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회 말 5득점.
2회 말 2득점.
단 2이닝 만에 올린 7득점.
어지간한 경기라면, 손쉽게 승리를 챙길 수 있을 거다. 어지간한 경기였다면 말이야.
‘살 떨리네.’
불펜의 문이 열리고.
그라운드를 밟았을 때.
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1회만 하더라도 기분 좋았던 분위기가 개판 났거든.
‘1,2회에 7점 내놓고, 한 점 차 팽팽한 승부가 될지 누가 알았겠어?’
2회 초와 3회 초, 우리도 각각 3득점씩 올리며 순식간에 점수 차가 좁혀졌다.
기분 좋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하지.
불쾌해진 관중들은 이미 내려간 소니 그레이를 대신해서. 다시 열기를 올려줄 새로운 제물을 찾았다.
그게 나야.
‘한창 신나 있을 때 조지려고 했더니. 아주 따가워서 죽겠네.’
첫 이닝은 쉽게 가져가려고 했다. 소니 그레이라는 거물을 털어먹었으니. 타자들이 잔뜩 흥분했을 테니까.
포심부터 새로 장착한 낙폭 강한 서클과 투심까지. 이제 구종만 여섯 개. 아니, 커브까지 포함하면 일곱 갠데.
흥분한 놈들 못 잡겠어?
구종마다 하나씩만 던져도 알아서 훙훙 돌릴 텐데.
근데 우리 팀 타자들이 갑자기 바짝 추격하면서, 뜨거워떤 경기장에 다시 냉철함이 감돌았다.
‘쓰읍, 좀 아쉽지만, 그래도 폼도 올라왔으니까. 이번 이닝은 쉽게 가보자고.’
그래도 소니 그레이가 열심히 두들겨 맞고, 타자들도 열나게 쳐준 덕분에 불펜피칭은 충분히 했다.
차키를 넣고 돌린 엔진처럼 거칠게 시동이 걸린 어깨는 최소한 스프링 트레이닝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했다.
애초에 시간이 지날수록 폼이 올라오니, 그야 당연하겠지만.
‘타순도 적절~하네. 스타트 끊기는 딱 좋겠어.’
소니 그레이가 15타자를 상대해준 덕분(?)에, 3회 말, 디백스 타순은 7-8-9번으로 이어진다.
뭐, 하위타순이라고 해도 셋 다 메이저리거거나, 메이저리거였던 양반들이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쁘진 않다.
“Go, 사인은-”
“알아. 근데 오늘은 두 개만 더 추가하자.”
“두 개?”
“내가 먼저 낼게. 이렇게 하면 글러브 좀 낮게 내고, 요렇게 하면 투심 생각 해. 네가 먼저 요구하지는 말고.”
단호한 말에 포수인 조시 페글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한 건 이해하는데, 어쩔 수 없다. 추가할 사인은 두 개, 투심과 낙폭이 강한 서클인데. 둘 다 아직은 미완성.
투심은 땅볼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포심만큼 강력하지 못하고, 낙폭 있는 서클, 기니까 그냥 서클 V1이라고 하자.
이게 사실 원조니까.
역회전이 변환된 거고.
아무튼 그 서클 V1이 제법 커맨드가 잡히고, 컨트롤이 되기는 해도, 여전히 약간은 몰린다.
그러니 둘 다 적절한 타이밍에만 내야 하는 건데, 나랑 호흡 맞추는 게 이번이 처음인 녀석에게 맡기기엔 조금 그렇지.
“왜?”
“···알았어. 후우, 아무튼 오늘 잘해보자. 쟤들 타격감 많이 올라왔으니까, 조심하고.”
아니꼬워도 어쩔 수 없다.
결국 공 던지는 놈이 주도권을 잡을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이걸 위해서 스티븐 보그트를 조진 거잖아?
개겼다가 내가 빈정 상해서 똑같이 포심 하나 박아 넣었다가 손가락이라도 다치면, 그대로 나가리 되는 건데. 쫄려서라도 못 개기지.
‘포수 길들이기, 효과 확실하네.’
그렇기에 조시 페글리는 뒤돌아서서 투덜거리면서도, 일단은 얌전히 홈 플레이트로 걸어갔다.
이제 혼자만 남은 마운드.
그라운드 전체를 통틀어서, 혼자 우뚝 솟은 곳이라서 그런지, 시선이 집중되기도 쉽다.
