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48화 (48/316)

48화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가 뽑은 건 보석이다.

그것도 아주 값져서.

가지고 있는 게 부담스러운 정도인 보석 말이다.

“이쪽도 우리 계열인가?”

“아뇨, 논조가 친화적이기는 한데, 딱히 관계는 없어요.”

“그렇단 말이지···”

눈길을 사로잡은 기사와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언론사에 비서에게 물은 빌리 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를 끌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단 두 경기 만에.’

썰물처럼 쏟아지는 기사들은 구단이 의도한 게 맞다.

소니 그레이를 받쳐줄, 혹은 그 자리를 대신할 영웅이 애슬레틱스에 필요했으니까.

항상 잘 먹히는 게 히어로 마케팅이지만, 지금 에이스에겐 이득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필수적인 일이지.

야심찬 도전에도 좌절했던 14년.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던 15년과 16년의 두 시즌. 그 과정을 바라본 팬들은 생각했다.

‘아, 이 팀은 안 되는구나.’

틀린 말은 아니다. 여타 빅마켓이나, 구단주의 씀씀이가 좋은 구단들에 비하면 가능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걸 방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이미지가 깨지면 구단도 무너진다. 최소한 언더독이라도 되려면, 그런 역할이라도 하려면. 밟히고, 좌절하고, 넘어지더라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영웅이 필요하고. 적어도 최근 몇 년간은 소니 그레이가 그 역할을 해줬다.

팜의 성골 유망주였던 선수는 화려한 데뷔 이후. 에이스로서 굳건하게 버텼으니까.

비참했던 15시즌, 사이 영 3위라는 쾌거를 올리며, 좌절한 팬들의 등대가 됐고.

작년 40홈런을 넘겼던 크리스 데이비스조차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스타.

그것이 소니 그레이라는 에이스지만.

‘불안하지. 모래 위의 성처럼.’

그는 타고난 피지컬이 좋지 않은 것 때문인지, 꾸준하게 부상에 시달렸다. 후반기에 들어서면 체력저하로 페이스가 떨어졌고.

언젠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선수. 하지만 무너지면 안 되는 영웅.

그리고 결국에는 무너졌던 작년.

모든 팬이 좌절한 그때.

새로운 신성이 우뚝 섰고.

지금 오클랜드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래서 띄웠다.

겨울 이후 상상 그 이상의 스터프를 장착하고 나타난 이후, 최소한 로테이션에는 들어올 수 있을 정도라는 판단이 섰으니까.

‘그게 마중물이 됐던 건가?’

구단에 우호적인 언론사들을 통해 적당히 밀어줬을 뿐인데. 이젠 관성이 붙었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구단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언론사에서 나온 이 기사가, 그 인기를 증명했다.

언제나 먹이를 찾으며 바닥을 훑는 하이에나 같은 작자들. 그들이 냄새를 맡고 붙은 거니까.

고유석이라는 선수와 그가 만들어낸 화제성이 그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거겠지.

‘문제는 지금 상황이 구단에게도 이득이냐는 거겠지.’

“너무 컸어.”

적당히 이슈를 몰아주는 정도로 생각했던 선수인데. 이젠 정말로 구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유망주가 됐다.

팜의 선수 중 기존에 No.1이었던 프랭클린 바레토의 이름이 팬 커뮤니티에서 사라졌을 정도로.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자인 AJ 퍽이나 다니엘 고셋은 그보다는 낫다. 같은 투수라는 이유 때문인지.

언젠가 황금 세대로서 함께 선발진을 구성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언급은 됐으니까. 결국 보조적인 역할이지만.

‘받은 계약금을 비교하면, 열 배는 넘을 텐데 말이야.’

주객이 전도됐다.

보너스 베이비들이 뒷전이 된 거니까.

그래도 다시 팬들이 활기를 찾았으니, 분명 기뻐야 할 텐데. 애석하게도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이젠 불안한 영웅이 소니 그레이 하나가 아니라, 고유석까지 포함해서 둘이 되어버렸으니까.

