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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43화 (43/316)

43화

이글이글 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니, 그렉은 대충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야~ 열기가 대단한데? 골수까지 뽑아먹을 기세네.”

그렇게 말하더니 가만히 나를 쳐다봤고.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저 진짜 착한 놈입니다.

가르쳐만 주신다면은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담아 웃었는데, 그는 표정을 와장창 구겼다. 거참 사람 무안하게스리.

“내 말을 생각보다 금방 알아듣는 걸 봐서는, 커트 앵글 너도 얼추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네. 맞지?”

귀신이네.

똥배 나온 동네 아저씨 같아도, 이런 모습을 보면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괜히 타자들 머리 위에서 놀던 사람이 아닌 건지, 정확하게 마음을 꿰뚫어 보네.

어차피 들켰고, 또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 생각해둔 게 있기는 하죠.”

“혹시 서클인가?”

“어···”

진짜 귀신 아니야?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오 매덕스 오오.

“네가 삼진 18개 올린 경기, 그거 봤었거든. 지금이랑 비슷하게 역회전 강한 서클 던지던데. 경기 후반에는 다시 평소처럼 낙폭 위주의 서클로 돌아왔고.”

“네, 그거 맞습니다. 둘 다 제대로 구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욕심도 많네. 솔직히 지금 네 서클··· 타자들 때려잡기 딱 좋을 거야. 그런데 굳이 더 욕심 부릴 이유 있어? 다른 체인지업도 하나 있잖아? 구리기는 해도 패스트볼 위력이 올라가서 그것도 잘 먹힐 텐데.”

“욕심내야죠. 욕심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건데.”

그렉은 다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정답이라는 듯 씨익 웃기도 했고.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나 보네.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 욕심이 없었다면 굳이 미국으로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좋아, 대충 잘 알겠네. 던지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쉬울 거야. 힘만 조금 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원리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응?”

매덕스는 결코 같은 공을 던지지 않는다. 같은 구종 내에서도 수많은 변형을 던지지.

이것만으로 이미 대단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지.

“그렇게 서로 무브먼트가 다른데, 커맨드는 어떻게 잡으시는 거예요?”

그 모든 변종을 일정한 제구력으로 던질 수 있는 커맨드.

내가 그렉 매덕스라는 전설에게 배워야 하는 건 바로 그거였다.

왜냐면···

‘그러고 보니, 안 보여줬었네.’

“커맨드? 낙폭이 강한 서클이 아니라?”

“그건 지금도 가능해요.”

“뭐라고?”

낙폭 있는 서클을 지금도 여전히 던질 수 있거든.

‘간단하잖아, 역회전 강한 건 손가락 마디로 던지고. 낙폭 있는 건, 예전처럼 손가락 끝으로 던지고.’

해보니까 되더라.

되기는 되는데, 두 개를 번갈아서 쓰다 보니, 커맨드가 흔들리는 게 진짜 문제였다.

서로 궤적이 판이하다 보니, 기껏 잡아놓은 영점이 안 맞는 건데. 그래서 일단은 조금 더 위력이 높을, 역회전 강한 서클을 선택했지.

시범경기를 위해서 최대한 준비해야 했기에 낙폭 있는 서클은 일부러 버린 건데, 단호하게 쳐내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둘 다 완벽하게 구사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거든. 그 방법은 모르지만.

‘커맨드 자체가 흔들려서,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근데 그 어려운 걸 해낸 장본인이 지금 내 눈앞에 있잖아?

어떻게든 배워야지. 나중을 위해서라도.

영 못 믿는 눈치라서 직접 보여주자, 그렉은 허탈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커트 앵글 너 혹시 천재 아니야? 이미 둘로 나눠서 던질 줄 안다고? 기껏 멋지게 퍼포먼스까지 준비했더니··· 이미 할 줄 알면 내가 왜 필요해? 그냥 너 알아서 던져.”

“천재는 아니고, 그냥 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무튼 커맨드 어떻게 잡으셨어요? 둘 다 쓰려고 하면 계속 흔들리던데.”

스스로 이상한 놈을 자청하면서 간곡하게 물어보니, 그렉은 그제야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튼 뭔지는 알겠네. 이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괜히 뻘짓 했잖아. 커맨드 잡는 거? 별거 아니야.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금방 잡힐걸? 첫 단계 건너뛰었으니까, 더 쉽겠네.”

아주 자신만만한 말이었지만, 그걸 뱉은 사람이 그렉 매덕스라서 그런지,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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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 강력한 피칭으로 스프링 캠프를 휘어잡다!>

<‘그는 이번 시즌 최고의 기대주’ 코치들, 고유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아···>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되고, 고유석에 대한 각종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호호캄 스타디움에 몰려들었던 기자들의 작품인데, 아직 정식 시범경기가 시작되지 않은 것치고는 꽤나 열광적인 분위기였지만.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바글거리는 시기지만, 박기자가 보기에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많은데, 투수가 적어.’

