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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38화 (38/316)

38화

루틴은 똑같다.

웨이트하고, 코어운동하고, 유산소하고, 밥 먹고, 자고.

거기에 피칭과 철저한 분석 정도만 추가됐을 뿐.

“혹시 손목의 각도가 문제가 아닐까요? 너무 젖힌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힘이 분출되는 게 아닌지.”

“아뇨, 그건 상관없습니다. 여길 보시면 임팩트를 줄 대는 손목이 정확하게 직선을 유지하죠. 인대도 도드라지고요. 이러면 힘이 제대로 실립니다.”

손목과 손가락.

두 가지 후보군 중 가장 먼저 분석이 들어간 건 손목이었다. 구위에서 손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은 만큼 사실상 유력후보로 꼽혔지만.

“네, 자세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너무 강하지 않게.”

“음··· 그대로죠?”

“네, 이건 아닌 것 같네요.”

유력후보가 늘 다 이기는 건 아니지.

손목의 각도, 힘, 밸런스 오만 가지를 다 들쑤시고, 교체해봤지만,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 제구만 통통 튀었네.

“손목은 아닌 것 같죠?”

“이제 남은 건 손가락인데···”

보름에 걸쳐 해답을 찾아 헤맸지만, 손목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도출되었고. 그렇게 유력 후보가 떨어져 나가면서, 손가락만이 남았다.

‘손가락이라···’

정확하게는 손가락을 포함한 왼손 자체라고 해야겠지.

이 작은 손안에서 여러 가지 미세한 컨트롤이 이루어진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저마다 다른 역학이 담겨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제일 애매한 게 남았네.’

그래서 가장 어려운 놈이고.

손가락은 아무리 힘을 주더라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으니까.

‘최악의 경우 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만큼, 심각한 수준의 문제덩어리가 잠자고 있을 수도 있었기에, 나도 대니얼도 그저 막막한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봤다.

“네, 쭉 당기세요.”

그 이후 우리는 손목으로 향했던 분석의 눈길을 왼손가락으로 돌렸고. 가장 먼저 행한 건 악력검사였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악력이 부족해서 그런 걸수도 있었고, 설사 아니더라도 악력을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해서 나쁜 건 없었으니까.

“음··· 네, 결과가 나왔네요. 78.86kg, 준수한 결과군요.”

평소에 쓰던 평범한 악력기 정도가 아니라, 당기는 힘을 측정하는 기계까지 동원하여 측정했는데. 78.86이라, 좋은 건가?

긴가민가한 내 표정에 대니얼은 노력으론 힘들고, 타고나야 가능한 수준이라는 말을 곁들였다. 노력한 보람은 있구만. 동료들 쿠사리 들어가면서 끼익거린 보람이 있어.

“그럼 악력은 문제가 없는 거네요.”

“네, 이 정도면 웬만한 투수들을 훨씬 웃도는 수치니까요. 그러니 악력은 아닙니다.”

그렇게 악력도 클리어.

그것을 시작으로 다섯손가락을 샅샅이 해부하듯 검사하고, 분석했다.

유연성이나, 힘줄, 혹시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검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부상까지 모조리 다.

‘이쯤 되면 하나 얻어걸릴 만도 한데···’

오만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고, 피칭 영상을 수백 번도 더 돌려봤는데도 영 잡히지 않는 실마리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냥 문제 같은 건 없었던 거 아니야?’

과거 스스로 도출해냈던 결론이다. 그냥 내가 타고난 스터프가 딱 여기까지였다는 것.

어떤 문제나, 노력도 필요 없이, 이게 내 최대 한계라는 것 말이다.

12월은 이미 끝나버렸고. 1월도 서서히 중순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이 저절로 머릿속에 깃들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비슷한 생각인 건지, 자신감이 넘쳤던 대니얼의 얼굴에도 조금씩 확신이 사라져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프시즌 트레이닝이 아예 망한 건 아니다.

“몸은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네요. Go가 보시기에 시즌과 비교하면 대략 몇 퍼센트 같습니까?”

“한 칠,팔십 퍼센트 정도?”

문제를 찾지 못한 것뿐이지, 시즌 준비 자체는 차곡차곡 잘 진행되었으니까.

몸과 컨디션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 온 건지, 짧은 연습피칭만으로도 투구감각이 금방 올라왔고. 제구도 빠르게 잡혔다.

