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53화 (53/316)

53화

파앙-

묵직한 가죽소리가 연달아서 울렸다.

받은 공을 돌려주면, 다시 되돌아오는 상황에 불펜포수는 평소처럼 립서비스하는 대신, 허겁지겁 공을 잡았다.

입을 열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말없이 투구동작만 지켜봤고.

고요한 불펜에는 글러브를 때리는 소리와 질겅거리는 씹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그만!”

포심 셋. 역회전이 강한 서클 셋. 낙폭 셋. 슬라이더 셋. 쓰리핑거 셋. 투심 셋.

총 18개의 공이 순식간에 올라간 뒤, 투수코치는 곧바로 제지했고. 나는 달아오른 어깨를 잠시 식혔다.

‘껌을 씹으니까, 리듬이 쉽게 타지기는 하네.’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질겅거리는 박자에 맞춰서 공을 던지니, 흐름이 물 흐르듯 유지되기는 했다.

정말 집중력과 투구감각이 정점을 찍을 때와 비교한다면야 약간의 손색이 있겠지만. 최소한 리듬 자체는 빠르게 올라온다는 건데···.

“어때요? 좀 달라요?”

“속도가 빨리 붙기는 하네. 경기 중간에 올라가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인터벌 자체는 빨라. 투구동작도 문제없고.”

나 혼자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인터벌 자체가 빨리 지기는 했나보다. 그렉마저 긍정적인 말을 할 정도면 말이야.

과연 실전에서도 유효할지는 한 번 더 시험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효과는 있다는 거니, 나쁘진 않다.

‘시험 상대야 충분히 있으니까.’

크리스 브라이언트에 집중하기는 했지만, 컵스 자체가 원래 타격이 준수한 팀이다.

애초에 그러니까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된 거고.

선발 라인업을 보면, 주전급이 죄다 출전했던데. 하위타선을 상대로 시험해보면 되겠지.

“조금만 더 던질게요. 일단 포심부터.”

간략한 테스트는 끝났으니, 이제는 진짜 오늘 컨디션을 알아볼 차례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힘을 빼고 던졌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열심히 공을 받느라 헥헥거리던 불펜포수가 황급히 포구자세를 취했다. 꽤나 결연한 표정으로.

“흐읍-”

서서히 출력을 높인다.

적당히 조절했던 힘을 개방하며, 한 구, 한 구를 박아 넣자, 불펜포수가 입을 앙다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충분히 강력해진 구위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올라오는 폼과 함께 구위도 계속해서 올라갔으니까.

스프링 트레이닝 시작 때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소리를 내며 글러브에 박히는 공.

연습피칭을 지켜보던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음··· Go, 살살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적당히 조절하고 있어요.”

이마저도 완전한 전력투구는 아니다. 앞선 테스트 겸 예열로 달아오른 어깨를 완전히 풀어버린 건 아니니까.

‘똑같이 3이닝이겠지만. 오늘은 그 내용이 다를 텐데, 힘을 아껴야지.’

시범경기야 이미 세 번이나 맛봤다고 해도, 상대한 타선에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마이너리거나, 혹은 조금 애매한 타자들이 중간중간 끼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컵스도 자신들의 전력을 한번 확인하려는 건지, 주전급으로만 선발라인업을 구상했으니까.

풀전력의 메이저리그 구단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좋은 결과는 물론이고, 경험까지 확실히 얻으려면.

“오··· 끝이야? 받느라 죽는 줄 알았네.”

“네, 끝이에요. 공 받아줘서 고마워요.”

“뭘, 이게 내 일인데.”

나도 완벽한 전력으로 상대해야겠지. 그렇게 불펜피칭이 끝났고, 컨디션은 좋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좋다.

“슬슬 나갈 준비하자. 경기 준비도 거의 끝난 거 같으니까.”

오늘은 홈이라 먼저 수비를 해야 하니,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마운드에 올라야 하기에 투수코치는 슬쩍 재촉했다.

