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64화 (64/316)

64화

트라웃이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신은 아니다. 결국 사람인 만큼 약점이 존재하지.

‘트라웃 작년 bWAR이 10.5였던가? fWAR이 9.7이고. OPS가 .991이었지 아마? 10할 아쉽게 못 찍었네, 십할.’

아닌가?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성적을 다시금 곱씹으니까, 더 괴물 같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정정한다. 신은 맞는 것 같은데, 어쨌든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은 존재한다.

내가 공략해야 할 건 그 일말의 양심. 그걸 최대한 이용해야겠지.

앞의 타자들이 손쉽게 처리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간은 경계하는 눈치라서 조금 쫄리지만, 그대로 던져야지.

‘초구가 가장 중요해. 인상을 박아 넣어야 하니까.’

홀로 고민했다. 트라웃이라는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잡아야’하는가.

그냥 거르면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겠지만, 그래도 데뷔전인데, 최대한 부딪쳐는 봐야지. 이미 계획도 세워 뒀으니까.

슬쩍 사인을 보내니, 스티븐 보그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트라웃의 대표적인 약점은 둘이지. 첫 번째는 하이 패스트볼. 의외로 하이 패스트볼 대처에 약한 모습을 보였어. 어퍼 스윙으로 낮은 공을 퍼 올리는 걸 선호했으니까. 다만 재작년부터는 오히려 그런 하이 패스트볼을 잘 대처했지. 올해는 또 다른 것 같지만.’

수준 높은 하이 패스트볼.

트라웃의 대표적인 약점이다.

아니, 대표젹인 약점이었다.

사실 좋은 하이 패스트볼에 약한 건 대부분 타자가 다 똑같다. 그러니 트라웃만의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그마저도 재작년부터는 잘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었지.

그렇기에 진짜는 두 번째다.

이건 꽤 유의미하거든.

트라웃의 대표적인 성향이고.

‘출루율이 높지, 선구안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의외로 삼진이 제법 높아.’

높은 출루율과 높은 삼진.

약간 모순적인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게 아니다. 특히나···

‘공을 지켜보는 타입이니까.’

트라웃처럼 훌륭한 선구안에 기대어, 공을 보는 성향의 타자라면 말이야.

그런 특유의 성향은 초구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병적이다 싶을 만큼, 거의 모든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초구에 스윙하지 않거든.

올라간 스트라이크. 꽁으로 카운트 잡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카운트가 아니라, 트라웃의 눈이다.

‘제대로 지켜봤어.’

내가 초구로 던진 건 서클이다. V2, 역회전이 강한 놈이지. 가장 좋은 공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장 덜 위험하거든.

‘다른 공이 이렇게 읽혔다면, 그다음부터는 힘들겠지만. 서클은 괜찮아. 몇 번 본다고 해서 바로 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역회전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은 리그 탑급이다. 실제로 여러 평가에서 70점, Plus-Plus등급을 받았으니까.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현재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커쇼의 커브와 똑같은 등급이다. 최소한 이거 하나는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거지.

그러니 아무리 트라웃이라고 해도, 처음 한 번 지켜본 거 가지고는 못 친다. 못 칠 거다. 못 쳐야 한다. 그렇게 믿었다.

‘바둑을 둔다고 생각하자. 차근차근, 하나씩 깔아 놓는 거야.’

어쨌든 머릿속에 똑똑히 박아 넣은 서클. 나쁘지 않다. 포석을 하나 놓았으니, 차근차근 수싸움을 하는 거지.

‘어설프게 허를 찌르면 X된다. 위험한 곳부터 지우자.’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타석이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다.

핫존으로 몰리지 않도록 기를 쓰고 제구를 잡는 동시에, 힘도 확실하게 줘야 했으니까.

‘그나마 몸쪽 낮은 코스. 그거 하나가 파랗지. 나머진 시뻘겋거나, 분홍색이고.’

트라웃의 핫 콜드 존은 심플 하다. 사각형의 스트라이크존의 안쪽은 빨갛고, 밖은 파랗다.

철저하게 선구하면서, 안으로 들어온 건 그냥 날린다는 거지. 존 안으로 넣는 것 자체가 힘든 타자지만, 그나마도 푸른 곳이 있다면 몸쪽 낮은 코스.