‘죄다 쳐다보는구만. 얼굴 뚫리겠네, 얼굴 뚫리겠어.’
억지로 우기면 둥글다고 할 만한 야구장과 둘러앉은 관중들. 그 중심에 서서 시선을 받고 있으니, 고대시대의 검투사가 된 기분이네.
괜히 벅차오르는 감정에 올라오는 타자에게 눈을 부라리자, 타자는 갑자기 웬 지랄이냐며 눈썹을 씰룩였다.
제이슨 프리디.
재작년까지는 우리 팀에서도 뛰었던 선수인데, AAAA리거다. 7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뒨 경기가 겨우 133경기면 말 다 한 거지.
다만 AAAA리거 답게, 마이너 투수는 맛깔나게 때려잡겠지만.
“스트라이크!”
지금 난 마이너가 아니다.
몸쪽 꽉찬 포심은 언제나 옳다. 얻어맞지만 않는다면,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일단 주심의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올릴 수 있고. 가볍게 들어온 타자에게 겁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웃!”
머릿속에 남겨서 다음 공에 대한 타자의 생각을 흔들 수도 있지.
몸쪽 포심 이후 비슷한 코스로 던진 투심. 내가 먼저 사인을 내자, 포수는 긴가민가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타자의 배트가 나왔다.
갑자기 박힌 포심과 그것과 비슷한 코스, 구속의 공에 스윙한 건데. 나한테 투심이 있는지 모르니, 빗맞을 수밖에.
2구만에 원 아웃.
일단은 계획대로다.
캠프에 초청된 것뿐이지.
정식 계약은 아니라고 하던데. 몸이 닳을 수밖에 없거든.
마이너 계약이라도 하려면,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늘 타격감도 괜찮았으니. 딱 배트를 낼 것 같았다.
‘7번타자 가시고. 이번엔 진짜 메이저리거네.’
8번타자 닉 아메드? 아흐메드? 아무튼 디백스 주전 유격수다. 작년 90경기를 뛰었던가?
허나 타격은 솔직하게 말해서, 메이저리거라고 보긴 어렵다.
‘유격수인 걸 감안해도, 성적이 좀 심각하지.’
타율, 출루율, 장타율. 대표적인 비율스탯 세 가지가 다 3할을 못 넘긴다면 말 다한 거지. 작년 홈런도 4개뿐이니, 뻥파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선 2구만에 나가리 된 제이슨 프리디보다 훨씬 쉽다. 특히나 나한테는.
‘컨택이 안 좋지. 선구안도 별로고. 하나 걸치자.’
같은 생각인지, 포수도 바깥쪽으로 낮은 아슬아슬한 공을 요구했고.
“파울!”
어림없는 코스인데도, 굳이 스윙한 닉 아메드에 살짝 걸친 공은 맥없이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힘에서 밀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정확도가 심하게 떨어졌다는 거겠지.
‘나누라고 했지. 타자들을.’
그렉은 타자들을 분류하라고 했다. 무조건 잡는 놈. 절대 못 이기는 놈. 그렇게 나누면 편하다고, 체력도 아껴질 거라고 말이야.
오늘 한번 테스트해보면 되겠네. 좀 길게 갈 생각이니까.
그런 분류에서 닉 아메드는···
“스트라이크!”
무조건 잡는 놈이다.
빈약한 파워는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으니까. 머리를 비우고 오로지 공을 던지는 것에만 집중하며 박아 넣었다.
“파울!”
낮은 공을 퍼올리며, 파울을 만들어 간신히 삼구삼진을 면했지만. 상관없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차피 서클에 끝날 테니까.
그렇게 두 번째 타자까지 아웃. 싸늘하게 식었던 관중들은 이젠 조금 더 진지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위타선이라지만, 한창 잘 때리던 녀석들인데, 허겁지겁하다가 죄다 쓸려나가니.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네.
나는 그런 그들의 의아함에.
“스트라이크!”
9번타자, 크리스 이아네타까지 몰아붙이는 것으로 방점을 찍어줬다.
초구로 몸쪽 서클 체인지업.
노련한 베테랑 포수인데도 타자는 멍하니 지켜만 봤다.
“스트라이크!”
그리고 다시 2구 또한 바깥쪽 체인지업. 역회전이 걸리며 멀어지는 공에 역시나 헛스윙.
‘딱이네. 테스트하기.’
머릿속에 서클이 강렬하게 박힌 타자. 온통 괴악한 역회전에 대한 생각뿐 일거고. 베테랑이기도 하니, 시험하긴 딱 좋았다.