불펜 피칭하느라 조금 시간을 허비했으니, 서둘러야겠네.

“오늘도 잘해, 커트 앵글. 타자들한테 쫄지 말고.”

“제가 언제 쪼는 거 봤어요?”

“흐흐흐, 그렇긴 하네.”

불펜을 나갈 때, 그렉은 잘 하지도 않던 응원을 다 해줬다. 준비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으니, 내가 그만큼 오늘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겠지.

능청스럽게 대꾸하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등판을 두들겼고, 그 힘을 그대로 짊어진 채, 문을 열었다.

‘소니 그레이의 빈자리라···’

불펜을 나서자,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니, 경기장에 들어오면서 만났던 어린 꼬마팬이 불쑥 떠올랐다.

경기장의 앞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욱 바글거렸는데, 직접 마킹한 건지, 새하얀 테이프로 GO, 이름까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등번호도 79번으로 정확했지.

꼬마는 입은 유니폼에 사인을 요구하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남은 투수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잘한다고. 그러니, 소니 그레이의 빈자리를 채워 달라고.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팬심은 아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어른 팬들도 그 아이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감하는 눈빛이었으니까.

‘그리고 불안해했지.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내게 기대를 걸면서도,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소니 그레이, 그의 부상 때문일 거다. 그 불안감은.

경미한 부상이라, 복귀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도, 꾸준히 부상에 시달린 선수니, 안심할 수 없었겠지.

불안해졌을 테고.

그 불안을 채우기 위해서, 나라는 대체재를 찾은 거다. 내가 그 불안감을 씻어주길 바라면서.

‘1선발에는 아직 관심 없지만, 팬들 달래주는 거야 기꺼이 해야지.’

불펜을 걸어 나오며, 훑어보니, 평소보다 관중이 많았다.

홈경기가 열려도, 빈자리가 종종 보였는데, 오늘은 그저 모든 좌석이 꽉꽉 채워졌네.

유유히 그라운드를 가로지르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관중석에서부터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Go! 오늘도 잘 해줘!”

“진짜 너밖에 없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

“너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 컵스 새끼들 화끈하게 박살내!”

사람마다 기대하는 게 다르다 보니, 응원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그저 좋은 피칭을 기원했고, 누군가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안전을 외쳤다. 그냥 타자들을 박살내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서로 원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똑같다.

내가 잘하길 바라는 것. 그래서 마음속의 불안함을 지워주길 바라는 것. 그것 하나 만큼은 애슬레틱스 팬들 모두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갈 거야?”

“리드대로 할 건데, 중간중간 사인 낼게. 단, 2번타자 상대할 때는 내가 알아서 던지고 싶은데, 괜찮아?”

“···그래 그렇게 해.”

오늘도 호흡을 맞추게 된 조시 페글리는 못 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경기에서 내 마음대로 피칭했고, 결과도 좋았으니, 반발할 명분이 없거든. 반발한다고 해봐야 딱히 들어줄 생각도 없지만.

‘수비 시프트도 미리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거야 벤치에서 알아서 하겠지.’

포수 단도리도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경기시작뿐.

내려가는 포수를 보며, 다시 입안의 껌을 씹었다. 불펜에서부터 씹었기에 단물이 다 빠졌는데, 어차피 중요한 건 씹는 행위니까.

‘어디, 한 번 가보자고.’

관중들의 기대감과 불안함 속에서 경기가 막을 올렸다.

####

“플레이볼!”

주심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고. 타석에는 이미 타자가 올라왔다.

카일 슈와버.

오늘의 1번타자로, 재작년 69경기 동안 16개의 홈런을 날리며 컵스 팬들을 설레게 만든 선수였지만. 작년 16시즌은 두 번째 선발경기에서 왼쪽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정규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이후 회복기간을 가진 뒤, 월드시리즈에 로스터에 오르며, 0.412의 타율을 기록,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그래서인지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린 것 치고는 컵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선수다. 어떻게 아냐고?

