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메디컬 테스트였다.
이번 시즌의 경우 저번 시즌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했기에 혹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건데.
그래서인지, 바로 훈련장소인 피닉스로 향하는 게 아니라, 먼저 보스턴으로 향하여, 보라스 코퍼레이션과 연결된 병원으로 향했다.
“Mr. Go 같은 경우는, 부상 전력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철저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몸은, 특히 운동선수의 몸은 완전히 깨끗할 수가 없으니까요.”
검사를 담당하게 된 의사는 혹시 모르는 상황을 가정하라는 듯이 약간의 겁을 줬는데, 검사가 진행될수록 그의 표정은 묘해졌다.
브라이언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고.
“흐음··· 놀랍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애매모호한 말에 조심스럽게 묻자, 의사는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깨, 팔꿈치, 손목. 관절과 인대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조금 마모되기는 했지만, 그거야 투수니 당연한 거고, 오히려 비슷한 연차의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깨끗합니다. 타고나기를 튼튼하게 타고난 거겠죠. 이 정도면 하이스쿨 선수들과 비슷하네요.”
뭔가 기나긴 말을 뱉었는데, 쉽게 설명하면 멀쩡하다 못해 아주 좋다는 뜻인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의문이 생겼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그럼 왜 제 구속인 이 따위 일까요? 어깨랑 팔꿈치가 멀쩡한데도, 무슨 웬만한 데드암 걸린 투수 수준인데.”
아니, 겉으로 보이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인대도 좋다는데, 구속은 왜 이 모양이야?
죄다 멀쩡하거나, 오히려 평균이상이라면, 구속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어쩌면 의학적인 검사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간절하게 바라보자, 의사는 피식 웃었다.
“투수의 구속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투수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이라서 그런지, 의사는 마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답했다.
“투수의 구속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근력.”
즉 파워인데, 단순히 힘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대나 신경 같은 인체구조를 뜻하는데, 이 근력이 구속의 한계치를 정한다.
“두 번째는 투구역학으로, 투구동작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발바닥부터 엉덩이, 허리, 어깨까지 이어지는 이 투구동작을 통해, 앞서 언급한 근력을 이용하는 거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관절의 회전력과 기동성입니다.”
관절의 가동범위와 탄력, 운동수행능력인데, 흔히 유연성이라고도 하는데, 투구동작을 통해 온몸으로 뽑아낸 근력을 얼마나 부드럽게, 그리고 안전하게 외부로 발산하는지를 좌우하지.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온몸을 충분히 잘 사용해야지만 빠른 구속이 나올 수 있다는 건데. 그거야 내가 아는 것과 단어만 다르다뿐이지, 대충 다 아는 사실이고. 진짜 본질은 이거다.
“Mr. Go는 세 가지 모두 밸런스가 잡혀 있고, 대단히 안정적입니다. 피칭하면서 뒤틀리거나, 꺾이는 부분이 없죠. 반대로 파이어볼러들은 오히려 이런 안정성이 떨어지기에, 최대출력은 더 높고요.”
비유하자면, 구속 빠른 놈들이 스포츠카라면, 나는 4인승 세단이라는 거네.
구속이 낮은 대신 안정성, 그러니까 부상이 적을 거라는 건데,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아, 물론 이렇게 표현하다고 해서, Go의 출력이 낮은 건 아닙니다. Mr. Go 역시 보다 더 직선적이고 역동적인 동작을 가진다면 더욱 높은 구속을 가질 수 있겠지만···.”
말끝을 흐린 의사는 잠시 나와 눈을 맞추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신 지금 같은 안정성은 잃을 테니, 의사의 입장에선 별로 추천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느 정도 부상 위험을 감수하고, 투구폼을 고친다면, 구속 상승의 가능성은 있다는 거네.’
솔직히 말하면 구미가 당겼다. 어쨌든 구속이 올라갈 수는 있다는 거니까.
모든 투수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똥볼을 가진 내 입장에선 이만큼 군침 도는 말이 없었다.
일 년 전이었다면, 당장 고개를 끄덕이고, 죽어라 투구폼을 바꿨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지.’
이번 시즌을 통해, 나는 이미 희망찬 미래를 살짝 엿봤다.
그것을 통해 지금 내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도 깨달았고.
“혹시 Go가 원한다면, 그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인연이 있는 투수코치들이 몇 있으니, 그들에게 부탁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투구폼을 교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흘끔거리는 눈빛으로 묻는 브라이언에게 손사래 쳤다.
“트레이닝은 계획대로 하는 게 최고죠. 뭐, 그래도 완전히 안 되는 건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요.”
“Go의 생각이 그렇다면, 기존의 일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브라이언 역시 진심으로 물은 건 아니었던 건지, 내 답변을 듣고는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혹시나 내가 갑자기 구속을 올리겠답시고, 투구폼을 교체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거겠지.
최대한 트레이닝을 돕기로 계약했으니, 무작정 우긴다면 막을 방법이 없을 테니까.
‘구속만 올라갈 수 있다면야,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당장 나한테 필요한 건 구속이 아니라, 구위야.
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다행스럽게, 지금 나는 구속에 집착하지 않았다.
투구폼을 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100마일을 던진다거나, 파이어볼러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아니까.
‘기껏해야 2~3마일, 많이 쳐서 그 정도고, 1마일쯤 증가하면 다행이지.’
겨우 그 정도 높이려고 모든 시간을 다 투자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구위는 약하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빠르지도 않은 구속. 거기다 투구폼을 바꾸면서, 제구도 조금 떨어지겠지. 오히려 망하는 지름길이야.’
그렇다고 해서 빠른 구속, 막강한 강속구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선후관계를 확실하게 하자는 거지.
