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슬슬 일어나야겠네.’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다. 시계도 오후를 가리켰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거지만, 오늘은 딱 좋다.
저녁 경기에 맞춰서, 수면시간을 조절한 거니까.
‘7시 시작이었지, 경기는. 그러면 준비는 대충 5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오늘 경기는 7시에 시작한다.
미국 기준이니, 경기가 시작하면 한국은 새벽이겠지. 한 새벽 3시쯤 되려나?
가게 때문에 바쁠 텐데, 새벽녘까지 잠 안자고 경기를 시청할 부모님을 생각하니, 정신이 확실하게 무장되네.
침대에서 약간 더 뭉갠 뒤,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 미리 알람을 꺼놓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중요한 날이니, 평소보다 더 빡빡 씻어야 한다. 목욕재계 뭐 그런 거지. 미신인 건 알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이 찝찝한 것보다는 확실한 게 낫지.
“Go, 딱 맞춰서 일어나셨네요. 식사는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오늘 운동량에 맞춰서 밸런스를 맞췄으니. 웬만하면 다 드시는 걸 추천합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털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니, 대니얼이 딱 맞아줬다.
적어도 올해는 대니얼도 여기서 함께 산다. 내 옆에 붙어서 최대한 트레이닝을 도와야 하니까. 식단도 관리해주고.
외간 남자랑 같은 집안에서 사는 게 조금 그림이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이 넓은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덜 외롭겠지.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니까.’
숙소 생활할 때는 방은 혼자서 쓴다고 해도, 어차피 다 얼굴 보고 사는지라, 진짜 혼자서 사는 건 아니었거든.
마이너 때는 아예 옆방은 물론 옆옆옆방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고 말이야. 그러니 갑작스럽게 조용한 집안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트레이너라도 아는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더 낫지.
보통 개인 트레이너들의 경우 만약 미국 국적이 아니라면, 비자 문제 때문에 이처럼 오랫동안 머무르며 전담 트레이닝 해주는 게 힘들지만. 대니얼은 미국인이라서 상관없다.
구단과도 이미 협의가 됐기에, 원정 때도 전세기에 같이 탈 수 있고.
‘그만큼 구단에서도 내 성적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거겠지. 또 은근히 대니얼을 팀 트레이너로 고용하고 싶은 눈치고.’
내 스터프가 획기적으로 상승한 원인을 구단에선 대니얼로 꼽은 것 같다. 그가 무언가 특별한 방법으로 구위를 향상시켜 준거라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찾아낸 건 대니얼이니까.
다만 그 비법이라는 게 다른 선수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손가락 마디라, 말해줘도 아무도 안 믿겠지. 설사 믿더라도 바보취급 할 거고.’
어쨌든 그걸 모르니, 구단에선 대니얼을 단순히 실력 좋은 트레이너가 아니라, 자기만의 신비로운 비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은근히 그를 구단에서 직접 고용해서, 트레이닝을 맡기고 싶어 하는 눈치고.
이제 데뷔전을 치르는 선수에게 공식적인 개인 트레이너를 허용한 게, 나를 향한 기대도 기대지만, 그런 오해도 한몫했겠지.
“오늘은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요?”
“일단 천천히 몸부터 풀어야죠. 평소보다는 조금 느리게 워밍업을 가질 겁니다. 충분하게 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혹시 완투가 하고 싶으시다면, 조금 더 쉬어도 되고요.”
“글쎄요, 저는 무척이나 하고 싶은데, 데뷔전 나가는 선발한테 완투까지 시키면 구단 사무실에 팬들이 불 지르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함께 부대끼면서 친해져서 그런가, 점점 농담도 느네. 그렇게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슬슬 픽업하러 오겠네요.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 건 없다.
입을 유니폼이나 장비야 클러비들이 잘 다려서 라커룸으로 가져다 줄 테니, 그냥 몸만 가는 거지. 그렇기에 브라이언의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는 순간 곧바로 나갔다.
“데뷔전이니, 너무 큰 욕심을 가지지 마시고, Go 스스로의 피칭을 보여주는 정도로만 생각하십시오.”
오클랜드-앨러메다 카운티 콜리시엄, 줄여서 오클랜드 콜리시엄 혹은 콜리시엄으로 불리는 경기장.
그곳으로 향하는 길, 브라이언은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최대한 부담을 덜어줬다.
