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44화 (44/316)

44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혹시나 못 일어날까봐, 휴대폰 볼륨을 제한 이상까지 높여주는 어플까지 다운받아놨더니. 기차화통 수준이네.

“···살기 좋아졌네. 성공했다, 고유석.”

스프링 트레이닝동안 배정해준 숙소에서 지낸지, 이제 열흘, 아니 11일째인데도 항상 신기하다.

좁은 골방 안에 통조림처럼 갇혀서 낑낑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고급호텔 부럽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애슬레틱스와 계약하기 위해서 처음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사기꾼 같던 에이전트가 그래도 좋은 호텔방을 잡아줬었다.

하룻밤에 30만원이라던가?

거기도 비싼값 하는 곳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그때 머물렀던 호텔방보다도 지금 이 임시숙소가 더 나았다. 덩치에 맞는 킹사이즈 침대도 좋고.

“후우···”

감상에서 빠져나온 뒤, 곧바로 몸 구석구석을 씻었다.

혹시라도 때 껴서 부정 타면 안 되지. 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감사합니다.”

꽃단장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향하니, 거나하게 뷔페가 차려져 있다. 메이저리거의 특권이지.

마이너리거들도 식사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대충 나눠주는 정도니까.

이렇게 양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은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거나, 그와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메이저 스프링 캠프에 초청되거나. 둘 중 하나다.

‘오늘은 빵이 좀 많네. 밥도 보이고.’

오늘 시범경기가 있는 만큼 평소보다 탄수화물이 제법 많았다. 운동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려면 탄수화물이 필요하니까.

메이저리그의 세심함이 드러난 식사였지만, 바로 먹는 건 아니다. 먼저 검수를 받아야지.

“어떻게 먹을까요? 평소 식단대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쫄래쫄래 달려가서 묻듯이, 언제 온 건지 매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대니얼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으음··· 어느 정도 이닝을 던지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죠?”

“정확하게는 모르고, 5회 이후에 등판한다는 것만 들었어요. 아마 투구수로 끊을 텐데, 첫 경기니까 한 30~40구 안쪽으로 끊겠죠.”

18이닝이던가? 브라이언의 협상으로 구단에서 시범경기 동안 나한테 보장한 이닝이.

약속을 지키려면 경기마다 긴 이닝을 던지게 해줘야겠지만, 시작부터 그러지는 않을 거다.

이제 첫 경기니, 적당하게 컨디션을 보는 정도로 투구수를 제한하겠지. 그걸 말해주자, 대니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단대로 섭취하되, 탄수화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섭취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그가 하나하나씩 집어준 대로 식사를 집으니, 접시는 금방 가득 찼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먹음직스럽네.

“수면시간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경기가 있으니까, 평소보다 45분 더 잤어요.”

“다행이군요. 컨디션은 어떤 것 같아요? 멍하다거나, 두통이 있다거나, 피곤하다거나.”

“평범해요. 특별히 아픈 곳이나 뻐근한 곳도 없고. 그냥저냥 적당한 수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대니얼은 마치 취조하듯 샅샅이 내 컨디션을 캐물었고, 성실히 답변해주니,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미소 지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 보통 때면 바로 몸을 풀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경기가 있으니까. 버스 타야지. 원정 경기거든.

“고맙다, 커트 앵글. 네 덕분에 내가 인연도 없는 에이스 유니폼 입고 컵스를 만나러 가네.”

버스 앞에서 만난 그렉은 묘하게 신이 나 보였다. 인스트럭터, 특별 초청강사라고는 해도, 일단은 에이스와 계약한 신분이라, 그도 에이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더럽게 안 어울린다.

본인도 그걸 잘 아는 듯 회색과 녹색으로 얼룩진 유니폼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다.

“거참 엄청나게 황송하네요.”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참 대단한 일을 저질렀구나 싶어서 그렇게 말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뒷차에 탑승했다.

정식 코치가 아닌지라, 선수단 버스에는 못 타거든.

‘이야. 때깔부터 곱더니, 안쪽은 더 죽여주네. 무슨 비행기 비즈니스석도 아니고.’

그렉을 보낸 뒤, 올라탄 버스 안은 대단했다.

감히 락하운즈의 고물똥차와 비교하는 게 죄송스러울 만큼 호화스러웠으니까.

아무리 오클랜드가 돈 없는 거지 구단 소리를 들어도, 메이저리그 구단이기는 한가보네.

‘어디보자··· 내 자리가 어디더라.’

좌석이 텅텅 비어 있으니, 아무데나 앉아도 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선수마다 좌석이 정해져 있으니까.

모든 선수가 탑승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있고, 짬밥 별로 대우해주는 것도 있다.

당장 오른쪽 창가에 붙은 1인용 좌석 같은 경우는 하나 같이 베테랑이나, 프랜차이즈 스타급 선수들의 이름이 붙어 있으니까.