‘최선은 둘 다 쭉 잘해서, 무탈하게 리그가 시작하는 거지만. 소니 그레이는 벌써부터 불안하지.’

이미 한 명은 아슬아슬하다.

작년 내내 시달렸던 부상의 후유증인지, 시작부터 삐걱 거렸으니까.

그래도 코어가 두 개가 되었으니, 나머지 하나가 버텨준다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그 마지막 코어마저도 꺼진다면?

지금의 열기가 싹 식어버릴 정도로 무너져버린다면?

‘그땐 끝이야.’

거기까지 생각한 빌리 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황당한 상황이 아닌가? 아직 빅리그 데뷔조차 못 해본 유망주 하나가, 구단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거니까.

차라리 그 정도였다면, 전전긍긍하면서도 그저 열심히 보듬어주고, 밀어줬을 텐데.

문제는 그 유망주에게···

“사장님? Mr. 브라이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Go의 에이전트요. 연결 할까요?”

에이전트가 붙어 있다.

그것도 자기 고객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그래서 더럽게 짜증 나는 사내가.

“···연결해.”

-빌리 빈 사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는군요.

“예, 오래간만이군요.”

차라리 영영 연락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앞으로는 자주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그래야 할 테니까요.

‘망할 새끼.’

목젖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은 빌리 빈은 단어를 씹듯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물었다.

“갑자기 연락한 용건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별건 아닙니다. 혹시나··· Go가 개막전 로스터에 오를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천천히 말씀해보시죠.”

그래, 위치를 너무 잘 안다.

이젠 구단으로서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정확히 캐치했기에, 이렇게 또다시 삥을 뜯어내려고 온 거겠지.

한편으론 에이전트만 그런 건 아니다. 선수도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보그트와 마찰이 있다고 했던가? 볼배합 문제로.’

멍청한 선수는 아닌 것 같으니. 공공연하게 주전 포수에게 도전했다는 건. 자신이 구단과 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안다는 거겠지.

어쩌면 옆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을 그렉 매덕스가 그걸 부추긴 걸 수도 있고.

‘지금은··· Go의 성적이 유지되는 편이 우리에게 이득일 테니, 그를 밀어줘야겠지.’

-···기존에 계약금을 충분히 받지 못한 만큼, 사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개막전 로스터에 오른다면 구단에서 그에게 렌트를- 듣고 계십니까?

그런 대우를 바라면 다저스나 양키스로 꺼질 것이지, 왜 애슬레틱스에서 지랄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낸 빌리 빈은 애써 노기를 감춘 목소리로 말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이번에도 판정승을 거두는 건 고유석과 브라이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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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웬일이에요?”

레인저스전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평소처럼 적당히 스트레칭 하면서, 굳은 어깨를 풀어주려고. 호호캄으로 향했을 때.

브라이언에게서 연락이 왔다.

꽤 오랜만이네. 잘했다는 메시지는 어제 이미 받았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괜히 걱정스러워졌지만. 다행히 목소리가 밝았다.

-하하,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지금쯤이면··· 딱 Go가 훈련장으로 향할 시간인 것 같아서요.

음, 이제 서로 알고 지낸 게 제법 돼서 그런지, 이 양반도 귀신이네. 날 너무 잘 알아.

그나저나 좋은 소식?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가 직접 전화를 줄 정도면 꽤나 큰일이라는 건데.

‘혹시 아시안게임 이야기라도 나왔나?’

나한테 가장 좋은 소식은 이거지. 아직은 사실상 마이너리거라,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혹시 또 모른다.

야구팬들이 들고일어났다거나. 감독이 신선한 느낌의 선수단을 원한다거나. 그런 이유로 내년 아시안게임 선수단에 나도 물망에 올랐을지도?

지금 한국에서 제법 유명세를 끌고 있는 것 같으니.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사실상 준 메이저리거나 다름없고.

“좋은 소식이라면?”

