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어릴 때는 하루하루 자라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았던 찬장 위가 보이거나. 높아 보였던 천장에는 손이 닿거나.
절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들이 손쉽게 해내며 성취감이라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런 성장기가 끝나고 나면, 한 몇 년은 그대로다. 더 나아지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시간이 멈춘다.
그런 정체감이 답답하고 느껴지고, 한숨 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마저도 행복이었다는 걸 깨달을 시기가 왔다.
‘젠장···’
하루하루 늙어가는 몸을 느낄 때면, 괜한 상소리가 나왔다.
분명 작년만 하더라도 훨씬 간단하게 해냈는데. 체력이 지금보다 더욱더 강건했는데. 사고의 속도도 더 빨랐는데.
누구나 찾아오는 시기고, 누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직업의 특수성 때문인지, 그는 이런 노화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내가 늙었다고? 그럴 리가. 당장 작년 올스타까지 들어갔는데. 아직 늙긴 너무 어리잖아.’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더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을 유지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작년과 재작년, 두 번의 올스타로 그걸 증명했고.
겨울을 지나, 몸을 만들었다. 평소처럼 천천히 컨디션을 올렸고. 에이징 커브가 오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더욱더 철저하게 루틴을 이행하며 폼을 올렸다.
우습게도 조급함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작년보다 오히려 더욱더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그걸 깨달은 순간, 처음으로 어린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르는 녀석들.
‘아직- 아직은 아니야. 할 수 있어.’
오클랜드는 리빌딩을 해야 한다. 기존의 선수들을 갈아치우고, 젊은 녀석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맡겨야 하지.
물론 모든 베테랑이 쓸려나가지는 않을 거다. 자기 가치를 증명해낸 몇몇 녀석들은 고참으로서 그 어린놈들을 이끌어야 할 테니까.
스티븐 보그트는 자신이 그중 한 명이라는 걸, 치고 올라오는 녀석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기엔 아직 거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븐, 스티븐.”
“아, 예.”
“딴생각이라도 하던 거야? 곧 경기 시작이니까, 준비해.”
“네.”
잠깐 상념에 잡혀 있을 때, 배터리 코치가 그를 일깨웠다.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코치들도 얼추 안다. 그의 몸이 생각보다 덜 올라온다는 걸. 모를 수가 없지.
일단은 주전 포수이니, 자신을 걱정하는 건데, 예전이라면 오히려 그런 관심이 고마웠을 텐데, 지금은 그저 껄끄러웠다.
‘후우, 집중하자. 집중.’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뜨니, 그제야 그라운드가 눈에 들어왔고. 저 멀리 불펜에서 나오는 녀석도 보였다.
Go You-Suck. 신기한 이름을 가진 투수는 경기 한 번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신과 달리,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처럼.
사실 캠프 내에서는 이전에도 그 무지막지한 무브먼트와 매덕스의 1대1 교습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미 유명했지만. 경기를 통해 외부로도 널리 알려진 거지.
‘아까 전은··· 내가 실수했어.’
그런 투수인데, 사실 첫인상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전적으로 스티븐 보그트 자신의 책임이니까.
자기 고집이 제법 심하고, 스스로 사인을 자주 내는 편이라는 말을 브루스 맥스웰에게서 들은 탓에 먼저 단단히 주의한 건데.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지.
‘곧 등판인 선발투수한테 시작부터 엄포를 놓았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허나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베테랑으로서 팀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고. 투수 리드는 노련한 포수의 상징이었다.
그런 투수 리드마저 어린 투수에게 주도권을 내준다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겠지.
‘웬만하면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지. 그래야 나도 편하고, 저 녀석도 편해.’
긴 숨을 내쉬며 슬쩍 다가갔는데, 표정이 묘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이제 두 번째 경기니, 그냥 긴장한 거겠지. 듣기로 선발 경쟁 중이라고 하는데. 오늘의 선발등판은 중요한 기회일 테니까.
대충 그렇게 생각한 스티븐 보그트는 간단하게 사인을 교환했다.
“사인은 알지? 포심, 슬라이더, 서클 체인지업, 쓰리핑거. 아, 커브도 던진다고 했나?”
“아뇨, 일단은 앞의 네 개만 던집니다. 사인은 이미 알아요.”
