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55화 (55/316)

55화

패스트볼만 노리고 있는 타자.

스윙의 타이밍과 타격감이 모두 포심에 집중되어 있다.

근데 내가 패스트볼만 던질 줄 아는 투수가 아니다. 구속 차이가 죽여주게 나고, 제구는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슬로우 커브도 하나 가지고 있지.

이건 뭐다?

‘이건 못 참지.’

간만에 슬로우 커브 룰렛 돌릴 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원하게 헛스윙하는데,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딱 이럴 것 같더라.

‘내가 미쳤나? 또 포심 하나 주게? 딱 보니, 이번에는 진짜 넘기겠구만.’

대놓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걸 안 받아먹으면 투수 실격이지. 비록 시범경기 내내 이어왔던 퍼펙트와 노히터는 깨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져서 희희낙락 웃으면서 마운드를 내려가니, 어째 보는 눈들이 싸했다.

아까 전까지는 날 사랑하는 것처럼 쳐다보더니, 이제는 약간 뜨뜻미지근하네. 갑자기 또 왜 이래?

“음···.”

“그- 그래, 잡는 게 중요한 거지! 잘했다!”

“하하하 아주 멋진··· 속임수였어. 그래, MVP 별거 아니네.”

왠지 조금 실망도 한 것 같고. 팬들도 다른 동료 선수들도 김이 샜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 비겁한 새끼야!”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거시기 떼라! 거시기 떼!”

“우우우우우우!”

컵스 팬들은 뭔가 다른 이유로 단단히 빡이 돈 것 같고.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막힌 게 그렇게 화가 난 건가? 하여튼 컵스빠들 극성이라니까.

MVP라고 어떻게 늘 잘해?

10번 중 3번만 쳐도 잘한다는 소리 듣는 게 타자인데, 거 가끔씩 이렇게 발릴 때도 있는 거지.

“잘했어. 대놓고 패스트볼 노리던데, 안 먹이면 그게 X신이지. 내 수제자답네.”

“그렇죠? 너무 노골적이라서 오히려 쉽던데요?”

그렉도 약간은 실망한 것 같지만, 이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죠?”

“어? 어어, 그래야지. 수고 많았어. 오늘··· 정말로 멋졌다.”

기분 좋게 웃은 뒤, 혹시 더 던지게 해주는 건가, 싶어서 스콧 에머슨에게 물으니,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렉과 마찬가지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세우는데, 어쩐지 이전 경기들보다 더욱더 만족스러워 보였다.

3이닝 1피안타, 1볼넷. 5탈삼진이면, 오히려 지금까지 시범경기들보다 조금 못한 성적인 건데. 마음에 들었던 건가?

‘하긴, 예전이랑 라인업이 다르긴 하지.’

이해는 된다.

지난 경기들은 마이너리거도 섞여 있고, AAAA리그도 있어서, 온전한 메이저리그 전력이라고 보긴 애매했지만.

오늘은 온전하게 전력을 갖춘 컵스를 상대로 준수한 성적을 올린 것이니, 평가가 더 높을 수밖에 없겠지.

“그나저나 껌은 어때? 효과 좀 있어?”

“껌은···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집중은 확실히 더 잘된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경기 시작부터 씹고 있던 껌이 아직도 입 안에 있다. 이젠 완전히 몰아일체네.

적어도 오늘은 그 껌의 효과가 나쁘진 않았다. 평소 경기 중간에 올라오는 것처럼 인터벌이 엄청나게 빨라지는 건 아니지만. 판단이 조금 빠르기는 했으니까.

본격적으로 찍어 눌렀던 2회 초도, 볼넷 하나 내준 걸 제외하면, 타자들을 손쉽게 잡았었고.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은데, 딱히 크지도 않아.’

기대한 것만큼의 엄청난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계속해야지.

벌써 좀 턱이 아려오는 걸 보아, 본격적으로 시즌이 시작되고, 긴 이닝을 맡게 되면, 조금 조절해야 하겠지만.

“효과가 있다니 다행이네. 그간 열심히 씹더니, 아예 뻘짓은 아니었어.”

껌 하나에 집중이 올라가다니, 이 단순한 놈. 그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나는 한없이 진지했는데, 반응이 이러니, 조금 불쾌하구만.

