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슬슬 끝나겠네.’
경기는 막바지로 달려갔다.
아이싱하면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내가 내려간 뒤에도 잠깐은 소강상태가 이어졌지만. 마지막 9회가 시작되니, 우리랑 디백스, 양쪽 다 열심히도 하네.
9회 초 2득점을 올리며 21점이라는 엄청난 점수가 올라가니, 안 그래도 사람이 줄었던 관중석에서 다시금 뭉텅이로 인파가 빠져나갔다.
디백스는 팬들이 보는 앞에서 참패를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9회 말, 마지막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타격했고.
내 뒤로 올라왔던 라울 알칸타라가 계속해서 얻어맞았지만, 딱 거기까지겠지.
“이런 경기 나오면 투수들은 죄다 X잡고 반성해야 돼. 시범경기라서 망정이지. 정규시즌 경기였으면 홈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걸? 맞아죽을 테니까.”
그렉은 무지막지했던 난타전이 한심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양팀 도합 31점이 나왔으니, 투수들이 오지게 대주기는 했다. 난 아니지만.
“그 반성에서 전 빠져도 되죠?”
“너? 너야 빠지는 게 아니라, 그냥 벤치에 이불 덮고 누워도 되지. 그 정도쯤 했으면.”
털이 무성한 양키들이 거시기 잡고 반성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클클 거리다,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소니 그레이, 아직도 안 돌아왔네.
난타당한 이후 소니 그레이는 벤치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검사를 받으러 간 거겠지. 부상의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안 돌아왔다는 건, 경기장에서 하는 간략한 약식 검사가 아니라, 진짜로 병원으로 갔다는 건데···
‘생각보다 부상의 정도가 큰 건가?’
기존에 선발 로테이션의 빈자리는 둘. 소니 그레이마저 부상으로 빠진다면, 셋으로 늘어난다.
즉 기존에도 널널했던 자리가, 조금 더 넓어졌다는 거지.
‘교체되네.’
결국 3실점을 내주며, 21대 10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만든 라울 알칸타라 또한.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교체되며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덕아웃에 있던 선수들 면면을 보며 그제야 깨달은 듯, 안 그래도 어두웠던 얼굴을 조금 더 찡그렸다.
자리 하나가 더 생겼으니, 경쟁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좋은 기회를 날렸으니까.
“라울, 수고 많았다. 너무 신경쓰지 마. 이만하면 잘 한거야.”
“후우··· 네.”
투수코치의 위로에도 괜히 한숨을 쉬면서 흘끔흘끔 나를 보는데, 부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히 자신과 달리 오늘 내가 잘했다고 그런 게 아니다.
선발진에 빈자리가 세 개나 생겼는데, 지금까지 내가 보인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그 셋 중에서 내 자리가 없을 수가 없지.’
그러니 빅리그 진입과 선발 경쟁에서 난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순간 처지가 달라졌으니, 라울 알칸타라로선 부러울 수밖에.
허나 그런 라울의 부러움과 달리, 나는 솔직히 큰 감흥은 없었다. 이미 예상했었잖아? 비어있는 선발 자리 중 한 자리는 내가 차지할 거라는 건.
어차피 이뤄져야 할 일이,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기에, 엄청나게 기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시큰둥하게 이제 정말로 끝나가는 그라운드를 지켜봤지만. 옆에 앉아서 같이 경기를 보던 그렉이 대뜸 입을 열었다.
“커트 앵글, 이제부턴 진짜로 조심해야 할 거야.”
“예? 아, 네. 그래야죠. 경쟁에서 앞섰다고는 해도, 몸이랑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는 좀 피곤해질 거거든.”
그렉은 오묘한 눈빛으로 날 보더니, 이내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벌써 시작됐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카메라 맨과 함께 리포터가 우리 쪽으로, 정확하게는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Mr. Go, 혹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아··· 네, 가능하죠.”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일단은 수락하고 슬쩍 그렉을 보자, 그는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의 탄생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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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말하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나는 꽤 유명인이다. 시범경기가 낳은 스타 중 하나였고. 하지만 그 인기와 유명세는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오클랜드 팬들, 그리고 야구 관계자들. 기자들. 딱 그 정도겠지.’