“카일! 한방 날려!”

지금도 저렇게들 열심히 소리치고 있잖아? 오늘 호호캄에는 에이스 팬들로 가득했지만. 컵스팬들도 적지는 않았다.

애초에 홈이든 원정이든 관중 동원력이 압도적인 컵스니까.

그들은 타자에게 열심히 소리치며 용기를 북돋아 줬고, 작년을 아쉽게 날렸던 카일 슈와버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뻥타자 같아도 컨택은 잘한다고 했었지? 다만 선구안은 좀 떨어지는 편이고.’

카일 슈와버는 쉽게 말해서, 전형적인 OPS형 히터다.

타율이 낮은 대신, 출루율은 보통 정도는 되고, 장타를 뻥뻥 날리는 타자 말이다.

선구안이 별로 좋지 않은데도, 일단은 지켜보는 타입이라고 했지. 그 말은···

“스트라이크!”

일단 카운트 자체는 내 판단에 따라서 잡기 쉽다는 거다.

오늘 경기의 초구를 타자가 꿈틀거리면서도 가만히 지켜봤다.

87마일의 포심.

내심 아쉬운 눈치네. 거의 한 복판에 박혔으니까. 스윙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도 조금 아쉬웠다.

파워툴은 확실한 타자니, 크리스 브라이언트 이전에 구위를 테스트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그래도 스트라이크는 잡았으니까.

‘서클가자.’

지금은 껌을 천천히 씹었다.

무시할만한 타자가 아니니, 집중해야지. 컨택도 있고 파워툴도 확실한 타자라, 실투라도 하나 나오는 순간 바로 넘어갈 거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스트라이크!

잡아야지.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역회전이 강한 V2에 타자가 크게 헛돌았다.

스윙에 박력이 넘쳤기에,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 팬이겠지. 걸렸으면 넘어가는 스윙인, 식겁했겠네.

파워가 어쨌든, 헛스윙으로 이제 2-0. 어디보자, 뭘 던져야 잘 잡았다고 칭찬을 해줄까?

‘그걸로 가자.’

인내심이 강하면서 반대로 선구안은 별로인 타자. 우타자니, 가능할만한 코스가 있다.

“볼!”

일단 먼저 볼을 하나.

낮은 볼에 타자는 꾹 참았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원 볼.

판이 깔렸겠다, 사인을 내니, 포수는 이제 초탈한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나 또한 지체 없이 바로 던졌다.

‘그나저나, 잡아줄까? 살짝 걸칠 거 같은데.’

유유히 날아가는 공.

바깥쪽으로 먼 코스에 움찔거리던 카일 슈와버는 이번에도 배트를 참았다.

볼이 하나 올라갔어도, 여전히 카운트가 유리하니, 내가 한 번 더 뺐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바깥쪽으로 조금 먼 것 같았던 공이 카일 슈와버를 놀리듯 유유히 꺾였다.

이미 스윙은 늦었기에 타자는 막연히 주심을 지켜봤고, 무사히 포수글러브에 안착한 공을 확인한 나도 주심을 봤다. 애매한 코스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루킹삼진.

제법 먼 지점이었기에, 카일 슈와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주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내쫒았다.

‘오케이, 오늘 좀 넓네. 타자들 곡소리 나겠어.’

솔직히 살짝 애매하다 싶었는데, 이걸 잡아줬으니. 아무래도 주심의 성향은 바깥쪽에 관대한 것 같네.

타자들이야 죽어나겠지만, 그거야 나랑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스트라이크 하나 잡았고 이제 본게임 시작이네.’

유망한 타자를 손쉽게 처리한 건 참 기쁜 일이나. 내가 확인해야 하는 건 단순히 유망주와의 승부가 아니라.

“KB! KB!”

“크리스, 한방 날려!”

“KB, 이번에 홈런, 알지?”

“MVP! MVP!”

정점에 다다른 타자와의 힘싸움이다. 후속타자가 올라오자, 경기장이 부쩍 시끄러워졌다.