애초에 다른 타자들도 섣불리 치기가 힘든 코스니, 콜드존인 게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코스라도 쑤셔 녛어야지.

“파울!”

오메 씨봉탱.

낮게 깔아 넣은 포심.

그걸 냅다 퍼올린 트라웃의 스윙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다행히 페어는 아닌데, 안으로 들어왔으면, 주력도 좋은 선수라서 바로 2루타였겠네.

‘심장 떨려서 살겠나. 그래도 포심도 지켜봤고. 천천히 가자, 천천히. 일단 투 스트라이크 잡았으니까. 조급하게 가면 안 돼.’

주문을 외우듯이 내 자신에게 철저하게 당부하며 차근차근 카운트를 잡았다.

“볼!”

“파울!”

“볼!”

바깥쪽으로 높은 슬라이더.

몸쪽으로 욱여넣은 투심.

뚝 떨어지는 낮은 서클 V1순으로 던졌는데. 개같네, 진짜.

저게 사람 새끼 눈인가? 나갔다 싶으면 미동도 안 하고, 애매한 건 바로 커트하네.

‘그래도 차례대로 잘 보여줬어. 남은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는 거지.’

그래도 다행히 얻어맞지는 않으면서, 계획대로 잘 보여줬다. 이 정도면 잘 한 거지.

이제 남은 건 이번 승부를 어떻게든 종결짓는 것 뿐.

‘어차피 던질 건 하나야.’

다시금 숨을 가다듬고, 트라웃과 눈을 맞춘다. 딴딴한 몸을 과시하며, 뭐든지 날려버리겠다는 눈치인데.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왜 저런 놈이랑 같은 지구고 지랄이야.’

X같아서 못해먹겠네.

오늘이야 묘수로 넘긴다고 쳐도, 다음부터는 안 통할 텐데···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당장에 집중하며 공을 던졌다.

높게. 몸쪽 코스. 그래, 하이 패스트볼이다. 이젠 약점이 아니라고 해놓고, 왜 또 하이 패스트볼이냐 싶겠지만. 그게 또 코스에 따라서 다르거든.

바깥쪽이나, 중앙에서 높은 코스의 하이 패스트볼은 이젠 곧잘 치지만, 몸쪽은 그나마 파랗다.

애초에 모든 타자들에게 힘든 코스이기도 하고. 만약 삐끗해서 조금 높이 뜨거나, 살짝 나간다면, 엿 같은 선구안으로 바로 골라버리겠지만. 그러니 더욱더 집중해야지.

‘첫 타석인데,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공을 던졌고. 내 최대한의 힘을 담은 공이 홈 플레이트로 날아갔다.

따악-하는 날쌘 타격음. 코스를 보아, 파울은 아니다. 다만 넘어가지도 않겠네.

‘제발 잡아라, 제발.’

이제 남은 건 야수의 영역이다. 나도 할 일 다 했고, 타자도 다 했으니, 신에게 비는 거지.

‘타구가 빠르긴 한데···’

외야 좌측 필드로 날아가는 타구. 경기 전 대화를 나누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던 크리스 데이비스의 수비영역이다.

비록 소녀어깨라서, 송구는 별로인 크리스지만, 날쌔게 타구를 쫓았고. 트라웃이라는 강타자를 대비해서 미리 수비라인이 뒤로 물러났기 때문인지.

“아웃!”

마지막 순간 글러브로 타구를 낚아챘다. 깔끔한 아웃. 열심히 달리던 트라웃은 2루를 몇 발자국 남겨두고서 아쉬운 듯 혀를 내둘렀고.

그것으로 내 메이저리그 첫 이닝이 종료됐다.

“Yeaaaaah!”

“그렇지! 이거지!”

“Go 네가 잘할 거라고 믿었어!”

내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개막전이라는 무게감을 이길 수 있을지 기대하고 또 걱정하며 보러왔던 관중들은 깔끔하게 종료된 1회에 만족했다.

다행히 기대치는 채운 거겠지. 저렇게 환호하는 걸 보면.

“Suck, 너 미쳤는데?”

“개막전 망치라고 저주 퍼붓던 새끼들 좀 쪽팔리겠네.”

“지금처럼 딱 8이닝만 더 가자. 혹시 알아? 사무국에서 바로 사이 영 상들고 찾아올지.”

동료들 반응도 좋고.