혹시라도 내가 사람들의 관심에 과하게 긴장하거나 흥분해서, 경기를 망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혹시 좋지 않은 경기를 펼친다면, 꽤나 가혹한 반응이 따라올 테니까.
‘루키에게 관대하다지만, 지금 나는 아니지. 사람들의 기대감이 루키에게 거는 것 정도를 아득하게 넘어섰으니까.’
루키 투수가 데뷔전에서 호투를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떠한 실링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는 어떤 투수가 될 거라는 기대치를 적당히 보여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하지만 난 그런 루키가 아니다. 시범경기에서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또 본의 아니게 언론 플레이도 되면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이거든.
개막전 선발투수라는 믿기지 않는 데뷔전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러니 만약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른 신인 선수들보다 그 여파가 조금 더 클 테고.’
기대가 높은 만큼, 실망도 클 거다. 과하게 열광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물어뜯을 테고.
지금까지는 리그 흥행을 위한 새로운 스타로서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던 언론도 또 다른 스토리를 위해 과대평가라느니, 거품이라느니 하면서 공격하겠지.
“이미 충분히 좋은 스타트입니다. 다른 선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죠. 그러니 주변에 흔들리지 마시고, 오직 Go만의 피칭을 하십시오.”
브라이언은 내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동하는 내내 조언을 계속했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나도 귀찮게 여기는 대신 얌전히 들었고, 평화로웠던 주택가를 지나, 왠지 모르게 한낮인데도 어두운 것 같은 시내로 차는 진입했다.
‘우범지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그런가, 괜히 좀 그렇네.’
첫날 집을 소개하면서 브라이언이 했던 말들 때문인지, 왠지 좀 느낌이 싸하단 말이야.
그래도 오늘은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라서 그런지, 평소 괜히 우중충했던 것과는 다르게, 제법 사람이 바글거렸다.
“생각보다 많네요? 아직 경기까지 한참 남았는데.”
“개막전이니까요. 관중동원이 저조한 오클랜드라고 해도, 개막전은 항상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죠. 더군다나 오늘은 Go라는 메인이벤트도 있으니···.”
그렇게 말한 브라이언은 이내 아차 싶었던 건지 내 안색을 살폈다. 기껏 긴장을 풀어놓고, 괜한 말을 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괜찮다.
부담스럽다거나, 어깨가 무겁다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좋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게.”
흥분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관중들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괜히 좀 몸이 짜릿하네.
한국에선 관종이라고 하던가? 요즘 생긴 신조어던데, 나도 그런 과인 것 같구만. 확실히 관심이 커질수록 더 잘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 거니까.”
“···예, 관중석에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브라이언도 그제야 은은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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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왔어?”
“오늘은 좀 늦었네?”
“오늘 선발이니까, 푹 쉬어야지.”
요즘 들어 커트 앵글이라고 부르는 건 시들해진 모양이다.
길~게 커트 앵글이라고 하는 것보단 짧고 굵게 그냥 Suck이라고 하는 게 더 편해서 그런 거겠지.
여전히 기분이 썩 좋지 않기는 해도, 적어도 내 이름이긴 하니까, 그래도 빡빡머리 프로레슬러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단 낫지.
이참에 그 망할 초록색 레슬링복을 찾는 것도 좀 그만두면 좋을 텐데, 그건 기어코 입힐 것 같다.
“잠은 푹 잤어? 식사는 했고? 난 데뷔전 때 한숨도 못 잤는데.”
“제가 그런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오늘도··· 좋아보이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라커룸에 들어가, 유니폼으로 환복하니, 슬쩍 스티븐 보그트가 다가와 컨디션을 물었다.
서로 투수 리드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내가 승리하면서 관계가 조금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선수단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 루키 헤이징도 흐지부지된 뒤로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자주 호흡을 맞춰야 하고, 배터리끼리 서로 얼굴 붉혀봤자, 상대팀한테만 좋은 일이니까.
“오늘은··· 웬만하면 내 리드를 참고해줘. 아, 그렇다고 네 자율권을 뺏겠다는 게 아니야. 이제 와서 다시 다투는 것도 좀 우습지. 다만···”
“저보단 스티븐이 상대팀을 더 잘 알 테니까요.”
“그래, 그렇지.”
