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57화 (57/316)

57화

켄달 그레이브맨은 생각했다.

차라리 소니 그레이가 이르게 복귀한다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소니는 이미 프랜차이즈 스타고, 팀의 에이스로서 우뚝 선 투수다.

적어도 애슬레틱스의 선발투수 중, 그의 자리를 욕심내는 사람은 있어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켄달 그레이브맨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그냥 언제나 그랬듯 소니 그레이가 1선발로서 개막전으로 나간다면, 그 역시 당연하다며 생각했겠지만···

“나이스 볼! 오늘도 좋은데? 하하, 다음 경기에서 화이트삭스 타자들 눈물 좀 흘리겠네. 투심도 좋아. 변화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제법 묵직해.”

“커터는 좀 어때 보여요?”

“으음, 나쁘지는 않아.”

“···네, 잘 알겠습니다.

이건 명백히 아니다.

그는 불펜의 다른 자리에서 평소처럼 연습피칭하는 투수를 봤다.

Go You-Suck.

다른 선수들은 커트 앵글이라고 부르던가? 저 옆에서 지도해주고 있는 그렉 매덕스가 부르는 것처럼.

‘내가 아직 데뷔도 안 한 놈한테 밀린다고? 겨우 시범경기에서 좀 잘했다고 개막전 선발?’

실력은 대단하다.

자신도 투수기에, 저 루키가 얼마나 대단한 공을 던지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차라리 션이었다면··· 그나마 이해가 됐을 텐데.’

션 마네아.

작년 함께 선발진을 지탱했던 녀석이었다면, 약간은 불쾌할지언정 받아들였을 거다.

비록 션 역시 작년에 갓 데뷔하여 올해 2년 차에 접어드는 루키지만. 어쨌든 작년 한 해 동안 풀타임을 소화했으니까.

이미 한 차례 검증된 투수에게 밀리는 것이라면, 약간은 불쾌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풀타임은커녕, 빅리그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마이너리거’에게 밀리는 건 문제가 있다.

‘다른 팀이 어떻게 보겠어? 안 그래도 오클랜드를 X신으로 보는데. 심지어 개막전에 루키를 등판시키면···’

사실 이건 핑계에 불과하다.

켄달 그레이브맨 역시 잘 알았다. 솔직히 다른 팀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어떻게 보는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그 정도로 로열티가 넘치는 건 아니니까. 허나 그런 명분이라도 필요했기에, 그는 기꺼이 자기 자신까지 속였다.

“션 너는 괜찮아? 차라리 네가 개막전 선발로 나가면 나도 이해하겠지만···”

“에이,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작년에도 간신히 잘한 거고. 그리고 솔직히··· 난 쟤보다 더 잘할 자신 없어.”

한편으론 다른 선수들도 이해가 안 됐다. 자신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딱히 반발하거나, 불만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로 개막전 선발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라고 할만한 션 마네아는 오히려 홀가분한 모습이었고.

얘들은 자존심도 없나? 루키 헤이징조차 대충대충 넘겨서, 흐지부지 되더니···.

‘루키 헤이징을 핑계로 컨디션이라도 흔들-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런 비열한 술수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더 자신이 한심스럽고, 비참해질 테니까.

“그럼 Go는 화이트삭스전에서 6이닝을···”

착잡한 마음에 잠시 쉬고 있을 무렵, 귓가에 불펜코치와 투수코치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Go, 그리고 6이닝.

조곤조곤한 목소리였기에,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선발 테스트를 하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고유석은 쭉 3이닝에서 4이닝 내외로 던졌었다. 중요한 유망주로 판명 났으니, 최대한 아껴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제 시즌도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기량이야 충분히 봤고, 체력적으로도 선발을 맡을 수 있는 정도인가를 시험해보겠다는 뜻.

‘일정대로면, Go의 경기 이틀 뒤에, 나도 등판이야. 상대는··· 똑같은 화이트삭스고.’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잘하면··· 여론을 돌릴 수도 있겠어.’

