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신성등장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시선이 나한테 집중됐다.
‘아까 전에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던데, 이제는 아니네.’
중간에 마주쳤던 코치-아마도 투수코치-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캠프에 들어온 선수가 코치나 감독을 찾아오지도 않고서, 다짜고짜 몸 풀더니, 피칭을 시작했으니까.
코치로서의 자신의 권위가 훼손된 기분이겠지. 제 아무리 위대한 그렉 매덕스라고 해도 정식코치가 아니라, 인스트럭터인데, 그에게 밀린 셈이니까.
충분히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명백한 내 실수지. 매덕스에게 홀려서 앞일 생각 안 하고 급발진한 거니 말이야.
‘시작부터 찍히는 줄 알고 불안했는데, 걱정 안해도 되겠네.’
그래서 중간에 만나, 함께 불펜에 들어왔을 때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불쾌함이 다른 감정들에게 밀려서 말끔하게 사라졌다.
경악, 감탄, 뭐 기타등등.
그의 얼굴은 그런 감정들로 가득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도 저었고.
“으음··· 듣던 것과 다르게, 무브먼트가 대단하군. 스터프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뭐, 겨울 동안 열심히 준비했죠.”
“···그래, 그런 것 같군.”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도 느껴지고.
아마 분석팀이나 스카우트팀을 향한 감정이겠지.
기존의 정보와 전혀 다른 투수가 나타났으니, 속으로 그들을 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잘 알겠군.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으니, 피칭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약간은 의심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매덕스씨를 번갈아서 쳐다보는 걸 보면, 스승과 제자라거나 뭐 그런 거로 생각하는 건가? 내 발전을 그가 도운 거라고. 약간 선후관계가 다르지만,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뭐, 나도 충분해. 영상이 가짜가 아닌지 솔직히 조금 의심했거든. 너무 달라졌잖아?”
“직접 보면 탄로 날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아무튼 그래서 교수님 감상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아. 최소한의 기본기는 확실하게 갖췄군.”
미스터 매덕스의 얼굴에 씌워진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아, 이제부터 그 비슷한 관계가 될 테니까.
“전력투구지?”
“아뇨, 적당히 조절했어요.”
“Mr. Go의 말처럼 조절하고 있습니다. 시즌 시작에 맞춰서 컨디션을 올리는 중이죠.”
허세가 아니라 진짜다.
몸이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아직 100%는 아니거든.
대니얼도 그렇게 말하잖아?
이미 놀라운 수준이겠지만. 감각까지 확실하게 올라오면, 지금보다 출력은 더 나올 거다.
당장 아까 전에 패스트볼 구속만 봐도 그렇지. 82마일로, 풀컨디션보다는 느렸거든.
코치는 왜 구속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고 놀라기도 했고.
“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매덕스께서는 그저 젊은 선수의 허세라고 받아들인 건지, 그다지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뭐, 어쨌든 커트라인을 통과했으니, 가르칠 맛은 있겠네. 오늘은 첫날이니, 쉬고, 코칭은 내일부터 시작하자고.”
“네,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하진 말고. 내가 전문 코치도 아닌데, 그냥 씨부리는 거 알아서 듣고 배워.”
우리 대화를 훔쳐 들은 건지, 나를 곁눈질하던 투수들의 시선이 조금 더 강해졌다.
‘처음부터 별로 반기지는 않았었지. 거기다 매덕스의 개인지도까지 걸렸으니, 질투심이 들기도 하겠네.’
투수진이 부실한 애슬레틱스기에,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 다 갈아치워질 수 있다.
그러니 이 불펜 안의 투수들은 모두가 서로 경쟁자인 셈이지. 특히나 대놓고 자리가 비어버린 선발 로테이션을 노리는 후보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소니 그레이는 안 보이고. 켄달 그레이브맨은 관심 없고. 션 마네아는 흥미 정도인가?’
그나마 자리가 확고부동한 이 셋을 제외하면 죄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봤다.
