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54화 (54/316)

54화

“···”

그라운드를 내려 보는 눈동자는 부산스러웠다. 한시도 가만히 한 지점에 머무르지 못하며, 시시때때로 움직였다.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관중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정확하게는 에이스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죄다 그랬다.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니, 그만큼 마음이 불안정하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불안했고, 지금도 불안하니까.

‘드디어 쓸만한 선발투수 나왔다고 기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소니 그레이를 볼 때면 항상 아쉬웠다. 소니의 문제는 아니다. 그는 적어도 A’s에겐 언제나 완벽한 에이스니까.

아쉬운 건 다른 투수들이다.

에이스인 소니 그레이의 뒤를 받쳐주고, 함께 팀을 이끌 투수가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거란 생각이 항상 들었다..

작년은 리치 힐이라는 걸출한 투수가 등장해서,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해줬지만. 반대로 소니 그레이가 부상으로 허덕였고.

단년 계약이고,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몸값이 비싸진 리치 힐은 항상 그랬듯이, 시즌 중간에 트레이드로 사라졌지.

남은 건 무너지고 남은 폐허 위에서의 재건이었지만, 그 재건은 예상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다저스에게 받아온 투수들도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고. 팀에 투수 유망주는 많았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범경기 시작 후 컵스전과 레인저스전에서 광명이 비췄다.

“어제 경기 봤어? 우리 팀에 죽여주는 투수 있던데.”

“그, Suck 맞지? 이름 특이해서 기억나네. 엄청나긴 하더라. 진짜 매덕스 같던데? 좌완이긴 하지만.”

“쯧쯧, 이 느린 새끼들. 난 작년부터 주목했다 이거야. You-Suck이 더블A에서 어떤 성적 찍었는지는 아냐?”

“그래, 너 잘났다.”

유망주, 아니, 그런 수준을 넘어, 지금 당장 선발진의 중심을 맡을 수 있는 수준의 투수가 불현듯 등장했으니까.

압도적이고, 화려했던 피칭을 본 순간 팬들의 머릿속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에이스인 소니 그레이와 그 뒤를 받쳐주는 강력한 선발진. 그리고 원래도 파워가 준수했던 타선의 조합.

그 아름다운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릴 무렵, 절망은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

-아아! 디백스! 또다시 득점! 이제 점수는 7대0!

-음··· 좋지 않네요. 약간 통증을 호소하는 것 같은데, 부상일까요?

-그래도 2회는 스스로 잘 마무리 지었기에, 경미한 수준일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부상에 시달렸던 소니 그레이지만, 올해는 다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욱 빠르게 찾아왔다.

디백스에게 난타를 당하며 내려가던 소니 그레이의 뒷모습을 팬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하얀 도화지에 흩뿌려진 잉크처럼,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에 검게 얼룩이 남았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올라온 선수가.

-스트라이크 아웃!

-Go! 오늘 정말 굉장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양 팀의 난타전이 될 것만 같았는데. 이젠 Go의 피칭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얼룩진 머릿속을 그냥 싹 뒤덮어버렸다. 얼룩이 있었던 것조차 까먹을 정도의 아주 강렬한 자신의 색채로.

<2017 캑터스 리그 최고의 라이징 스타!>

<새롭게 등장한 체인지업 마스터! Go, 세 가지 체인지업으로 디백스를 완파!>

그래서일까?

애슬레틱스뿐만이 아니라, 아메리칸 리그 내에서도 제법 수위급 투수로 인정받는 소니 그레이의 처절한 난타는 빠르게 가려졌다.

구단에서 어떤 조치를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에이스의 몰락보다도 이쪽이 더 자극적이고, 흥미롭다는 거겠지.

수없이 올라오는 기사와 분석, 다른 팀 팬들의 부러움 섞인 말들. 그런 반응을 보며 에이스 팬들도 잠시나마 걱정을 내려놓았다.

오래간만에 어깨가 올라가기도 했고.

<캠프에서 자취를 감춘 소니 그레이?>

<소니 그레이, 부상 확인!>

<소니, 광배근 부상으로 4주 아웃! 복귀 기간은 그보다 훨씬 긴 것으로 예상돼·····>

행복은 이번에도 오래가지 않았다. 설마설마했던 부상이 현실이 됐고. 복귀시기도 미지수라는 말이 나왔다.

<12일, 컵스전. 소니 그레이 대신하여, Go가 선발출장>

그때였다.

호호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건. 믿었던 에이스가 다시금 무너진 가운데, 그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그 빈자리를 이어받은 선수에게서.