오늘은 에이스 팬이 더 많은데도, 화력이 밀렸다. 그만큼 컵스가 저 선수를 사랑한다는 거겠지.

‘장난 아니네. 뭐가 저렇게 커?’

타석을 꽉 채우는 거구는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타자 중 가장 거대했다.

그토록 강건한 신체를 자랑하며, 크리스 브라이언트. 오늘 경기의 대마가 시작부터 올라왔다. 그런데···

‘별로 진지해 보이지가 않네.’

왠지 조금 표정이 나른하다. 마치 지금의 승부가 그저 시큰둥한 사람처럼.

‘하긴, 작년 MVP인데 시범경기 따위가 눈에 들어오겠어?’

적당~히 폼 올리고, 컨디션만 관리하기 위한 무대니까. 별다른 생각이 없겠지.

그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러면 안 된다. 내가 오늘 보고 싶은 건. 전력을 다하는 크리스 브라이언트였으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그래도 좀 신경쓰는 척이라도 해라. 사람 개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번 승부는 내가 집도한다.’

다행히 저런 타자에게 의욕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다.

어차피 이번 타석은 내가 주도하기로, 포수에게 통보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지.

‘잘 받아, 흘리지 말고. 주자는 없지만, 모양 빠지잖아?’

정말 그게 맞냐는 듯 되묻는 포수에게 신신당부한 뒤, 하체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리며 정조준했다.

이번 공은 난이도가 높다.

풀파워를 내면서도, 정확도가 필요했으니까. 삐끗하면 대형 참사가 나다 못해, 시카고 시민들에게 테러를 당할 수도 있거든.

그러니 제구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해야지. 절대로 빗나가지 않도록.

그렇기에 미친 듯이 껌을 씹으며 집중력을 올렸고, 바짝 날선 털들의 감각을 느끼면서. 초구를 던졌다.

“허억-”

“볼!”

누군가 헛숨을 삼켰다.

아마도 컵스 팬이겠지.

지금 내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의 대가리를.

“이 X새끼야! 미쳤어!”

“저 새끼 퇴장시켜!”

“X발 헤드샷이잖아!”

“너 이 새끼, 조금만 삐끗했어도 찢어 죽였어! 알아!”

거의 맞출 뻔 했거든.

하이 패스트볼. 그것도 몸쪽으로 바짝 붙여서. 공은 거의 타자의 코앞에서 지나갔다.

거기다 파워도 훌륭하다. 뻐억-하는 묵직한 소리가 마운드까지 들렸으니까.

‘88마일, 최고구속도 올라왔네. 몸이 많이 풀렸어.’

아마 한 5센치만 더 옆으로 갔으면, 바로 퇴장이었을 거다. 헤드샷이니까.

아니, 퇴장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 대형사고가 났을 수도 있겠지. 근데 안 맞췄잖아? 그러면 된 거지.

이런 내 깊은 뜻도 몰라주는 건지, 좌석을 채웠던 컵스 팬들이 미쳐 날뛰는데. 조마조마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에이스 팬들도 뒤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래! X발 그래야지! 어딜 쳐 가까이 붙어? 안 떨어져?”

“시원시원해서 좋다! 타자 바지에 지린 거 같은데?”

“안 맞췄으면 그만이지! 거 더럽게들 난리치네!”

많이 좋아하시네.

하긴, 우리 팀 유망주가 작년 MVP한테 배짱 좋게 위협구를 던졌는데, 진짜 팬이라면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하겠지.

일단 관중들은 그 누구보다도 달아올랐지만, 중요한 건 타자다. 자, 하찮은 애송이가 위협구를 던졌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 진작 그랬으면, 서로 좋았잖아?’

제대로 먹혔다.

역시 이게 직빵이지.

배트를 쥔 팔에는 거칠게 핏줄이 서며, 조금 더 부풀었고.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한층 진지해진 눈빛으로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

‘이야, 무섭다 무서워. 위협구 두 번 던지면, 배트 들고 마운드까지 달려오겠네.’