“그래, 다행이네. 손 잘 보고, 컨트롤 잘해. 그냥 열심히만 던져, 나머진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는데, 홈 플레이트로 향하는 길은 왠지 좀 싸늘했다. 뭔가 불안한 기운도 감돌았고.
‘싫은 티를 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차분하군. 다행이야.’
그래도 다시금 신신당부하는 자신의 말에 투수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기에, 애써 그런 기운을 떨쳐냈다.
그렇게 홈 플레이트에 앉아, 글러브를 팍팍 치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빛이 조금 수상했다.
웃는 건가? 아니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마치 장난을 쳐놓은 악동 같은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에이징 커브의 기미가 있다고 해도, 스티븐 보그트 자신은 주전 포수고, 클럽하우스의 리더인 선수다.
아무리 패기 넘친다고 해도, 아직은 젊은 투수가 범접할 수 없는 베테랑이지. 그렇기에 애써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심이 경기 시작을 선언했고, 여전히 묘한 표정의 투수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올라오는 타자에게 주목했다.
“Hello~w, 스티브. 몇 달 만에 만나네요.”
딜리아노 드쉴즈 Jr.
레인저스의 백업 외야수다.
재작년 데뷔했을 때는 꽤나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AL 올해의 신인 7위까지 들어갔었지만. 작년은 트리플A를 오 다니며, AAAA급 리거가 됐었지.
같은 지구라서 꽤 자주 봤던 지라, 넉살 좋게 인사하는데, 여유로운척 하는 와중에도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래, 너도 중요한 시기겠지. 올해까지 말아먹으면, 주전은 물 건너가는 거니까.’
“쎈 척하지마, 주니어. 너 못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니 타석을 몇 번이나 봤는데. 어차피 막 휘두를 거, 그냥 빨리 들어오기나 하지 그래?”
슬쩍 속을 긁어주니,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표정도 살짝 굳었고. 다시 애써 웃는데, 오히려 그러니 더욱 우스웠다.
‘몸쪽 코스에 약했지. 아직 젊은 주제에 파워가 나보다도 약한 녀석이니, 큰 거 맞을 걱정은 없어.’
굳은 표정으로 타격자세를 취하는 타자를 흘끔 살핀 뒤, 투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몸쪽 꽉 찬 포심.
구속이 80마일대인 녀석이니, 아마도 맞춰 잡는 스타일이겠지만. 일단 한 구는 꽂아봐야 한다. 영접을 잡기 위해서라도.
다행히 투수는 순순히 투구폼을 취했고 요구한 대로 공이 날아왔다.
“스트라이크!”
가만히 참는 타자.
제법 깊었는데,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자, 짜증스러운 듯 눈살을 찡그렸다.
‘초조한 녀석이니, 배트가 나올 거야. 스트라이크도 하나 잡았으니까. 낮게 하나 가자.’
다시금 낮게 포심 하나.
타자의 배트가 나올 걸 예상하고, 땅볼을 유도하려는 건데, 고개를 저었다.
‘쓰리핑거? 굳이?’
아직 타자가 패스트볼에도 충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체인지업에 속을까?
무지막지한 서클이라면 모를까, 쓰리핑거라면 제아무리 파워가 약한 놈이라도 장타가 나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스티븐 보그트는 재차 강력하게 포심을 요구했고, 이번에도 묘한 표정을 지은 투수는 순순히 자세를 잡았다.
‘진작 그럴 것이지.’
머리를 숙인 거라고 생각한 스티븐 보그트는 피식 웃으며 당당하게 글러브를 댔고, 무난한 투구폼을 눈에 담으며 준비했을 때.
“어?””
공이 날아왔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구속의 차이도 크겠지만.
무브먼트에서 심각한 차이가 나다 보니, 원래 구속보다도 훨씬 더 느리게 느껴지는 공이 서서히 날아왔다.
‘이런 미친!’
심지어 바깥쪽.
순간 욕지거리가 목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자기 마음대로 던진 거야? 사인이랑 상관없이?
그것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텐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스트라이크!”
타자의 헛스윙.
우렁차게 스윙하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공은 유유히 글러브로 들어왔다.
투수의 노림수가 통한 거다.
헛스윙까지 끌어내며, 타이밍을 흔듦과 동시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으니. 쓰리핑거 하나로 여러 가지 이득을 거둔 셈이지만. 스티븐 보그트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투수의 자기주장이 성공한 거니까. 그건 곧 행동에 명분이 생긴다는 거였다.
