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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56화 (56/316)

56화

착각 속에서 훈훈하게 지펴진 컵스전의 여파는 선수단에도 서서히 퍼져나갔다.

갑자기 살가워졌다거나, 친하게 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지금까지 서로 대화도 제대로 안 했는데. 뜬금없이 그러는 것도 좀 이상하지.

“자, 들이마시고- 내쉬고. 역시 회복 속도가 빠르네요. 자라리 불펜투수였으면 더 재능을 살렸을 텐데.”

“연투라도 하죠, 뭐. 하루는 선발로 던지고, 하루는 불펜으로 던지고.”

“차라리 투타겸업이 더 말이 되겠네요.”

그냥저냥 적당~히 스며들기 시작한 건데, 그 시작은 야수들이었다.

이유야 간단하지.

포지션이 겹치지 않으니, 경쟁자도 아니니, 서로 거리낄 것도 없잖아. 거기다, 어제 인터뷰하면서 조금 약도 풀었고.

어제 공식 중계방송에서 리포터와 인터뷰할 때. 어째서 크리스 브라이언트에게 그렇게 위험한 피칭을 한 거냐고 묻길래 저렇게 답했는데. 캬, 내가 생각해도 만점짜리 답변이네.

“커트 앵글, 오늘도 일찍 나왔네? 너무 성실한 거 아니야? 어제 등판했으니까, 좀 쉬지, 그래.”

그래서 그런가, 바로 입질이 왔다. 시작은 껌을 주고받으면서, 안면을 텄던 크리스 데이비스.

평소처럼 대니얼과 스트레칭하면서, 피칭으로 피로해진 몸을 풀고 있는데, 그가 먼저 슬며시 다가와 인사했다.

그나저나, 커트 앵글?

“쉬어도 몸 풀고 쉬어야죠. 그런데 웬 커트 앵글? 그렉 따라하는 거예요?”

“Suck, Suck거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듣기 좋잖아?”

“Go라는 대안도 있는데요? 애초에 저번에 Go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재미없어서 싫어.”

Go라는 단어도 영어로 보면 참 재밌는 것 같은데 말이야.

지칭하는 말은 조금 못 마땅했지만, 어쨌든 타구를 잡아주는 수비수, 그것도 좌완인 내가 3루수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나도 괜히 밀어내지 않으며, 적당히 크리스 데이비스와 어울렸고. 그런 모습이 다시금 계기가 된 건지. 다른 선수들도 차츰차츰 다가왔다.

“커트 앵글, 컵스전 때는 뜬공을 자주 유도하던데. 앞으로도 그럴 거야? 포지셔닝 뒤로 잡을까?”

“아뇨, 컵스전만 그렇게 던진 거고. 웬만하면 땅볼 유도해야죠. 그쪽이 안전하니까. 포지셔닝이야 내가 말하긴 뭐하고, 그냥 시미언이 잘 잡아줘요.”

잘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안면을 텄던 마커스 시미언 같은 다른 야수들부터, 마찬가지로 사실상 선발투수로 고정되었으니, 경쟁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불펜투수들까지.

죄다 커트 앵글, 커트 앵글 거리며, 친근하게 구는 터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거봐, 딱 맞는 별명이잖아? 얼마나 입에 착착 감겨. 역시 난 머리가 좋다니까.”

그 사태의 원인인 그렉은 그저 자신이 만든 별명이 널리 퍼지는 것이 즐겁다는 듯 클클거렸고. 그 모습을 보니, 우상이고 나발이고, 딱밤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물론 락하운즈 때처럼 죄다 사람한테 Suck, Suck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애초에 내 이름이랑 하나도 같은 게 없잖아.’

“축하합니다, 커트 앵- 아니, Go. 선수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네요.”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함께했던 대니얼은 뿌듯한 듯 그렇게 말했지만.

이름 대신 커트 앵글 소리를 들으니, 난 별로 뿌듯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별명으로 고정됐으니.