이닝이 끝나는 즉시, 선수들이 우글우글 다가왔다. 누가 보면 완봉이라도 한 줄 알겠네.

크리스 데이비스는 자랑하듯 활짝 웃으며, 흰 공을 흔들면서 달려오고 있고.

“점수만 내줘. 기왕이면 개막전은 이겨야지.”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데뷔전 승리투수가 되고 싶다고.”

“그래, 그것도 있고.”

“Suck, 너는 열심히만 던져, 우리가 알아서 떠먹여 줄 테니까.”

“자자~ 귀하신 분 덕아웃까지 모셔야 하니까. 다들 앞에서 꺼져.”

자신들만 믿으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는 타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향하던 중. 문득 상대팀 덕아웃을 봤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우리 홈인만큼 흥겨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상대팀, 에인절스의 덕아웃은 홀로 붕 떠 있었다.

약간의 불쾌감. 그리고 투지.

덕아웃 난간에 걸쳐있는 에인절스 선수들.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여유롭던 그들의 눈동자가 모두 나한테 꽂혔다.

흉악하게 생긴 덩치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지지 않고 그들 한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똑똑히 봐둬야지.

오늘 내가 잡을 양반들인데.

조져놓고 얼굴도 기억 못 하면 안 되잖아?

‘그쪽도 마찬가지고.’

마이크 트라웃.

아쉬운 범타를 기록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법 투구수도 끌었고. 내가 가진 손패를 거의 다 확인했으니, 그로서도 손해는 아니겠지.

‘하나 정도는 맞을 거 각오했는데. 다행이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최상까지는 아니지만, 좋은 결과인 건 확실했다.

운이 나쁘면, 홈런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비록 삼진은 아니지만, 첫 타석은 무사히 넘겼으니, 그거면 됐지.

‘뭐, 어차피 삼진으로 잡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지만. 애초에 목표도 아니었고.’

트라웃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승부였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번 타석은 밑밥을 던지는 정도였거든. 천천히 트라웃이라는 대물을 낚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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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말은 금방 끝났다.

삼진 두 개에 땅볼 하나를 기록하며, 상대 선발투수 리키 놀래스코한테 타자들이 죄다 털렸거든.

내용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 낫기에 원정온 소수의 에인절스 팬들의 기세가 살아났다.

“네가 역대급 재능이라고? 웃기고 있네!”

“너보다 리키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저렇게 말하면서 약올리려고 하는데, 불쾌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대단하지.

용감하잖아,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도 오클랜드에서 저짓거릴 한다는게.

물론 우리 팬들은 당장이라도 린치를 가할 기세로 노려봤지만.

어쨌든 기세가 살아난 상대팀 원정팬들 보다는 이번 이닝 첫 타자가 더 중요했다.

이번 경기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타자니까.

‘알버트 푸홀스.’

금방 공수가 교대된 뒤. 시작된 2회 초,

그가 이닝의 선두타자로서 타석에 올라왔다.

‘예전에는 진짜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쩌면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트라웃보다도 더욱 까다로운 타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가 카디널스에서 보냈던 10년은 그저 완벽했으니까.

위대한 타자고, 투수로서 껄끄럽다 못해 두려운 타자였지만···

‘이젠 아니지.’

그 푸홀스는 이제 없다.

정말로 죽은 건지, 아니면 푸홀스인척 하는 저 양반의 몸속에 감금된 건지는 몰라도. 리그에서 홀연히 사라졌지.

다만 전성기에 비해서 많이 쇠락했다는 거지, 지금 당장도 타격은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

특히 작년 홈런 수에서 알 수 있듯, 아직 파워는 살아있고.

‘그러니 정면으로 달려들면, 한방 맞을 수도 있겠지만, 안 그러면 되지.’

푸홀스의 몰락이 시작되면서 가장 크게 꼽힌 문제점은 선구안이다.

훌륭했던 선구안이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타격의 정확도도 심각하게 떨어졌고.

‘굳이 삼진을 잡기보다는···’

그런 명확한 단점이 존재하기에, 손쉽게 잡을 방법 역시 존재했다.

‘땅볼을 유도하자.’

“볼!”

먼저 낮게 하나 깔아둔다.

전혀 칠 만한 코스가 아닌데도 손이 근질거리는 거 보면 많이 떨어지긴 했나보네.