나를 아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칭찬하거나, 경계하고, 환호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모른다는 거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크다 보니, 지역마다 주로보는 미디어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이번 경기로 그 한계선이 깨졌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이죠? 먼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경기입니다.]
[화끈한 난타전이 일어난 경기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있죠.]
수없이 손을 뻗고, 질문들 던져대는 기자들을 뚫고서 다시 돌아온 숙소. 나는 얌전히 방안에 틀어박혀 티비를 봤다.
굳이 보려고 한 건 아니고, 브라이언이 연락을 줬거든. 내가 방송에 탔다면서.
야구전문 채널인데. 오늘 열린 시범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설명하면서, 내 이야기도 함께 했다. 오늘 했던 간략한 인터뷰도 담겼고.
[패스트볼이 상승 무브먼트를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타자의 입장에선 마치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거죠.]
피칭에 슬로우 모션까지 걸어가면서, 내 공을 분석, 아니, 찬양하고 있는데.
[경기의 하이라이트죠? 체인지업 세 개로. 완벽하게 타자를 잡는 모습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말하자면 감탄이겠네요. 아니, 경악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찬양이야, 휴대폰만 살짝 만져도, 볼 수 있기에 상관없고. 중요한 건 이 채널이다.
‘MLB Network. 전국 방송탔네.’
MLB Network.
전국 방송이거든.
오늘 있었던 경기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인데, 경기의 하이라이트로 내 피칭이 뽑혔다.
‘반응이야 이미 뜨겁지만, 거기에 아예 기름을 부어주네.’
슬쩍 휴대폰을 매만졌다.
평소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둘 중 하나다. 간혹 내 기사가 나오거나, 아예 엉뚱한 게시글이 나오거나.
Go, You-Suck.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글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Go! 4이닝 8K!]
[비밀병기를 선보인 Go, 구종 가치는 얼마?]
[당신이 주목해야 하는 최고의 신인! Go You-Suck]
[고유석, 환상적인 투구로 메이저리그 정조준!]
이름을 검색하자 평소처럼 기이한 게시글들 대신, 죄다 야구 기사나, 오늘 피칭을 짧게 편집한 동영상들이 쭈르륵 나왔으니까.
그런 미디어 이외의 반응 역시 상당했고.
[#A’s]
[오늘 Go 봤냐? 완전히 Crazy였어!]
└나도. 우리 투수 피칭 보고 소름 돋는 건 오랜만이야.
└소니가 시작부터 털리는 것만 보고 망했구나 싶었는데, Go가 던지는 거 보고 걱정이 싹 사라졌어.
└이전에도 말은 많았지만. 솔직히 난 큰 기대는 안 했어. 겨우 시범경기잖아? 근데 오늘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 Go는 그냥··· 최고야.
[#A’s]
[Go, 두 가지 서클.gif]
[오늘 Go가 던진 서클 모음이야. 기존의 것도 엄청난데, 이것도 최소 Plus급 아니야?]
└그 이상이지. 대체 어디서 배웠나 몰라.
└매덕스 아닐까? 인스트럭터 하고 있잖아.
일단 에이스 팬들은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 소니 그레이가 안겨준 불안감을 씻어주기는 했나보네.
하지만 그거야 어차피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던 거고. 진짜는 다른 구단의 팬들이었다.
[#Dbacks]
[시작할 때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엿 같네.]
└21대10이 뭐냐 대체?
└다 그 Suck 같은 투수 때문이야. 걔만 아니었으면 더 낼 수도 있었어!
└타자 새끼들 정신 빠져가지고, 뭐 그런 놈한테 쳐발려?
└솔직히 타자들 잘못은 아니지. 투수가 그렇게 던지는데. 장난 아니더라.
[#Dbacks]
[You-Suck, 걔 트레이드는 안 되나?]
└에이스 상황 개판인 거야 유명하니까. 혹시 모르지.
└오늘 경기에서는 이름처럼 Suck이긴 한데, 솔직히 좀 탐나긴 하더라.
└할 수만 있다면, 돈값 못하는 그레인키 보내고 걔 데려오고 싶어.
└불가능하지. 에이스 거지인데, 그레인키는 줘도 안 받을 걸.