마치 넌 뭐길래 이런 거물이 직접 지도해주는 거냐고 묻는 것 같은데.
‘꼬우면 너네도 유능한 에이전트 통해서 구단이랑 쇼부보던가.’
뭐 어쩌라고? 노려보면 내가 쫄아서 도망칠 줄 알았나?
저 양반들은 착각하고 있다.
작년 메이저에서 본 적이 없는 놈이니, 나를 그저 그런 마이너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여.
자기가 노려보면 겁먹고 깨갱하면서 꼬리 내릴 애송이 말이야.
‘뭐,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지. 원래대로면 난 언더독이니까. 원래대로라면 말이야.’
마이너에서 엄청난 성적을 올려, 팬들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고, 그런 팬들을 달래야 하는 구단의 인정도 받았다고 해도.
그래봤자 마이너 성적이고.
정식적으로 25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마이너 애송이가 아닌 것도 아니지. 구단에서 어떤 대우를 해주든지 간에, 25개밖에 없는 빅리그 티켓 경쟁에서도 결국 언더독일 수밖에 없고.
허나 이 모든 가정은, 내 구위, 스터프가 터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구위가 좋아진 순간부터 배당은 이미 달라졌다 이거야.’
구단에서 고유석이라는 투수를 볼 때 가장 큰 단점은 역시나 스터프다.
저조하다 못해 수준이하조차 안 되는 스터프는 좋은 성적조차 플루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지.
그 단점이 채워졌다면? 아니, 단점이 사라지다 못해 아예 강력한 장점이 되어버렸다면?
스터프 외에 모든 것을 갖춘 선발투수를 애슬레틱스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코치가 보고 올리면, 프런트 반응 볼만하겠네.’
간단하다.
부족했던 스터프마저 채워진 순간. 나는 이미 이 경쟁의 탑독이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런트가 그걸 공인해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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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진 훈련 보고서입니다. 분석팀과 스카우트팀 검토는 이미 마쳤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되면, 사무실은 종이의 산을 이룬다. 선수별 보고서가 올라오니까.
작년과 비교해서 어떤지, 몸은 얼마나 만들어졌는지, 어떤 점은 퇴보했고, 어떤 점이 발전했는지. 선수의 심리 상태는 어떤지.
사소한 것까지 모두 분석팀과 스카우트팀을 거쳐서 분석되고, 평가되어 올라온다.
‘투수, 포수만 모였는데도 빌딩이네, 빌딩이야.’
야수조 합류를 하루 남겨둔 오늘, 지난 4일간 투수들의 평가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그래도 당장은 그나마 낫다.
투수와 포수만 모였으니까.
내일 야수들까지 합류하면 지금의 두 배, 아니, 2.5배는 되겠지.
물론 양만 덜하다뿐이지, 팀의 중심인 투수들이기에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션 마네아는 나쁘지 않고. 그레이브맨은 몸이 덜 올라왔군. 소니는···’
특히 선발투수들의 컨디션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기에 주의 깊게 살펴 본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이었지만, 나오는 건 그저 한숨이었다.
그나마 오클랜드에서 주전 선발이라고 할 만한 세 명 중 션 마네아와 켄달 그레이브맨은 그럭저럭 준비된 것 같지만. 팬들의 사랑과 기대, 끄리고 아쉬움까지 듬뿍 받는 소니 그레이가 이번에도 문제였다.
‘이제 팔꿈치는 멀쩡한데, 정작 다른 쪽이 문제구만.’
작년부터 마가 낀 건지, 부상과 부진을 달고 살며, 커리어로우를 기록했던 소니 그레이였는데, 올해는 아예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커맨드에서 문제를 보인다라··· 단순히 폼이 덜 올라온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주전 선수들의 경우 오히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마이너 선수보다 못한 몸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시범경기가 아니라, 정규시즌을 보고 몸을 만드니까.
하지만 소니 그레이는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심각하게 폼이 떨어졌다.
어쩌면 또 다른 부상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고.
