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투수진은 구멍투성이군.’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두고 로스터를 검토하던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처참하게 무너졌으니, 올해는 적어도 반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바램과는 달리, 선수단에 구멍이 가득했으니까.
정확하게는 투수진에.
‘타선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꽤 좋은 편이지,’
작년, 트레이드로 데려온 크리스 데이비스(1987)가 무려 42홈런을 달성했고.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 또한 불안한 수비력을 대신하듯 27홈런을 날리며 팀 타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 외에도 준수한 파워툴을 갖춘 타자들이 많은 타선은 B+ 정도로 평가할 수 있었다. 리그 최하위 팀 치고는 제법 강력한 타선이나.
그와 달리 투수진, 특히나 선발진은 빈 구멍이 가득했다.
‘확실한 주전 선발투수라고 할 만한 게 겨우 셋뿐이야.’
찬란한 에이스였던 소니 그레이는 거듭 부상을 당하며 무너졌으나. 여전히 선발진의 핵심이고.
션 마네아는 기대받았던 스터프가 드디어 터지기 시작하는 건지, 작년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주전 선발투수로 올라섰다.
작년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켄달 그레이브맨 역시 팀의 중심을 받쳐주는 선발투수고.
이 세 선수가 그나마 에이스의 주전 선발투수들이나, 1년에 162경기를 치르는 빅리그는 최소한 다섯 명의 선발투수를 요구했다.
‘우리는 선발의 빈자리를 불펜으로 땜빵할 수 있는 팀도 아니니까.’
선발진이 과하게 부실한 거지, 불펜도 튼실한 건 아니다. 비교적 멀쩡한 형태만 갖췄을 뿐.
그 멀쩡한 형태라도 유지하려면 불펜에 과한 체력부담을 안겨주는 건 삼가야 하고.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선발자리를 확정 지어야 하는데···’
다행인 것은 그간 꾸준하게 투수를 모았던 에이스이기에 후보는 많다는 거였다.
작년 리치 힐과 조시 레딕을 넘겨주면서 받아온 자렐 코튼과 프랭키 몬타스.
불펜투수이나, 선발 전환 가능성을 보여준 앤드류 트릭스와 제시 한, 크리스 배싯.
마이너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대체선발로서 종종 메이저에서도 얼굴을 보인 다니엘 멩덴과 확장 로스터로 콜업했지만,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한 라울 알칸타라.
작년 빅리그 데뷔는 못했지만, 마이너에서 선발투수로 훌륭한 성적을 올린 다니엘 고셋. 그리고···
“Go.”
데이비드 단장은 마지막 선발후보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Go You-Suck.
독특한 이름의 투수는 여러 후보군들 중 어쩌면 코어팬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선수라고 해도 무방했다.
작년 더블A에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선보이고, 숱한 트레이드 기사를 낳으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이름을 박아 넣었으니까.
데이비드 포스트 역시 지지하는 쪽에 가까운 투수이나, 진지하게 팀의 주전 선발투수로서 로테이션에 넣을 정도냐고 묻는 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애매하지. 이닝 소화 능력도 제법 갖췄고, 컨트롤과 서클 체인지업은 예술적이지만. 과연 빅리그에서도 통할까?’
장점이 워낙 확실한 투수이기에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위험성이 너무 높다는 거였다.
저조하다 못해, 아예 없는 수준에 가까운 스터프는 메이저리그의 주전타자라면 누구라도 홈런을 날릴 수 있다.
투수친화 구장인 홈구장 콜리시엄이 어느 정도 장타를 억제해준다고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는 투수의 역량이 받쳐줘야 가능한 거지.
제아무리 담장이 높고, 담장의 거리가 멀다고 해도, 결국 넘어갈 공은 넘어간다.
‘만약 적당한 수준의 스터프만 갖추더라도 땜빵정도가 아니라, 선발진의 한 축이 되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제는···’
괜찮은 구위를 갖춰서, 억제력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면, 콜리시엄과 누구보다 잘 어울릴 거다. 공격적인 성향을 타고났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애매했다.
차라리 가능성이 아예 없는 투수라면 관심조차 안 가질 텐데. 98%, 아니 80%를 갖추고 20%가 부족한 투수기에 섣부른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냐는 거지.’
튼실한 피지컬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가벼운 스터프가 겨울 한 번 지났다고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단한 트레이너를 붙여준다고 해도, 쉽지는 않겠지.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이 괜히 입맛을 다셨을 때, 그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왜 저래? 나 몰래 FA라도 있었나?’
“무슨 일이야?”
“그렉 매덕스가 인스터럭터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텁텁했던 입안이 가글한 것처럼 시원해졌다.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감돌았고.