이거 봐, 생각보다 조심스럽잖아? 나도 막 나가는 놈은 아니고, 베테랑의 경험은 존중하기에, 고개를 끄덕이니, 스티븐 보그트도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설마하니 내가 오늘도 막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것도 시범경기니까 가능했던 거지, 데뷔전에서야 그럴 수는 없지.
그랬다가 경기를 망치기라도 하면,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
“대부분은 리드대로 던질 테니까, 대신 스티븐도 제가 사인 내면 좀 잘 받아줘요.”
“알았어. 괜히 타이밍 망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사인 내고 바로 던져.”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것을 끝으로 포수와의 면담을 마친 뒤, 나는 대니얼의 지도하에 서서히 몸을 풀었다.
보통은 등판 전엔 코치가 딱 붙어서 루틴을 돕는데, 나는 개인 트레이너가 있기에 적당~히 먼발치에서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팀 트레이너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라는 생각에 대니얼을 조금 묘한 눈으로 보기도 했고.
“···네, 15분 됐습니다.”
루틴은 15분 단위로 쪼개진다. 모든 투수의 친구인 러닝을 시작으로 가벼운 스트레칭, 전신 스트레칭. 캐치볼. 마지막으로 불펜피칭까지. 서서히 단계를 높이는 식으로.
저 중간에 선수에 따라서 롱토스가 끼기도 하지만, 나는 롱토스 회의파라 패스하고.
“Suck, 몸은 어때?”
“좋아요, 딱.”
“다행이네, 오늘은 어떻게 갈 거야? 화이트삭스 때처럼 처음에는 맞춰 잡는 식으로?”
“적당히 섞어야죠. 우타자가 많으니까, 크리스가 잘 잡아줘요.”
“하하, 난 수비를 홈런으로 대신하는 편이라. 그래도 우리 예비 에이스의 데뷔전이니까. 발에 땀 나도록 뛰어야겠네. 그래도 송구는 기대하지마.”
다음 루틴을 위해 이동하며, 크리스 데이비스와 마주쳤다.
아마도 데뷔전을 맞이한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온 것 같다. 애도 아니고 달래는 꼴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고맙네.
‘오늘 크리스 역할이 중요하기는 하지.’
예상 라인업을 보면, 우타자가 많다. 또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트라웃과 푸홀스가 우타자이고. 거기에 트라웃은 어퍼스윙을 잘 하는 타자지.
그런 만큼 가장 강력한 타구가 많이 갈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물론 물어깨로 유명한 만큼 송구는 기대 안 하지만 말이야.
그런 내 말에 크리스 또한 열심히 하겠다는 듯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찼네요.”
“네, 클러비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더군요. 개막전이라도 이렇게 많은 관중이 몰린 건 드물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워밍업을 하며, 주변의 격려를 받는 사이, 콜리시움은 서서히 관중들로 차올랐다. 시범경기 때도 제법 사람이 많았는데. 메이저가 다르긴 달라.
‘저 중에서 못해도 10% 정도는 내 몫이지.’
꽉 채워진 관중석의 일정부분은 나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범경기 내내 기존에서 팀 내에서는 유례없는 평가가 쏟아졌고, 데뷔전으로 개막전 선발등판이라는 이슈도 있었으니까.
얼마나 잘하는지, 또 어떤 선수인지 얼굴이나 보자는 거겠지.
그런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모든 루틴을 마친 나는 본격적으로 불펜으로 들어갔다.
“워밍업은 충분히 했어? 너무 과하게 하지는 않았고?”
“네, 딱 좋아요. 어깨만 좀 달아오르면, 바로 올라가도 될걸요?”
“다행이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냥 마이너 경기라고 생각 해.”
불펜에 들어가니, 문 앞에서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이 맞이해줬다. 불펜코치도 보이고.
루틴을 망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는 겉돌았지만, 이제부터는 그의 영역이니까.
익숙한 불펜포수도 슬쩍 손을 흔드는데, 다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긴장되기보다는 조금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스 볼. 공은 좋아.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컨트롤도 체크하자. 조금 더 낮게 던져 봐.”
평소처럼 서클 체인지업으로 시작한 연습피칭. 천천히 출력을 올리는 형식으로 투구감각을 테스트했다.
꽤 긴 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그런지, 몸이 가벼운 덕분에 공도 조금 더 잘 뻗었다. 힘들 덜 줬는데도, 스프링 트레이닝 초반과 느낌이 비슷할 정도로.
‘확실히 올라왔어.’