‘어느 쪽이든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군.’
2년 연속 처참하게 처박은 성적에 실망한 팬들을 달래려면 잘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가장 즉효약일 에이스의 컨디션이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으니···
‘차선으로 유망주라도 잘 키운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프랭키 몬타스, 자렐 코튼. 이 둘도 몸이 덜 올라왔어. 다니엘 고셋은 그나마 조금 괜찮아 보이지만. 역시 부족하지’
남은 건 하나.
현재 팜의 선발투수들 중 가장 팬들에게 가깝고, 그들의 기대를 받는 선수뿐이다.
‘자,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오프시즌을 보냈기에 무려 그렉 매덕스를 홀리셨나?’
스스로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마지막 자료를 집어든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이었지만,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가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인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허?”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었을 때. 얼굴은 마치 심각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종합평가 – A+(70)>
종합평가는 구종, 커맨드, 컨트롤, 스터프, 모두 통틀어서 매긴 점수다. 당연히 기준은 20-80스케일이고.
그중에서 유망주들은 종합평가 점수에 따라 A~C까지의 등급으로 나뉜다.
A등급은 잠재적인 슈퍼스타.
B등급은 향후 올스타급.
C등급은 일반적인 메이저리거를 뜻하는데. 그 이하는 없다. 그 밑으로는 빅리그 가능성 자체가 없는 선수들이니, 평가할 가치가 없지.
만약 타자가 A등급을 받는다면. 언젠가 MVP를 노려볼만한 선수라는 걸 의미했다.
기대한 만큼 성장한다면, 그 정도 수준에 이른다는 거지.
투수의 경우는···
“잠재적인 사이 영 위너. 이게 진짜라고?”
작년 내부평가에서 A등급을 받은 선수는 팜을 통틀어 프랭클린 바레토 단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A-였고.
원래 팜의 투수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건 작년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의 주인공은 AJ퍽이다. B+를 받았었지.
이제는 아니지만.
미래의 사이 영 위너.
그것을 뜻하는 등급을 본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은 고된 업무로 축 처졌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스터프··· 진짜로 올라갔네. 아니, 아주 제대로 터졌어.’
거의 모든 부문에서 작년보다 평가가 상향됐다.
다만 스프링 트레이닝 초기 평가이기에 아직은 그리 정확도가 높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뭐가 많이 달라졌다는 거겠지.
실제로 코치들을 통해 스터프가 대단해졌다는 건 수시로 전해 들었고.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30점에서 70점이라.’
급격하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수준의 성장. 놀라운 건 이런 80마일대의 구속의 패스트볼이 이런 인정을 받았다는 거다.
그야말로 구위 쪽으로는 가공할만한 발전을 이뤘다는 건데. 그렇기에 믿기지가 않았다.
‘도핑이라도 한 건가?’
단장이 하기 뭐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워낙 그 변화, 아니 진화가 급격했기에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구속이 작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록과 비슷했기에 의심이 약간 덜어지긴 했지만.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나마 제구는 작년과 똑같은 평가를 받았지만, 애초에 제구는 65점 이상, 메이저에서도 상위권으로 평가받았으니. 의미는 없지.
‘만약 도핑이나 다른 치팅이 아닌 제 실력이라는 전제하에, 이 평가가 시범경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면··· 1선발도 아깝지는 않겠어.’
“3등 당첨 정도인 줄 알았는데, 잭팟이었군.”
데이비드 포스트는 생각했다.
어쩌면 무너져가는 소니 그레이를 대체할 에이스의 새로운 ‘에이스’ 후보가 등장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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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입질이 왔네.
이제 보고서가 올라온 건가?
아무래도 구단 사람들이 일을 잘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른 걸 보면.
“앞으로 이 라커룸을 쓰시면 됩니다.”
“저 혼자요?”
“네,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은 오로지 Mr. Go 전용입니다.”
아침일찍 클럽하우스를 들어가자마자, 구장직원? 클러비? 아무튼 직원이 나를 반겨줬다.