‘그리고 가볍게 하나 더.’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바깥쪽.

뚝 떨어지는 서클 V1에 역시나 배트가 크게 헛돈다. 브레이킹 볼 대처가 심각하긴 하네.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비슷한 코스로 낮게 하나 더.

“아웃!”

이번에도 서클이었는데, 툭 빗맞아서 마운드로 굴러온 공을 가볍게 집어 1루로 던졌다. 그걸로 푸홀스 아웃.

쉽게 잡았지만, 의미는 남다르다. 이걸로 확신을 얻었으니까.

‘좋아, 나중에 트라웃한테 볼넷 줘도 괜찮겠네.’

일종의 보험이지.

느낌상으로는 작년보다도 더 폼이 떨어진 것 같네. 비록 작년은 영상으로만 봤지만.

어쨌든 푸홀스 상태를 보니, 트라웃에게 볼넷을 내주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파워는 여전히 강한 만큼, 일단 띄워서 주력이 좋은 트라웃을 불러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면 푸홀스는 이제 됐고. 다음 타자는··· 더 쉽겠네.’

5번타자, C.J. 크론.

1루수인데, 포지션답게 파워툴은 좋다. 다만 공갈포끼가 심각한 타자라는 게 문제지.

시원한 장타도 잘 만들지만, 안 좋은 공에도 손이 자주 나가는 타입이다. 무슨 뜻이냐면···

“스트라이크!”

“볼!”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기계라는 거지.

최대한 역회전이 강한 서클을 숨긴 뒤, 철저하게 바깥쪽 위주로 승부하다가, 결정구로 서클을 던지니,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이제부턴 쉽지.’

그것으로 상위타선이 모두 종료됐고, 그 뒤로는 비교적 손쉬운 타자들. 껌을 씹는 속도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6번타자, 카메론 메이빈까지 5구째 낙폭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으로 삼진으로 잡으며 2회 초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고.

“Hell Yeah!”

곧이어 스티븐 보그트의 솔로홈런으로 득점 지원이 있었던 덕분인지, 더욱더 올라온 집중력으로 3회 초 역시 빠르게 지워 나갔다.

‘포심으로 유도하자.’

“아웃!”

비록 중간에 단타를 하나 내주긴 했지만, 추가적인 안타는 허용하지 않으며.

삼진 한 개와 범타 두 개로 차례차례 타자들을 처리했고. 그렇게 스피드하게 지나간 경기 초반에 분위기는 조금 더 달아올랐다.

혹시나 싶었던 기대가 이젠 거의 확신으로 변했으니까.

“You-Suck! You-Suck!”

아주 열심히 소리를 치시는데. 저게 내 이름을 외치는 건지, 아니면 허무하게 처리된 타자들에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애들 정서에는 안 좋은 것 같네.

‘아니,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내 이름을 진짜 욕으로 여기면 안 되는 거라고.’

어쨌든 그렇게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이번 경기의 두 번째 분수령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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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보그트는 생각했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겨우 3이닝이긴 하지만, 대단하긴 하네. 정규시즌에서도 저렇게 던질 줄은 몰랐는데.’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녀석이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개막전에서도 이런 피칭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범경기 때도 손바닥이 아팠지만··· 오늘은 훨씬 더 묵직해.’

원래도 힘은 좋은 녀석이다.

처음 기싸움을 했을 때, 손바닥을 때리는 포심에 눈물이 찔끔 나왔을 정도로.

그런데 오늘은 그보다 더 무거우면서도, 도리어 포구하는 건 훨씬 쉬웠다.

‘알아서 들어오니까. 글러브 안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정신력이 조금 강한 사람이더라도 부담감과 긴장감에 공이 살짝 뜰 수밖에 없을 텐데.

오히려 더욱더 날카로워진 피칭은 직접 받는 입장에서 약간의 전율마저 느껴졌다.

‘저렇게 잘 던지는데, 득점지원이 없어서 되나.’

그는 강한 포부를 가지고서 타석에 나갔고. 홈런을 만들었다. 잘 던지는 투수의 어깨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

물론 정말로 그렇게 숭고한 생각만 했던 건 아니고. 욕심도 조금은 섞여 있다.

모든 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순간이니, 자신 역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득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오랜만이네. 팬들이 저렇게나 좋아하는 건.’