지금 개막전 선발 경쟁에서, 고유석의 가장 큰 지지자는 여론이다.

언론과 팬덤이 단합하여, 그를 열심히 밀어주는 형국이지. 언론은 흥행을 위한 새로운 스타로 선택한 거고. 팬들은 그저 새로운 유망주를 기대하는 거고.

구단이야 현명한 선택을 내리겠지만, 그런 여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잘하면 다음 경기에서, 그 여론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Go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지. 시범경기지만, 아직 단 한 점도 실점하지 않았으니까. 피안타도 겨우 두 개 던가?’

허나 켄달 그레이브맨이 생각하기에, 그런 호성적의 원천은 전력투구였다.

그가 알기로 고유석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이 89마일이다. 이리저리 들은 정보가 있지.

시범경기 동안에는 89마일을 찍지 못했지만, 그에 근접한 구속을 꾸준하게 찍었다.

마치 중간에 교체로 올라온 불펜투수가, 완급조절 없이 오로지 전력으로만 던지는 것처럼.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길게 소화한 것도 겨우 4이닝, 평균적으로는 매 경기 3이닝 정도밖에 던지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완급조절할 것도 없이, 오로지 힘으로만 찍어 누르는 거지.

당장의 성적에는 좋겠지만, 결코 선발투수의 피칭은 아니다.

‘한 타순을 도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 뒤는 힘이 빠지기 마련이야.’

아직 경험이 부족한 선발투수. 체력은 모두 소모했는데, 아직 남은 이닝은 길다.

무너지기 딱 좋은 조건.

‘처음으로 긴 이닝을 맡긴 Go가 무너지고, 그 뒤로 같은 팀을 상대로 내가 좋은 성적을 올린다면··· 여론을 돌릴 수 있어.’

소리 높여 고유석을 외치던 팬들도, 언론도, 조금 더 노련한 선수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겠지.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그의 연습피칭에는 조금씩 힘이 더 들어갔다. 마치 저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나이스 볼! 커트 앵글, 너 왜 점점 더 강해지는 거야? 이제는 받아주는 것도 힘든데?”

“커트 앵글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Go라고 부르면, 힘 좀 뺄게요.”

“하하, 난 편한 것보다 좋은 공을 받는 게 더 좋아. 커트 앵글, 세 개만 더 던져봐.”

옆에서 들려온, 퍼엉-하고 폭탄이 터지듯, 무겁고 요란한 투구 소리를 애써 지우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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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훈련장은 조금 더 바빠진다. 선수는 줄어들지만, 그만큼 개막이 가까워졌기에,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거지.

흔히 메이저리그가 자율훈련이라고 해서, 편하게 노는 줄 아는데, 애초에 그런 선수는 빅리그가 아니라, 더블A도 못 올라간다.

말 그대로 자기 몸에 맞춰서 자율적으로 훈련하는 거지, 훈련량 자체는 한국에서 팀훈련 시키는 것보다 더 많을걸?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나도 평소처럼 훈련했지만, 오늘은 조금 내용이 다르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아요?”

“과하다 싶더라도, 최대한 몸을 풀어주는 게 좋습니다. 평소 투구할 때와 다른 근육을 사용하는 거니까요.”

원래는 러닝 위주로 워밍업 하며 몸을 달아 올린 뒤, 불펜으로 들어가지만, 오늘은 유연성에 중점을 뒀다.

내 몸을 사정없이 쭉쭉 늘리는 대니얼의 손짓에 악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부상을 방지하는 건데,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충분하게 몸을 풀어준 뒤, 자세를 잡자, 우릴 지켜보고 있던 그렉이 흘끔 코치를 봤다.

마커스 젠센, 보조 타격코치이자, 포수들의 코칭을 담당하는 코치다.

포수들을 지도하는 만큼, 투수인 나랑 아예 관계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오늘은 포수 코칭이 아니라, 앞의 타격코치가 중요했다.

“이제 슬슬 가보죠.”