“표정 펴. 커트 앵글. 지금도 카메라에 잡히고 있을 텐데, 표정 관리 해야지.”

“아, 예.”

귀신같네. 얼굴 좀 일그러뜨리니, 바로 지적하는 것 봐.

옆에도 눈이 달린 건가?

‘거짓말은 아니네. 덕아웃 카메라가 죄다 내 쪽으로 향해 있어.’

망상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대놓고 날 찍고 있거든. 행동 하나하나를 다 담겠다는 듯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오늘도 잘하긴 했지. 그것도 엄청.’

잠깐, 가만 생각해보니, 나 오늘 진짜 좀 잘한 것 같은데? 작년 MVP가 포함된 타선을,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도 좋은 성적을 거뒀으니···

‘어? 진짜, 1선발도 가능한 거 아니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Go, 가만히 좀 있어. 아이싱하기 힘들잖아.”

아이싱하는 와중에 움직이니, 트레이닝 코치가 한 소리 했지만, 아랑곳 않고 덕아웃을 훑으며 선수들의 반응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니, 씨익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가 진짜 에이스의 선수가 되기는 했나 보다. 개소닭 보듯이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선수들, 아니, 동료들의 반응까지 확인하니,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 것 같았다.

이대로 로테이션만 쭉 유지되면 되는 건데···.

‘뭐, 구단에서 알아서 하겠지. 일단 선발진에는 확실하게 올라갔으니까.’

기대감과 함께 풍선껌을 부풀며, 그라운드를 지켜봤다.

이후 세 번째 타석에 올라간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박력이 넘치는 스윙으로 홈런을 만들었지만···

뭐, 그거야 별로 안 중요하지. 그래봤자 나한테 발렸잖아. 외야플라이 하나, 꼴사나운 헛스윙 삼구삼진 하나로.

다른 투수한테 홈런 쳤다고, 이전 기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쟤 지금 나 가리키는 거죠?”

“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커트 앵글 너 가리키네. 확실한데? I see you, 뭐 그런 건가?”

크리스 브라이언트 본인은 어쩐지 앙금이 남은 것 같지만.

어쩌라고, 어차피 올해는 월드시리즈에서 붙는 거 아닌 이상 만날 일도 없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패배감을 곱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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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이겨냈군.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텐데,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어.’

오늘 경기를 지켜본 박기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록 자체는 아예 퍼펙트에, 삼진도 조금 더 많았던 지난 경기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지 모르나.

고유석이라는 투수 개인의 이미지에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경기였다고.

‘소니 그레이, 오클랜드를 아는 사람이라면, 팬들이 그 선수에게 가지는 마음을 모를 수가 없지.’

한국에서도 고유석이라는 선수의 주가가 급상승하면서, 화시에서도 긍정적으로 여긴 건지, 덕분에 모든 경기를 직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오늘 평소보다 훨씬 더 사람이 많다는 걸. 모두 다 고유석이라는 이름에, 아니, 그가 보여줄 미래에 홀려서 찾아온 거겠지.

그런 수많은 팬들 앞에서, 중계방송까지 포함하면, 거의 모든 오클랜드의 팬들 앞에서, 고유석은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정면승부··· 이런 낭만이 있는 선수였던가? 구위는 대단하지만, 기교파에 조금 가까운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박기자 자신에게도 말이다.

크리스 브라이언트, 절대로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이미 시카고라는 거대도시의 스타가 된 선수니까.

그토록 대단한 선수와의 첫 대결에선 정정당당하게 승리하더니. 이어진 2차전에서는···

‘자기가 어떤 투수인지 제대로 보여줬지.’

마지막의 슬로커브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전율이 돋았다. 크리스 브라이언트. 작년 NL MVP가, 이제 갓 데뷔를 앞둔 투수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했으니까.

“2번째 타석에서도 정면승부 했으면, 저 새끼가 홈런 맞았을 텐데···”

“비겁한 새끼! 먼저 시비 걸어놓고, 야비하게 구네. 거지새끼들한테 딱 맞는 투수야.”

컵스 팬들은 성이 났다.

자신들을 흘겨보는 오클랜드 팬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라운드 한쪽에서 인터뷰 중인 고유석을 보며 씩씩거렸고. 폄하하는 말을 참지 않았다.