기쁨을 넘어서, 환희에 가까워진 팬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작년은 오히려 화를 안 내는 모습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지.

‘희망이라···’

알 것도 같았다. 어째서 저 특이한 애송이가 그렇게 불리는 건지.

‘희망을 끝까지 지키려면, 저 새끼가 문제인데···’

이대로 영원히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난관은 존재한다. 그것도 저쪽 대기타석에.

“Suck, 어떻게 갈 거야?”

“투구수를 좀 주더라도, 콜 칼훈은 어떻게든 잡고. 트라웃은··· 최대한 많이 보여주죠.”

“계획대로 가려고? 아까 전에 보니까, 공을 체크하던데, 위험하진 않겠어?”

“위험하겠죠. 대신 스티븐이 눈치 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사인 보내요. 내보내자고.”

“하긴, 그 뒤의 양반은 네 공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으니까, 괜찮겠네.”

다행히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은 이미 이 똘똘이 스머프가 세워뒀지만. 쉽지 않은 관문이기에 제법 위험했다.

어린 녀석이 참 똘똘하단 말이야. 배짱도 좋고.

스티븐 보그트는 위험한 계획을 겁 없이 시행하는 고유석을 보며 괜히 입맛을 다셨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낭떠러지로 처박힐 수도 있는데, 무섭지도 않은가? 최소한 보그트 자신은 데뷔전에서 저 정도로 용감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괜히 만용을 부리는 녀석은 아니야.’

그렇기에 믿고 홈 플레이트로 향했고, 고개를 끄덕이는 고유석에 마찬가지로 살짝 끄덕였다.

그것으로 시작된 4회 초.

스티븐 보그트는 최대한 포구에 집중했다. 오늘은 프레이밍도 필요 없었으니까.

‘알아서 넣어주니, 잡기만 하자, 잡기만. 욕심내지 말고.’

그는 욕심을 버렸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며 치고 올라오는 어린놈들이 여전히 껄그럽긴 하지만, 그런 감정으로 이번 경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글러브를 제 위치에 놓기만 하면, 알아서 박아 넣어주니, 뭔가를 더 하는 것도 우습지.

“스트라이크!”

이거 봐. 위험한 곳인데도 그냥 쑤셔 박잖아?

“스티븐, 쟨 대체 뭐야? 아니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왜 이런 놈이 있는지.”

“혹시 스티븐 네가 요구한 건 아니지? 방금 건 거의 헤드삿이었어.”

이닝의 선두타자로 올라온 콜 칼훈이 머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슬라이더에 허둥지둥 배트를 휘두더니 이내 투덜거렸다. 아니, 징징거렸다.

‘헤드샷은 무슨. 스치지도 않았구만. 오히려 치기 좋은 코스인데, 막 휘두른 자기 잘못이지.’

좌타자의 몸쪽으로 넣은 슬라이더니, 존으로 들어가기에, 도리어 딱 좋은 코스다.

그걸 놓쳤으니, 그저 징징거림에 불과하지. 물론 본인도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그러는 걸 수도 있고.

‘투구수를 많이 써도 되니까, 최대한 잡으라고 했지.’

그에 맞춰서 조심스럽게 리드하며, 점점 카운트를 조여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6구째 삼진아웃.

중간에 커트한 것 때문에 예상보다 투구수를 조금 더 쓰기는 했지만, 앞선 이닝들에서 많이 아꼈기에 괜찮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지.’

마이크 트라웃. 꼴 보기도 싫은 녀석이 성큼성큼 타석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선 타석의 아쉬움을 씻어내겠다는 표정으로.

그 꼴을 보니,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지만, 투수가 먼저 보낸 사인이 그를 진정시켰다.

‘그래, 한번 보자고. 트라웃을 어떻게 잡는지.’

이제부턴 알아서 할 거다.

강한 타자들을 상대로는 쭉 그랬으니까. 포수로서 여전히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야 없지.

그는 투수의 사인에 맞춰서 얌전히 글러브만 가져다 댔고. 곧 이어진 건 앞선 첫 번째 타석보다도 더욱더 난잡한 피칭이었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포심, 서클 V1,V2. 슬라이더와 투심. 가지고 있는 모든 구종을 탈탈 털어 넣다 시피하며, 승부를 질질 끌었다.