“무리하게 움직이시지 마시고, 혹시나 공이 날아오면 무조건 피하십시오.”

대니얼은 신신당부를 남긴 뒤, 자리를 피했고, 마커스 젠센도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어? 매번 할 때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간 떨려서 죽겠다고.”

“혹시 위험한 것 같으면 바로 피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 그럼 자세 잡고, 준비해.”

제법 많이 했는데도, 여전히 긴장되는 건지, 우는소리를 한 그는 배트를 잡았다. 평범한 야구 배트보다 약간 얇은 배트를.

당연히 타격용은 아니다.

저렇게 가벼운 배트는 피칭머신으로 날린 공이랑 부딪쳐도 바로 박살나지.

펑고 전용 배트거든.

“왼쪽!”

마커스 젠센은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방향을 이야기하며 가볍게 배트를 휘둘렀다. 강한 타구는 아니고, 그래봐야 땅볼이지.

이쯤 되면 알 거다. 지금 내가 하는 훈련이 뭔지. 바로 수비훈련.

사실 수비훈련 자체는 캠프 합류 이후부터 꾸준하게 했지만, 예전에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마이너 때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왜냐고? 구위가 구린데, 수비가 무슨 소용이야.

투수라서 어차피 수비범위는 내야, 그것도 마운드 주위로 한정되어 있고, 그 외에는 기껏해야 베이스 커버다.

구위가 약한 탓에 어차피 정타로 맞으면 죄다 외야로 날아가고, 빗맞은 내야뜬공 정도는 다른 내야수들의 몫이지.

그렇기에 수비훈련을 굳이 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피칭에 집중했지만.

구위가 올라간 이후로는 다시 수비에 집중했다. 그렉에게 투심을 배운 뒤에는 더욱더 중요하게 여겼고.

‘긴 시즌을 보내려면, 결국 맞춰 잡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지금 내 구위랑 투심을 생각하면, 결국 땅볼도 많이 나올 테니까.’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갈고닦아, 이제 제법 쓸 만해진 투심은 변형 패스트볼답게, 땅볼을 잘 유도하는 공이다.

그 투심이 이제 즉전감이 됐으니, 종종 써먹을 텐데, 내야수들에게 맡긴다고는 해도, 나도 어느 정도는 수비할 줄 알아야지.

거기다가···

“커트 앵글, 너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야수들을 믿으라고! 넌 피칭만 잘 해. 투수가 무슨 수비 훈련···이야. 어우, 계속해라. 잘하네. 그럼 이만.”

가장 훌륭한 선생님도 계신데,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펑고를 받는 내 모습을 발견한 마커스 시미언은 농담을 중얼거리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그렉의 모습에 입을 닫았다.

골드글러브 18회에 빛나는 역대 최고의 수비력을 갖춘 투수 앞에서, 투수의 수비를 폄하하긴 좀 그렇겠지.

‘바로 사라지네. 그러고 보면, 다른 선수들은 확실히 그렉을 좀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하긴,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니까.’

마커스 시미언이 물러난 뒤, 나는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사실 시미언 외에도, 코치들, 특히 투수코치인 스콧 에머슨은 내가 굳이 수비 훈련하는 걸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

그렉의 눈빛에 진압된 시미언처럼 야수들을 믿으라는 건 아니고, 위험성이 높잖아. 혹시라도 훈련하다 부상당할지 누가 알아?

하지만 그렉은 내 수비훈련을 긍정적으로 여겼고, 그건 그가 말해줬던 시즌 관리와 관련되어 있다.

‘타자들을 찍어 누르려면, 수비력도 갖춰야 하니까.’

누누이 말한 거 있잖아. 타자들을 분류해서, 일정수준 이하의 타자들을 막 찍어 눌러야 한다는 거.

그런데 그렇게 찍어 누르다 보면, 삼진만 나오는 게 아니라, 땅볼도 많이 나온다.