하긴, 대니얼이 수면시간까지 체크하면서 도와줬는데, 평소보다 빠르게 올라올 수밖에 없지.

“그래도 최소한 스프링 트레이닝 전까지 몸은 다 만들어지겠네요.”

“뭐, 그거야 당연한 거죠. 선수의 준비를 완성시키는 게 트레이너의 업무니까요.”

딱히 진척이 없는 상황에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오히려 대니얼 본인이 부족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감 가득하게 선언했는데, 정작 티끌만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 양반도 많이 답답하겠지.

‘역시 겨우 오프시즌 한 번으로는 힘든 건가? 쓰읍,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하루 이틀 걸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애써 실망을 눌러뒀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문제를 찾지 못한다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지금에 와서야 문제를 알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2년, 아니 1년 전에만 깨달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나았을 테니까.

“그래도 아직 스프링 트레이닝 시작까지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열심히 해보죠. 생각보다 금방 알게 될 수도 있잖아요?”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대니얼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서 애써 밝게 말했고, 나도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고유석의 앞에서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은 대니얼이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웠다.

‘죄다 멀쩡해. 손목도 딱 좋고, 악력도 충분하고, 뭔가 부상이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찾아내기 어려울 거라는 건 이미 스스로도 각오한 일이지만, 아예 실마리조차 잡지 못할 줄은 몰랐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최소한 지금부터라도 서서히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걸 고치기 시작해야 했으니까.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건가?’

대니얼 자기자신에 대한 의심마저 자라났지만, 그는 생각을 금방 털어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분명 뭔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돼.’

단순히 자기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서 그런 건 아니다. 스포츠 과학적으로 분석하더라도 명백히 이상했으며.

단순히 타고나지 않았다고 지칭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타고난 고유석이었으니까.

‘특히나 회전수도 최소한 2100은 나와야 정상인데··· 그보다 100이상 낮아.’

그러니 못해도 평균적인 수준의 수치가 도출되어야 정상일 텐데, 그조차도 안 되니.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가 대체···’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그의 눈에 문득 고유석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저 긴 손가락에는 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이토록 철저하게 감춰진 걸까?

“그러고 보니, Mr. Go는 신장을 감안해도 손가락이 긴 편이군요.”

“하이스쿨 때 키 크면서 같이 크더라고요.”

“원래는 짧았던 건가요?”

“뭐, 그전에도 평균은 됐죠. 지금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도 짧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건 왜 묻느냐는 듯 고유석이 눈썹을 씰룩이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대니얼이었지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손가락··· 손가락이란 말이지.’

죽어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실마리가,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손끝에 닿은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짧지는 않았다고. 그럼··· 그 어릴 때가 언제지?’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든 대니얼은 고유석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Mr. Go, 혹시 야구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미들스쿨?”

생각보다 많은 야구선수가 중학생 때 처음 야구를 접한 경우가 많다.

물론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하는 이들도 많지만,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많은 장비를 필요로 하기에 접근성이 대단히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런데 간혹 아주 어릴적부터 야구를 해온 이들의 경우, 그 시작을 누가 지도했느냐에 따라서.

“아뇨, 8살, 아니, 7살부터 했어요. 학교 입학하고 바로 야구부 들어갔으니까. 여기 기준으론 리틀야구겠네요.”

“투수로 시작하셨고요?”

“네, 쭉 투수였죠. 가끔 타석에 서기도 했지만, 형편업숒..”

“그럼 Go가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적 코치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투수셨나요?”

안 좋은 습관이 생기기도 하고. 잘못 터득하기도 한다.

“글쎄요··· 옛날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따로 코치는 없었고, 감독님도 그냥저냥 평범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포수출신이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고유석처럼.

번뜩이는 대니얼의 눈동자에 고유석은 마치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니얼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한순간 맑아진 머리에, 생각의 바다로 빠져들었으니까.

‘그래, 리틀야구 수준에서 정식 투수코치가 있는 곳은 많지 않지. 선수 한명 한명에게 심혈을 기울여줄 사람도 거의 없고. 기껏해야 야구에 관심이 있는 체육선생 수준이지. 또한···’

대니얼의 시선이 다시금 고유석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이렇게 정밀한 분석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행동은 프로팀에서도 찾기가 어렵지.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을 거야. Go 역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고. 그게··· 문제의 시작이다.’

알 것 같았다. 고유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가.

“혹시 뭔가 깨달은 거라도?”