“매덕스가? 정말로?”
그렉 매덕스가 내걸은 조건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오프시즌 트레이닝 결과에 따라 승낙한다고 했었지.
그런 그가 수락했다는 말은···
‘허, 가능했네. 겨우 오프시즌 한 번 만에.’
고유석의 오프시즌 트레이닝이 성공을 거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매덕스라는 전설조차 혹할 만큼 대성공을 말이다.
에이스라는 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빌리 빈이, 일개 에이전트에게 휘둘려 협상을 가졌다는 걸 탐탁지 않게 보는 구단 내부인사들이 많았는데. 아마 얼마 동안은 닥치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닥칠 수도 있고.’
####
브라이언이 왔다.
기쁜 소식과 함께.
“그렉 매덕스가 인스트럭터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Go의 개인 코치인 셈이죠. 기간은 시범경기가 끝날 때까지고요.”
스터프가 상승한, 아니, 숨겨진 스터프를 찾은 순간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생각보다 감정이 미미했지만, 어쨌든 기뻤다.
그는 분명 날 몇 단계는 더 상승시켜줄 사람이었으니까.
‘구종 하나만 배워도 감지덕지지.’
메이저리그에서만 22년을 뛴 거물이다. 그 경험을 발톱 때만큼만 배워도 나 같은 애송이한테는 기연이나 다름없는 거지.
그렇기에 그가 인스트럭터 제안을 수락했다는 소식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조금 기쁘기도 했고.
그런 대단한 사람한테 내 공이 인정받았다는 거니까.
“그나저나 이번에도 바로 가실 겁니까?”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뒤,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트레이닝 동안 브라이언이 아예 찾아오지 않은 건 아니다.
이전에도 종종 한 번씩 들리기는 했었지. 보통 하루만 있다가 갔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곧 스프링 트레이닝 합류일이니, 피닉스에서 계속 머물 생각입니다. Go의 컨디션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잠깐 숨을 고른 그는 나와 눈을 맞췄고. 마치 무언가 선언하듯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저한테 가장 중요한 선수는 Mr. Go입니다.”
확신을 얻은 건 매덕스만이 아니구만. 브라이언 역시 나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 같으니까.
“혹시 Go의 피칭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영상은 충분히 봤지만···”
다만 그게 완전하지는 않은 듯,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끝을 흐렸는데,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선수를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조심하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똥볼만 던지던 놈이 갑자기 이런 공을 던지면, 의심부터 들 테니까.
“안 그래도 오늘 연습피칭하는 날인데. 마침 딱 잘 오셨네요.”
“아, 그런가요? 루틴에 지장이 가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내 모습에 그제야 브라이언은 얼굴을 폈다. 여전히 조심스러운데, 이것 역시 당연하다.
‘갑자기 내 몸값이 확 뛰었으니까.’
브라이언이 대니얼이라는 트레이너를 구해준 덕분이기에 나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스러울 수밖에.
이후로도 그는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피칭이 시작되자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그 대신, 희열감이 피어올랐으니까.
“허···”
“나이스볼.”
쭉 봐왔던 대니얼은 덤덤하게 박수를 쳤고, 브라이언은 옅은 한숨을 뱉었다.
이미 영상으로 한번 봤던 걸, 다시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니, 반응이 크지는 않았지만, 놀랍기는 한 거겠지.
“이젠 정말··· 빅리그 입성만 남았군요.”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엔 묘한 희열감이 감돌았다. 투자가 대성공으로 돌아왔으니.
“컨트롤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합니까?”
“예전보다는 못하죠. 그래도 거의 잡았어요.”
“손가락은 괜찮습니까? 아프다거나, 조금 이상하다거나.”
“멀쩡해요.”
마지막으로 몸 상태까지 물어본 브라이언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그를 따라 나도 피식 웃었다.
그렇게 그가 가장 궁금했을 포심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피칭을 이어 나갔고. 제한된 투구수 중 절반을 소모했을 때.
그제야 브라이언은 알아차린 건지 슬쩍 뒷마당의 울타리로 시선이 향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숙소를 옮기겠습니다.”
“아뇨, 내버려 둬요. 관중 덕분에 집중이 잘 되거든요.”
“Go가 그렇다면야···”
울타리 틈새 사이로 조그만한 눈동자가 빛났다. 나중에 보고 야구공 하나 안겨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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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 난관을 넘어서고, 오로지 운동에만 집중했던 정신에 여유가 깃드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좀 살만해진 거지.
그래서 그런가, 그전까지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시선도 알아챌 수 있었다. 옆집 말이다.
‘오늘도 보고 있네. 학교 안 가나?’