“Go는 잘하겠지?”

“션이랑 켄달도 괜찮긴 하지만··· 소니가 없으니, 사실상 Go가 에이스나 다름없어.”

“Go는 몸 괜찮대? 어떤 기사보니까, 작년에 많이 던져서 위험하다고 하던데.”

이젠 정말로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선수기에 기대감을 가지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불안함이 공존했다.

“···우리 보는 건가?”

“Go! 오늘도 잘해라!”

그래서 응원을 하면서도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경기가 시작된 지금도.

초조한 듯 다리를 떠는 사람도 있었고, 왠지 모를 답답함에 사 온 음료수를 벌컥 들이켜기도 했지만. 그 모든 행동은.

-스트라이크!

초구가 박히는 순간 가라앉았다.

마치 자신은 건재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하듯 힘차게 던진 공.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경기 속에 빨려 들어갔다.

타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내 팀도 아니고, 같은 지구나 리그의 선수도 아니니까.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타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저 상대팀의 타자를 우리 투수가 손쉽게 때려잡는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할 뿐.

-스트라이크 아웃!

“이예에에에에에에!”

“그렇지! 이거지!”

떨리던 가슴이 조금 다른 이유로 두근거렸다. 오늘도 기분 좋게 시작한 경기기에, 저 선수는 언제나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2번타자, 크리스 브라이언트.

하지만 그다음 타자의 등장에 흥분은 조금 잦아들었다.

“크리스 브라이언트? 유명한 놈이야? 다들 반응이 이상하네.”

“작년 내셔널리그 MVP잖아, 멍청아.”

“MVP? 그럼··· 저 새끼가 트라웃 수준이라는 거야?”

“트라웃 만큼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정도는 되겠지. MVP니까.”

집중이 탁 풀렸다.

작년 최정상을 차지한 선수가 저벅저벅 타석으로 들어왔으니까.

트라웃이라는 괴물과 같은 지구 팀이라는 죄로 수없이 고통받았던 에이스기에, MVP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잘 알았다.

“Go가 잘하기는 해도···.”

“MVP라잖아, MVP. 적당히만 잡아도 되는 거지.”

“뭐, 그래도 시범경기니까, 살살 하겠지. 그 정도면 Go가 잡을 수 있어.”

그렇기에 그냥저냥 적당한 결과에 만족하리라고 다짐하며, 다시금 불안하게 그라운드를 봤지만.

-볼!

그런 관중들의 머리를 때리듯, 심장이 철렁거릴 정도의 위협구가 날아갔다.

마치 자신은 MVP 같은 단어에 쫄지 않는다고 외치듯, 당당한 일구는 그 무게감에 짓눌렸던 팬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였다.

“야구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그러게 왜 홈 플레이트에 붙어? 처맞기 싫으면 떨어지던가!”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반발하는 컵스 팬들을 향해 더욱더 호되게 소리쳤고.

-파울!

자신감을 북돋워 주듯이 다시금 묵직한 공이 날아갔다. 마치 피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옆동네라고는 하나, 빅리그의 정상에 선, 선수에게 지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은 가슴속에 묘한 울림을 줬다.

-파울!

두 번째 파울은 조금 더 컸다. 소리도 훨씬 무거웠고.

괜히 MVP가 아닌 건지, 그 강력한 힘에 가슴이 철렁거릴 정도였지만, 여전히 투수는 진지하게 타자를 노려봤고.

그런 투수의 얼굴을 잡아주는 카메라와 전광판 화면에 가슴이 요동쳤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절절하게 전해졌으니까.

“그래! 쫄지 말고 던져!”

“MVP가 별거야? 너도 올해 사이 영 탈 거니까, 안 꿇려!”

“저 새끼도 삼진으로 잡아버려!”

알았던 거다. 저 투수도.

우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 건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그걸 떨쳐 내주기 위해서, 불안을 지워주기 위해, 더욱더 용감하고, 강력하게 맞서 싸웠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아웃!”

결국 이겨냈다. 당당하게.

MVP와의 정면대결에서 당당히 승리한 투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뱉으며 살짝 웃었고.

그 옅은 미소가 마지막 퍼즐로서 완성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You-Suck! You-Suck!”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을.

-정말 대단하네요.

-네, 크리스 브라이언트를 상대로, 오직 패스트볼! 패스트볼로 정면승부를 펼쳤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소니 그레이의 부상 소식으로 애슬레틱스 팬들이 많은 걱정을 했는데. Go가 그 모든 걱정을 지워주네요.