화가 난 맹수 앞에 선 기분이다. 하긴, 굉장히 위험한 코스고, 대놓고 선전포고한 거나 다름없으니. 타작 빡이 돌만도 하지.

흥분한 것 같으니, 원래라면 살살 꼬셔서 잡았겠지만. 그럴 수야 없지, 이번 타석은 단순히 타자를 잡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

다시금 사인을 보내니, 조시 페글리는 진지하게 내기 미친 건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맞아도 내가 맞아.’

다시금 강하게 사인을 보내니, 긴 한숨을 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도 거절했으면, 그냥 냅다 던지려고 했는데. 눈치가 빠르군.

잠깐 타자와 눈을 맞춘 뒤,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이러면 치아건강에 안 좋다고 하던데, 오늘은 껌이 완충재 작용을 해줄 테니까. 괜찮겠지.

“흡-”

방금 전의 위협구가 제구까지 특별히 신경 써야 했다면, 이번 공은 아니다. 오로지 힘. 모든 힘을 담아서 공을 쏘아보냈고.

‘씹-’

따악-하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상대의 턱을 올려치는 어퍼컷처럼 강력한 스윙.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지만, 간신히 씹어 삼켰다.

“파울!”

몸쪽 꽉 박히는 코스.

제대로 맞은 듯 날아가던 타구가 파울라인을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 제대로 컨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

‘밀렸어.’

이유는 잘 안다.

배트가 밀렸거든. 구위가 찍어 눌렀다는 거지.

‘짜릿하겠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척하면 척이지. 아마 짜릿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을 거다. 지금도 저릿저릿할 거고.

공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으니, 일정량의 힘이 다시 손안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당장은 내 구위가 이겼지만, 스윙도 조금 늦었어. 완벽한 풀파워는 아니야.’

위협구를 던져놓고, 다시 몸쪽으로 포심을 박아 넣을 줄은 예상 못했겠지.

그렇기에 약간 타이밍이 늦었고, 완벽하게 파워가 실리지도 않았다. 그것을 잘 알기에 다시금 포수에게 사인을 보냈고. 조시 페글리는 해탈한 듯 대충 고개만 끄덕거렸다.

곧바로 다시 3구.

힘을 실어 왼팔을 휘두른다.

체중이 담긴 공인 쭉 뻗었고.

타자,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공을 정확히 쏘아보고. 웅크린 몸이 활짝 펼쳤다.

레그킥 없이 가볍게 토 탭(Toe Tap)하며 지면을 내디딘 발. 간결한 자세지만, 스윙은 아름답다. 그 안에 담긴 힘 역시 강력하고.

완벽한 원을 그리며, 전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힘을 폭발시킨 스윙.

폭죽이 터지는 듯한 타격음이 귓가를 울리며, 공은 사라졌다.

“파울!”

허나 파울.

이번에도 라인을 넘었고.

3루쪽 관중석으로 들어갔던데 반해, 비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간 떨려서 죽겠네.’

포심 세 개로 파울 하나. 볼 하나. 이쯤되면 타자도 알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위협구에 이글거렸던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눈동자에 약간의 흥미가 감돌았다.

삐끗하면 넘어가니, 나는 살 떨려서 죽겠는데, 쟤는 재밌나 보네.

‘패스트볼에 타이밍이 잡혔다. 체인지업, 셋 중에 아무거나 던져도 삼진 잡을 수 있어. 할까?’

유혹이 샘솟았다.

이젠 아예 컨택을 포기한 듯, 파워에 집중한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잡기 딱 좋았으니까.

눈에 안 보이게 바깥쪽으로 체인지업 하나 던지면 헛스윙이 나오겠지.

‘아니, 한번 끝을 봐야지.’

한 차례 고개를 털며, 잡념을 씻어냈다. 내 제스처에 오해한 건지 조시 페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사인을 안 냈다면서.