수준 이하로 분류됐다는 건, 기본적으로 실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된 타자라는 거고, 그런 놈들은 컨택이 좋지 않으니. 억지로 휘두르다가 빗맞은 타구를 많이 만든다는 거지.

그러니 나도 어느 정도는 수비할 줄 알아야, 예상치 못했던 내야안타라는 불상사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는 건데. 맞는 말이다.

‘최소한 내 팔이 닿는 영역까지는 커버할 줄 알아야지.’

땅볼을 유도했는데, 안타가 되는 걸 투수가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수비력을 갈고닦는다면, 그 확률은 줄일 수 있겠지.

심지어 역사상 가장 수비를 잘했다고 해도 무방한 레전드 투수가 인스트럭터로 있잖아?

최대한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훈련하니, 조금씩 그렉의 표정이 묘해졌다.

“음···”

못 마땅한 건가? 제법 노력했는데, 아직 기대만큼은 아니라는 듯 그는 눈빛을 흐렸다. 아니, 본인 기준이면 다 별로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렉 매덕스가 기준이 아니더라도, 내 수비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동작이 약간 굼뜨거든. 또 내가 상체보다 다리가 월등하게 긴 우월한 존재라, 땅볼 캐치도 쉽지 않고.

‘그래도 예전이랑 비교하면 이 정도면 꽤 많이 좋아졌어.’

애매한 듯 낮은 신음을 흘리는 그렉을 애써 무시하고, 훈련을 이어가다, 한 타구를 봤다.

마커스 젠슨은 가볍게 툭툭 쳐줬지만, 그러다 실수로 정타가 나온 건지, 제법 빠른 타구.

그래도 아예 정면으로 날아오지 않았기에, 위험성은 낮다. 그래서 슬쩍 손을 뻗어 그대로 낚아챘다.

“Go! 괜찮아? 안 맞았어? 미안미안, 진짜 미안! 힘을 최대한 뺐는데, 배트 중심에 맞았나봐.”

화들짝 놀란 마커스 젠센은 황급히 달려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코치의 반응이 어쩌면 지금 내 입지를 말해줬다.

사실 스치지도 않았고, 기본적으로 힘 빼고 툭툭 날리는 펑고 타구는 맞아봤자 그리 아프지도 않은데, 저렇게 놀라는 걸 보면, 날 구단에서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하는가보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를 진정시켜준 뒤, 슬쩍 그렉을 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늘은 여기까지. 나쁘지 않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여전히 구린 수준이지만, 그래도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겠네.”

이 정도면 엄청난 칭찬이지.

많이 야박한 양반이니까.

본인도 그걸 깨달은 듯 말을 덧붙였다.

“넌 너무 동작이 굼떠.”

“예예, 대신 동체시력은 좋잖아요?”

변명 같지만 사실이다.

그렉과 훈련하면서 알게 된 건데, 내가 생각보다 동체시력이 좋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타구를 포착하는 것 자체는 잘한다. 그 뒤에 캐치하는 동작이 느려서 그렇지.

“아무튼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는 않죠?”

“···어. 어디서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겠네.”

다시금 물으니, 그렉은 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그제야 조금 인정해주셨다. 기준점은 통과했군.

사실 경기를 앞두고, 굳이 오늘 수비훈련을 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다음 경기, 화이트삭스전은 땅볼이 많이 나올 테니, 미리 점검하고, 준비해야 하거든.

물론 내야수들이 웬만한 건 다 잡아주겠지만, 앞서 말했듯, 나도 최소한 내 반경 안쪽은 잡아야, 불상사를 막을 수 있겠지.

‘수비력도 적당히 갈고닦았으니, 이만하면··· 준비는 끝났네.’

아직 경기까지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경기야 말로 진정한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르는 거니까. 욕심나는 것도 걸려 있고.

‘그레이브맨, 은근히 의식했었지. 내 피칭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예상도 되고.’

경쟁자와 똑같은 팀을 상대로 마운드에 오르는 것. 구단에서 일부러 정해놓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공교롭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앞에 하는 게 불리하다. 뒷사람이 사람들 기억에 더 잘 남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앞사람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뒷사람은 그대로 묻혀버리지.’