왠지 나중에 루키 헤이징 데이에 내가 입을 복장이 예상됐거든.

‘레슬링, 레슬링만큼은 안 돼.’

선수에게 선정적이거나, 여장 같은 걸 시키면 사무국에서 제재를 가하는 추세라지만···

“차라리 Suck이라고 해요.”

“에이, 그러면 너무 좀 그렇잖아? 그래도 동료 이름 부르는 건데.”

“그럼그럼, 원래 동료들끼리는 친근하게 부르는 거야.”

“Suck이 제 이름인데요? 그게 더 친근하지 않아요?”

“하하하, 그냥 애칭이라고 생각해. 뭣하면 앵글로 부를까? 아니면 커트?”

레슬링 복장이야, 선정성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다른 스포츠의 정식 복장인데. 과연 사무국에서 태클을 걸까?

혹시라도 내가 타이즈를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반발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사소한 애칭을 시작으로 제법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대니얼의 말처럼, 단순히 시범경기에서나 보는 애송이가 아니라, 진지하게 동료이자, 선수단의 신입으로 인정받은 거지.

살갑게 굴어주니, 참 고오~맙기는 한데, 서로 간의 벽이 허물어져서 그런지, 신입생에게 짊어지는 의례적인 의무도 함께 따라왔다.

루키 헤이징 말이야.

####

“커트 앵글, 나 드링크 좀 가져다 줘. 어차피 오늘 등판도 안 하니까, 할일도 없잖아?”

“어, 그럼 오는 길에 나도 하나만 가져다 줘.”

“난, 그냥 물 한병!”

시작은 컵스전 이후 이틀 뒤. 3월 14일, 홈에서 열린 로키스전이었다.

비록 등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덕아웃에는 들어가서, 경기를 봤는데.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심부름을 시키네.

‘이게 그 루키 헤이징인가?’

루키 헤이징하면 흔히 웃긴 옷 입고 있는 걸 떠올리지만, 그건 루키 헤이징 데이에나 그렇고. 진정한 의미의 루키 헤이징은 이거다.

심부름시키거나, 세탁물을 맞기거나, 심하면 갑자기 노래를 부르라고 시킨다거나.

말 그대로 루키를 괴롭히는 건데. 일종의 신입생 길들이기다.

보통 분위기가 마초적인 순서대로 강도가 심해지는데, NFL, MLB, NBA순으로 심하다고 한다.

‘누가 미국에는 선후배 대우 없대?’

결국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고, 막내 대우는 어디서나 다 똑같구만.

특히 남자들끼리 우글거리면서 살 부대끼는 단체생활은 말할 것도 없지.

사실 원래라면 정식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뒤에 루키 헤이징도 시작돼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미 빅리그 입성이 확정된 상황이나 다름없고.

거기다가···

“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난 스티비처럼 아프기 싫다고, 미안해!”

“커트 앵글, 너무 그러지 마. 우리가 그래도 너보다 선밴데. 대우는 해줘~”

“공 던지려고? 나 글러브 안 꼈는데? 잠시만 기다려.”

선수단의 고참인 스티븐 보그트와의 마찰의 여파인지, 아무래도 고참 선수들 사이에서 위험분자로 찍힌 것 같다.

저렇게 놀리는 걸 보면.

아픈 기억을 가진 스티븐 보그트 본인도 내가 쳐다보니 조금 흠칫하면서도, 이내, 이번에는 지지 않겠다는 듯 빤히 쳐다봤고.

동료로서 인정받았으니, 이제 친분은 가지겠지만, 그래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성질을 죽여 놓으려는 건데. 내가 얌전히 장단에 맞춰 줬냐고?

“침이 먹고 싶었으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걸쭉하게 뱉어서 올 테니까, 좀만 기다리슈.”

그럴 리가.

아빠뻘이고, 이 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 감독 코치를 죄다 통틀어도 최고참 수준인 그렉이랑도 서로 농담하면서 지내는데. 어딜, 어림도 없지!