구단에서 제법 대우해주니, 혹시나 나한테도 한 자리 편하게 배정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택도 없네. 뭐, 대우는 라커룸 하나 혼자 쓰는 거에 만족하자고.

‘라울 알칸타라? 돌고 돌아 락하운즈네.’

내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옆자리를 확인하니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라울 알칸타라. 얘도 선발투수 테스트 후보 중 하나다. 작년에 확장 로스터로 데뷔해서 열심히 털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높으니까.

문제는···

“쓰읍-”

“어차피 가까우니까, 그냥 앉아.”

“···그래.”

얘도 한 덩치 한다는 거다.

키는 나보다 좀 작은 6.3피튼가 그럴 거고, 대충 봐서 몸무게는 나보다 더 나가겠네.

비행기 비즈니스석처럼 좌석이 큼직한 덕분에 살 부대낄 걱정은 없겠지만. 덩치 큰 놈 둘이서 같이 가니, 꽤나 숨막힐 것 같았다.

굳이 이렇게 붙여놓은 구단의 의도가 보이기도 하고.

‘알만하네, 경쟁의식을 가져라?’

선발 놓고 다툴 놈들이 서로 경쟁의식을 가지길 바라는 거겠지.

그걸 통해서 더욱더 발전하길 바랄 거고.

“···Suck, 커튼 좀 쳐줘.”

그래서인지 조금 갑갑한 분위기 속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경쟁자끼리 서로 딱 붙어서 가는 게 더럽게 어색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원정지가 가깝다는 것이다.

첫 시범경기 상대, 컵스의 홈구장인 슬로언 파크는 호호캄과 마찬가지로 메사에 있으니까.

저번에 대니얼이 말해준 것처럼 호호캄 스타디움 자체가 예전에는 컵스의 시범경기 홈이었는데.

새로운 구장인 슬로언 파크를 지으면서 거기로 갔다고 하더라고. 멀리 옮기지 않은 거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10분 이동했나? 이 정도면 산책 삼아서 걸어서 가도 될 것 같다.

뭐, 그래도 어색하긴 하지만, 메이저 버스의 위용을 맛봤으니까, 좋게 생각해야지.

“작년 10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과연 이번 시즌까지 그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 가운데···”

버스에서 내리자, 라울의 부탁으로 커튼을 친 탓에 미처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 어디를 가도 컵스 팬이 있다는 말이 있다. 전국구 인기팀이라는 것과 그만큼 팬덤의 충성도가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데.

그걸 증명하듯 호호캄 근처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지만, 아예 비교가 안 됐다.

‘작년에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했으니···.’

그런 대단한 충성도에, 바로 몇 달 전 108년만의 우승이라는 빅 이벤트까지 있었으니.

겨우 시범경기인데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컵스 팬들은 슬로언 파크의 주변에서 휘황찬란하게 유니폼을 흩날렸다.

기자나 리포터도 쫙 깔렸고.

“Go! Cubs, Go!”

“Go! Cubs, Go!”

심지어 고 컵스를 외치는 사람들도 보이네.

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론 궁금했다.

저런 사람들 앞에서, 저 양반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팀을 때려잡으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정반대로 아무런 희망도 없고, 애정마저 식어가는 우리 쪽 팬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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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이이익!”

“올해도 우승 가자!”

“108년 동안 못했으니까, 연달아서 가야지!”

경기 전부터 신이 나 있던 컵스 팬들은 경기가 시작되고, 더욱더 활짝 웃었다.

1회가 무난하게 지나가고, 2회 말, 그들의 공격이 찾아오자, 타자들이 불을 내뿜기 시작했으니까.

‘탈탈 털리네.’

에이스 선발투수는 제시 한.

선발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선수기에 경쟁에서 먼저 우위를 점하길 원했을 텐데. 그 바램은 산산조각났다.

2회가 시작되고, 좀 흔들리더니, 이후 탈탈 털렸으니까.

시범경기에서 좀 얻어맞는 다고 큰일 아는 건 아니다. 사이 영급 투수들도 시범경기에선 5점대 ERA를 찍기도 하니까.

눈도장 찍을 첫 번째 기회를 날렸으니, 제시 한 본인은 씁쓸하겠지만 말이야.

“으음···”

탈탈 털리는 제시 한의 모습을 보며,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Go, 불펜으로 가봐.”

“넵.”

5회 이후에 등판한다고 해서,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준비하게 됐네.

날 불펜으로 보낸 투수코치는 이후 마운드로 올라갔다. 강판이구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불펜으로 들어가자, 먼저 가 있던 라울 알칸타라와 시몬 카스트로와 흘끔 쳐다봤다.

“저쪽 자리에 가서, 준비하면 돼. 몸은 다 풀렸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빵빵합니다.”