허나 박기자는 이런 컵스 팬들의 반응이야말로, 고유석의 승리를 상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 제가 영어는 잘 모르지만,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왜들 저러는 거예요? 크리스 브라이언트 때문에?”

“우리 팀의 자랑스러운 MVP가 이름도 모르는 하찮은 동양인 투수의 비열한 술수에 발렸으니, 자존심이 오죽 상하겠어?”

“에이, 비열하긴 뭐가 비열하다고. 당연한 행동이지. 하여튼, 컵스 팬들은 자기 팀을 너무 사랑한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사수는 얼추 정답에 근접했다. 평소엔 시원찮은 놈이지만. 의외성이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네 말대로 당연한 행동이지. 그래서 더 완벽해진 거고.”

“그쵸?”

“첫 타석은 낭만이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프로의 세계를 보여준 거니까. 고유석 자신이 어떤 투수인지를.”

투수가 비열하게 느껴지면, 그 투수가 참 잘한다는 거다.

아무리 얍삽한 수를 쓰더라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으면, 오히려 우스운 법이니까.

그러니 컵스 팬들이 저렇게 화가 났다는 건, 짜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한편으론 까다롭게 느꼈다는 거지.

고유석이라는 투수를.

‘이번 경기를 지켜보거나, 나중에 알게 될 다른 팀의 팬들도 그렇게 여길 거고.’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투수. 매덕스가 인스트럭터로 붙었다는 걸 알아차린 뒤, 흥미가 생겼던 투수.

그리고 처음으로 눈앞에서 선보인 피칭으로 머릿속에 똑똑히 박혀버린 투수.

그를 생각하며, 박기자는 이내 피식 웃었다. 오늘, 류영진이 등판하지도 않았으니. 아마 한국에도 중계가 됐을 거다.

현지의 팬들마저 충격으로 물들어, 저런 반응을 보이는데, 과연 한국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번 기사도, 기대해도 괜찮겠어. 인터뷰만 하나 따서 같이 실으면 딱일 것 같은데···’

공식 방송 인터뷰를 마친 건지,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고유석을 보며, 주변의 다른 기자들이 모조리 일어났다.

“야야! 빨리 준비해!”

“오늘 어떻게든 인터뷰 따야 한다. 최소한 질문 하나라도 받아야 한다고!”

“젠장··· 뭐라고 표현하지? Go의 피칭은 그저 퍼펙트했다? 아니, 퍼펙트는 너무 많이 썼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사의 타이틀이나, 인터뷰를 생각하며 부산스럽게 구는 기자들에 피식 웃은 박기자는 이내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금 호들갑스러운 무리를 봤다.

‘스카우트··· 저쪽도 꽤나 바빠지겠어. 오클랜드 프런트도.’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 언제까지 농땡이 피울 거야? 카메라 잘 챙기고.”

“경기 끝나기 전에, 이미 다 준비해뒀죠. 바로 가시면 됩니다.”

“그래, 이제 좀 일머리가 늘었네.”

바쁘게 움직이는 스카우트들. 다른 구단에서 보낸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몇몇은 오클랜드 소속이다.

고유석에 대한 기사를 위해, 꿩 대신 닭이라고, 오클랜드 스카우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서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저들이 저렇게 황급히 행동한다는 건, 구단에도 적지 않은 충격이라는 거겠지.

그런 스카우트들과 말없이 박수를 치거나 환희하며, 경기를 되새김질하는 오클랜드 팬들을 번갈아서 보며. 박기자는 생각했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군.’

아직 메이저리그에 단 한 경기, 한 이닝도 나오지 않은 투수였지만. 지금 이 순간 고유석은 오클랜드의 새로운 스타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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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시작, 프로다운 마무리! Go, MVP 크리스 브라이언트와의 맞대결에서 완승!>

<소니 그레이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우며 팀의 자존심을 세운 Go! 3이닝 1피안타, 1볼넷 5탈삼진>

<고유석 1선발 가능성? ‘실력은 이미 충분하다’, 구단 관계자가 밝혀···>

<목표는 사이 영? No! 그저 구단의 우승! Go는 실력과 더불어 로열티를 가졌다!>

아주 그냥 빨아주고, 핥아주고 난리도 아니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을 뿌리치면서 간신히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을 확인하니.

방금 막 올린 따끈따끈한 기사들로 가득했다. 죄다 내 얘기 중이고.