사인 거절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이번 타석은 그냥 내가 알아서 던지기로 했잖아? 별일 아니니까, 공이나 잘 받아.

텔레파시가 없어서, 이렇게 긴 마음을 전달할 수는 없기에, 그냥 사인만 보냈다.

이제는 슬슬 얘도 감이 잡히는 걸까? 이전처럼 기겁하지 않고, 그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뭔가 좀 착각한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서 슬쩍 그라운드를 둘러보니,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글러브를 치는데. 왜들 이러나 몰라.

‘가자.’

아무튼 야수들도 긴장이 빡 된 것 같고, 외야 수비라인도 적당히 뒤로 물러나 있으니. 준비는 끝났다. 이젠 이 살 떨리는 승부를 끝마치는 것뿐.

코스는 정해져 있다. 경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생각해뒀으니까.

가볍게 숨을 뱉은 뒤, 자연스럽게 투구동작을 이행했다. 힘이 빡 들어갔던 직전투구 보다 오히려 가벼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씁-”

마지막 임팩트의 순간 무호흡을 유지하며 지금껏 쌓아 올린 집중력, 투구감각과 함께 힘을 담아 공을 찍었다.

최소한 이번 시범경기 동안에는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공. 그리고 가장 많은 힘을 담은 공.

전날 인터넷에서 찾아봤던 하이라이트 동영상처럼 크리스 브라이언트 역시 전력을 다한 스윙으로 받아쳤다.

야구공과 스윙의 궤적은 어느 지점에서 일치한 순간, 압도적인 타격음이 귓속을 파고들며, 스윙이 공을 날려 보냈다.

맞는 거야, 애초에 맞으려고 던진 거니까, 상관없고. 진짜는 그다음이다.

크리스 브라이언트도, 나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으로 타구를 쫓았다.

‘크다.’

한 눈에 봐도 큼직한 타구.

거기다 이전과 달리, 라인을 넘어가지 않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섭게 펜스를 향해 비행했다.

만약 외야수들의 위치가 앞으로 당겨졌다면, 절대로 쫓아가지 못했겠지. 허나 적절하게 시프트가 펼쳐져 있었기에 좌익수와 중견수는 끝까지 공을 따라갔고.

“아웃!”

워닝트랙.

앞에 펜스가 있다는 걸, 수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잔디 없이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좌익수가 타구를 잡았다.

그것으로 승부는 종료.

만약 조금만 더 뻗었다면 그대로 넘어갔을 테니, 타자,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아쉬워했을까? 나는 가슴이 철렁거렸을까?

‘구위가 먹혔어.’

그럴 리가.

그는 덤덤하게 패배를 받아들였고. 나 또한 그저 승리감을 만끽했다.

서로 전력으로 부딪쳤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조금 더 뻗지 못했을 거라는 걸 잘 알거든. 어떻게 쳤든지, 비거리는 딱 저기까지였겠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통한다, 내 구위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작년 MVP마저 쉽게 넘기지 못할 정도로.

그것으로 실험은 끝났고. 마찬가지로 강력한 타자인 앤서니 리조를 맞이하며, 다음 승부를 준비하려고 했는데···

“와아아아아아아!”

“You-Suck! You-Suck!”

“써어어어어억!”

뭔가 좀 반응이 길다?

어째, 다른 사람들은 이번 승부를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관중들은 작년 락하운즈 이후로 간만에 듣는 You-Suck 소리를 내지르면서 힘껏 박수쳤고. 야수들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 피칭!”

“계속 그렇게만 가자!”

“우리 믿고 던져! 다 잡아줄 테니까!”

뭔가 허슬도 좀 들어갔네. 이전까지는 별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양반들인데. 갑자기 크게 소리치며, 보란 듯이 글러브를 두들겼다.

포수, 조시 페글리는 흥분한 듯 콧김을 흥흥 내뿜었고.

‘다들 왜 이래?’

뭔지는 모르겠는데. 서로 소통의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나한테 긍정적인 방향의 문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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