“그래, 천천히 던지면서, 어깨 풀어.”

이미 상황을 전달 받은 불펜코치는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나를 인도했고. 자리에 가니, 익숙한 불펜포수가 슬쩍 손을 흔들었다.

필립 폴,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공을 받아줬던 양반인데, 재작년까지 현역이라서 그런지, 포구가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포수로 따지면, 앤디 파즈나, 보 테일러보다 훨씬 낫지.

“오늘도 팡팡 꽂아 넣어 봐. 대신 좀 살살 해줘, 네 공은 받을 때마다 너무 아프다고.”

저렇게 립서비스 잘하고.

정확하게 글러브로만 딱딱 잡는데, 아플 리가 있나.

그래도 기분은 좋아서,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공을 던졌다.

평소처럼 서클 체인지업으로 시작하는 불펜피칭. 예전과 다르게 패스트볼이 상당히 좋아졌지만, 이미 루틴이 됐기에 어쩔 수 없다.

“휘유~ 오늘도 서클 죽여주네! 그것도 한번 던져봐, 비장의 무기.”

“예예, 갑니다.”

비장의 무기라고 하니 거창하지만, 별건 아니고, 그냥 지금까지 열심히 커맨드 잡았던 낙폭이 강한 서클이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쪽이 메인이었는데, 조커카드가 되버렸네.

‘얼추 커맨드가 잡혀.’

그렉이 괜히 호언장담한 게 아닌 건지, 두 개를 동시에 쓰더라도 제법 커맨드가 잡혔다.

원래는 계속 안쪽으로 박혔는데, 최대한 궤적을 예측하며 집어넣으니, 얼추 손에 잡힌다.

‘하지만 아직 실전감은 아니야. 여전히 너무 몰려. 그리고··· 오늘은 제대로 해야 하니, 최대한의 전력으로 가는 게 낫겠지.’

그런 의미에서 커브도 탈락. 쓰리핑거는 제구도 잘 되고, 패스트볼이 좋아지면서, 위력이 올라가서 럭키카드로 쓸만하다.

그렇게 하나하나 박아 넣으며, 천천히 머릿속으로 계획을 잡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계획이 안 잡혀. 시범경기라 교체를 막 할 거고. 타자들 타격감도 제멋대로겠지.’

또한, 지금 내 실력이 실전에서 얼마나 통할지도 모르니. 경기 계획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오늘은 골치 아프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나이스 샷! 하하, 좌타자 몸쪽으로 박으면 볼만하겠는데?”

찍어 누르자.

작년이라면 모를까, 지금 내가 그 정도는 되는 것 같거든.

“라울, 올라가.”

어깨를 달아 올리는 사이, 먼저 왔던 놈들이 나가고,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시몬이 먼저 나가고, 라울도 나갔으니. 이젠 내 차례라는 거지.

어깨는 이미 충분히 달아 올렸기에, 잠깐 우두커니 서서, 불펜 한쪽에 설치된 티비로 경기 상황을 확인했다.

벌써 4회 말, 앞서 나갔던 라울 알칸타라가 2이닝째 던지고 있는데, 박살났던 제시 한과는 다르게, 녀석은 충분하게 자기어필 했다.

안타를 하나 맞기는 했지만, 2이닝을 깔끔하게 지워버렸으니까. 뭐, 그거야 나랑 관계없고. 중요한 건···

“Go, 준비해. 다음 이닝 등판이야.”

“네.”

내 시간이 왔다는 거지.

‘아마도 제한된 투구수는 30구 전후겠지.’

평소라면 아쉽다 못해, 안 던지느니만 못한 감질나는 투구수겠지만. 뭐, 어때, 짧은 시간 동안 충분한 임팩트를 보이면 되지.

‘처음부터 풀파워로 간다.’

체력 조절할 필요도 없으니.

그 30구 안에 모든 걸 쏟아 부으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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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말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투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Go··· You-Suck. 놀라지 마십시오, 시청자 여러분. 공식적으로 등록된 이름이니까요.

시범경기라고 해도, 어쨌든 메이저리그 경기기에, 당연히 중계방송은 있다.

캐스터와 해설자로 이루어진 중계진 역시 있었고.

새로운 이닝을 맞이하며 새롭게 올라온 투수를 소개하던 그들은 지루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일부러 이름을 강조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만 독특한 이름과는 달리, 작년 더블A에서 놀라운 성적을 올렸죠. 175개의 삼진을 잡는 동안 단 17개의 볼넷을 내줬습니다.

-네, 그런 센세이셔널한 활약 덕분에 애슬레틱스 선발진의 새로운 활력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마이너인 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성적을 가볍게 흘리자, 이름에 피식피식 웃던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화면에 집중했고.