원래 내 자리였던 통로 쪽 라커룸 반쪽은 다른 선수의 유니폼이 들어가 있었고. 그 대신 통로에서 조금 떨어진 라커룸에 잘 다려진 유니폼이 큼직하게 걸렸다.
“세탁물은 그냥 라커룸에 넣어두시면, 알아서 세탁과 다림질을 마친 뒤, 다시 넣어 놓겠습니다.”
“아··· 예, 수고하세요.”
라커룸이 그냥 유니폼 걸어 놓고, 잡동사니 쌓아 놓는 곳 같지만,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선수의 입지에 따라서 배정되는 라커룸의 위치, 크기 같은 게 달라지거든.
특히 선수가 우글거리는 스프링 트레이닝 때는 선수의 입지에 따라서 하나의 라커룸을 둘이서 같이 쓰기도 하지.
어제까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라커룸 하나를 통째로 쓸 수 있는 건, 주전급 선수, 그러니까 25인 로스터에 들어간 선수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소니 그레이와 크리스 데이비스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급 플레이어들은 두 개를 쓰기도 하고.
‘그러니 라커룸 하나를 통째로 나한테 배정했다는 건···’
애슬레틱스가 고유석이라는 투수를 주전급으로 대우하겠다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
심지어 자리까지 좋네.
예전에 쓰던 반쪽 라커룸은 문과 바짝 닿아 있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중앙에 가까웠다.
“지나가게 조금만 비켜 줘. 덩치 엄청 크네.”
흡족하게 라커룸을 보고 있을 대, 웬 목소리가 슬며시 귀를 간지럽혔다.
부산스러운 라커룸이라, 덩치 큰 내가 길목 하나를 턱 막고 있으니, 이동에 문제가 생겼네.
“아, 지나가슈.”
“고마워, 음,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너 매덕스 걔 맞지?”
슬쩍 비켜서자 지나가던 선수는 이내 내 얼굴을 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봤다.
‘매덕스 걔’라는 요상한 단어로 나를 지칭했고.
“매덕스 걔가 아니라 Go You-Suck이야. 그냥 Go라고 불러.”
“···아, 그래. 불쾌했다면 미안. 네가 누군지는 아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아니아니, 이게 진짜 내 이름이야, 유니폼 등짝 봐.”
처음 본 사람한테 이름 말하면 믿는 새끼가 단 하나도 없다. 죄다 농담인줄 알아.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들이미니 그제야 믿는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또 미안하네. 난 네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나는-”
“소니 그레이. 우리 팀 에이스 이름이야 이미 알고 있어.”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민망하네. 아무튼 미안해. 스터프가 엄청나다던데, 꼭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덕담을 끝으로 남자, 소니 그레이는 자신의 라커룸을 향해 걸어갔다.
정 가운데에, 두 개를 통째로 쓰는 것만 봐도 애슬레틱스에서 그가 가지는 입지를 알 수 있다.
오클랜드 팬들에게 작년에 내가 제법 어필을 했다고 해도, 소니 그레이에 비하면 쨉도 안 되지. 에이스니까.
‘그런데··· 에이스님 표정이 별로 밝아 보이지가 않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번 시즌을 조금 말아먹기는 했어도 팀 내에서는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선수기에 거들먹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니 그냥 사람 자체가 좋아서 그런지, 은은한 미소 뒤에 감춰진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괜히 오지랖은 안 부렸다.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고는 해도 내가 누구 걱정할 처지가 아니잖아?
‘오늘은 또 뭘 배우려나.’
그리고 지금 나한테는 시간이 안 맞아서 오늘 처음 마주친 팀 에이스의 고민보다는 당장의 배움이 더 중요하다.
“대니얼, 바로 워밍업 가죠.”
“네, 매덕스 씨는 오늘은 그냥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뭐, 나이가 나이니까요. 현역 때처럼 같이 뛰면 몸이 남아나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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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커트 앵글. 몸은 다 풀었어?”