여긴 주택가다. 이 집이야 브라이언이 잠시 임대를 해줬다고는 하지만, 다른 집은 일반 가정집이겠지.
그런데 갑자기 비어있던 옆집에 웬 이상한 중년 남성 하나랑 덩치가 산 만한 동양인 남자가 들어와서 매일 같이 소음을 피워대니, 관심이 없을 리가 있나.
특히나···
‘저 나이 대 남자애들은 말할 것도 없지.’
울타리 틈새 사이로 눈동자가 번뜩였다. 9~10살쯤 되나? 아니, 어쩌면 더 어릴지도.
처음 알아챈 건, 스터프가 올라가고 며칠 지나서였다.
옆집 꼬맹이는 자기 딴에는 숨어서 보는 것 같은데, 이미 들켰어, 이 친구야.
그래도 동심을 파괴하기 싫어서, 일부러 못 본 척하니, 정말로 안 들켰다고 생각한 건지, 연습피칭 때마다 계속 훔쳐봤다.
‘집중하자, 집중.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10구 제한으로 시작했던 연습피칭은 차근차근 투구수가 늘리며, 지금은 7~80구씩 던졌다. 원래는 80% 정도만 힘을 썼는데.
오늘은 90%까지 힘을 끌어 올렸다. 오늘을 끝으로, 스프링 캠프에 합류해야 하니, 마지막 점검이 필요했으니까.
“와···”
공이 가죽 표적지를 때리며 난 펑~ 하는 소리에 울타리 너머로 높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럴 거면 왜 숨었냐.
모른 척해준 보람이 없네.
“열성 팬이군요.”
피칭을 관람하던 브라이언 역시 슬쩍 녀석을 곁눈질하며, 농담을 던졌다.
열성팬은 팬이지, 그것도 아주 열렬한 팬. 등판할 때마다 관람하는데, 저런 팬이 어딨어?
“오늘은 좀 오래 있네요. 학교 갈 시간 아닌가?”
평소에는 중간까지만 보다가 등교하는 건지 사라지고는 했는데, 오늘은 좀 더 길다.
퇴학이라도 당했나?
“토요일입니다. Mr. Go가 요일도 모를 만큼 트레이닝에 집중한 것 같아서 기쁘네요. 열심히 훈련 프로그램 짠 보람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이제 해가 중천인데 왜 집에 있나 했더니. 토요일이었구만. 그럼 인정이지.
그나저나, 얼굴 뚫어지겠네.
젊은 층 사이에서 야구 인기 떨어진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는가 보다.
저렇게 열렬한 야구팬(?)이 자라고 있는 걸 보면, 괜한 걱정 말고 야구해도 되겠어.
‘어릴 때부터 약 쳐놔야, 나중에도 알아서 야구장 찾아가겠지.’
집토끼라고 무시했다간, 우리에서 도망칠지도 모르니. 당근을 듬뿍 줘야 한다.
팬층을 넓히는 건 사무국에서 해야 할 일이겠지만, 선수도 함께 행동해줘야 훨씬 수월하겠지.
“잠깐 좀 다녀올게요.”
갑자기 야구공 다발을 쥐고 울타리로 걸어가자, 뭐하냐는 듯이 보던 대니얼과 브라이언은 조금 지나 내 뜻을 알아차린 듯 옅게 웃었다.
“어어, 스탑. 도망치지 말고. 다시 와. 나쁜사람 아니야.”
꼬맹이도 내가 자기한테 다가가는 거란 걸 깨달은 듯 황급히 물러섰지만, 내 말에 덜커덕 몸이 멈췄다.
착한 녀석이군. 어른 말을 잘 듣는 걸 보면 가정교육을 아주 제대로 받았어.
“왜- 왜요? 그··· 훔쳐봐서 죄송합니다. 야구하는 거 신기해서 봤는데. 아저씨 근데 야구선수예요?”
그래도 당혹스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건지, 어린아이 특유의 횡설수설을 하는 꼬마에게 울타리 너머로 야구공 몇 개를 던져주자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네 용돈보다 비싸니까, 내일 학교 가서 자랑해. 갖고 있다가 나 유명해지면 옥션에 팔고.”
“아저씨 야구선수 맞죠? 데이빗은 쨉도 안 되게 잘하던데, 아, 데이빗은 제 사촌형이에요. 근데 아저씨 메이저리거에요? 디백스에서 뛰어요?”
“어, 메이저리거야. 디백스 소속은 아니고, 저~기 오클랜드에서 뛰어. 애슬레틱스.”
메이저리거가 될 건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약간의 시간 차이, 혹은 서순의 문제지. 아무튼 그렇다.
초롱초롱해진 눈동자를 보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지만, 거짓말은 아니라니까?
