자율적으로 경기 일정에 맞춰서 출근하면 되지만, 원정 시리즈는 다 같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일단은 적지이고, 낯선 곳이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는 거지.

“Go, 딱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진 않으셨어요?”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일단 바로 몸부터 푸시죠.”

경기장에 도착하니, 먼저 온 대니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칼 같이 지키네. 조금 늦을 줄 알았더니.

그 외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여행길은 편안했느냐 거나, 숙소는 어떻게 할 거냐는 거 말이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코앞에 있으니···

‘컨디션도 좋고, 좋은 트레이너도 딱 맞춰서 왔겠다.’

상대팀 조질 준비부터 완벽하게 해야겠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한국인은 둘로 나뉜다. 상대 팀 한국인과, 우리 팀 한국인으로.

상대 팀 한국인에게는 당연히 야유나 비난이 뒤따른다. 그냥 상대 팀 선수니까.

그리고 우리 팀 한국인에게는 야유와 비난이··· 아무튼 오늘 내 목표는 야유와 비난이다.

이번 경기에서 홈관중들에게 X같은 놈이 되게 만드는 거다. 내가 그렇게 될 거냐고?

아니, 상대 타자들 말이야.

‘죄다 잡아 족쳐서 삼진을 만들어야지.’

그래서 관중들이 타자들을 욕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은 있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애초에 이런 스타일의 피칭이야말로 나한테 가장 익숙한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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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 피칭 영상입니다, 이 장면을 보시면···”

하루 전. 아직 난타전 경기조차 없었을 때. 홈으로 돌아온 레인저스 선수단은 분석실로 모였다.

이번 시리즈 상대팀인 에인절스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데이터를 전해 듣기 위해서.

먼저 1차전 선발투수인 앤드류 트릭스에 대한 분석이 있었지만, 진짜는 그다음부터였다.

‘고유석, 쟤도 좀 고생하겠네.’

스크린 가득 떠오른 프로필과 그 가장 상단에 위치한 이름에 장내는 은은한 웃음이 감돌았다.

“이야, 저게 진짜 이름이었어?”

“난 또, 콜 네임인줄 알았지.”

“Go You-Suck,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네.”

시범경기에서 한 차례 상대해본 투수. 그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다만 그게 콜네임 같은 별명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추민수는 저 어린 후배가 꽤나 고달팠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야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이름이지만. 여기선 동료들 반응만 봐도 굉장히 독특하니까.

“포심 패스트볼 평균구속 85마일대에, 최고구속은 89마일입니다.”

거기다가 느린 구속까지.

이것만 보면 이 투수는 앞서 언급된 앤드류 트릭스보다도 더욱 볼품없는 투수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타자들이 꽤나 존재했다. 에인절스가 바보인 거지, 이 투수는 허접하다고.

시범경기에서 상대해본 선수들이야 물론 생각이 달랐지만. 애초에 그 경기는 주전급이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만하다는 분위기 속에서 분석관은 선수들에게 주의를 주듯 말했다.

“네, 볼품없는 구속이지만··· 포스트 매덕스라고 불릴 만큼 스터프는 상당합니다. 특히 지금 언급한 포심은 엄청난 수준의 수직 무브먼트를 보이죠.”

“엄청난 수준이라면···?”

“흔히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도 하죠. 그런 종류입니다.”

엄청난 무브먼트.

저번 경기의 영상에서 포심이 보여준 무브먼트는 대단했다.

투수 뒤쪽에서 찍은 카메라로 봤을 때, 그냥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그래 저거지, 의외로 구속이 느리긴 해도, 포심이 복병이야.’

라이징 패스트볼.

만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같지만, 의외로 현실에서도, 특히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만화처럼 떠오르는 종류의 패스트볼 구종은 아니다. 수직 무브먼트가 대단하여, 패스트볼이 덜 가라앉는 경우 타자의 눈에는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기에,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부르는데.

고유석이 던지는 포심 역시 그런 종류로 분류될 수도 있었다.

“거기다 볼끝이 지저분해서, 빗맞은 타구를 쉽게 만들죠. 또한 덩치를 이용해서 투구 동작 때 공을 끝까지 숨기기에, 더욱 빠르게 느껴지고요.”

쉽게 말해서 구속이 느린 다신, 나머지를 다 갖추고 있는 팔방미인이라는 건데, 사실 이런 종류의 공에 대한 대처법은 딱히 없었다.