워밍업을 마치고, 불펜으로 향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렉이 손을 흔들었다.
어제만 해도 이런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는 놈들이 많았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확실히 우릴 보는 시선이 좀 줄었네.
“투심 그립은 손에 좀 익었어?”
“익숙해지기는 했는데, 정작 던져보질 못했으니까, 영~ 감이 안 잡히네요.”
“그래, 그래서 연습피칭이라는 게 있는 거지. 몸은 충분히 풀었지?”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래 미스터 서든께서 알아서 하셨겠네.”
둘쨋 날부터 그에게 배운 건 당연히 투심이다. 배웠다기보단 그립을 가르쳐주셨지.
다만 손에 익기 전까지는 절대로 던지지 말라고 해서 아직까지 한 구도 못 던져 봤다는 게 문제지만.
“오늘은 던지는 거 맞죠?”
“너무 조급해하지 마. 어설픈 상황에서 던졌다가 괜히 안 좋은 습관 생기는 것보다는-”
“예예, 차근차근 가는게 낫죠.”
“이제 좀 말귀를 알아듣네!”
틀린 말은 아니기에 일단 따르고 있는데, 몸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로 꼽히는 투심이 내 손에 있는데, 정작 이걸 던지지는 못하고 있으니···
“감이 제법 익었다니까, 오늘부터 피칭도 해보자고.”
그런 내 감정을 알아챈 건지, 우는 아이에게 사탕 물려주듯 그렉은 드디어 투심을 허락했다. 일종의 당근인 셈인데.
고오~맙게 받아먹어야지.
“투구폼 집중하고, 자세 틀어지지 않게 주의하고. 손목 각도에 집중해. 너무 젖히지 않도록.”
“그립은요? 처음 던지는 건데 그립에도 집중해야 하지 않아요?”
“넌 포심 던질 때도 그립 신경쓰냐? 서클은? 슬라이더는?”
“안 쓰죠. 어차피 익숙한데, 괜히 신경쓰다가 손가락만 꼬이니까. 던지다 보면 알아서 편하게 그립이 잡히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지난 며칠간 그렉의 코칭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렉은 매번 중요 포인트를 콕 집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다시 질문을 던져서 내 스스로 깨닫게 했지.
뭐라더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가 이런 방식이었다고 어제 대니얼이 말해줬는데, 흘려들어서 기억이 안 나네.
“던져 봐.”
아무튼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잡자 그렉이 고개를 끄덕였고, 글러브를 팡팡 치는 불펜포수와 잠깐 눈을 맞춘 뒤 곧바로 공을 던졌다.
그리고···
“음···”
실망했다.
이게 매덕스의 투심?
아무리 숙련도가 떨어져도 그렇지. 포심보다 훨씬 못하네. 역회전도 그다지 없고.
몇 번을 더 던져봤지만, 오히려 실망감은 더욱더 짙어졌다.
지금 기준으로는 그냥 밋밋한 포심 같네. 손에 덜 익어서 그런지, 힘이 잘 안 담기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조금 더 숙련도를 쌓다 보면 훨씬 나아지겠지만, 과연 내가 아는 그렉 매덕스의 투심처럼 될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지?”
“···네.”
그런 내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렉은 낄낄거렸다.
“원래 그렇다니까. 너 내 그립보고 처음에 무슨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면, 그냥 평범했죠. 그립 자체는 일반적인 투심 그립이잖아요.”
사실 그렉 매덕스의 투심 그립은 그의 이름을 가려놓고 보면, 교보재에 올라도 될 만큼 일반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투수의 전설적인 구종 치고는 손에 은근히 잘 익었고. 그립 잡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어색하게나마 알아서 그립이 잡힐 정도로.
“그래, 그렇지. 원래 중요한 건 그립이 아니야. 던지는 사람의 노하우와 재능이지.”
“···그럼 결국 의미 없는 거 아니에요?”
“워워, 진정해 커트 앵글. 그게 아니라, 진짜는 따로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진짜가 뭔데요.