“타임!”
재빠른 타임요청.
경기시작하고 1분도 채 되지 않은 타이밍에 나온 타임에 주심마저 이상한 듯이 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잠깐 사인에 문제가 생겨서, 금방 의견 나누고 오겠습니다.”
주심은 다녀오라며 고개를 까딱였고. 무슨 일이냐고 사인을 보내는 투수코치에게 별일 아니라며 손짓한 뒤 스티븐 보그트는 조금 거친 발걸음으로 마운드로 향했다.
‘메이저는 근처도 못 와본 애송이가, 나랑 힘 싸움을 해보시겠다? 포수가 우습게 보여?’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신경이 예민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니, 평소보다도 조금 더 열이 올랐다.
그것이 훤히 드러나는 발걸음에도 마운드는 고요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잘못해서 패스트볼(Passed Ball-포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네 멋대로 행동해?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사인을 거절하던가?”
“쏘리쏘리. 딱 쓰리핑거 타이밍인데, 고개 젓다가 타이밍 놓칠 것 같아서 그냥 던졌어요. 그리고 잘 받으시던데, 설마 놓치겠어요. 포구실력도 좋으신 분이.”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거칠게 질책하니, 능글맞게 구는 몸짓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적당~히 자신에 대한 칭찬을 곁들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저 놀리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조심해, 다시는 이딴 짓거리 하지 말고. 두 번은 안 참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찝찝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보통 저런 어린 투수들은 이렇게 한번 크게 질책하고 나면, 약간 움츠러들거나,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하는데. 도리어 이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니까.
‘매덕스랑 붙어 다니더니, 자기가 매덕스라도 된 줄 아나?’
오만한 애송이 같으니. 거친 걸음으로 다시 홈 플레이트로 돌아와, 자세를 잡자, 주심은 다시 경기를 속행했다.
정작 2-0로 몰린 타자는 의아한 듯 그와 투수를 번갈아서 쳐다봤고, 말이다.
“워우, 저 친구도 성격 쎈가 보네. 요즘 애들 참 X같죠?”
“네가 하도 허접해서, 그냥 한복판에 넣는다고 하길래, 말리고 오는 길이야.”
“예, 그러시겠죠.”
젠장할. 일련의 상황에 열심히 잘 긁어놨던 녀석까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저렇게 비아냥거릴 정도로.
투수에게 치이고, 타자에게 또 치이는 상황이 참으로 엿 같았지만, 애써 분노를 삭인 그는 다시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으로 하나 빼. 카운트 잡았고, 타자도 제정신 차렸으니. 천천히 가자.’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그 역동적인 궤적을 감안하면, 아마도 넉넉하게 볼이 될 거다. 어쩌면 다시금 타자를 속여,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공을 요구했지만,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단단히 주의를 준 줄 알았더니.
‘차라리 방금 한 방 맞았으면 얌전히 입 닥쳤을 텐데···’
스트라이크 하나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진 건가? 우습지도 않지. 이후로도 몇 차례나 투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사인을 요구했다.
이미 기고만장해졌는데, 여기서 밀리기까지 한다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굴복한 건지 투수는 자세를 잡았고. 불만 섞인 표정으로 그를 봤다. 스티븐 보그트 입장에선 그저 우스웠지만.
‘던지기나 해.’
저런 애송이들을 수없이 본 입장에서 어떻게 다루는 지는 훤했다. 특히 중요한 시기니, 웬만하면 몸을 사릴 수밖에.
이렇게 천천히 고집을 꺾어주다 보면, 결국 알아서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렇게 확신하며 포구자세를 취했지만, 모든 동작을 마친 뒤, 공을 놓으며 투수가 지은 표정을 본 순간.
스티븐 보그트는 깨달았다.
‘저거 미친놈이다.’
상대는 그런 경험에 의한 상식 같은 게 통하지 않는 놈이라는 걸.
“스트라~잌 아웃!”
던진 공은 슬라이더.
바깥쪽 먼 곳에서부터 시작한 공은 멋들어지게 꺾인 뒤, 유유히 존 안으로 들어왔다.
차분해진 심정으로 스윙을 참았던 타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봤고 말이다.
루킹 삼진.