-체인지업 마스터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브레이킹볼에 능하고, 다양한 구종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선수인데, 이번에는 팬들을 위해서 패스트볼을 던졌습니다.

그저 자신의 구위를 시험하고 싶었을 뿐인 고유석 본인이 알았다면,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며 헛웃음을 지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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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혹시 필요한 거 없어?”

“물 좀 줄까? 땀 많이 흘리던데.”

“자자, 다들 꺼져. 선발투수한테 뭐하는 거야? 정, Go를 돕고 싶으면, 가서 점수나 내.”

뭔지 모르겠지만. 다들 친절해졌다. 갑자기 친한 척들이야. 네가 우리 팀의 자존심이라며,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양반도 있고.

“Go, 수고했어. 바로 점수 낼 테니까, 기대해.”

“아, 예. 아! 크리스, 껌 줘서 고마워요. 도움 됐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도 잘 해보자.”

껌이라는 수단을 알려줬던 크리스 데이비스도 뭔가 좀 친근하게 굴고 말이다.

‘팬들도 뭔가 이상하지.’

거기다 팬들도 좀 이상하다.

원래도 나를 보는 눈빛에 꿀이 뚝뚝 떨어지긴 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심하네.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은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 된걸까? 영 모르겠단 말이야.

팀에 녹아든 것 같아서 기분은 좋지만. 상황이 이해가 돼야, 좋든 말든 하지.

“커트 앵글, 오늘 아주 멋졌어. 그래야 선발투수지! 가르침 보람이 있던데? 뭐, 스터프는 내 작품이 아니지만.”

심지어 그렉마저도 묘하게 뿌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이 양반은 또 왜 이러는가 몰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칭찬에 박하던 양반까지 이러니, 머릿속이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뭐, 그래도 나쁜 건 아니니까. 날 좋게 봐주는 건데,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쨌든 나한테 나쁜 일은 아니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며, 애써 넘긴 뒤, 그렉에게 진지한 감상을 물었다.

“꽤 쓸 만한 것 같죠? 그렉이 보기에는 어땠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쓸 만한 정도는 이미 넘어섰지. 크리스 브라이언트, 쟤 작년에 홈런이 38개던가?”

“39개요.”

“그런 거포가 작정하고 하이 패스트볼을 날렸는데, 안 넘어갔으니··· 뭐, 말이 더 필요해?”

말 다 한 거긴 하네.

뿌듯한 표정이던 그렉도 새삼 신기하다는 듯 나를 훑어봤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는 눈빛이네.

하긴, 날림 구위였던 거 엊그제 같은데. 이젠 리그에서 알아주는 거포도 쉽게 못 넘길 정도의 구위가 됐으니, 내 예전 구위를 알고 있는 그렉 입장에선 신기하긴 하겠다.

‘이유가 황당하다는 걸 알면, 그것도 모르면서 야구 했냐고 놀리겠지만.’

“비결이 뭐냐? 시범경기 끝나고, 다시 애들 가르치러 가면 좀 써먹자.”

말없이 손가락 마디를 톡톡 쳤는데, 영 못 알아듣네.

저 지금까지 손가락 끝으로 던졌어요, 라고 하면 바보 취급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닫았다.

“섭섭하네, 우리 사이가 그거밖에 안 돼? 아, 혹시 나만 보면 눈동자에 사랑이 가득한 그 트레이너 양반 작품인가? 그러면 이해가 가네. 자기만의 영업비밀인데, 가르쳐주긴 좀 그렇겠네.”

알아서 착각해주시니 고맙네.

조금 삐질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오늘은 착각의 연속인 것 같구만.

그렉도 그렇고, 선수들도 그렇고, 관중들도 그렇고. 죄다 나에 대해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거든.

‘나중에 되면 알겠지. 타자나 잘 잡자.’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전해 받았던 컵스의 자료를 뒤적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잘하면 크리스 브라이언트도 착각하고 있겠는데?’

처음에는 위협구에 화가 난 듯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꽤 진지해 졌었다.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리고 약간의 흥미로움과 만족감도 있었지. 내 의도가 어찌됐든,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당당한 힘싸움이었으니까.

‘어차피 3이닝만 던지고 내려갈 테니, 계속 퍼펙트 이어가면 못 만나겠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지.’

언젠가 볼넷도 하나 나오기 마련이고, 안타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게 오늘일 수도 있고.

만약에 그래서 다시 크리스 브라이언트와 붙는다면, 한번 써먹어 볼 만했다.

‘오래간만에 룰렛을 돌려야겠어.’

3루에서 열심히 수비하고 있는 크리스 브라이언트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니, 괜히 설렌단 말이야.