시즌에 맞는 몸 상태가 됐다는 거겠지. 그 공헌자인 대니얼을 슬쩍 보니, 그는 말없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오늘 상대 라인업은···”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부터, 스콧 에머슨은 상대 타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했다.
이미 전력분석팀에서 뽑아준 자료를 열심히 정독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체크해주는 거지.
유넬 에스코바부터 마틴 말도나도까지. 그들의 작년 시즌 성적과 데이터, 무슨 공에 약하고 어느 코스에 약한지.
핫콜드존은 어떤지 등이 쭉 이어졌고, 대부분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차분하게 들으면서 다시금 되새겼다.
“마지막으로 트라웃은···”
마이크 트라웃. 투수에겐 난제나 다름없는 선수의 이름 앞에서 스콧 에머슨은 처음으로 뜸 들였다. 뭐라 말하기가 애매하지.
트라웃은 특별한 약점이 없는 선수다.
하이 패스트볼에 잘 당한다는 단점이 과거에는 있었지만, 이번 시범경기에선 그런 경향이 옅어졌거든.
사실 시범경기의 데이터는 그리 정확성이 높지 않지만, 매 시즌마다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트라웃이기에, 그런 데이터마저 무시할 수가 없다.
“생각해둔 방법은 있어요. 통하면 좋겠지만, 안 되면 그냥 거르죠.”
그토록 위대한 선수지만, 완전무결한 신은 아니다.
원래도 명전감이었던 본즈처럼 약을 빤다면, 진짜 야구의 신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범생으로 유멍한 트라웃이니, 그러지는 않겠지.
‘쎈 놈들한테 잘 통하는 게 하나 있으니까. 그 다음 보여줄 플랜B도 있고. 만약에 안 통하면··· 까짓거 좀 맞으면 되는 거지.’
그토록 완벽한 타자기에, 오히려 방법은 쉽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묘수를 던져 보고. 정 안 된다 싶으면 그냥 거르면 되니까.
‘그 외의 나머지는··· 충분히 잡을만 하니까.’
“나이스 볼!”
불펜포수의 묵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운명의 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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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시범경기처럼만 해!”
“에인절스 새끼들, 트라웃 빼면 X밥이니까, 쫄지 마!”
“넌 X나게 잘할 거야!”
불펜의 문을 열고 나서니, 온갖 종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홈관중들, 수만 명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고.
그라운드에 가까이 앉은 이들은 말투가 조금 거칠기는 해도, 죄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날 응원했다.
‘이런 느낌인가, 빅리그에서 선발투수로 나온다는 게.’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지만, 적당한 무게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개막전을 노린 이상, 감내해야 하는 무게지.’
홈에서 열리는 개막전의 선발투수. 영광스러운 자리지. 이번 시즌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오르는 선수가 되는 거니까.
그러니 그 영광의 무게도 이겨내야겠지.
나를 향한 모든 목소리를 레드카펫 삼아, 마운드에 도달했다.
‘깨끗하네.’
작년 시즌 종료 이후, 오프시즌부터 시범경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은 마운드는 깨끗했다.
콜리시엄이라는 구장은 메이저에서 최악으로 꼽히는 시설을 가졌지만, 그라운드만큼은 잘 정비가 됐네.
둥글고 매끈한 마운드를 잠시 내려 보다, 조심스럽게 첫 발자국을 찍었다. 앞으로 수없이 찍을 발자국의 첫 토대를.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마운드 위에 우뚝 서서 그라운드를 둘러보니, 제 포지션을 찾아가던 야수들, 동료들도 관중들처럼 자기만의 방식으로 격려했다.
미소를 짓거나, 글러브를 때리거나. 형식은 다르지만, 의미는 똑같다. 믿고 던지라는 거겠지.
다시 정면을 보니, 스티븐 보그트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다가왔고.
“이제 와서 긴장한 거 아니지? 그런 녀석 아니잖아?”
“그럴 리가요. 제가 그렇게 싸가지가 있는 놈이 아니란 건, 스티븐이 제일 잘 알잖아요?”
“그래, 그렇지. 겨우 이 정도에 긴장할 리가 없는 놈이지.”
피식 웃은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볼배합이야 이미 짜뒀고, 서로 의견도 조율했으니.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는 말 없이 오른쪽 어깨를 두들긴 뒤, 홈 플레이트로 돌아갔고, 자리에 앉아,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글러브를 때렸다.