그런 눈빛으로 그렉을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저은 그는 이내 내 손에서 공을 뺏듯이 가져간 뒤 자세를 잡았다.
‘투구하려는 건가?’
그가 투구폼을 잡자, 불펜포수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찼고, 곁눈질하던 투수들은 아예 대놓고 그를 봤다.
이렇게라도 가르침을 얻겠다는 것처럼. 이해한다, 나 같아도 저러지. 오오 매덕스 오오.
“잘 봐. 공의 차이를.”
첫 번째 공. 은퇴한 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괜히 레전드가 아닌 듯, 공은 역동적으로 포수 글러브로 향했다.
“스트라이크!”
“거기! 괜히 오버 하지 말고, 바로 포구자세나 잡아. 어때, 커트 앵글. 방금 공 말이야, 뭐 같아?”
“엄청난데요?”
“그래, 엄청난 거 말고, 다른 거. 무슨 구종 같으냐고.”
“투심이요.”
그는 내 답변에 씨익 웃었다.
뭔가 잘못 말했나?
투심 아니야? 영상에서 보던 투심 맞는데. 하이라이트로 떠돌던 것처럼 괴랄하게 꺾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현역시절과 비슷하다.
그런데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건가?
말없이 다시금 투구폼을 잡은 그는 두 번째 공을 던졌고, 그것은-
“어?”
고등학생 때, 짤방으로 봤었던 장면과 똑같았다.
급격하게 역회전하며, 포수 글러브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마치 구위가 폭발한 이후의 내 서클처럼 말이다.
아, 그래, 서클인가?
투심 얘기하시다가 왜 갑자기 서클을 던지는 거야?
“이건 뭐 같냐?”
“어··· 서클 체인지업?”
“틀렸어. 내가 갑자기 서클을 왜 던져? 패스트볼 얘기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듯 그는 고개를 저었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가 현역시절 던졌다는 구종들이 쫙 떠올랐다.
서클은 아니라고 했고.
투심? 근데 너무 달라.
그러고 보니···
“싱커. 맞죠?”
싱커도 있다.
아니, 있다고 한다.
강력한 역회전을 보이며, 타자를 돌려세우거나 땅볼을 만드는 싱커를 던졌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싱커를 말하자 그는 씨익 웃었지만.
“아니, 이번에도 틀렸어. 이건 그냥 변형 패스트볼이야. 분류는 투심이지.”
“예?”
“사람들은 참 이상해. 내 공을 투심이니, 싱커니, 제멋대로 분류해. 자기들 마음대로 다른 구종으로 떼어놓기도 하고. 커트 앵글, 구종을 나누는 차이가 뭐냐?”
“무브먼트?”
“그거 말고, 결정적인 거.”
“그야··· 그립이죠.”
알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이 그립, 뭐냐?”
“투심이죠.”
“그래, 그렇게 분류하지. 그런데 정작 초구랑 2구는 그립이 같아. 왜일 거 같아?”
그렉 매덕스라는 투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절대로 같은 공을 던지지 않는다.’였다.
같은 ‘구종’으로 분류되더라도, 공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는 거지. 물론 약간의 과장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같은 구종 내에서도 차이를 둘 줄 알았다.
그래, 방금 피칭처럼.
“그립은 중요한 게 아니야. 손목의 각도와 회전. 이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하게 구종을 만들 수 있으니까. 진짜는 이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번, 9이닝 18K 이후로 줄곧 품어왔던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역회전이 강한 서클과 낙폭이 심한 서클로 나눠서 던지는 것.
구위가 긁히면서, 그때처럼 역회전이 더 짙어진 서클로 인해 더욱더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허황된 망상 같았던 그 상상을.
“즉 같은 그립을 잡고 던져도, 아예 다르게 던질 수 있다는 거네요. 마치 다른 구종처럼.”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네! 요 며칠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어쩌면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어. 그렉 매덕스라는 전설에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터득해서 내 걸로 만들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