“Go, 음··· 이상한 말인 건 알지만, 절대로 오해하지 마시고. 혹시 괜찮다면 제 주먹을 야구공이라고 생각하고 잡아주십시오.”

“예?”

“피칭할 때랑 정확하게 똑같아야 합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아는데··· 네, Go의 말처럼 뭔가 알 것 같아서요.”

황당한 부탁에 무슨 개소리냐는 듯 고유석이 그를 쳐다봤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 때문인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성인남성끼리 서로 손을 맞댄다는 게 배가 꼬이고, 서로에게 펀치를 갈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일이나.

떨떠름하게나마 고유석은 대니얼이 뻗은 주먹을 쥐었고, 습관적으로 그립을 잡았다.

“역시!”

주먹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순간, 대니얼의 표정은 환희에 가득 찼다.

최근 들어 그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가 명쾌하게 풀리는 순간이었으니까.

####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첫날의 의심이 진짜였나?

갑자기 자기 주먹을 쥐어보라고 하더니, 진짜로 잡으니까 활짝 웃는 대니얼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멀어졌지만, 다행히 대니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시원하게 웃었을 뿐.

‘설마···’

“이제야 알겠습니다. Go의 문제가 뭐인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라보자, 대니얼은 지금까지 봤던 표정 중 가장 후련한 얼굴로 말했고. 그걸 들은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놈쉐끼, 이놈쉐끼. 이렇게 귀하신 분을 감히 의심하다니! 고유석 이런 불경한 놈 같으니라고! 반성하고 속죄하자.

“어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고개 숙여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자, 대니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열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제가 생각한 게 맞다면, 바로잡는데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사소하면서, 영향은 큰 놈이니까요.”

그 뜨거운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눈빛 때문이라기보다는, 저 눈빛이 일으킬 일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이제부터 진짜구만.’

변화. 아니, 진화가 시작될 테니까.

####

“Mr. Go, 혹시 피칭을 할 때 손가락 어느 부분에 힘을 실으십니까?”

“그야 손끝이죠?”

공을 손끝으로 찍어 눌러라.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당연한 말이고. 설마 이게 문제야?

이론이라고 할 것도 없이, 공을 던지는 건 손끝이 맞지 않나? 정석 중의 정석인데. 이게 잘못된 건가?

머릿속에 혼돈으로 뒤덮였을 때, 대니얼은 무슨 생각인지 안 다는 듯 조금 더 자세히 물었다.

“그러니까, 그 손끝이 어디죠?”

‘손끝이 그냥 손끝이지, 혹시 명칭이 따로 있나?’

내가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리자, 그것을 포착한 대니얼은 그거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하군요. Mr. Go, 야구에서 말하는 손끝, 그러니까 피칭에 필요한 손끝은 손가락 마지막 마디입니다.”

“아, 네 그렇죠. 저도 그쪽에 힘을 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은 대니얼은 정확하게 내 검지를 잡아 꾹 눌렀다.

“아뇨, 거기가 아니라 여기요. 정확하게 딱 선이 그어지는 이곳.”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됐으니까. 아무도 해준 적 없는 조언이었고.

“손가락의 힘, 흔히 악력은 절대로 손톱부분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미세한 컨트롤은 그곳으로 하겠지만, 힘은 오로지 여기, 마지막 마디까지만 올라가죠. 여길 중점으로 공을 미는 게 정석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공을 채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Go는 여태까지 충분한 힘을 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진짜 힘들은 딱 손가락을 휘두르는 정도로 끝났다는 거죠.”

타자로 따진다면, 스위트 스팟이 아니라, 배트 끝부분으로만 타격한 거나 없다는 건데. 진짜 이거라고? 내 문제점이?

“손가락이 짧은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마디부분에 공이 걸치겠지만. Go는 하이스쿨 이후로 손가락도 자라면서, 공이 더욱더 힘의 중심에서 멀어졌을 겁니다.”

그 결과가 지금 쓰레기 같은 구위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자, 대니얼은 확인시켜주겠다는 듯 야구공을 들었다.

“오늘 피칭은 마쳤지만, 조금 더 던져도 무리는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투구수를 조절했으니까요. 피칭을 하면, 바로 알 수 있겠죠. 하시겠습니까?”

말없이 건네준 공을 집었다. 말이 필요가 없는 순간이고. 무조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평소 피칭을 할 때는 기쁘게 걷는데, 지금은 걸음 하나하나가 1톤이 넘는 무게처럼 느껴졌다.