문제는 바로 투수가 단 두 명이라는 것. 그마저도 한 명은 마무리 투수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타자와 투수가 가지는 분량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게 이유였다.

‘경기 중계방송에서 타자가 나오는 시간은 많지 않지. 기껏해야 수비시간까지 포함해도 10분 정도?’

그에 반해 투수는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부터 쭉 카메라에 담기고. 특히나 긴 이닝을 던지는 선발투수의 분량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결국 공놀이에서는 공을 오래 들고 있는 놈이 최고니까.’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많은데, 투수는 단 두 명. 그나마도 선발투수는 한 명인데, 그 한 명인 류영진은 작년 부상으로 허덕였다.

올해 열리는 WBC를 불참하기로 결정하며, 몸을 만들더니, 무사히 캠프에도 합류했지만. 과연 정말로 재활을 무사히 마쳤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렇기에 중계권을 가진 방송국과 기자, 언론은 똑같은 불안감을 공유했다.

그토록 소중한 유일한 선발투수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유석이 등장했어. 마치 혜성처럼.’

그래, 혜성이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엄청난 불빛을 내뿜으며 등장했으니까.

젊고 싱싱한,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굉장히 가까운 한국인 선발투수가.

이런 타이틀은 류영진으로부터 시작된 불안을 씻어내기 충분했다.

‘단순히 숨 돌리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가능성이 훨씬 컸지.’

포수 글러브를 때리던 강력하고 묵직했던 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마저 있었다.

계속 듣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마지막까지 볼 끝이 살아서 날아갔던 공의 궤적은 영화 속 명장면처럼 머릿속에 남았고.

한 가지 애석한 게 있다면, 그 피칭을 목격한 게 박기자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

‘죄다 난리가 났네. 하긴, 그래도 야구기자들이니, 아예 옹이눈은 아니겠지.’

보물은 모두가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기에 보물이다.

첫날 피칭을 본 순간부터 모두가 고유석의 가치를 알아챘고, 그의 빅리그 입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희소성이 사라진 것이니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없네, 아무도. 멍청한 놈들··· 조금 더 넓게 봐야지.’

박기자 자신만이 알고 있는 희귀하고 값진 게 하나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 파급력은···

-박기자, 기사는 아직이야? 죄다 고유석 때문에 난린데, 우리만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몰라?

“예예, 지금 막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보세요. 퇴고랑 검수까지 쫙했으니, 최대한 빨리 올리시고요.”

-오~ 좋은 소스라도 있나봐? 아주 자신만만한데? 어디 보자··· 어?

“기다린 보람 있죠?”

<특별 초청강사로 돌아온 매덕스! 그 이유는 고유석?>

천지를 뒤흔들겠지.

약간 조언을 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내 붙어 다닌 걸 확인했다.

정식으로 초빙한 인스트럭터라는 것도 직원 하나를 살살 꽤서 알아냈고.

철저한 사실 확인 끝에 작성을 마친 기사였기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의 시작을 알리는 여러 가지 기사들 중, 이게 최고이리라는 것을.

‘이걸로 기대치는 만땅을 찍었고. 이제 남은 건 진짜로 메이저에서도 통하느냐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던 박기자는 이내 피식 웃었다.

‘시범경기가 기대되는군. 그렉 매덕스에게 뭘 배울지도 궁금하고.’

이토록 순수하게 한 투수의 투구가 기다려지는 건 꽤 오래간만의 일이었으니까.

####

야수조까지 합류하니, 라커룸은 완전히 시장바닥이었다.

투수, 야수, 포수 모두 합쳐서 총원 40명이나 되는 선수들에, 코치들까지 들락거리니.

그리 좁은 곳도 아닌데도, 서로 살이 부대낄 정도로 사람이 바글거리네.

“너 폼은 좀 올라왔어?”

“아직, 겨울 동안 찐 살 빼느라 바빴거든. 경기 좀 뛰다보면 올라오겠지.”

“넌 식습관 좀 고쳐라. 맥주만 조금 덜 마셔도 10파운드는 덜 찔걸?”

“넌 벌크업이나 하고 그런 소리 해. 어째 더 말라서 왔네. 그래가지고 홈런 좀 치겠냐?”

그런 수많은 선수들은 보통 둘로 나뉘었다. 저~기 반대쪽 라커룸에서 농담이나 따먹는 양반들처럼 여유만만이거나.

“후우···.”

“···”

벌써 한바탕 뛰고 온 건지, 땀내를 풍기는 놈들처럼 바짝 긴장하고 있거나.

둘 중에서 프로선수를 지목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후자를 고를 거다. 성실하게 훈련을 하는 것 같으니까.

웃긴 건 실력은 전자가 더 좋다는 거고.