그래서 씨익 웃었는데, 그때 딱 눈이 마주친 크리스 브라이언트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대하고 있겠다는 것처럼.

저 모습을 봐선 미끼를 더 던질 필요도 없겠네, 무조건 낚이겠어.

뭐, 가장 좋은 건 그냥 오늘도 끝까지 퍼펙트로 막아서, 다시 안 만나는 거겠지만 말이야.

####

낭만을 아는 남자다.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상대 투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정당당 승부라···’

승부의 세계에서 정정당당은 개소리다. 져놓고 정정당당하게 했다며 자기위안 하는 것만큼 꼴불견인 게 없지.

하지만 한편으로 야구팬들은 그런 정면승부를 동경했다.

동화 속 왕자님을 꿈꾸는 어린 소녀처럼. 세상에 그런 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 보고 싶은 거지.

그리고 그 꿈이 오늘 이루어졌다. 방금 전의 타석에서.

투수는 마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오로지 패스트볼만 자신에게 던졌다.

다른 타자들에겐 자유자재로 브레이킹볼을 던져댔지만, 뭐, 어쨌든 크리스 브라이언트 자신에겐 그랬다는 게 중요하지.

‘충분히 인정할 만한 실력이기도 해.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되고. 패스트볼, 제법··· 묵직했지.’

손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구위. 88마일이 아니라, 100마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이해됐을 거다.

‘매덕스가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다고 했던가?

과거 그렉 매덕스가 그랬다고 하던가? 구속은 느리지만, 압도적인 구위였다고.

컵스의 레전드이기도 하기에, 매덕스의 이야기야 익히 들었다. 상대팀, 에이스에서 특별강사라는 이적행위(?)를 한다는 것도 이미 팀 내에 알려졌고.

팬들은 그에 볼멘소리했지만, 어쨌든 그런 전설적인 선수라서 그런지, 자신과 비슷한 괴물을 만든 것 같았다.

그토록 수없이 오르내렸던 매덕스의 구위가 바로 저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다시 한번 해보자는 거였겠지. 아까 전의 그 눈빛은.’

첫 승부는 깔끔하게 패배했다. 대놓고 던진 높은 공을 펜스 너머로 넘기지 못했으니. 더 변명할 것도 없다.

하지만 투수 역시 그러한 결과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1회 말, 수비하고 있을 때, 묘한 시선을 보냈으니까. 마치 그런 시시한 결과가 아니라, 제대로 결과를 가려보자는 것처럼.

MVP라는 대업을 이룬 크리스 브라이언트고, 아직 빅리그에도 데뷔하지 못한 투수기에, 서로 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지만.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저 투수가 마음에 들었다. 낭만을 아는 그 당당한 용기도 좋았고. 그렇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만약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그래서일까? 2회 초, 쓸려나가는 동료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아쉽게 느껴졌다.

“아자아자! 벤 하나만 쳐!”

“애디슨! 한 방 날려!”

평소보다 조금 더 강력하게 동료들을 응원하는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모습에 컵스 타자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쟤 왜 저래?”

“몰라, 흥분했는데?”

“자존심 상한 거 아니야? 저 투수한테 첫 타석에 밀렸잖아.”

“오호라, 한 번 더 붙고 싶어서 저런다는 거지?”

컵스 타자들도 흥미가 생겼다. 그들 역시 1회 초의 명승부가 머리에 남았고, 크리스 브라이언트라는 동료의 패배가 아쉬웠으니까.

“우리 MVP께서 자존심 회복하시고 싶다는데, 기꺼이 도와 드려야지!”

팀 내에서, 클럽하우스 리더인 앤서니 리조마저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자, 열기는 순식간에 올랐다.

자랑스러운 MVP가 저렇게나 바라는데. 동료로서 돕고 싶었으니까.

“베이스 온 볼!”

“아자아아아아아아!”

거기다가 2회 초, 기를 쓰고 꾹 참은 제이슨 헤이워드가 볼넷으로 나가며, 그런 분위기가 더욱더 강해졌고 말이다.

“아우! 아깝다!”

“뭐 어때? 이제 볼넷이나 안타 하나. 딱 하나면 돼!”

“저 투수 3이닝까지만 던질 테니까, 어떻게든 크리스까지 죽어라 이어주자고!”

애석하게도 후속타자인 미겔 몬테로가 삼진으로 처리됐지만. 이미 형성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Go! Cubs, Go!”

“저 새끼, 저거 때려잡아!”

“어떻게든 크리스까지만 이어!”