뭘 던지든지, 오늘 하루 만큼은 어떻게든 받아주겠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아.’
마운드 적응과 스트라이크존 형성을 위해 불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연습피칭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구씩 박아 넣으니, 마음이 한결 더 차분해졌고. 따갑게 찌르던 시선도 어느샌가 무감각해졌다.
그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플레이볼!”
주심의 우렁찬 선언.
그것으로 내 데뷔전이자, 페넌트레이스 개막전이 시작됐다.
리드오프가 타석으로 올라온다.
내 메이저리그 커리어의 첫 번째 타자.
1번타자 유넬 에스코바.
우타자로, 3루수인 선수인데.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다.
작년, 그럭저럭 리그 평균 정도는 되는 타격 성적을 기록했는데. 장단점이 명확하지.
‘컨택이 좋아서 타율이 꽤 높지만. 파워는 형편없지. 커리어 내내 장타율이 4할 5푼을 넘긴 게, 데뷔시즌밖에 없을 정도로.’
올해로 11년차. 총 10년간 빅리그에서 커리어를 보낸 베테랑인데, 그 중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한 게 세 시즌 밖에 없다.
작년 2016시즌에는 132경기, 567타석을 뛰었는데도 고작 5개가 전부고. 그런데도 타율은 .304로 3할을 넘겼다.
이런 타자를 세 글자로 뭐라고 표현할까?
‘똑딱이지. 전형적인 똑딱이.’
애초에 그러니까 테이블 세터를 맡는 거겠지만. 어쨌든 첫 타자로서는 나쁜 상대가 아니다. 왜냐고?
‘지금 내 구위를 생각하면, 작년 오프시즌 동안 약이라도 빤 게 아닌 이상, 절대로 못 넘기지. 외야 필드가 넓으니, 수비라인을 잘 꿰뚫으면 장타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즉 내 입장에선 위험부담이 전혀 없는 타자다. 투수로서 최악의 결과인 홈런을 배제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차분해졌던 감정이 한층 더 안정됐고, 스티븐 보그트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쓰읍- 하.”
메이저리그에서 던지는 첫 번째 공. 짧게 호흡하며 이미 내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투구동작을 이행했다.
평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쓰리쿼터의 투구폼. 예전에는 평범한 만큼, 공의 위력도 별로라는 말을 들었지만.
“스트라이크!”
이젠 아니다.
몸쪽을 파고든 포심.
타자는 배트를 참았고,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존 안으로 확실하게 넣었으니, 타자도 별다른 제스처는 없었다. 다만···
‘생각보다 더 죽여주지?’
조금 놀란 것 같네.
아마도 에인절스에서 나에 대한 분석을 많이 했을 거다. 같은지구 팀에 쓸 만한 투수가 나왔으니까.
구위가 대단하다거나, 변화구가 위력적이라거나. 조금 더 세세하게는 피칭 스타일, 무브먼트의 성질 같은 것들도 낱낱이 파헤쳤겠지.
그러니 유넬 에스코바도 어느 정도는 알았겠지만, 직접 보니 느낌이 다르겠지.
‘또, 약간은 무시했을 거고.’
제 아무리 날렸다고 해도, 결국은 루키, 그래봤자 시범경기다. 이제 11년차에 접어드는 베테랑에겐 우습겠지.
그런데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묵직한 공이 들어왔으니, 놀랄 수밖에.
어쩌면 저런 유넬 에스코바의 반응이 이번 경기에서 내가 가지는 이점을 이야기했다.
‘시범경기 동안 에인절스는 안 만났지. 그러니 글자로 적힌 데이터야 있겠지만. 많이 생소할 거야.’
루키가 가지는 특혜인데.
있을 때 열심히 써먹어야지.
2년 차부터는 속옷을 뭐 입는 지도 다 털리기에, 딱 이번 시즌 동안만 누릴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 정신 차리기 전에 조져야지.’
놀란 기색을 보였으니.
더욱더 시간을 주면 안 되지.
노련한 타자의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다. 날 낚으려고 했던 거라면, 조금 더 확실하게 보였을 테니까. 지금처럼 은은하게 당혹감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스트라이크!”
몸쪽 포심.
그리고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우타자를 상대할 때 내가 하는 주류 볼배합이다.
역회전이 강한 서클을 바깥쪽으로 던져서 배트를 끌어내는 건데, 이번에는 참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넣었으니까.