화면 속, 곰처럼 커다랗고 단단한 체격으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그런 시청자들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워우, 동양인인데, 체격이 엄청나네.”

“삼진 많고 볼넷 적은 걸 보면, 파워피처인가? 혹시 100마일이라도 던지는 거 아니야?”

“에이스 망하는 것 같더니, 저런 투수가 하나 나오기는 하네.”

신체조건이 우수하다 못해 완벽한 투수였기에, 몇몇은 필시 대단한 파이어볼러라고 예측했다. 삼진도 많은 걸 보면 틀림없겠지.

그렇게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연습피칭마저 끝난 뒤, 본격적인 5회 말이 시작됐다.

-타석에 1번타자 제이슨 헤이워드가 올라왔습니다.

-1회 말 첫 번째 타석에서는 범타를, 2회 말 두 번째 타석에서 볼넷을 기록했습니다.

타석에 올라온 1번타자 제이슨 헤이워드. FA로 막대한 금액을 받고 계약한 주제에, 처참한 타격을 선보였던 선수였기에.

많은 컵스 팬들은 그를 증오하면서도, 이번 시즌부터라도 반등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조금 진지하게 승부를 지켜봤다. 그들은 저 마이너 애송이를 헤이워드가 두들기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까놓고 보니.

-음! 몸쪽으로 깊숙이 찔러 넣었군요. 스트라이크!

-86마일. 구속은 조금 느리죠? 하지만 타자가 헛스윙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력한 무브먼트였습니다.

그 애송이가 상상이상이었다.

몸쪽으로 깔끔하게 박힌 포심. 제대로 날이 선 듯, 정확하게 제구 된 몸쪽 패스트볼은 예상대로 파이어볼러가 맞았다는 착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86마일? 대체 왜?”

“딱 봐도 빠르던데, 구속 잘못 측정된 거 아니야?”

“86마일에 저런 무브먼트가 나온다고? 무슨 매덕스도 아니고···.”

아니, 실제로 파이어볼러가 맞다.

속도가 느릴 뿐이지, 그 강력함은 파이어볼러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니까. 투수의 피칭 역시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았고.

-오, 파울! 이건··· 대단하네요. 서클 체인지업인가요?

-예, 서클 같습니다. 급격한 역회전을 선보이며, 배트를 비껴 같는데. 이런 건 헛칠 수밖에 없죠.

-더블A에서 대단한 성적을 올린 선수인데, 이유가 있었네요.

패스트볼이 느리지만 강력했다면.

뒤이어 던진 서클 체인지업은 그저 완벽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중계를 보던 이들이 식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또한, 그런 서클과 마찬가지로, 이미 제 것으로 만들어버린 승부를 마무리 짓는 것 역시.

-스트라이크 아웃! 제이슨 헤이워드가 세 번 연달아 헛스윙하며 타석에서 물러났습니다. 멋진 하이 패스트볼이군요.

-87마일, 구속도 올라왔네요. Go, 상상이상의 피칭을 보여주면서, 첫 타석부터 삼구삼진을 만들었습니다.

완벽했고 말이다.

흔들린 타자를 찍어 누르듯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으며, 힘차게 던진 하이 패스트볼.

타자의 배트는 볼썽사납게 헛돌았고, 주심의 나직한 삼진콜이 스피커 너머로 새어나왔다. 순식간에 올라간 삼진 하나.

마이너 투수에게 꼴사납게 헛스윙 삼구삼진이나 당하다니,

원래도 아쉬운 놈이었기에 평소라면 불만스럽게 혀를 찼을 컵스 팬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허···”

“저렇게 던지면 솔직히··· 치기 힘들지. 풀컨디션도 아니었을 텐데.”

타자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타자를 욕하는 대신, 투수를 칭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

이미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고유석은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위닝샷은 서클 체인지업이었습니다. 두 타자 연속 삼진!

-우타자 입장에서 좌투수가 저런 공을 던지면 방법이 없죠.

두 번째 타자 역시 삼진.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대타로 들어온 2번타자는 뭔가 보여주기도 전에, 강력한 서클 체인지업에 무릎꿇으며, 타석에서 물러났고.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으로 낮게 걸친 공을 그저 바라만 봤습니다. KKK!

-서클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겠지만, 슬라이더 역시 깔끔했습니다. Go! 강력한 공으로 컵스 타자들을 처리하며, 5회 말을 지워버렸습니다.

마지막 3번타자는 이번 경기 처음 보여준 슬라이더를 멍하니 지켜만 보며, 세 타자 연속 삼진과 루킹삼진의 제물이 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린 5회 말.

타자 세 명이 나란히 삼진을 당할 동안, 소모된 투구수는 겨우 열한 개, 지독하게 짧은 피칭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에이스에 새로운 신성이 떠올랐네요.

이 경기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말이다.

그 짧았던 피칭이 고유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콱 박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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