그런 열기가 관중들에게도 전해진 건지, 그제야 타자들의 허슬의 이유를 깨달은 팬들 역시 Go Cubs Go를 외치며, 경기장을 달아 올렸다.

“세이프!”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3회 초 투아웃. 카일 슈와버가 좌중간을 가르는 안타 날리며, 판을 만들었다.

“크리스! 한방 날리고 와!”

“Crush! 네 별명처럼 이번엔 넘겨버려!”

3회 초, 투 아웃.

응원하는 동료들과 관중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타석으로 향했다.

씨익 웃으며 투수를 바라보니,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다. 시선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입모양을 봐서는 무슨 말을 하는 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 X발, 말이 씨가 되네. 진짜 연결이 돼? 이래서 입조심 해야 하는 건데. 아니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는데, 인생 X같네.”

코리아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모국어로 의지를 다지는 거겠지.

그 도전적인 눈빛에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기꺼이 어울려줬다. 둘 다 똑같은 마음일 테니까.

‘좋아, 끝까지 가보자!’

당당하게 홈 플레이트로 들어오니, 포수가 입을 열었다.

“똥폼 잡지 마. 어차피 이번에도 처발릴 테니까. Go한테.”

신성한 승부에 초를 치다니. 정말 머저리 같은 놈이다. 마음 같아선 흥을 깬 포수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갈무리한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수도사와 같은 마음으로 경건하게 자세를 취했다.

투수 역시 이런 한심한 포수 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아까 전, 1회 초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표정으로 몸을 풀었고.

그 두 사람의 모습에, 애리조나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치 황야에서 펼쳐지는 카우보이 간의 결투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그라운드에 감돌았다.

결투장 안의, 그리고 시청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영화에 집중한 가운데, 초구가, 첫발이 날아왔다.

“파울!”

이번에도 파울. 하지만 비거리는 상당했다. 역시나 포심 패스트볼. 짜릿한 손맛이 전율처럼 타고 올라왔다.

‘역시!’

제법 큼직한 타구였는데도, 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처럼 서로를 바라봤을 뿐.

마음이 통해서인지, 흥분이 조금 더 강해졌고. 집중력도 올라왔다.

타격감 또한 서서히 정점을 향했다.

이미 다섯 번이나 똑같은 공을 봤기에, 타이밍은 이제 거의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파울!”

공을 허투루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88마일. 느린 구속과 관계없이, 그저 무거운 무게감이 팔꿈치를 푹 찔렀다.

또다시 나온 파울에 긴장감은 한층 더 올라갔고, 포수는 분명 배트와 공의 타이밍이 더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은 건지, 타임을 외치려는 듯 몸을 달싹였지만, 투수가 손을 뻗어 진정시켰다.

‘흐름대로 가자, 이거지?’

이심전심.

투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 승부를 즐기고 싶어 하는 거다.

그걸 깨달았기에, 입가의 미소는 조금 더 진해졌고, 집중력은 한계까지 달아올랐다.

‘볼 끝이 지저분하고, 무게가 상당해서 애매했지만, 이젠 확실하게 감을 잡았어.’

코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겠지. 처음의 승부처럼.

그렇기에 오로지 패스트볼의 타이밍에 최대한 집중하며,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타격을 준비했고. 대결의 끝이 다가왔다.

시원한 와인드업. 투수는 크리스 브라이언트 자신과 마찬가지로 간결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가볍게 다리를 뻗고, 팔을 휘두르며, 물흐르듯 부드럽게 동작을 이어가는 거지. 허나 직접 배트로 느꼈기에, 그 가벼운 동작에 담긴 힘이 상당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힘을 배트 한 자루에 쏟아부으며, 그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스윙으로 상대했다.

날아오는 공, 휘둘러진 배트.

엄청난 배트 스피드를 자랑하며, 스윙은 아름다운 원을 그렸고, 이거라면 할 수 있다면 자신감이 차오른 순간.

‘Son of a-’

느릿하게 날아와, 유유히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며,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생각했다.

‘Bitch···’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저건 개자식이라고.

한 남자의, 야구팬들의 순수한 낭만을 짓밟는 개자식을, 이름만큼이나 Suck같은 놈을 바라보며,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투수는 마치 방금 전의 진지한 모습은 모두 연기였다는 듯이, 그저 즐거운 발걸음으로 유유히 마운드에서 내려갔으니까.

깔끔한 헛스윙 삼구삼진.

2016시즌 내셔널리그 MVP를 잡고.

이닝을 마무리 지은 건.

66마일의 슬로우 커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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