주심의 요란한 목소리에, 몇몇 관중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올라온 2번타자 트래비스 스나이더와 라이언 루아까지 삼진을 당하면서. 경기 시작부터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화끈한 결과가 나왔지만, 오히려 삼진이 올라갈수록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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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뭐하는-”
“어이, 커트 앵글. 피칭 이야기 좀 하자.”
나이스 그렉.
이닝이 끝나고 덕아웃 오면서 솔직히 조금 조마조마했다.
스티븐 보그트, 우리 포수 양반 얼굴이 장난이 아니었거든.
그래도 상대팀한테까지 콩가루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려고 했던 건지.
덕아웃에 들어온 뒤에 곧바로 고성을 터트리는데, 그렉이 적절하게 막아줬다.
“뭐야, 뭐 할말 있어?”
“···내가 니 공 잡아주는 불펜포수로 보여? 조심해. 다음 이닝부터는.”
차마 그렉 매덕스라는 거물의 짬밥을 이길 수는 없었던 건지, 나직한 욕설을 뱉은 뒤, 다시금 약간의 주의를 주는 것으로 스티븐 보그트는 물러났다.
“캬~ 저놈 성깔 있네. 공 받느라 손바닥 얼얼할 텐데.”
“현역시절처럼 아주 완벽한 타이밍이었어요.”
“누가 봐도 빡이 돈 것 같더만. 그나저나··· 어때? 신기하지?”
“네. 딱 그렉이 말한 대로네요.”
뭘 말하는 거냐고?
별거 아니다. 벤치, 그러니까 코치들의 반응 말이야.
‘가만~히 있네.’
투수 코치나 배터리 코치는 알 거다. 내가 사인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던졌다는 걸.
다른 선수들도 스티븐의 행동에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감지했을 거고.
그런데 아무도 나한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코치들마저도 모르는 척하겠다는 듯 평범하게 굴었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네요.”
“결국 그게 진리지. 빅리그에선 잘하는 놈이 최고니까. 넌 지금 X나게 잘했고.”
만약 내 마음대로 던지고 홈런을 맞았다면, 코치도 주의를 줬을 거다.
뭐, 직접적인 지적은 아니겠지만, 포수를 믿고 던지라거나, 벤치의 지시를 이행하라거나 하는 식으로 스티븐 보그트에게 힘을 실어 줬겠지.
하지만 세 타자 연속 삼진.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터치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투수의 재량권으로 여긴다는 거고.
이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생각보다 팀 내에서 내 입지가 훨씬 더 크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지금 팀 케미스트리를 망치고 있다.
주전 포수이자, 베테랑 선수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고 있으니까.
그러니 원래라면 적절하게 주의를 줬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최소한 코치들은 내가 승부에서 자기주장은 할 수 있는 정도의 위치로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티븐 보그트의 입지도 생각보다 작고.’
정말로 팀의 리더로 생각하고 있다면, 다른 선수들을 감안해서라도 나를 제지했겠지.
나 하나 때문에 빡이 돈 선수들 때문에, 팀이 진짜로 콩가루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앞서 말했듯 코치는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마치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한 발 떨어져 있지.
그건 선수단 내에서 스티븐 보그트가 어느 정도는 지지를 받을지언정, 절대적인 위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막말로 은퇴한 브레이브스의 치퍼 존스나, 양키스의 데릭 지터 같은 위상이었다면, 벤치에 들어오자마자 선수들한테 다구리 당했을 걸?
‘처음에는 그냥 열 받아서 한 거지만··· 이거, 해 볼만한데?’
그냥 화만 좀 풀려고 했다.
적당히 반항 좀 하다가, 적당히 기어주려고 했지. 근데 지금 이런 반응들을 보니, 진지하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저쪽의 투수 길들이기에 맞선, 포수 길들이기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참··· 새삼 모래알 같아서요.”
“그래서 좋잖아? 선수들끼리 서로 끈끈했으면, 넌 지금 드링크나 타야 했어. 간식이나 가져다 바치고. 모래알 같으니까, 잘하는 신인이 우뚝 설 수 있는 거지.”
진짜 신선 아니야?
내 생각을 다 아네.
신기한 듯 쳐다보니, 도리어 그렉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봤다.
“이상~하게 생각이 잘 맞는단 말이야. 진짜 내 아들이라도 되나?“
“저희 아버지 집에 잘 계신데요. 그렉보다 한 살 어리실 걸요?”