오늘 나와 에이스한테 처절하게 털렸던 디백스를 시작으로.
[#Dodgers]
[You-Suck, 얘 괜찮은데?]
└하이라이트 보니까, 구속은 느려도 엄청나던데. 어떻게 안 되나?
└Ryu랑 같은 Korea 출신이던데. 얘도 몬스터네.
└작년에 얘 우리팀으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 있지 않았나? 리치 힐, 레딕이랑 같이.
└프리드먼 멍청한 새끼야. 늙어빠진 리치 힐 대신 얘를 데려왔어야지!
작년 트레이드 이야기가 오갔던 다저스.
[#Cubs]
[매덕스는 왜 남의 집에서 괴물을 키우고 있어.]
└그러게. 그래도 우리팀 레전드이기도 한데, 유망주 가르칠 거면 여기서 가르치지.
└쟤 저번에 우리랑 할 때도 보니까 장난 아니었는데, 오늘은 더 쩔더라. 솔직히 좀 탐나기도 하고.
└그때도 엄청났지만, 매덕스가 다른 서클도 하나 가르친 것 같더라. 무슨 스플리터 같던데?
└에이스 새끼들은 이상하게 선발투수가 하나씩 긁히네.
그렉 매덕스라는 관계성에, 한 차례 맞상대도 했었던 컵스.
그 외에도 각 구단의 커뮤니티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렸고. 대부분의 반응은 하나로 귀결됐다. 이 투수, 갖고 싶다.
사실 이건 좀 오버고, 어쨌든 꽤 많은 구단과 구단의 팬들이 죄다 나를 탐내고는 있다.
이런 반응들이 뜻하는 건 간단했다. 내가 단순히 에이스의 희망이자, 소중한 유망주가 아니라. 진짜 전국구 유망주가 됐다는 뜻이지.
‘확실히··· 그렉 말처럼 좀 귀찮기는 하겠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확실히 좀 귀찮아지기는 할 거다.
예를 들면, 대충 벗어둔 바지 주머니에 포개져 있을 리포터의 전화번호처럼 말이야.
불려가서 했던 간략한 인터뷰가 끝난 뒤, 나중에 전화하라고 속삭이면서 쥐어줬는데. 엉겁결에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절대로 리포터의 찰랑거리던 금빛 머릿결이나 도발적인 윙크 때문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대쉬에 살짝 당황해서 챙긴 거니까.
진짜로 아니야.
####
“Go! 사인해주세요!”
“유니폼 마킹 했는데, 사인 가능할까요?
반응은 현실에서도 즉각적이었다. 평소처럼 어깨나 풀려고 경기장으로 향하니,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죄다 몰려드네.
이전에도 중요한 투수 유망주였기에, 사인을 요구야 많았지만. 오늘은 그에 두 배, 아니 세 배는 됐다.
그래도 사인 요청 정도면 양반이다. 팬서비스야 프로선수의 업무고, 날 그만큼 좋아해준다는 건데, 감사히 해드려야지.
“제 폰 넘버에요! 언제든지 연락해요!”
애들도 있는데, 뭐하는 짓이야.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대니까, 오히려 좀 그렇네.
자신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피켓을 흔드는 여자를 무시 한 채, 열심히 펜을 놀리며, 간신히 인파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사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흐읍-”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수고했어요, Go.”
어제 등판했는데, 하긴 뭘 해.
대니얼이랑 간단한 스트레칭하면서, 피로감에 물든 어깨나 좀 푸는 거지.
그것으로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친 나는 멍하니 훈련장을 구경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이 있거든.
‘그렉의 말처럼 훨씬 편하기는 했어. 딱 정해놓고 던지니까. 체력소모도 덜하고.’
그렉의 조언대로, 생각을 약간 덜어내고 한 피칭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확실히 정신적인 피로감도 덜했고.
가르침을 빠르게 터득했으니, 기뻐야 정상이겠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다만 위험성을 방지하고, 확실하게 찍어 누르려면, 인터벌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건데, 그게 참 힘들단 말이야.’
사실 이 문제는 예전부터 함께 했었다. 집중력과 경기감각이 정점을 찍으면, 인터벌이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거야 이미 작년에도 알았던 거잖아?