심지어 부족해서 봉인됐던 커터까지 바깥쪽으로 멀리, 낮게나마 볼로서 던질 정도로.

슬로 커브도 거의 바운드를 시키며 볼 카운트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가진 구종은 거의 다 썼다.

딱 하나를 제외하면.

‘타이밍 잡았어. 거르자.’

스티븐 보그트는 트라웃의 눈치를 봤다. 꽈악 붙들어 맨 배트, 힘이 빡 들어간 엉덩이.

느낌이 안 좋았다.

그는 곧바로 사인을 보냈고,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 고유석은 마지막으로 바깥쪽으로 박히는 서클을 던졌다.

“베이스 온 볼!”

꽤나 먼 코스였기에 주심은 단호하게 볼넷을 선언했고, 트라웃은 허탈한 듯 피식 웃으며 힘을 풀었다.

“아아아···”

“저게 어떻게 볼이야!”

“우우우우우우!”

명백히 나간 코스인데도 화가 난 듯이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지만, 몇몇은 결국 트라웃이라는 괴물에게 굴복하며 볼넷을 허용한 고유석에 아쉬운 듯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 관중들에게 스티븐 보그트는 말해주고 싶었다.

‘일단은 계획대로 됐네. 이제 남은 건 다음 타석까지 잘 막으면 돼.’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는 걸.

####

비록 트라웃에게 볼넷을 내주기는 했지만, 4회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기대했던 대로 푸홀스는 손쉽게 잡혔고. C.J.크론도 땅볼로 물러났으니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집중력과 투구감각이 올라오면서, 인터벌이 빨라진 덕분에 5회 역시 안타 하나를 맞긴 했지만, 나머진 깔끔하게 막았고.

뒤이어 5회 말, 우리가 한 점을 더 뽑아내며, 점수는 이제 2대0.

5이닝 2피안타 1볼넷 무실점.

승리투수 조건도 이미 갖췄고, 데뷔전으로서 훌륭한 성적이니, 이제 내려가도 충분히 만족스럽겠지만, 아직 아니다.

‘이제 거둘 때가 됐네.’

하이라이트가 남았으니까.

열심히 밑밥을 던졌으니, 본전 회수는 해야지. 지금을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던진 건데.

“Go, 괜찮겠어? 어깨는 어때?”

“아직 멀쩡해요. 투구수 적당히 조절했잖아요? 아직 2이닝은 더 거뜬합니다.”

스콧 에머슨은 이대로 웃으면서 내 데뷔전을 마무리하고 싶은 눈치지만, 어림도 없지.

그의 걱정을 뒤로 한 채, 6회 초 다시금 마운드에 올랐고, 곧 박수소리가 울렸다.

‘교체될 줄 알았던 건가?’

이만하면 완벽하다고 해도 무방한 데뷔전이니, 내가 만족할 줄 알았던 건지, 다시금 얼굴을 비추니 조금 놀란 눈치들이다.

약간 걱정하는 것도 같고.

이번 이닝은 타순이 1-2-3번으로 이어지니까.

‘지금도 충분히 멋진 경기였지만, 마지막이 예뻐야지.’

자신감은 있다. 경기 동안 잘 벼려진 투구감각이 매섭게 몸을 적셨고, 밑밥도 충분히 던져뒀으니까.

‘먼저 유넬 에스코바부터.’

상성이 좋은 것 같다.

타순이 돌면서, 몇몇 타자들이 감을 잡은데 반해, 이 친구는 여전히 막 휘두르니까.

나쁘지 않지.

같은 지구라서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팀인데, 타선에 한 명 호구가 있으면 편하잖아?

‘바깥쪽 코스에 약한 눈치였지. 높은 하이 패스트볼은 잘 손도 못 대고.’

그렇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한 구씩, 툭툭 던졌다.

낮은 포심으로 한 구를 뺀 다음, 다시 높게 하나. 그것으로 원 앤 원.

“스트라이크!”

3구는 몸쪽으로 맞출 듯 서클을 집어넣으며, 헛스윙을 유도했고. 마지막은 백도어성 슬라이더.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약간의 낙폭과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꺾이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한 타자는 배트로 제 헬멧을 두들겼다.

뒤이어 올라온 콜 칼훈.