긴 심호흡. 최대한 투구동작에 신경 쓰며, 손안의 공을 놓는다. 마지막까지 손끝으로 최대한 감각을 붙잡으면서.
다시금 몸쪽으로 날아오는 공. 익숙한 구속. 그에 타자는 눈을 부라렸다. 오랫동안 빅리그의 타석에 서고, 투수들의 공을 받았던 그였기에 더욱더 쉽게 보였겠지.
후웅- 강렬한 확신이 깃든 스윙은 그런 환청마저 들릴 정도였다. 우람한 팔뚝이 둥글게 부풀며 배트에 힘을 실어 줬지만.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헛스윙.
뚝 떨어지는 공, 서클 V1을 바라보며, 타자 크리스 이아네타는, 아니, 어쩌면 그걸 지켜본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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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다. 경기를 보며, 빌리 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니 그레이의 등판이기에, 불안한 마음에도 일부러 시청했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머릿속으로 그렸던 가장 최악의 그림이 현실에서 실현됐다.
‘부상이군. 역시 문제가 있었어.’
2이닝 7실점.
홈런 하나에, 안타 다섯, 거기다가 볼넷도 네 개를 내주며. 에이스가 무너졌다.
아마도 부상일 거다.
오랜 경험 덕분에 잘 안다.
단장으로, 그리고 운영사장으로 애슬레틱스를 맡으면서, 부상으로 고통받은 선수를 수없이 봐왔으니까.
‘팬들 반응은···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겠지.’
소니 그레이를 보며 팬들 역시 많은 걱정을 했다. 피지컬이 좋지 못해서인지, 부상에 자주 시달리는 선수였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박살났으니. 아마 충격은 꽤 클 거다. 오래갈 거고.
‘부상의 정도가 약하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뭐가 됐든 당장은 힘들겠군.’
이미 흔들렸던 팬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던 빌리 빈은 그 뒤로 올라오는 투수에 미간을 좁혔다.
“Go···”
공교롭다면 공교롭다.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가 무너진 뒤, 가장 주목받는 선수가 뒤이어 올라왔으니까. 그렇기에···
‘위험해.’
만약 소니 그레이가 팬들이 바라는 모습을, 강력한 에이스로서의 피칭을 보여줬다면. 꽤 그럴듯한 그림이 됐겠지.
현재의 에이스와 미래의 에이스가 서로 바톤을 주고받는 듯한 장면이 연출됐을 테니까.
하지만 소니 그레이가 무너지면서, 그 아름다운 장면은 사라졌고, 가장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여기서 Go까지 무너진다면? 기대와 다르게, 저조한 피칭을 보여준다면?’
그땐 끝이다.
서늘한 감각이 빌리 빈의 뒷목을 스쳤을 때. 우렁찬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스트라이크 선언.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앞서 들린 가죽을 때리는 파괴적인 소리.
그건 불안한 가정들로 복잡했던 머리를 맑게 해줬다.
‘끌까?’
사실 원래는 경기를 안 본다.
빌리 빈 자신을 다룬 영화처럼, 경기를 보면 진다거나 하는 징크스가 있는 건 아니고.
한때는 그도 선수였기에, 경기를 보면 마음이 끓어오르고, 흥분하기에 자제했다. 흥분하면, 선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나, 분석이 힘드니까.
그렇기에 오늘은 조금 독특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니 그레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이례적으로 시범경기 중계를 시청한 거니까.
허나 그 소니 그레이는 이미 내려갔고. 지금 마운드에는···
-아웃!
흥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선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중계를 틀어놨던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으려던 빌리 빈은 저도 모르게 덜컥 멈췄다.
계속 이어진 압도적인 피칭이 그의 두 눈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내일부턴 힘들테니,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 변명하며 마우스를 멈춘 그는 조용히 경기를 지켜봤고. 중계진이 던지는 여러 가지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서 안 되는 건데 말이야.’
두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을 때. 흥분감에 찌들어 뜨겁게 달아오른 목 주변을 매만지며 그는 피식 웃었다.
분명 직접 본 고유석이라는 선수는 굉장했다.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최악의 상황인데도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만약 계속해서 경기를 지켜본다면, 선수에 대한 선입견이나, 팀을 아우르는 관리자로서 가져서는 안 될 호감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다시금 마우스를 집은 순간.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마치 그런 빌리 빈을 붙잡듯, 빠르게 던진 공 세 개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이건··· 아.’