기대감에 차서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Go, 혹시 로스터에 오른다면, 주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어림도 없지!

KBO 거치고 간 것도 아니고. 바로 해외로 날아간 놈이 뭐 예쁘다고 국대까지 시켜주겠어? 올해 WBC도 승선 못했는데, 역시나 그럴리가 없지.

추민수 선배도 엄청나게 잘한 뒤에야 간신히 들어갔으니. 나도 최소한 WBC 정도는 한번 뛰어야 시켜주겠지. 그럼 아시안 게임은 글렀고, 올림픽이나 노려봐야겠네.

기대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도 꽤나 솔깃하다.

“어··· 집이요? 뭐, 숙소밖에 더 있겠어요. 돈도 없는데. 아, 혹시 메이저는 숙소 없나?”

-아뇨, 구단에서 선수에게 따로 제공하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웬만하면 혼자 사시는 게 더 편하시겠죠?

“네, 뭐 그럴 수만 있다면야. 컨디션 관리에도 좋겠죠.”

숙소라··· 별로 좋은 추억은 없다. 지금 스프링 트레이닝 숙소에서 지내는 걸 빼면.

여긴 천국이지. 마이너 숙소들은 죄다 닭장 같았으니까.

아마 작년 락하운즈의 숙소였다면, 지금 같은 수면관리는 힘들 거다. 애써 시간 맞춰 자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구는 통에 숙면이 불가능하거든.

특히나 나는 선발투수니까,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는 혼자 지내는 게 훨씬 좋지.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콜업되면 봉급이 다르니까, 얼추 렌트는 가능하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오클랜드에서 값싼 곳에 살 수는 없으니. 엄청 쪼들리겠네.’

괜히 한숨이 나왔다.

빅리그만 가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고, 탄탄대로일 것 같았는데. 막상 또 쉽지가 않을 것 같네.

그런 내 한숨에 브라이언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음기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Go의 고민이 심하다는 건 잘 알겠군요. 그 고민을 해결해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어떻게요?”

-구단과는 이미 협상을 마쳤습니다. Go도 아시겠지만, 지금 Go의 가치를 생각하면 기존에 받았던 계약금은 터무니없죠.

“지금은 그렇죠, 지금은.”

지금 내 기대치는 1선발이다.

자랑하는 거 아니고, 허세 부리는 거 아니다. 진지하게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팬 커뮤니티에서.

차기 에이스라고 칭송을 하던데, 아마 그에 근접한 정도는 되겠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그러니 그런 기대치와 비교하면 기존에 받았던 계약금은 푼돈도 안 되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구단에서 퍼줘. 최대한 아껴야지.

그때 나는 최고구속이 90마일도 못 찍는 애새끼였으니까.

-그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25인 로스터 진입시, 메이저리그에서 보내는 기간 동안 최대 1년까지 구단에서 임대료를 대신 지불해주기로 했습니다.

와우.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렌트비를 지불해줘? 구단이?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더 대단한 건 그 구단이···

“에이스가요? 진짜요?”

오클랜드라는 거다.

이 거지새끼들- 아니, 거지구단께서 그런 호의까지 베풀어 준다고? 나한테? 그냥 대충 숙소에다가 처박아 놓는 게 아니라?

이건 절대로 구단의 의사가 아니다.

분명 브라이언이 끌어낸 거겠지. 그 정도로 정이 넘치는 구단이 아니니까.

“제가 에이전트 하나는 끝내주게 얻은 것 같네요.”

-다 선수가 잘한 덕분이죠. Go의 실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지금처럼 경기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으로 통화는 끝났고. 어깨가 무거웠다. 지금처럼 하라고 해서? 아니, 그거야 당연한 거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쪽팔릴 일은 없게 해야지. 어차피 고개 쳐든 거, 앞으로도 쭉 숙이지 않도록.’

그런 결심이 섰다.

물론 임대료가 탐나기도 했고. 집세만 아껴도 돈이 얼마야?

1년 지원해준다고 했으니까.