난 다음 경기에서 켄달 그레이브맨을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선, 수비도 필수적이지. 혹시나 모를 불행마저 억제해야 하니까.

####

“카멜백 랜치-글렌데일에서 열리는 캑터스 리그 23라운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경기가 이제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경기 전, 시작된 중계방송.

듣기 좋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시작을 알린 캐스터는 해설자와 라인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달아 올렸다.

“···네, 양팀의 선발투수입니다. 화이트삭스는 미겔 곤잘레스 선수를, 애슬레틱스는 Go를 선발투수로 냈습니다. 최근 Go와 관련된 재밌는 이슈가 있죠?”

라인업 설명을 마친 뒤,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경기에, 시간을 때우려, 캐스터는 사람들이 흥미로워 할 주제를 꺼냈고. 사전에 계획된 내용이기에, 해설자 역시 능숙하게 받았다.

“오늘 애슬레틱스의 선발투수인 Go의 개막전 선발등판에 관한 이야기로, 에이스 팬덤이 제법 뜨거운 걸로 압니다.”

고유석의 개막전 선발 가능성은 단순히 애슬레틱스에서만 화제인 건 아니었다.

이번 시범경기를 통해, 전국적인 유망주로 발돋움한 투수고, 그만큼 지켜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데뷔전을 개막전 선발투수로 한다, 그리 흔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런지, 저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의견은 딱 둘로 나뉘었다. 친 오클랜드 성향의 언론과 에이스 팬들은 그것을 지지했고.

그 외의 나머지 모든 구단의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그런 애슬레틱스를 비웃었으니까. 중계진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만큼 팬들이 이 선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째서죠?”

“일단 너무 도박적이죠. 물론 팬들은 바라겠지만, 한 시즌 162경기를 시작하는 개막전을 루키에게 맡기는 건 위험성이 다소 높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단한 유망주.

적어도 애슬레틱스 내에서는 확고부동한 No.1의 재능이라고 봐도 무방하나.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경험은 재능으로 얻지 못한다. 그런 경험이 부족한 투수를 개막전에 내세우는 건, 잃을 확률이 굉장히 높은 도박이나 다름없고.

또한 이제 갓 데뷔하는 선수에게, 굳이 개막전부터 부담을 짊어줘서, 과도한 피로를 주는 것 역시 애매하고 말이다.

“물론 이번 시범경기 동안, Go가 굉장한 피칭을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5경기출장, 16이닝 동안, 31개의 삼진을 기록했고, 피안타는 겨우 2개, 볼넷은 하나니까요. 평균자책점은 놀랍게도 0이고요.”

“네, 그러니 팬들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아직은 조금 섣부른 이야기죠. 또한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이 던진 게 아직 4이닝에 불과한 만큼, 과연 긴 이닝에서도 통할지도 의문이고요.”

그렇기에 중계진은 오클랜드 이외의, 나머지 대다수 여론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비록 개막전 선발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Go라는 선수의 재능은 놀랍네요. 데뷔 시즌부터 정식 선발투수로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자체가, 이 선수의 거대한 재능을 이야기해 준다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그렇게만 끝낼 경우, 성난 에이스 팬들이 몰려와, 불만을 토해낼 수도 있었기에, 적절히 칭찬도 곁들였지만. 어쨌든 중계진 역시 지금의 이슈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적절하게 대화를 마친 순간, 준비가 끝난 건지, 경기가 시작됐고, 화이트삭스의 홈이기에 애슬레틱스가 선공을 취했다.

“쳤습니다, 라이온 힐리! 주자는 홈인! 애슬레틱스! 경기 시작부터 2득점을 올립니다!”

먼저 선취득점을 올리고, 우위를 점한 건 애슬레틱스였다. 주자들이 나란히 안타와 볼넷으로 점수를 냈고.

경기를 지켜보던 화이트삭스 팬들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제야 1회 초가 막을 내렸다.