“···나도 너 같은 아들 싫어.”
삐졌네.
입을 씰룩거린 그렉은 이내 은근하게 물었다.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이만하면 화는 풀린 것 같은데. 계속 Go?”
“이름값 해야죠. 제일 고참한테 지랄하면, 나머지 놈들은 알아서 듣겠죠. 그리고 이미 서로 감정 상했는데, 여기서 멈춰봤자, 마음이 풀리겠어요? 그냥 끝까지 가야지.”
“하긴, 원래 미친놈이 되면 스스로는 편한 법이거든. 대충 쟤만 알아서 조지면, 나머지도 네가 먼저 사인을 내든, 말든, 그냥 그러려니 할 거야.”
그렇게 말한 그렉은 우리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투수코치의 눈치를 본 뒤, 조용히 방법을 말해줬다.
“딴 거 말고 하나만 해. 저 나이쯤 되면 자기 몸이 아주 소중한 나이거든. 그러니까···”
진짜 사악하네.
이래서 친구를 가려서 사귀어야 하나보다. 바로 나쁜 물이 드는 거 보면. 원래 난 착한 놈이라고.
이런 위대한 분께서 직접 자신의 철학을 가르치시는데, 새하얀 백지처럼 순수한 내가 물들 수밖에 없지.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때?”
“좋은데요?”
“그치?”
가르쳐주신 대로 할 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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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또 네 마음대로 지랄하면 그땐 그냥 공 안 받을 거니까, 알아서 해.”
참 억울하단 말이야.
누가 보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한 줄 알겠네. 정작 개수 따져보면 고분고분하게 던진 게 더 많을 텐데 말이야.
물론, 이건 내 입장이고.
포수로선 X같겠지. 투수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간 떨려서 살겠어? 자칫하다 놓치면, 그렉 말마따나 다 자기 책임 되는 건데.
‘그러면 그냥 내가 사인 낼 때 받아주던가? 그럼 서로 얼마나 편해?’
놓치면 엿 되는 건 포수지만, 맞으면 엿 되는 건 나다. 그러니 그냥 나 엿 돼보라는 생각으로 받아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 조금의 양보조차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건가? 대체 뭐 때문에? 겨우 그거 하나, 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의견 주고받는 것 때문에 방출이라도 당해?
화가 다 풀린 줄 알았는데, 마운드에 올라가기 전, 굳이 한마디 해서 속을 긁는 스티븐 보그트 때문에 다시금 짜증이 피어올랐다.
‘후우, 집중하자, 이러다가 야마 돌아서 막 던지면, 그거야말로 나한테 손해야. 작전대로만 가자, 작전대로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속으로 염불을 외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고, 마운드에 올라서서 자세를 잡으니, 이제는 아예 손가락질까지 했다.
두 손가락을 자기 눈을 가리켰다가, 나한테 찌르는데. I See You, 뭐 그런 뜻인가?
‘참자, 참아. 자~ 그럼 다음 타자를 볼까?’
조이 갈로.
뭔가 좀 느낌이 쎄~하다.
작년과 재작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메이저에서 뛰었는데, 성적은 처참하다.
마이너 리그 성적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트리플A에서 장타율 .529에 25홈런을 날렸으니 충분히 강력한데.
타율과 출루율이 심각하지.
대략적인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떤 유형인지. 극단적인 풀히터겠지. 컨택도 별로 안 좋을 거고.
‘그런데··· 엄청 크네.’
하지만 파워는 확실할 거다.
나랑 키가 비슷해 보이거든.
몸무게는 더 나가 보이고.
곰 같은 체형이네.
힘이 없을 수가 없지.
‘지금 구위가 아무리 좋아도, 저런 놈한테 한번 걸리면 무조건 넘어간다.’
오랜 경험에서 숙달된 감각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최대한 조심하라고 소리쳤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포수를 보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서로 마음이 같았다.
‘오케이, 계속 그렇게만 하면 나도 얌전히 잘 던질 거니까, 그렇게만 하슈.’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자, 스티븐 보그트는 재차 주의를 보내는데, 거 포수 양반 참 빡빡하네.
‘가자.’
숨을 고르고 공을 던진다.
목표는 바깥쪽 낮은 코스.
좌타자라서 같은 손이니, 크로스파이어 비슷하겠네.
구종은 당연히 포심.
“스트라이크!”