걸쭉하게 목을 긁으며, 가래를 영혼까지 끌어모으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드링크 심부름을 시키던 선수들은, 황당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됐어··· 입맛이 뚝 떨어지네.”

“쟤 원래 저래? 생각보다 더 도라인데?”

“어우, 요즘 애들 너무 무섭다니까. 전통이고 나발이고, 자기주장이 너무 심해. 난 안 그랬는데.”

크리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그 행위로 내 성격을 파악한 듯 일찌감치 접었지만, 반대로 오기가 생긴 이들도 있었다.

“이건 뭡니까? 음식물 쓰레기? 상한 치즈 같은데.”

“내 유니폼이야. 네가 가서 클러비한테 전해줘. 난 지금 너무 힘들어.”

대표적으로 제드 라우리.

주전 2루수이자, 메이저 짬밥으로 선수단 내에서 최고참인 선수인데. 경기 중간, 교체로 나오면서, 경기하며 흘린 땀으로 찌들은 유니폼을 쓱 넘겨줬다.

정작 본인은 뽀송뽀송하고.

교체되자마자, 바로 라커룸으로 가서 샤워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온 건데. 그러면 그냥, 그때 라커룸에 처박아 두면 될 것을 굳이 가져와서 나한테 내미는 심보가 고약했다.

그래도 경기를 뛴 선수니, 선의로 부탁했다면 나도 기꺼이 가져다줬겠지만. 이건 못 참지.

“전해주라고요?”

거절할 명분이 애매한 상황이지만, 다행히 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어, 클러비한테.”

“오케이, 바로 갈게요.”

내 국적 말이야.

난 한국인이거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지.

영어 잘 몰라. 이제까진 좔좔 씨부렸지만, 어쨌든 난 한국인이니까.

제드 라우리는 클러비에게 세탁물을 전달하라는 뜻으로 말했겠지만, 나는 외국인으로서 단어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하니, 뭔 짓거리냐며 바라보는데, 그러게, 정확히 말했어야지.

전해주라며, 클러비한테.

그래서 전해주러 가는 중이다. 제드 라우리가 세탁물을 가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이야~ 저거 보기 드문 미친놈인데? 잘만 알아들어 놓고, 모르는 척하는 것 봐. 대놓고 뻔뻔하니까,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지네.”

“그냥 놔둬, 원래 저런 놈이야.”

내가 덕아웃 문을 여니, 제드 라우리는 그제야 깨달은 듯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데. 루키 헤이징마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해탈한 듯한 스티븐 보그트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나가면서 슬쩍 그렉을 바라보니,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였다. 역시 선발투수끼리 통하는게 있구만. 어딜 신성한 선발투수한테 심부름시키려고!

선수들에게 완벽하게 미친놈으로 각인된 것 같지만, 그보다는 남 심부름 들어주는 게 더 귀찮아서 괜찮다.

자칫 선배 대우를 개차반으로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오클랜드인데 뭔 상관이야?

‘따돌린 놈이 나가든, 내가 나가든. 문제 생기면 알아서 트레이드될 텐데, 상관없지.’

내가 뭐 오클랜드에 뼈를 묻을 것도 아니고, 지금 실력이면 불러주는 곳이야 많으니까. 쫄릴 건 없지.

또한 내가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진지하게 따돌리는 것도 힘들 거라는 판단도 있었고.

“괜히 루키 터치하지 마. 성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그리고 선발투수잖아? 건드려서 좋은 소리 안 나올걸?”

“빌리 일도 있으니까, 프런트도 주시하고 있을 텐데. 문제 안 생기게, 그냥 내버려 둬.”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첫 번째 이유는 작년, 지금은 선수단에 없는 빌리 버틀러가 대니 발렌시아와 스폰서 문제로 대립하며 다툼이 있었다는 것.