“이제 1회 말, 선발투수 Go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언제봐도 준수한 체격이네요. 느린 구속과 다르게, 대단한 스터프와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선수인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애슬레틱스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네요.”

불펜에서부터 서서히 걸어오는 고유석의 걸음은 당당했고. 그를 쫓아 원정경기까지 따라온 팬들은 흥겨웠던 1회 초와 그런 당당함에 흠뻑 취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을 보며 캐스터는 말없이 혀를 내둘렀다. 어째서 개막전 선발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알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였단 말이야? 거의 프랜차이즈 스타 수준이네.’

방금 전, 크리스 데이비스가 타석에 올랐을 때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더 열렬한 응원.

선발진 합류야 이미 확정적인 선수라지만, 어쨌든 아직 빅리그 데뷔조차 못한 선수인데. 조금 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지금 애슬레틱스 사정이 사정이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간략하게 고유석의 시범경기 성적과 작년 기록을 쭉 말한 그는 그라운드를 내려 봤다.

“Go, 굉장히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투수죠?”

“네, 시범경기는 물론, 작년 마이너에서의 기록까지 찾아보면, 볼넷을 죄악처럼 여기는 수준입니다.”

“표기되는 구속만 본다면, 자연스럽게 피네스 피처 같은 선수지만, 본질은 파워피처, 그것도 파이어볼러 스타일이죠.”

“하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대단히 공격적인 선수.

타자를 거세게 압박하며,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 그 화려함에 수많은 사람이 취했지만. 캐스터는 오히려 그렇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플라이볼 성향이 강하지. 시범경기에서는 저렇게 던져도 괜찮겠지만··· 제 컨디션을 찾은 빅리거들에게도 통할까?’

크리스 브라이언트를 힘으로 찍어 누른 게 유명하고, 그것으로 구위를 인정받았지만. 만약 정규시즌 경기였다면,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 그는 의심스러웠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타자들에게는 타구의 발사각도라는 새로운 연구거리이자, 무기가 쥐어졌다.

원래라면 워닝트랙에서 잡히는 외야 플라이로 끝났을 타구를, 펜스 너머로 넘길 수 있게 된 거다.

‘구속이 느린 투수니, 타이밍도 금방 잡히지. 홈구장이 콜리시엄이니, 그나마 괜찮겠지만···’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구속이 느린데다, 구위로 타자를 압박하며, 삼진 혹은 플라이볼을 주로 만드는 고유석을 캐스터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웃!”

그런 캐스터를 놀리듯, 고유석은 첫 타자를 초구 만에 마운드 앞 땅볼을 유도하며 잡았고.

“스트라이크 아웃!”

두 번째 타자는 시그니처와 같은 서클 체인지업으로 잡았으며.

“아웃!”

마지막은 3구째 다시 땅볼을 유도하여, 굴러온 공을 가볍게 잡아 1루로 던지는 것으로 이닝을 끝마쳤다.

“Go! 오늘도 훌륭한 피칭을 선보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1회부터 적극적으로 투심을 던지며, 땅볼을 유도했네요. 수비 역시 좋았고요.”

“야성적인 모습으로 타자들을 잡는 선수인데, 이번 이닝은 굉장히 지능적이었습니다.”

소모된 투구수는 겨우 9개.

효율적으로 투구수를 관리했고, 또한 오직 전력으로만 타자에게 때려 박던 것과 달리, 완급조절 역시 적절했다.

“패스트볼을 총 네 개를 던졌는데, 네 개 다 84마일 정도네요. 평소보다 조금 느리죠?”

“네, 완급조절을 한 것 같습니다.”

흥겹게 풍선껌을 부풀리며,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고유석을 보면서, 캐스터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저 투수를 너무 과소평가 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또한.

‘개막전, 단순히 과도한 팬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루키의 개막전 선발등판.

터무니없다 못해, 황당할 정도였던 애슬레틱스 팬들의 외침이.

그저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평가해서 내린, 이성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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