꼬박꼬박 열심히 모으면, 그다음 해에는 그냥 내 명의로 하나 사도 되겠네.

머릿속에 그려진 장밋빛 미래에, 호호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소보다도 조금 더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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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몸을 풀다가 느낀 건데. 이틀 전, 스티븐 보그트에게 본때(?)를 보여준 효과가 확실한 것 같다.

예전에는 뭐랄까, 흥미롭다거나, 신기하다거나, 궁금하다거나, 혹은 질투하거나.

그런 종류의 시선으로 나를 봤었다. 특히 투수들은 눈빛으로 태워 죽이려는 건지, 아주 눈동자가 이글이글거렸고.

근데 지금은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피하거나, 모르는 척 다. 마치 위험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얼마전에 대화를 나눴던 마커스 시미언도 눈이 마주치니, 어색하게 웃기만 하고.

“효과 확실하네요. 누구든지 먼저 개기는 놈은 없겠는데요?”

“주전 포수 손을 날려먹은 놈인데, 오죽하겠어?”

“언제는 좋은 방법이라면서 부추기더니··· 그리고 안 날려 먹었어요. 멀쩡해요. 경기도 뛰었구만.”

그래, 목표는 확실하게 이뤘다. 캠프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건드리면 안 되는 미친놈으로 찍혔으니까.

구단 최고참 중 한명이자, 주전 포수한테도 들이받는 놈이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거지.

그래서 왠지 조금 친해지는 것 같았던 주전 선수들과의 사이가 다시 멀어진 느낌인데. 나쁘진 않다. 애초에 이게 원래 계획이었잖아?

‘최소한 포수들은 닥치고 공 받겠네.’

투구할 때 태클 거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러면 된 거지. 사인 내면 알아서 잘 들을 거고.

물론 포수들도 속마음으로는 언젠가 한 방 맞으라며 고사를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내가 잘하면 되는 거고.

“혹시 애새끼처럼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삐지는 건 아니지? 아니, 애새끼가 맞나? 아직 어린 놈이니까. 네 아버지가 나보다 한 살 어리다며?.”

“그건 그렉이 늙은 거지, 제가 어린 게 아니죠. 그리고 어차피 계속 잘하면 알아서 먼저 다가올 텐데. 뭐, 상관없죠.”

놀리려는 건지, 은근하게 묻던 그렉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야 뭘 좀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나저나, 그렉이야 말로 저 말고 친한 사람 없어요?”

“허, 누구 때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에이스로 왔는데··· 옆 동네 컵스였으면 두 발로 걸어 다니지도 않았어. 죄다 업어 준다고 난리 났을 테니까.”

“업어드려요?”

농담한 거 가지고 얼굴로 욕을 하시네. 등판한 뒤에는 대충 이렇다. 슬~슬 몸이나 풀면서 노닥거리는 거지.

마음 같아선 연습피칭이라도 싶은데. 3이닝이나 던져서 그런지, 투수코치가 꾸준하게 나를 주시했다.

혹시라도 글러브 끼면, 바로 훈련장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답답해 죽겠지? 참아. 괜찮은 것 같아도, 그러다가 훅 가는 거야.”

“예예, 잘 알죠.”

선발등판 시켜줄 거면 시원하게 5이닝쯤 던지게 해주면 안 되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상상만 했다. 어깨가 재산인데, 아껴야지.

이런 시간이 지루하고 괜히 감질나기는 해도, 무리해서 망가지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나저나, 저번 경기 보면서 느낀 건데, 커트 앵글. 넌 너무 생각이 많아.”

간략한 운동을 마치고 스트레칭할 때, 대뜸 그렉이 그렇게 말했다. 생각이 많다고?

“누가 누굴 보고 그런 말을···”

메이저리그를 통틀어서 가장 생각을 많이 하면서 피칭하신 분이 저런 말을 하니 신기하네.

철저한 경기계획.

타자마다 다른 피칭.

그걸로 리그를 정복하신 분께서 나 같은 하찮은 놈한테 생각이 많다니. 반어법인가?