두 사람은 결국 주먹까지 오가다가 빌리 버틀러는 9월에 방출, 대니 발렌시아는 시즌 끝나고 트레이드되는 것으로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로 인해 팬들의 성토가 이어지면서, 프런트에서도 클럽하우스를 주시하고 있지.

두 번째는 사무국 차원에서의 루키 헤이징 금지였다.

루키한테 이상한 옷 입히는, 루키 헤이징 데이를 금지한 건 아니다. 그건 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거든.

그냥 신입들 너무 괴롭혀서, 메이저리그에 안 좋은 인상 풍기지 말라고, 심부름이나 괴롭힘 같은 걸, 올해부터 사무국에서 금지한 건데, 그런 상황에서 일 크게 벌였다가 걸려서 좋을 건 없지.

‘또 팬들도 가만 안 있을 테고. 작년 성적도 안 좋은데, 유망주까지 괴롭힌다는 소리가 나오면 바로 터질 테니까.’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이후의 보복은 없을 거다.

선수들 눈에는 아마 내가 막 나가는 개차반으로 보이겠지. 고참 포수와 다투더니, 전통적인 루키 헤이징까지 X까라고 하는 거니까.

하지만 난 언제나 계산 하에 움직인다. 스티븐 보그트도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거고.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스티븐 보그트 때문에 어차피 이미 미친놈으로 찍혔으니까, 상관없지.’

착한 사람이 딱 한 번 나쁜 짓 하면 질타를 받는 법이고, 나쁜 놈이 착한 짓 한 번 하면, 알고 보니 좋은 놈이라며 평가가 올라간다.

난 원래부터 발랑까진 놈으로 각인돼서 그런지, 라커룸을 나가며 슬쩍 훑어보니, 역시나 다른 선수들도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쟤는 원래 저런 놈 같으니까, 내버려 두자, 하는 모습들이네.

‘개기는 것도 상황 봐 가면서 개겨야 하는 법이지. 이런 식으로 천천히 각인을 박아 놓으면, 정규시즌 시작한 뒤에도 안 건드리겠네.’

그것으로 루키 헤이징은 정규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조기 진압했다.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레슬링으로 가야겠어.”

“루키 헤이징 데이?”

“어, 신인이라는 녀석이, 심부름도 안 해주는데, 그렇게라도 괴롭혀야지.”

“레슬링복은 죄다 파란색이던데, 녹색은 없나? 기왕이면 팀컬러에 맞춰야지.”

“그거 괜찮네. 은퇴할 때까지, 은퇴 하고 나서도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해주자고.”

다만 괘씸죄로 루키 헤이징 데이에서 입을 복장이 확정된 것 같지만.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를 줘야지.

내 미래를 상상하며, 그냥 드링크 좀 가져다주고, 세탁물도 맡겨서, 잘 달랠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진짜로.

####

“스트라이크 아웃!”

혹시 모를 뒷탈까지 완전히 잠재운 건 역시나 실력이었다.

이후 파드리스전에서 선발로 나가, 4이닝 1피안타 6K를 기록했으니까.

“사실 저 정도 실력이면, 심부름 안 해도 되기는 하지.”

“정식 선발투수인데, 괴롭히는 것도 영 그렇기는 해.”

“원래 루키 헤이징이라고 해도, 선발은 잘 안 건드리잖아?”

만약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걸 빌미로 삼아 다시금 압박을 가했겠지만. 계속 잘하니, 그냥 인정하고 마는 거지.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만약 누군가 데뷔시즌에 MVP 타면, 누가 그걸 신인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렇기에 마지막 실력 검증까지 확실하게 마치며, 그럭저럭 동료들과 어울렸지만. 딱 한 명과는 여전히 조금 데면데면했다.

“아, Go. 오늘도 빠르네. 그럼 수고해.”

“그레이브맨도 수고하세요.”

남들 다 커트 앵글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데, 꿋꿋하게 Go라고 지칭하는 선수.

켄달 그레이브맨.

소니 그레이가 사라진 시점에서, 선발진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인데.