불현듯 떠올랐다.
스터프가 올라가고, 서클의 역회전이 강해지면서, 예전의 낙폭이 강했던 서클을 잃은 게 아니라. 커맨드에 문제가 생긴 거라는 것과 그래서 그걸 바로잡기 위해, 인스트럭터로 붙였던 그렉 매덕스와 연습하고 있다던 보고가 말이다.
‘가능···했던 건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그립으로 던지는 구종인데도, 서로 판이하니, 커맨드가 흔들리는 이상, 공존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해낸 건가? 정말로?
‘저런 선수가 5년을 마이너에 처박혀 있었단 말이지··· 무려 5년을.’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저런 재능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메이저에 있었더라면. 훨씬 상황이 낫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은 빌리 빈의 눈에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걱정과 근심이 사라졌다.
다른 가정을 할 필요 없이, 딱 하나는 확실했으니까.
‘저것 하나로··· 소니 그레이는 지워졌다.’
에이스의 몰락은 더욱더 강력한 충격으로 가려졌다. 이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도.
그의 충격적인 모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없겠지.
그보다 훨씬 더 밝고, 희망차면서, 굉장히 자극적인 이야기가 따로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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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찰칵거린다.
내 얼굴을 어떻게든 담으려는 것처럼 열심히도 찍네.
‘일단 3이닝까진 세이프. 탈삼진 다섯 개면. 그럭저럭 잘 잡았네. 저번보다 두 개가 적긴 해도.’
허락된 3이닝은 일단 무사히 끝났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서클이 날아오니,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타자들은 처절하게 망가졌다.
그 결과가 삼진 다섯 개고.
피안타와 볼넷을 내주지 않았기에, 시범경기가 시작하면서부터 이어졌던 퍼펙트 역시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만족하고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야 없지.
일부러 투구수 조절한 건데.
‘지금까지 투구수가 31개. 저번 경기보다 5개 줄였네.’
적절하게 던진 투심이 큰 역할을 해줬다. 땅볼을 잘 유도해줬으니까. 그 덕에 삼진은 지난번보다 조금 줄었지만, 투구수는 확실하게 아꼈다.
그렇기에 허락은 생각보다 흔쾌히 떨어졌다. 사실 31개면, 꽤 적은 숫자인 건 사실이잖아?
남들 3이닝 던지는 거랑 비교하면 적어도 10개, 많으면 20개 이상 적은 수준이니 말이야.
‘어깨도 딱 좋게 풀렸어.’
어깨는 오히려 시작보다 더욱더 뜨거웠다. 한 타순을 돌면서, 제대로 풀린 거지.
내가 다시 덕아웃에서 걸어나오니, 마찬가지로 대기타석으로 나가던 제이슨 프리디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시범경기이니, 굳이 내가 4이닝을 던질 줄은 몰랐던 거겠지. 보통 3이닝 정도로 끊으니까.
이미 충분한 퍼포먼스도 보여줬는데, 굳이 왜 다시 올라오느냐고 묻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만한 기회가 없지.’
정밀검사를 위해서 간 건지. 벤치에 없는 소니 그레이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신 없을 기회였다.
스포트라이트가 몰리기 좋잖아?. 꽤 공교로운 상황이니까.
그리고 내가 가진 손 패를 다 보여준 거나 다름없는데. 이 정도로 만족하긴 조금 아쉽지.
‘수미상관이라고 하던가?’
그렇기에 다시 오른 마운드.
경기의 시작과 똑같았다.
제이슨 프리디가 타석으로 올라왔고, 그가 떠난 자리를 대신해서, 닉 아메드가 대기타석으로 나왔으니까.
작품의 처음과 끝이 비슷하거나 같은 걸 수미상관이라고 하던데, 뭐, 그런 느낌이네. 슬슬 교체할 줄 알았더니. 조금 더 보는 건가?
경기는 이미 크게 뒤집혔다.
6회 초, 타자들이 시원하게 때렸거든. 11점이나 냈고. 5회에도 2점을 냈기에, 7대0으로 시작했던 경기가, 이제는 19대 7이 됐다.
그야말로 화끈한 난타전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경기의 주인공은 그런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타자들이 아니다.
“스트라이크!”
나지.
초구 스트라이크.
첫 타석은 몸쪽으로 넣었기에 그걸 생각한 건지,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지만. 들어온 건 바깥쪽 낮은 슬라이더.