그냥 타이밍에 잘 맞춰서, 정확하게 때려내는 것 외에는. 제구가 좋은 투수라서, 몰리는 실투도 적다고 하니까.

‘영진이랑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느낌이네. 구종도 엇비슷한 것 같던데.’

다른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추민수 역시 신기한 듯 영상에 빠져들었다.

처음 그가 생각했던 고유석이라는 후배는, 또 다른 선발투수 후배인 류영진의 구속이 느린 버전이었다.

체인지업을 잘 사용하고, 제구가 좋으며, 구종이 많다는 게 엇비슷해 보였으니까. 거기다 좌완이기도 하고.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수록 조금씩 궤도가 달라졌다.

포심의 타이밍 중간 끼워 넣는 투심과 좌타자에게 자주 던지지만, 종종 바깥쪽으로 걸쳐서 루킹 삼진을 만드는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 마스터라는 별명마저 붙을 만큼 다양하고 강력한 세 가지 구질의 체인지업까지.

모든 설명이 마쳤을 때, 처음과 같은 가벼운 분위기는 없었다. 특히나 우타자들은 한숨을 내쉬는 이들마저 있었고.

개막전의 하이라이트 장면.

똑똑히 보여줬던 서클 체인지업은 우타자들에게 공포와도 같았으니까.

물론 좌타자들도 마찬가지고.

좌타자 기준으로 몸쪽으로 빨려들어가는 역회전이 강한 서클이야 그나마 괜찮겠지만···

‘저걸 대체 어떻게 구분해서 던지는 거야? 낙폭이 무슨 포크볼 수준이네. 영진이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젊은 투수들은 구종을 너무 쉽게 배우는 거 아니야?’

홈 플레이트 앞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변화를 보이는 낙폭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은, 서클보다는 오히려 포크볼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추민수와는 달리, 포크볼에 익숙치않은 다른 타자들은 스플리터 아니냐며 수군거리기도 했고.

“개막전에서 아홉 개의 탈삼진을 올렸고, 시범경기에선 엄청난 삼진율을 보여줬지만. 지능적인 피칭을 하는 투수이기에,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선 조금 다를 겁니다.”

표본이라고 할 게, 시범경기와 개막전밖에 없는데도 굉장히 길었던 분석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계획이 세워졌다.

머리가 좋고, 제구력이 좋으며, 스터프도 갖췄으니, 분석팀에서는 지능적으로 맞춰 잡을 거라는 예상을 했고. 타자들도 어느 정도는 동감했다.

실제로 글로브 라이프 파크를 홈으로 쓰는 레인저스도, 과거에는 싱커와 투심 위주의 땅볼투수를 적극적으로 양산하려고 했으니까.

그건 장타가 잘 나오는 홈구장을 가진 팀들의 어쩔 수 없는 비애다. 쿠어스를 홈으로 한 콜로라도 로키스도 그런 종류의 투수를 원하고 말이다.

‘포심이랑 투심을 적극적으로 섞어서 쓰면, 좀 까다롭긴 하겠네.’

정말로 머리가 좋은 녀석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야금야금 밑밥을 던지다, 마지막 순간 트라웃을 잡을 때는 분명 똑똑한 사냥꾼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투심 자체는 그리 수준높은 종류의 구종은 아니지만, 포심과 투구폼과 릴리스 포인트가 똑같은 탓에 땅볼을 유도하기 쉬워 보이기도 했고.

‘쉬운 길이 있으니, 그쪽을 선택하겠지.’

구위도 좋은 녀석이니 맞춰 잡는 것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고.

‘바깥쪽 위주로 제구하겠네. 컨트롤이 좋아 보이니까, 집중해야겠어.’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1차전은 엄청난 난타전이 열렸다.

레인저스 타선이 폭발하며 상대 선발투수를 철저하게 때려눕혔고, 대승에 홈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 1차전으로 인해서, 다음 경기, 2차전 선발투수에 대한 예측도 더욱더 확신에 찼다.

이런 광경을 코앞에서 봤는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트라이크!”

그런 예측은 2차전 경기가 시작되고, 1회 말 선발투수가 마운드에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마운드에 오른 고유석은 분석 영상으로 봤던 개막전보다도 훨씬 더 공격적인 모습으로 레인저스를 맞이했으니까.