지난 두 번의 타석으로 제법 타이밍이 올라온 것 같았기에, 조금 경계하면서 던졌고.

“아웃!”

5구째에 투심으로 땅볼을 유도하며 처리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번 경기를 완성해줄 타자가 올라왔다.

‘트라웃.’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

관건은 어떻게든 투 스트라이크를 만드느냐는 것.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며 입장한 그와 눈을 맞췄다. 그 역시 나를 봤고. 마치 내가 뭘 할지 뻔히 알고 있다는 것처럼.

‘머리가 좋은 타자지. 눈으로 보고 직접 상대하며 정보로 자기만의 데이터를 만드는 형식이고.’

그러니 내가 뭘 던질지는 대략적으로 예상할 거다. 그걸 적당하게 꼬는 거지.

‘바깥쪽, 서클 하나.’

초구는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트라웃은 처음으로 초구에 배트를 휘둘렀다. 지금까지 내가 초구는 줄곧 존 안으로 넣었으니, 그걸 예상하고 한번 휘두른 거겠지.

“스트라이크!”

하지만 애초에 서클은 밖으로 뺐다. 아직 힘이 남은 덕분인지, 여전한 싱킹 무브먼트를 보이며 공은 타자의 배트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그걸로 목표로 삼은 투 스트라이크의 절반이 충족됐다. 이제 남은 건 딱 하나, 하나만 더 잡는 거지.

‘슬라이더 제외. 커브는 절대로 안 되고. 커터는 어림도 없지.’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내 인생이, 야구가 바뀌기 시작했던 그날 선보였던 볼배합. 그게 정답이지.

몸쪽으로 바짝 붙인다. 최대한 아슬아슬한 코스로. 스무스하게 스윙을 가져가던 트라웃은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덜컥 멈췄다.

낙폭이 심한 서클.

나갈 걸 예상하고 멈춘 건데, 배트는 돌지 않았다. 체크 스윙. 하지만···

“스트라이크!”

어차피 존 안쪽으로 넣었다.

살짝 애매한 코스지만, 주심은 내 손을 들어줬고, 그것에 불만을 가질 법 한데도 타자는 아무 말 없이 자세를 취했다.

그래, 내가 뭘 노리는지 어차피 알고 있다는 것처럼. 스마트한 양반이니까, 당연히 알아차리겠지. 내가 뭘 숨긴 건지.

‘이거 하나로 끝낸다.’

어차피 더 볼 것도 없기에 사인을 보내지도 않았다. 거의 공을 받는 동시에 자세를 취했고, 이미 서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기에 스티븐 보그트도 포구를 준비했다.

타자, 마이크 트라웃은 마찬가지로 타격폼을 취했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쓰리핑거, 내가 던질 수 있는 또다른 체인지업.

이번 경기 내내 숨겼지. 단 하나도 던지지 않았고.

세 가지 체인지업 중 가장 떨어지는 이 녀석이 이번 승부의, 아니, 내 데뷔전의 키 포인트다.

초구와 비슷한 코스로 둥실둥실 날아오는 공을 보며 트라웃의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가 지어졌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받쳐놓고 휘두르는 스윙.

배트의 궤적은 공과 일치했고, 동작은 그런 배트를 위해 충분할 만큼의 힘을 실어줬다.

모든 걸 갈라버릴 정도로. 날아오는 공을 담장 너머로, 어쩌면 구장 밖까지 넘겨버릴 정도로.

‘···이라고 생각했겠지.’

뒤늦게 깨달은 걸까?

선구안이 괴물 같은 타자이니, 떨어지는 무브먼트를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는 황급히 배트를 멈췄지만, 이미 충분한 탄력과 힘을 받은 스윙은 방금 전과 달리 쉽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위닝 샷은 서클 체인지업이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툭 밀었지. 낙폭이 강한 놈으로 말이야.

쓰리핑거는 낚시다. 딱 미끼를 물 것 같더라고.

열심히 밑밥을 던진 덕분인지, 제대로 낚였네.

‘역시 잘난 놈일수록 잘 통한단 말이야.’

구질은 다르나, 그립은 같은 체인지업 세 개.

그런 똥배짱에 헛스윙 삼구삼진 당한 마이크 트라웃.

그것으로 이번 시즌 개막전이자, 내 빅리그 데뷔전의 하이라이트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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