이 양반아, 아무리 몸쪽 포심이 옳다고 내가 그걸 두 번이나 하겠어? 같은 선수한테?
깔끔한 헛스윙에 카운트가 올라갔다. 경기 동안 꾸준하게 올라왔던 집중력과 경기감각이 점점 정오를 가리켰고.
“스트라이크!”
늘 그랬던 것처럼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초구가 던져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날아든 2구. 뚝 떨어지는 서클 V1에 타자는 다시금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일부러 낮게 잡았던 코스에 익숙해졌던 타자를 하이 패스트볼로 돌려세우자, 조용했던 경기장이 약간 부산스러워졌다.
불쾌한 듯 눈을 찡그리거나, 한숨을 뱉으며 나가는 관중들. 아마도 기대하고 왔을 디백스의 팬들이겠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기대감을 120% 채워진 경기였지만. 시간이 지난 뒤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는 경기를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졌으리라.
“스트라이크!”
허나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 이 경기는 조금 다르게 변질된지 오래니까.
불쾌한 홈팬들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셔터소리가 울렸다.
언뜻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 플래시가 줄지어 터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스트라이크 아웃!”
닉 아메드는 첫 시작을 알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제물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타자.
처음과 마찬가지로 크리스 이아네타가 올라올 줄 알았지만, 조금 생소한 녀석이 올라왔다.
조쉬 톨. 구단에서 건네준 자료에서 이름을 봤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수많은 교체선수 중 누가, 언제 나올 줄 알고 하나하나 다 기억해. 중요한 놈들만 쓱 읽고 말지.
그래도 메이저리거였다는 건 얼추 생각이 나지만, 그것 외에는 그다지 큰 인상은 없다.
그러니···
“스트라이크!”
그냥 때려잡자.
한복판으로 들어온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타자는 멍하니 지켜만 봤다.
앞서 두 명의 타자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걸 똑똑히 지켜보고 올라왔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
그 순간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뜻밖의 공에 흔들렸더라도, 그걸 겉으로 표출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니까.
“스트라이크!”
다시 바깥쪽으로 걸치는 포심 적당히 나갈 것 같았는데, 투구감각이 올라온 것 때문인지, 정확하게 컨트롤이 됐다.
타자는 이번에도 배트를 내지 못했고. 처량한 와중에 찰칵거리는 소리와 주심의 우렁찬 목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상황이 만들어졌으니, 망설이지 않고 사인을 보냈다. 얘가 오늘의 주인공이니까.
“후우.”
꾹 참아왔던 숨을 한번 뱉은 뒤, 열기가 나가지 않도록 다시금 들이마셨고. 얌전히 글러브를 받치고 있는 포수에게 유유히 공을 던진다.
이번에도 한가운데.
초구와 똑같은 코스다.
모를 수가 없지.
누가 봐도 브레이킹볼이니까.
하지만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는 코스. 과연 참을 수가 있을까? 정확하게 컨택만 한다면, 홈런도 우습게 날릴 수 있을 텐데?
“읍-”
느릿한 구속으로 유유히 날아오는 공. 그것에 홀린 타자는 저도 모르게 배트를 내었다가, 돌연 정신이 든 듯 억지로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충분한 탄력을 받은 배트는 제 할 일을 했다.
남은 것은 그저 그런 배트를 놀리듯 쑥 떨어지는 공을 보고 눈을 질끈 감는 것뿐.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는 돌았고, 주심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닝의 마지막을 장식한 KKK. 좌절한 디백스 팬들에겐 잔인하게도 몇몇 환호성이 우렁차게 터졌다.
몇 안 되는 우리 팬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관광객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디백스 팬들의 감정과 상관없이, 그저 스스로의 속마음에 충실했다.
“휘이이이이익!”
“죽이는데? 쟤 누구야?”
이제까지보다 조금 더 강렬했던 셔터 소리, 플래시 소리와 함께.
‘그렉이 말한 대로네.’
일전에 그가 했던 말처럼 경악한 기자들은 광기에 휩싸이며 나를 카메라에 담았고.
경기장 곳곳에서 보이던 스카우트들은 황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거나, 자신의 수첩을 북북 찢었다.
에이스가 무너졌고. 타자들이 미쳐 날뛰었으며. 화끈한 난타전이 일어났던 경기.
허나 결국 남은 건 이번에도 고유석이라는 이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