아니나 다를까, 거친 스윙이 나왔다. 눈 감고 휘둘렀나?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그런데···
‘와우.’
바람이 불어온다.
타석에서 18.44미터가 떨어져 있는데, 스윙 한 번마 앞머리가 찰랑거린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타자, 조이 갈로는 딱 예상대로였다. 선구안은 별로인 것 같은데, 파워는 진짜 끝내주네. 뭐 저런 놈이 있어?
‘어설프게 가면, 홈런이야. 조심하자.’
저런 놈이 타석에 있으니.
왠지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구위 약했을 때 말이야.
얻어걸리는 순간 넘어가니, 전전긍긍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저런 놈들 조지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방법이야 여러 개가 있지.
‘저쪽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좋아, 일단은 따라가지.’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인진 알겠네.
이번에도 순순히 수락하자, 이제야 표정이 풀렸다.
“볼!”
“스트라이크!”
“볼!”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공을 던졌다. 한 구, 한 구. 신중하게 박아 넣으며 서서히 카운트를 잡았고. 척척 말을 잘 듣는 내 모습에 스티븐 보그트는 그제야 흡족한 모습이다.
자기 엄포가 이제야 통했다는 생각이겠지.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쫄 리가 있나. 뭔래 투수가 갑이라고. 투수는 왕, 포수는 거지, 몰라?
‘바깥쪽 슬라이더··· 빠지게 던져라?’
2-2. 중요한 카운트에서 나온 사인이다. 아직 카운트가 살짝 여유로우니, 침착하게 가자는 건데.
‘그쪽 말 열심히 들었으니까, 하나쯤은 양보해줘.’
나는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서로 오고가는 게 있어야지.
왜 당신만 챙기려고 그래.
사인을 보냈는데, 만약 그가 받아들인다면, 기 싸움은 깔끔하게 접을 생각이었다. 서로 대화의 창구가 트인다는 거니까.
허나 그는 거절했다.
스티븐 보그트가 재차 사인을 보내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융통성 같은 건 없구만. 마음에 들어. 그래야 나도 죄책감이 없지.
‘가자.’
길게 숨을 뱉으며, 포수를 봤다. 최대한 무해한 표정으로. 아주 선량하게. 당신의 말을 무조건 들을 거라는 것처럼.
그렉이 해준 조언이다.
스텝 원 일단 포수를 안심시킨다. 긴장하지 않도록.
스텝 투.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올려, 손안에 모두 담는다.
스텝 쓰리. 그렇게 모은 힘을 평소와 같은 자연스런 투구폼으로 영혼까지 발산한다.
스텝 포. 가만히 지켜본다.
“스트라이크 아웃!”
“씁-”
하이 패스트볼에 타자의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쟤도 아마 내가 한 구 빼겠거니 생각했겠지. 누가 봐도 승부에 조심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눈에 들어온 패스트볼에 결국 배트를 참지 못했고, 결과는 헛스윙.
일단 이것도 의도대로 됐고.
그 뒤에서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신음을 삼키는 포수 역시 계획대로다.
‘87마일. 현재까지 최고구속 찍었네. 88마일 찍는 줄 알았더니. 아직은 힘든가?’
최선을 다해서 던진 전력투구. 그걸 아무런 준비 없이, 사실상 맨손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받았다.
손바닥이 아주 저릿저릿할 거야. 그렉이 가르쳐준 방법은 바로 이거다. 포수를 안심시키고,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전력으로 포심을 박아 넣으라고.
나이들수록 제몸이 소중한 걸 잘 알기에, 아주 직방일 거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난 서클이 좋은 것 같은데, 그쪽은 어떠슈?’
다음 타자를 상대로 먼저 사인을 내니, 스티븐 보그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사실상 기 싸움은 끝났다.
역시 사람은 고통을 느껴야, 생각이 트이는 법이라니까.
“스트라이크!”
이봐, 서로 얼마나 좋아?
이제 배터리 간의 마음도 서로 일치했으니, 남은 건 다시 평소처럼 타자들을 조지는 것뿐. 그리고 그건-
“스트라이크 아웃!”
내가 참 잘하는 일이지.
이제는 집중력을 갉아먹는 다른 일도 없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공을 던졌고. 그건 곧 결과로 이어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3이닝 7삼진. 무안타 무실점 무볼넷.
오늘 경기도 주인공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