물론 친 오클랜드 언론사나, 한국 쪽 위주로 쭉 훑어본 거기는 한데, 어쨌든 반응은 엄청났다. 뜻밖의 말도 나오고.

‘낭만적인 시작? 팀의 자존심을 세워? 내가?’

이건 또 뭔 개소릴까.

오늘 내 피칭에 낭만 같은 게 있었나? 퍼펙트를 유지했다면 모를까, 간만에 피안타와 볼넷을 올려서 기분이 좀 찝찝한데, 이런 소리를 하니 오히려 어이가 없다.

그래서 기사 내용을 살펴봤는데, 어? 뭔가 그럴듯한데?

다른 사람들은 크리스 브라이언트와 나의 승부를 이렇게 볼 법도 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이해되네.

‘어쩐지 팬들이랑 동료들, 반응이 좀 과하더니, 이렇게 생각 했던 거야?’

왠지 좀 과하게 열광한다 싶더라니. 속구로 승부하는 걸 보고 저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뭐, 확실히 첫 타석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처럼 보이겠지만···

저런 생각으로 피칭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왠지 좀 거짓말을 한 것만 같았다. 괜히 기분이 찝찝해. 살짝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죄다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데, 그러면 내가 거기에 맞춰 줘야지.’

나 빼고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뻔뻔하지만, 뭐 어때? 원래 의도는 결과에 끼워 맞춰지는 법이야.

경기 내내 이어졌던 착각의 진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해명하거나 정정하지는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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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 본인은 지금의 반응들과 사람들의 착각에 그저 기분 좋게 생각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여파는 조금 거대했다.

전력으로 나온 디펜딩 챔피언을 이제 갓 유망주 딱지를 벗기 직전인 투수가 잡은 거니까.

물론 이전에도 시범경기 내내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이며, 관심을 사로잡았지만. 어느 정도는 초심자의 행운이 섞여 있을 거라는 게 주류 평가였다.

아예 플루크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마이너 선수니, 더 많이 준비했을 것이고, 상대팀이 데이터도 없을 테니.

약간은 쉬웠다는 거지.

‘하지만 이번 경기로 깨졌어.’

허나 오늘은 아니다.

컵스는 그런 초심자의 행운 정도로 잡을 수 있는 팀이 아니고, 크리스 브라이언트라는 선수 또한 운적 요소로 이길 수 없는 선수니까.

또한 컵스는 이미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고유석을 상대해봤고. 그때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요주의 인물로 찍었다.

구위가 대단하다는 것도, 체인지업이 뛰어나다는 것도, 피칭 스타일이 공격적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는 뜻.

그런데도 이겼다는 건.

‘초심자의 행운은 퍼펙트까지 였다는 거지.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그냥 자기 기량이야.’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안타와 볼넷. 초심자의 행운은 딱 그 정도였다는 거다.

그걸 깨달은 순간, 각 구단들은 부산스러워졌다.

“올해 무조건 데뷔하지?”

“아마도 그렇겠죠. 개막전 시리즈부터 선발라인업에 오를 겁니다. 에이스가 투수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니까.”

“일단 데이터부터 만들자. 분석팀에 시범경기 최대한 관찰하라고 하고,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해.”

가장 먼저 바빠진 건 전력분석팀이었다. 화려한 유망주가 당장의 위협으로 변한 만큼, 그에 대한 대처가 필요했으니까.

특히 애슬레틱스와 같은 지구인 에인절스나 애스트로스, 고유석에게 이미 한 차례가 깨진 바가 있는 레인저스 같은 팀들은 그의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으기 바빴다.

그가 무슨 공을 던지고, 스터프는 어느 정도인지, 무브먼트는 어떤 종류인지. 혹시 습관은 없는지.

보이지 않는 속옷을 제외하고는,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했고. 기존보다 조금 더 많은 숫자의 분석관들이 피닉스로 날아갔다.

고유석이라는 새로운 위협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팀들이 그랬다면. 에이스와 부딪칠 일이 없기에, 서로 간의 트레이드가 용이한 내셔널리그는 조금 반응이 달랐다.

-데이브, 나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뭐, 우리끼리 통화하는 게 무슨 이유겠어? 트레이드지. 너희 팀에 괜찮은 투수 하나가 있던데···

“션? 실링이 높긴 하지. 그런데 트레이드 건은 사장님한테 물어보지 그래? 알잖아, 나 힘없는 거.”