나는 솔직히 그놈의 커트 앵글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Go라고 불러주는게 차라리 고맙지만, 어쨌든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어차피 둘 다 주전 선발투수로 확정된 입장이니, 원래라면 딱히 거리낄 게 없어야겠지만.

‘언론이랑 팬들이 자존심을 살살 건드린단 말이야.’

내 잘못은 아니다.

외부에서의 부추김이 문제지.

<개막전 선발은 누구? 응답자 76%가 Go를 지지!>

[#A’s]

[난 솔직히 Go가 개막전 선발로 나왔으면 좋겠어.]

└나도. Go가 정규시즌에서도 통할지, 당장 보고 싶거든.

└까놓고 말해서, 보는 맛도 켄달보다는 Go가 더 좋지. 일단 시원시원하잖아?

└어차피 소니도 없는데, 그냥 제일 기대되는 놈한테 맡기면 안 되나?

개막전 선발투수.

다르게 말하면, 소니 그레이가 돌아올 때까지 1선발.

언론과 팬들이 그걸 꺼내고, 은근하게 나를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서로 거리감이 생겼다. 그레이브맨 입장에선 자존심의 문제니까.

소니 그레이가 없으니, 선발진의 고참이자, 작년 괜찮은 성적을 올렸던 자신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직 정식 데뷔도 못 한 나에게 여론에서도 밀리고 있으니. 그레이브맨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겠지.

투수는, 특히 선발투수는 스스로의 프라이드로 먹고사는 거니까.

내가 먼저 다가가서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조금 욕심이 생겼고.’

자꾸 바깥에서 바람을 불어서 그런가.

귀가 조금 솔깃해졌거든.

원래는 생각조차 안 했다. 1선발이라고 해봐야 소니 그레이 돌아오면 다시 자리 내줘야 할 텐데. 뭐가 대단하다고 탐을 내?

어차피 가능성도 낮을 텐데.

하지만 팬들의 여론이 생성되는 걸 보니, 조금씩 마음에 욕심이 자라났다.

‘데뷔전으로 개막전 선발등판. 보통 일은 아니지. 그래서 더 값진 거고.’

예전에는 그저 실력이 떨어져서 참았던 거지, 난 원래 욕심이 많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 스스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먹어 치울 정도로.

‘4월 3일에 개막이니. 서로 남은 경기는 둘. 아니, 로테이션 조정까지 감안하면, 하나인가?’

서로 사람들에게 실력을 선보이고, 최종 결정을 위해 스스로를 뽐낼 기회는 딱 하나.

그 뒤에는 개막전을 위해 적당히 주전 선발투수들의 로테이션을 조정할 테니. 그 한 경기로 판가름 난다.

‘굳이 개막전이 아니더라도, 개막전 시리즈에는 충분히 나갈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꿈을 크게 가져야지.’

당장은 내가 언더독이다.

팬들 여론이야, 시범경기에서 내가 돌풍을 일으켰으니, 좋을 수밖에 없지만. 구단의 견해는 또 다르니까.

작년을 이미 말아먹었는데, 개막전을 신인 투수에게 맡기는 건 어려운 결정이잖아?

또 막상 내가 시범경기에서나 잘하다가, 개막전에서 얻어터질 수도 있고. 그러니 보여줘야 했다.

‘지금까지는 3이닝 정도에서 끊었지만, 본격적인 실전 테스트를 위해서, 다음 경기는 좀 길게 던지겠지.’

그런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내가 매력적인 카드라는 걸.

물론···

‘일정을 따지면 상대팀은 화이트삭스인가? 체력 테스트를 감안하면 아마 6이닝에서 7이닝 정도를 맡길 텐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자신감도 있었다.

루키 헤이징 때도 말했지만. 난 절대로 무작정 덤비지 않는다. 가능할 것 같다는 계산이 서면 그때 개기는 거지.

그런 내 육감이 이야기해줬다. 여론을 등에 업었으니, 이번에도 나만 잘하면, 충분히 개길만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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