‘잡아주네, 루키는 존이 짜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닌 건가?’
흔히 메이저리그에는 루키존이라고 해서, 신인에겐 스트라이크존을 짜게 준다는 풍문이 있는데. 오늘은 아니구만.
그렇게 올린 투 스트라이크. 이젠 타자의 마음이 급해진다. 루키의 데뷔전, 그 장엄한 시작을 삼구삼진으로 장식하는 들러리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경력이 풍부한 선수니, 허둥지둥 거리진 않는다. 그러니···’
사인을 보낸 즉시 공을 던졌고, 차분하게 지켜보던 타자의 배트가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스트라이크 아웃!”
높은 하이 패스트볼.
투심이다. 포심이었다면 살짝 나갔겠지만, 마지막 순간 약간의 하강 무브먼트를 보이며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스치며 루킹 삼진을 만들어냈다.
‘최고의 스타트네.’
메이저리그 데뷔전.
첫 타석에서 올라간 첫 번째 기록은 삼구삼진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네.’
홈 플레이트에선 판정에 승복하지 못한 타자가 볼이라며 주심과 언쟁을 벌였지만, 이미 잡은 타자에겐 관심 없다.
선발투수는 항상 그다음을 봐야하니까.
‘콜 칼훈, 이쪽은 그래도 파워가 좀 있어.’
2번타자 콜 칼훈.
좌타자이고, 우익수인데.
유넬 에스코바와 비교하면 거포라고 지칭할 수 있다.
작년 1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에스코바보다 13개나 더 많은 홈런을 기록했으니까.
장타율도 훨씬 높고.
‘최소한 넘길 공은 넘길 수 있는 파워가 있다는 거지.’
그래서 조금 겁나냐고?
이미 말했잖아. 에인절스에서 내 공을 넘길 수 있는 건 둘밖에 없다고. 허세가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이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잡기가 더 편하지.’
결국 주심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황급히 내려간 유넬 에스코바를 뒤이어 올라온 콜 칼훈.
그와 눈동자를 맞추며, 슬쩍 사인을 보냈다. 개막전 등판이 확정된 이후, 스콧 에머슨은 그런 말을 했다.
콜리시엄에서는 지금보다 더욱더 적극적으로-
‘존 안으로 깊게, 도저히 안 건드리고는 못 배길 정도로.’
띄워도 된다고.
약간은 둔중한 타격음이 울렸다. 손맛을 보기 딱 좋은 코스의 공이 왔으니. 타자는 참지 못했다.
분명 휘두를 때까지는 좋았겠지만,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그의 미간은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지?
무게를 이기려는 듯 억지로 배트를 밀어내며 타구를 날려 보낸 콜 칼훈이었지만, 차라리 힘을 빼는 게 더 나았을 거다.
스티븐 보그트는 발이 느려서, 뒤로 날아간 파울을 잘 잡지 못하는 포수기에, 최소한 한 번의 기회는 더 있었을 테니까.
“아웃!”
허나 둥실둥실 떠올라 외야로 날아간 공은 곧 중견수 라제이 데이비스에게 잡혔다.
콜리시엄에서 치명적인 건,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라인드라이브 혹은 땅볼성 장타다.
외야가 넓다 보니, 수비수들의 커버 범위가 넓기에, 자칫 방향이 잘못 꺾이면, 3루타가 나올 수가 있거든.
반대로 지금처럼 느리게 뜬공은 천천히 대처할 수 있으니, 오히려 편하고.
‘다만 저 양반한테 이런 걸 내주면 X되겠지만 말이야.’
물론 이런 것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 한다. 혹시나 싶어서 1루까지 걸어가다가 다시 방향을 꺾어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콜 칼훈을 뒤이어 올라온 타자에게 지금 같은 공을 던졌다간 뜬공이 아니라 그냥 홈런이 될 테니까.
‘마이크 트라웃. X발 데뷔전부터 최종보스네.’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을까? 첫 이닝부터 트라웃이라니, 이제 데뷔하는 투수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타자, 뭐라고 더 설명하는 것조차 불필요한 괴물.
듬직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타자가 타석을 가득 채우며 자세를 취했다.
그 꼴을 보니, 인생이 참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낚아보자고.’
머릿속으로는 저런 대단한 괴물을 잡을 방법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것이 내 데뷔전을 더욱더 화려하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