-션이 아닌 거 알잖아. Go 말이야, 빌리한테는 이미 연락 했어. 천하의 빌리 빈도 나이가 들었는지 고집불통이 다 됐던데? 오른팔인 자네 말이라면 들을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했어. 어때?

“꺼져.”

Not for Sale을 외친 빌리 빈 때문인지, 단장이라고는 하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은 데이비드 포스트에게도 연락이 빗발쳤다.

그를 꾀어서 어떻게든 찔러나 보려는 건데, 그 의도가 너무 뻔해서, 그때마다 Fuck off를 외치며 전화를 끊었지만,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언젠가 주가가 올라갈 줄은 알았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매물의 가치가 달라졌다.

상대 쪽에서 트레이드 대가로 내미는 선수들의 이름값이, 불과 반 년 전과 심각한 차이를 보였다.

작년 트레이드 마감 이전, 숱한 제안이 쏟아졌던 고유석이지만, 대부분은 준수한 유망주 정도로 생각하며 매물을 제시했는데.

이젠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지, 데이비드 자신도 바로바로 이름이 떠오를 만큼 매력적인 매물들이 빗발쳤다.

작년 드래프트에서 갓 뽑은 따끈따끈한 1라운드 선수들마저 오르내렸으니까.

기존에도 고유석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던 데이비드 포스트기에, 유망주의 가치가 언젠가 인정받을 거라며 생각하긴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르고, 가팔랐다.

이건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라, 작전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치가 폭등했으니까.

‘남 얘기는 아니지. 우리 쪽도 다들 난리법석이니까.’

웃긴 건, 이렇게 화들짝 당황해버린 게, 다른 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역시 내부에서 꽤나 충격을 받았으니까.

이미 몇 번이고 다시 재평가되었던 고유석에 대한 평가가 또한번 상승했고. 노련한 스카우트 몇몇은 진지하게 내가 이제 퇴물이 된 건 아닌지 고민하며, 은퇴를 생각하기도 했다.

전력분석관들은 기존의 자료를 거의 반쯤은 폐기한 채, 다시 작성하느라 바빴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케팅 쪽 만큼은 아니지.’

고유석이라는 폭탄이 던져 준 충격에 프런트 전체가 허우덕 거렸지만, 그마저도 마케팅 팀의 수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유니폼 판매량이 급증이라··· 아직 이름도 제대로 마킹이 되지 않았는데.’

서서히 고유석이라는 선수가 떠오르면서, 만약을 대비해 고유석의 등번호인 79번이 적힌 유니폼을 급하게 찍어냈었다. 판매량이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진짜로 다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기껏해야 절반쯤 팔리면 대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대단한 성적이기는 해도, 아직은 레귤러에 못 미치는 마이너, 거기다 인종적인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 추가 물량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넉넉하다 못해, 넘치리라고 생각했었건만.

벌써 유니폼이 거의 동났다.

기존의 선발투수인 션 마네아와 켄달 그레이브맨의 판매량은 확실하게 앞지를 거라는 예측도 나왔고 말이다.

몇몇 과격한 직원들은 어쩌면 일시적으로나마, 소니 그레이와 크리스 데이비스에 이어 3위에 등극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원래라면 개소리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다시 보내달라며 소리치는 점주들의 아우성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프런트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졌고. 다른 선수들의 유니폼처럼, 매장에서 마킹해줄 수 없느냐고 묻는 팬들이 건의도 빗발쳤다.

그에 직원들은 그저 바쁘게 돌아다니며, 구단과 연결된 공장들에 발주를 넣었다.

‘인터넷 판매야, 한인들이나, Korea의 해외 주문이 많으니 이해가 가지만, 진짜는 오프라인 매장이지.’

구장 스토어에서 그런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는 것은, 고유석이라는 선수가 그만큼이나 팬덤에게 어필을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시범경기 동안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던 고유석과 소니 그레이의 이탈이라는 문제로 생겨났던 또 다른 고민으로 이어졌다.

‘개막전은 홈에서 열리지. 만약 지금 분위기가 그때까지 이어진다면··· 홈팬들은 과연 개막전의 선발투수로 누가 마운드에 올라오길 바랄까?’

어쩌면 그저 재밌는 가능성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검토를 해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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