‘주전이라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 거지. 자리 뺏길 걱정이 없으니까.’

무조건 25인 로스터에 들어갈 선수들이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당장의 페이스보다는 천천히 긴 시즌을 준비하는 셈이지.

그러니, 오히려 시즌을 더 잘 준비하고 있는 건 저런 농담 따먹는 양반들이다.

‘지금 페이스를 올리면 도리어 풀시즌을 치르기가 어려워지니까.’

하지만 마이너리거들은 아니다. 어떻게든 구단의 눈에 들기 위해, 메이저에서도 자신이 통한다는 걸 시범경기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조급한 마음으로 페이스를 빠르게 올린다.

그래서인지 서로 대화도 주고받고, 농담도 나누는 주전급들에 비해, 초청된 마이너리거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저 땀을 흘렸다.

‘그래서 그런가, 어떻게 한 놈도 말 걸어주는 놈이 없네.’

다니엘 고셋, 라울 알칸타라, 맷 채프먼 등등.

작년에 락하운즈에서 같이 뛰었던 놈들이 제법 많은데,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쟤는 저렇게 진지한 놈이 락하운즈에선 왜 그랬나 몰라.’

특히나 나처럼 붕괴된 선발진의 빈자리를 노리는 다니엘 고셋 같은 경우는 내가 알던 약간 나사 빠진 모습 대신 잘 벼려진 칼 같은 모습으로 훈련장을 배회했다.

그래서 섭섭하냐고? 그럴 리가. 애초에 나도 먼저 말 안 걸잖아? 일단은 경쟁자니까.

이런 분위기가 당연한 거지.

누누이 말하지만 서로 피 끓는 동료애나 전우애 같은 건 빅리그에 확실히 뿌리박은 다음에 찾아도 안 늦는다.

“오늘은 좀 늦었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한참 막혔어요. 무슨 교통체증도 아니고···”

“원래 스프링 트레이닝 때는 그런 법이지. 오늘도 한번 감을 잡아 보자고. 대충 원리는 알겠지?”

“무슨 말 했는지는 알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라. 거참 대단한 가르침이십니다. 너무 대단해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누가 그림을 그리래? 궤적을 그리라고 했지.”

참고로 나는 그런 두 부류에서 적당히 중간 정도다.

기회를 바라는 마이너리거들이 보기에는 내가 매덕스랑 신선놀음 하는 것처럼 보일 거고.

반대로 주전들 눈에는 이리저리 구르고 훈련하는 모습이 다른 놈들처럼 열심히 빨빨거리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입지도 딱 그 정도지.

“오! 흠흠, 오늘도 좋군. 구속이 더 오른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파앙!하고 울리는 묵직한 소리에 불펜을 돌아다니던 투수코치가 내 앞에서 멈춘 뒤 감탄했다. 그 모습이 부끄러웠던 건지, 아닌 척 헛기침하기도 했고.

“네, 슬슬 페이스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매덕스 씨와 커맨드를 잡고 있다고 들었는데, 컨트롤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뇨, 새로 하나 배우는 구종의 커맨드를 잡는 겁니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군.”

보시다시피, 나를 향한 관심도는 높다. 불펜피칭으로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까.

단순히 코치가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라커룸 배정에서 드러나듯, 구단 차원에서도 제법 눈여겨보는 거겠지.

선발투수가 부족한 에이스고, 아는 그 경쟁의 탑독이니, 준 레귤러급으로 대우해주는 건데. 사실상 빅리그의 문 앞에 선 셈이었지만. 문 앞에 섰을 뿐, 완전히 문지방을 넘어선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펜피칭에 불과하니까.’

스터프의 상승으로 기존보다 기대치가 올라갔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은 남아 있었다.

과연 그 놀라운 피칭이 프로 선수, 그것도 메이저리거를 상대로도 통하느냐는 것.

“Go,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피칭하지 말고, 대기하면서 컨디션 관리해.”

다시 걸어가지 않고, 잠깐 동안 멈춰 서서 피칭을 지켜보던 투수코치가 슬쩍 말했다.

왜 갑자기 커맨드와 컨트롤을 물어보나 했더니, 컨디션을 확인한 거였구만.

“혹시···”

“내일 등판이야. 아마도··· 5이닝쯤 올라가겠네. 긴장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딱 좋으니까.”

코치는 씨익 웃으며 오른쪽 어깨를 두들긴 뒤 다시 걸어갔고, 그것으로 내일, 캑터스 리그 개막전 등판이 결정됐다.

‘증명의 시간이 왔구만.’

늘어졌던 몸에 긴장이 감돌았지만, 한편으론 흥분감도 감돌았다.

‘어디, 잘나신 메이저리거님들 맛이나 보자고. 겸사겸사 서클 커맨드도 중간점검 해보고.’

솔직하게 말하면.

증명이고 나발이고, 다 조져버릴 자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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