####

타자가 공을 못 치게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못 칠 수밖에 없는 공, 예를 들어 100마일짜리 크로스파이어나,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서클 같은 걸 던지거나.

‘아니면 못 칠 수밖에 없는 코스로 공을 던지거나.’

참고로 난 둘 다 가능하다.

앞에 언급한 것들 수준이라는 건 아닌데, 내 서클도 충분히 못 칠 수밖에 없는 공이고.

코스는 내가 제구가 좋잖아?

다만 못 치는 공과 다르게, 못 치는 코스는 항상 가변적이다. 상황에 맞춰서 항상 베스트가 바뀌거든.

상대 타자가 뭘 노리고 있는지, 어느 코스를 좋아하고 어디를 싫어하는지, 그걸 고치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검토해서 하나씩 선택지를 제거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 내지는 둘 정도가 남는다. 거기다 던지는 거지.

이것들을 갖추면 삼진을 잡을 수 있다. 근데 이거야 당연한 거고, 더 적극적으로 잡으려면 하나가 더 필요하지.

‘타자가 타이밍을 못 잡게 만들어야지.’

이것도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내가 가장 선호하는 건 하나다. 바로···

“스윙! 스트라이크!”

배트가 나오게 만드는 것.

헛스윙은 타이밍을 망친다.

스윙 순간 결국 어쩔 수 없이 시야가 흔들리기에, 공이나 투수의 타이밍을 똑바로 확인하지 못하거든.

물론 간혹 괴물 같은 작자들은 스윙을 하면서도 공을 또렷히 지켜본다고도 한다. 매덕스가 그토록 싫어했던 X같은 토니 그윈처럼.

몇몇 소수에게 해당되는 축복인데. 다행히 뻥파워가 강한 레인저스에는 몇 없다. 그 몇 없는 X같은 놈들 중 하나인 벨트레는 부상으로 빠졌고.

‘헛스윙이 나오게 만들려면, 타자가 휘두를 수밖에 없는 코스로, 그 비슷한 위치로 넣어야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치기 좋은 코스로 던지면 안 된다. 그게 무슨 헛스윙 유도야? 그냥 실투지.

아슬아슬하게, 약간 부족한 정도로 던지는 게 기술이다.

그래야 타자가 헛스윙을 하면서도···

‘타이밍은 거의 맞췄다는 착각을 하니까.’

1번타자 카를로스 고메즈.

우타자에 중견수인데.

그리 타격은 좋지 못한 선수다. 타율과 출루율의 갭차이를 보아, 컨택이 문제겠지.

그 부진한 타격 때문에 애스트로스에서 지명할당 이후 방출을 당했다가.

작년 우리 추민수 선배님의 부상으로 대체자원으로서 텍사스에서 데려갔고. 후반기 동안 그럭저럭 활약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좋은 타자는 아니지.’

“스트라이크 아웃!”

특히나 이미 한 차례의 방출을 겪은 탓에 절박한 만큼 배트는 쉽게 나왔다.

내내 몸쪽으로 넣다가, 4구째에 바깥쪽으로 던진 슬라이더에 배트는 헛돌았다.

약간 모자란 정도였으니, 아쉽겠지.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 거고. 그에게 씨앗을 심어준 뒤, 뒤이어 딱딱한 표정으로 올라오는 타자를 봤다.

‘한국에서 시청률 좀 오르겠어.’

왠지 좀 반갑네.

촌스럽다고 그럴 지는 몰라도, 그냥 한국인 보면 괜히 친한 척하고 싶단 말이야.

2번타자 추민수. 한국인 야수로서 메이저리그에 크게 족적을 남긴 선수이자, 고교야구 직행의 2차 붐을 일으킨 선수지만···

‘지금은 딱 좋지.

상대하게 딱 좋아.

정말로 죄송한 말씀이나, 내 입장에서는 그리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다.

‘갭 파워(Gap-Power)도 준수하고, 홈런도 제법 잘 치지만, 거포는 아니야.’

20홈런 시즌이 네 번이나 되는 만큼 파워 자체는 준수하다. 특히 중장거리타를 만드는 힘은 확실하게 있다.

다만 전통적인 거포 유형이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적극적으로 홈런을 만든다기보다는, 종종 잘 맞은 타구가 준수한 파워와 어우러져 담장을 넘어가는 형식이니까.