심장도 미치도록 두근거렸고.

‘정말··· 정말로 이게 다라고? 이게 끝이라고?’

온통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니얼의 말처럼 더럽게 사소한 문제였으니까.

간이불펜의 마운드 위에 섰을 때도 여전히 정신이 멍했다.

“먼저 평소처럼 던져보십시오. 포심으로요.”

지시에 따라 자세를 잡았다.

평소라면 마운드도 내 취향대로 열심히 고르고, 발자국도 몇 개 남겼을 텐데. 그런 여유는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공을 던지고 싶었을 뿐.

“후우···”

길게 숨을 뱉어내고 다시 빨아들이자, 산소가 공급된 목 안이 화끈거렸다. 감기 걸린 기분이네.

“흐읍-”

그대로 던진 공.

똑같은 자세로 채찍처럼 세차게 팔을 휘두르며 쏘아던진 공은 익히 알고 있는 그놈.

구속도, 구위도 모두 똑같다.

당연하지, 평소 던지던 대로 던졌는데, 똑같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네, 이번에는 손가락 마디에 집중해서, 공을 채는 게 아니라, 미십시오.”

대니얼은 다시 공을 하나 던져주며 그것을 강조했고, 나는 이번에도 말없이 자세를 잡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훑었다. 고요하고, 적막하네. 경기장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그라운드 위에서 피칭하는 것보다 이거 하나가 더 떨리냐.’

조금씩 커지던 심장박동은 이젠 귓가를 쿵쿵 울릴 정도로 커졌고. 그런 긴장감 때문인지 올라온 집중력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던 대니얼의 시선마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야구공 하나와 그것을 쥔 왼손. 그 두 개만이 가득했을 뿐.

‘천천히 동작을 의식하면서.’

앞선 투구보다는 조금 느리게, 최대한 투구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발을 내디뎠고, 뒤로 젖혔던 왼팔을 다시금 휘둘렀다.

팡-하는 소리.

공에 맞은 표적지는 조금 세차게 흔들렸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소리부터 달랐으니까.

손가락에서부터 쭉 뻗어나간 공은 표적지의 윗부분을 때렸다. 제구가 솟았네. 하긴, 힘이 다르니까.

“하아.”

‘겨우 이거였다고.’

피칭하며 참았던 숨을 뱉어내자, 문득 속이 공허했다. 조금 허탈하기도 했고.

이 아무것도 아닌, 이 빌어먹을 손가락 위치 하나가, 내 인생을 말아먹을 뻔했다는 거잖아?

이렇게 쉬운 걸 여태까지 모른 채, 잘못된 방법으로만 피칭을 해왔다는 거고.

‘어떤 점에서는 대단하네. 남들이랑 다른 방법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니까.’

어쩌면 내가 생각보다 천재인 걸지도. 아니, 천재 맞지. 이렇게 던질 수 있는데도 기어코 똥볼만 주구장창 던지면서 더블A까지 털어먹은 거잖아. 거참 X나게 대단한 재능이었네.

팡- 팡- 팡-

허탈한 웃음 뒤로, 표적지를 때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흘렀다.

평소에는 제한된 투구수를 넘어서면 대니얼이 칼 같이 차단하지만, 지금은 그저 옆에서 열심히 공을 넘겨줬다.

포심, 서클, 슬라이더, 쓰리핑거, 커브. 각각 두 개씩 모두 던져본 뒤에야 몸이 멈췄다.

컨트롤이랄 것도 없이, 죄다 자기 마음대로 박혔지만, 구종의 수준이 달랐다.

포심은 천지개벽 수준에, 서클은 18K할 때 봤던 거랑 비슷하고. 슬라이더는 더 꺾이네. 커브랑 쓰리핑거는 여전히 별로고.

멍했던 머리도 맑아졌고. 다시금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심장도 더욱더 세차게 요동쳤다. 앞으로의 일을 예견하듯이.

“이제 좀 후련하십니까?”

“아뇨, 아직도 부족하죠. 잘못 던진 투구수를 다 합치면 못해도 만 개는 될 텐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죠. 최소한 빅리그 정도는 우습게 들어가야 조금이라도 만족할 거 같은데. 가능할까요?”

“스프링 트레이닝 합류일이 2월 14일. 지금이 1월 16일이니. 충분합니다.”

그래, 진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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