덕분에 하찮은 구위로도 경기 중반 이후부터는 타자들을 찍어 눌렀었지만. 문제는 그걸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가 없다는 거다.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장 작년에도 존 와스딘과 함께 인위적으로 인터벌 시간을 줄이려고 해봤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었다.
그걸 마음대로 해낼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집중력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올릴 수가 있나?
‘물론 방법이야 있겠지만.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겠지.’
모든 건 학습이 가능하다.
그러니 찾아보면 방법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게 뭐냐는 건데. 원래라면 그렉에게 물으려고 했지만. 오늘은 그렉이 훈련장에 나오지 않았다.
나이도 많은 양반이, 어젯밤 뭘 잘못 먹은 건지, 배탈이 났거든. 그래서 아마 요 며칠 간은 못 볼 거다.
‘쓰읍··· 차라리 내가 숙소로 찾아가?’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지만, 제법 친해졌다고는 해도, 대선배이자, 레전드 투수의 숙소에 마음대로 찾아가는 것도 좀 그렇지.
그래서 그냥 혼자 끙끙 앓고만 있었을 때. 누군가 내가 앉아 있던 벤치로 걸어왔다.
“음? 선객이 있었네. Go, 맞지? 아, 나도 커트 앵글이라고 부를까? 매덕스 씨는 그렇게 부르던데.”
“···Go로 해줘요.”
“넌 크리스라고 불러. 앞으로 같이 뛸 텐데, 너무 딱딱한 것도 좀 그렇잖아?”
크리스 데이비스.
볼티모어의 크리스 데이비스랑 동명이인으로, 원래는 짭데로 불렸는데.
볼티모어의 참데가 조금은 아쉬운 성적을 기록한데 반해, 작년 42홈런을 날리며, 이젠 본인이 참데로 등극한 양반이다.
사실 동명이인이라고 해도 볼티모어 크데는 C고, 이쪽은 K라 살짝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작년 한정으론 이쪽이 참데이시다.
소니 그레이가 이탈한 지금 시점에서 선수단 내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이고.
‘요즘은 작은 사람들이 파워가 좋은 게 트렌드인가?’
비록 작년 트레이드로 넘어온 선수기는 하지만, 이미 프랜차이즈 스타로 등극한 선수인데. 투수 친화 구장인 콜리시엄에서 42홈런을 날린 거포치고는 좀 많이 작네.
내가 큰 것도 있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작아.
거포들은 죄다 체구가 두툼하다는 편견을 다시금 깨주는 체격을 가진 그는 휘휘 팔을 돌리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
“좀 쉬려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땀 좀 흘리니까, 힘드네.”
작년 150경기나 뛴 양반이 이런 말 하니 참 설득력 있네그려.
그래도 주전 좌익수이자, 핵심 타자인 양반이랑 안면을 터서 나쁠 건 없지.
“그나저나, 어제 4이닝이나 던졌는데, 쉬어야 하지 않나? 이렇게 훈련장에 나와도 되는 거야? 거기다 오늘은 휴식일이잖아?”
“겨우 그거 던지고 헥헥 거리면 선발투수 때려치워야죠. 그리고 그냥 누워 있으면 오히려 좀 회복이 더디더라고요. 스트레칭이나 하는 거죠.”
그는 정답이라는 듯 피식 웃더니, 이내 슬며시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봐?”
티가 난 건가? 표정에서 드러난 것 같다. 살짝 고민했지만, 딱히 숨길 일도 아니기에 설명하자, 크리스 데이비스는 눈알을 굴렸다.
“그게 끝이야? 겨우?”
“예, 겨우 이게 끝인데요.”
“뭐 그런 걸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
이 양반이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우습게 생각하네. 나한테는 진지한 고민인데, 괜히 비웃음 산 것 같아 불쾌했지만, 곧 불쾌감이 사르륵 녹았다.
명쾌한 해답을 줬으니까.
“그냥 껌 씹어.”
“네?”
“츄잉껌 말이야. 아, 혹시 모르나? 코리안이라고 했지? 그, 있잖아. 씹는 거.”
껌? 아, 껌!
“하나 줄까?”
크리스 데이비스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껌 하나를 쓱 내밀었다.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은 딸기맛 분홍색 풍선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