‘고점을 본다면, 선구안도 좋고 기본적인 컨택과 파워도 준수해서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지금 추민수라는 선수는 고점을 지나 내려가는 중이다. 특히 올해는 작년에 많은 경기를 잔부상으로 날린 것도 여파가 있을 거고.

‘슬로우 스타터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타격감이 올라오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거기다가 나는 좌완투수지.

좌투수 상대로 바보까지는 아닌데, 확실히 좀 떨어지는 감은 있다. 사사구로 인한 부상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게 유력한데···

‘그걸 적극적으로 노려야지.’

스티븐 보그트에게 사인을 보낸 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초구를 던졌다.

몸쪽으로 꽉찬 투구.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다, 급격하게 꺾이는 슬라이더에 타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스트라이크!”

선구안이 좋은 타자지만, 지금은 분명 흔들렸다. 좌완 투수의 몸쪽 공에 약하다는 평가가 주류던데, 진짜였네.

한편으론 눈빛도 달라졌다.

대놓고 약점을 찔렀으니,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면서, 한층 더 집중하는 거겠지.

마치 내가 뭘 던질 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쏘아보는데, 정말로 그럴까?

‘아닐 텐데.’

와인드업, 그리고 던진 2구.

“파울!”

간신히 쳐낸 타구가 포수 뒤로 넘어갔다. 타자의 눈빛은 한층 더 뜨거워졌고. 이번에도 몸쪽이었거든.

손잡이 부분에 맞았다. 중간에 멈추기는 했지만, 배트 궤적을 보아 몸쪽을 노린 스윙은 아니다.

‘카를로스 고메즈도 그렇고, 바깥쪽 공에 신경을 쓰는 눈치였지.’

예상이 가네.

어제 잔치도 열렸으니, 내가 쫄아서 땅볼이라도 유도할 줄 알았던 건가? 난 원래 맞춰 잡는 걸 못했던 사람이야.

맞춰 잡으려고 맞춰 잡는 게 아니라, 구위가 좋아서 땅볼이나 뜬공이 자주 나오는 거고.

“볼!”

“볼!”

“파울!”

이게 원래 내 방식이지.

집요하게 몸쪽으로만 던지는 피칭. 좌완에 대한 약점을 제외하더라도 역시나 당겨치는 파워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당긴 타구는 1루 쪽 관중석 너머로 날아갔다. 공 잡은 사람은 횡재했겠네.

그것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남은 건···

‘기본적으로 선구안이 좋아. 어설픈 유도는 금방 파악하겠지. 그러니 타이밍을 흔들기보다는···’

“스트라이크 아웃!”

‘머리로 낚아야지.’

또다시 몸쪽. 약간의 분노와 묵직한 힘이 섞인 스윙이 나왔지만, 공은 스윙이 지나간 뒤에나 글러브로 들어갔다.

체인지업. 쓰리핑거다.

‘은근히 쓸만하다니까.’

역회전이 강한 서클은 잘못 던졌다가 맞출 수도 있으니 조금 그렇고. 낙폭이 강한 V1은 골라낼 것 같더라고.

크게 헛스윙한 타자, 추민수는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맞나?’

처음부터 끝까지 몸쪽으로만 집요하게 넣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만도 하지.

그래도 후배 된 도리로서 최대한 머리 써서 잡았습니다. 그걸 알아주십쇼.

‘마지막으로 노마 마자라.’

1회 말의 마지막 타자(예정)인 타자가 올라왔다. 요주의 인물로 꼽혔던 타자 삼인방 중 하나인 노마 마자라.

얘도 좌타자인데, 어찌 보면 앞선 타자와 비슷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조금 더 편하지. 왜냐고?

‘좌상바 하이?’

훨씬 더 심한 좌상바거든.

작년 2016시즌 평균 OPS가 7할 3푼 9리에, 우투수 상대 OPS가 7할 9푼인데, 좌투수를 상대로는 5할 4푼일 정도로. 그게 무슨 뜻이냐면.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내 첫 메이저리그 원정의 첫 이닝을 장식하기에 딱 좋은 타자라는 뜻이다.

세 타자 연속 삼진.

그것을 알리는 주심의 우렁찬 삼진콜이 마치 선전포고처럼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울리자. 원래도 적개심 가득했던 관중들의 시선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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