이제 정말 한 걸음 남았으니까. 스트링 트레이닝 도중에 갑자기 식중독에 걸린다거나, 팔이 부러지지 않는 이상.
‘무조건 가능하지.’
겨우 구위 하나 좋아진 걸로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냥 좋아진 게 아니라 X나게 좋아졌으니, 이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꼭 기다려야 해요!”
초롱초롱하던 꼬마는 무언가 생각난 건지, 갑자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와서 도망치는 건가, 싶었지만, 쟤도 내 말 듣고 멈췄으니, 나도 기다려 줘야지.
기껏 던져준 야구공도 다 내팽겨치고 집으로 향했던 녀석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조막만한 손에 사인펜을 쥐고서.
갑자기 흥분한 아이가 걱정됐던 건지, 처음 보는 어머님도 따라 나오시네.
‘나쁜 사람 아닙니다.’
자기 아들이 웬 거대한 동양인에게 달려가니, 눈동자가 세차게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그에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사인! 사인해주세요!”
“사인?”
“메이저리거라면서요!”
“어··· 그래.”
엄마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건지, 흥분하면서 달려온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던져줬던 야구공을 다시 울타리 너머로 넘겼다.
당돌하군. 공짜 야구공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건가? 나중에 크게 될 녀석이야.
“이름?”
“노아에요! 아저씨는요?”
“고유··· Go라고 알아둬.”
“Go?”
하도 들어서 안다.
내 이름이 욕 같다는 거. 한국에선 의식 안하면 무난한 이름인데, 여기선 그렇게 들리는 거지.
부모님이 내려준 석 자가 욕 취급당하는 게 억울하지만, 어쩔 수 있나. 여긴 미국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이름이라도 그럴듯 하게 지어둘 것을.
어린 애한테 욕설을 뱉을 수는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Go라는 성만 말했다.
“스펠링은 쥐, 오.”
“저 어리다고 장난치는 거죠?”
“진짜로 이게 이름이야.”
작년 미들랜드의 슈퍼스타였기에 사인 요청을 제법 받았던지라, 둥근 야구공에 사인하나 그리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내 이름이 구라가 아니라는 걸 설득하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세 개 모두 멋들어지게 사인을 남긴 뒤 다시 건네주자 꼬마, 노아는 흥분에 잠겼다.
“메이저리거 사인은 처음이에요!”
“그렇다니 나도 기쁘네. 너 근데 몇 살이냐?”
“여덟 살인데요.”
‘생각보다 더 어렸네. 요즘 애들 참 빨리 커.’
그 꼴이 참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신신당부했다.
“절대 다른 사람주지 말고, 잘 챙겨둬. 나중에 큰돈 될 테니까.”
“평생 간직할게요!”
“그래그래, 그리고··· 오늘 피칭 구경한 건 잘했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어, 그러면···”
“야구하러 가야 하거든.”
지금 처음 대화를 나누는 주제에 떠난다고 하니 똘망똘망한 눈가에 수분이 차오르는데, 야구하러 간다는 말에 쏙 그쳤다.
“엄마가 부르네, 빨리 가봐. 야구공 잘 챙기고.”
“앞으로 오클랜드 경기 꼭 챙겨볼게요! 근데 진짜로 Go 맞죠?”
“맞다니까.”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야구공을 꼭 챙기고서 냅다 달려가는 녀석을 잠깐 눈에 담은 뒤, 나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보기 좋군요.”
“열심히 도운 보람이 있네요. 이런 선수가 많아져야 할 텐데.”
“저도 이런 식으로 야구팬이 된 거라서. 저 같은 애 하나 만드는 거죠.”
“팬서비스 역시 슈퍼스타의 자질이죠. Go는 사랑받는 선수가 될 겁니다.”
훈훈하다는 듯 웃는 브라이언과 대니얼의 모습에 괜히 멋쩍어서 둘러댔지만, 나도 조금 기분이 묘한 건 사실이었다.
어린 애한테 사인해준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녀석 덕분에 캠프 합류 전 마음이 다 잡혔다.
단순히 빅리그 입성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거시적인 목표도 생겼고.
“요즘 대학 등록금 얼마 정도 해요? 전 안 가봐서.”
“학교에 따라 다릅니다. 공립, 사립, 소속 주인지, 다른 주인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그런데 그건 왜···”
“아뇨,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요.”
저 사인볼. 세 개 합쳐서 대학 등록금 정도로 만들어보자. 여덟 살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10년인가?
충분하겠네. 그럴듯한 사연까지 있으니, 잘하면 비싼 값 받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가 잘하면 말이야.
일단 스프링 트레이닝과 시범경기를 씹어 먹는 게 먼저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죠, 메사로.”
그건 이미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