“나? 너랑 나는 다르지. 애초에 방법이 달라. 난 말년 때 말고는 너처럼 무식하게 안 했어.”

그런 생각을 담은 말에 그렉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아니, 생각이 많다고 해놓고 무식하다는 건 또 뭐야?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대화할 때마다 선문답 같다. 그나마 가장 말이 잘 통했던 게, 스티븐 보그트를 조질 때였으니, 말 다했지.

“딱 보면 알아. 넌 타자 한 명마다 죄다 계획을 세우지? 공하나 던지고, 어떻게 반응하나 보면서 말이야.”

“다들 그러지 않아요?”

“넌 그게 너무 심하다는 거야. 그렇게 해가지고는 절대로 빅리그에서 못 버텨. 그 전에 지칠 테니까.”

여전히 뜬구름 잡는 것 같은데. 일단은 경청했다. 뭔가 비법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초롱초롱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피식 웃은 그렉은 자기 머리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머리를 쓰는 건 좋은데, 머리 쓰는 것도 지능적으로 써야지. 빅리그 타자는 수백 명도 더 넘어. 올라오는 놈들까지 합치면, 더럽게 많지. 그놈들한테 전부 공하나 던질 때마다 생각하다가는, 제명에 못 살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선택과 집중.”

실마리가 잡혔다.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타자를 두 부류로 나눠. 무조건 잡는 놈이랑, 절대로 못 이기는 놈으로. 무조건 잡는 놈은 길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던져. 대신!”

“대신?”

“최대한 타이밍을 빠르게 잡아. 마이너 때 너도 비슷하게 하더만? 경기 중간에 갑자기 인터벌이 빨라지던데. 그렇게 쉴 새 없이 몰아쳐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지. 무조건 잡을 수 있으니까.”

이 양반 생각보다 내 영상을 많이 봤는데? 그것까지 알 정도면.

‘그러고 보니··· 확실히 좀 편하기는 했지.’

경기력과 집중력이 적절하게 올라오면, 무아지경 비슷한 상태가 된다. 피칭 타이밍이 점점 빨라지면서,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물러났었지.

나 또한 엄청나게 지치는 행위일 텐데도, 이상하게 그리 힘이 든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던지고 나면,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었지. 피로도 늦게 찾아왔고.

내 생각을 읽은 건지, 그렉은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뇌라는 게, 큰 도움이 되지만, 그만쿰 은근히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 놈이지. 그리고 정신적인 피로감도 쉽게 올라가고. 그걸 최대한으로 줄여야 오래 던질 수 있는 거야.”

“근데, 그러다가 큰 거 맞으면요? 빅리그 타자쯤 되면 어느 정도 파워는 있을 텐데.”

“그건 똥 밟은 셈 쳐야지. 그리고 솔직히 그 뜬금포 억제할 정도는 되잖아? 커트 앵글, 지금 네 실력이.”

그의 말에서 두 가지 감정을 얻었다. 하나는 깨달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쁨.

“그렇게 야금야금 정신력과 체력을 아껴서, 쎈 놈들한테 퍼부어야지. 그래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선택과 집중이라···”

“타자들이 자기가 칠 공을 고르는 것처럼. 투수도 자기가 잡을 타자를 골라야, 더 편한 법이야.”

그렉 매덕스라는 거물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롱런했던 건지, 그 비결을 조금 엿본 것 같다.

남은 건, 그가 이렇게 한 마디씩 던져주는 가르침들을, 내가 어떻게 체득시키느냐는 거겠지.

“그런데, 진짜로 뭘 해도 안 되는 놈이 올라오면 걔는 어떻게 해요? 그런 놈한테 집중하다가 한 방 맞으면 그거야말로 손해 같은데.”

“뭘 어떡해? 눈치보고 그냥 걸러야지. 고의사구라는 건 원래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있는 룰인데, 잘 이용해야지.”

음, 역시 자기 철학이 확실한 분이시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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