어설프게 욕심을 채우느니, 차라리 가장 필요한 걸 채우는 게 옳은 선택이야.
‘물론 정말로 구위가 좋아진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아직까지는 구위도 가능성만 살짝 있다. 정말로 좋아질 수 있는지는 문제점을 찾고, 트레이닝이 어느 정도 진행되기 전까지는 모른다.
허나 그렇기에 투구폼 보완 혹은 교체를 통한 구속의 증가가 가능하다는 말이 그런 불안감을 싹 씻어줬다.
‘일단은 열심히 트레이닝 하다가, 정 안 되면, 내년은 말아먹는 셈치고, 그때라도 투구폼을 교체하든가 하면 되겠지.’
이번 오프시즌을 망치더라도, 내년을 위한 보험하나 쯤은 있다는 거니까, 좋게 생각해야지.
그것으로 대화가 끝났고, 몇 가지 세부적인 검사를 더 거치며, 아무런 이상소견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메디컬 테스트는 끝났으니.
“몸도 건강하니, 이제 열심히 구를 일만 남았네요.”
“프로그램은 이미 완성됐다고 하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굴러야지.
눈밭에 굴린 눈덩이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겨울의 한파로 얼어붙은 보스턴을 떠나, 올해의 마지막과 내년의 시작을 맞이할 피닉스로 향했다.
####
“반갑습니다, Mr. Go. 앞으로 Go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컨디셔닝, 식단 관리를 맡을 피지컬 트레이너, 대니얼 서든이라고 합니다.”
“고유석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닉스에 도착한 직후, 먼저 브라이언이 시범경기 종료시점까지 임대한 숙소에 들린 뒤, 본격적으로 트레이너와 조우했다.
기대하라는 말을 자주 했었던 브라이언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트레이너를 모셨는가, 조금 궁금했는데. 그냥저냥?
‘피지컬 트레이너라고 해서, 뭔가 되게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대단히 근육질도 아니고, 체격도 조금은 작달만해서, 지나가다 만났으면 그냥 동네 아저씨로 착각할 것 같네.
조금 기대감이 식었지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앞으로 전적으로 믿고 내 몸을 맡길 트레이너였으니까.
‘아니, 정신 차리자. 내 주제에 누굴 평가해?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일 텐데.’
그렇게 다시 정신을 무장했지만, 곧 다시금 의심이 자라났다. 눈빛이 수상했으니까.
“으음··· 왜 그렇게 보시죠?”
“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의 몸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어서··· 좋은 몸이군요.”
아니, 뭔지는 알겠는데, 내 말은 왜 그런 눈으로 보냐고.
감탄이라거나, 만족이라거나 하는 종류가 아니라, 마치 먹음직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몸을 훑는 트레이너, 대니얼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112, 아니, 911에 신고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진짜 트레이너 맞죠?”
“실력은 확실한 사람입니다. 업계 평가도 좋고요. Go도 아시겠지만, 저희 에이전시가 그저 그런 사람에게 선수를 맡기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싶어 소곤소곤 묻자, 브라이언이 당당하게 보증해줬지만, 여전히 껄끄러움은 가시지 않았고, 그에 괜히 입맛을 다셨을 때. 묘한 미소만 짓고 있던 대니얼이 입을 열었다.
“메디털 테스트 자료는 이미 받았습니다. 6.5fit(198cm)에 220lbs(99.7kg), 오프시즌 동안 체중이 15파운드가량 증가했더군요.”
아니, 입만 연 게 아니라 눈빛이 달라졌다.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됐으니까.
“아··· 네. 놀고먹다 보니까, 금방 찌더라고요. 커팅을 해야 할까요?”
“아뇨, 원래 오프시즌 동안 20파운드를 증량할 계획이었으니,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5파운드를 더 증량해야 하죠. 시간을 절약했네요.”
“운동이라곤 러닝한 게 전부라, 죄다 살일 텐데 괜찮을까요?”
“체성분 검사표를 보시면, Go의 경우 여전히 근육량이 많습니다. 운동능력을 더욱 원활하게 발휘하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선, 오히려 지방을 더 늘리는 게 좋죠.”
의심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진지한 눈빛과 거침없이 말을 뱉는 걸 보면, 그만큼 자기 일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거야.
“프로그램을 조금 변경해야겠군요. 웨이트 시간을 조금 줄이고, 나머지 벌크업을 병행하며, 코어운동 위주로 밸런스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내일부터 바로 일정에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언제든지 좋습니다. 계속 쉬다 보니까, 몸이 좀 근질근질하거든요.”
“하하, 다행이군요. 식단은 오늘부터 짜드릴 테니, 식단에 맞춰서 식사 하기리 바랍니다.”
그것으로 첫인상이 말끔하게 지워졌고. 평범한 얼굴이 이상하게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이 사람이라면, 믿고 맡겨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쓰읍, 정말··· 좋은 몸이야.”
씨익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저 말을 듣지 못했다면 말이야.
‘진짜 믿어도 되나?’
대화를 통해 트레이너로서 좋은 사람이란 걸 잘 알겠지만, 슬슬 다른 쪽으로 걱정됐다.
왜 입맛을 다셔, 왜 그런 식으로 입맛을 다시냐고.
####
그다음 날부터 곧바로 대니얼이 준비한 프로그램대로 천천히 몸을 만들었다.
“자, 들이마시고~ 그대로 뱉으면서 자세유지 하십시오.”
“끄읍- 하아···”
첫 만남에서 살짝 엿볼 수 있었던 전문성이 진짜였던 건지, 트레이닝은 꽤나 체계적이었다.
분, 아니 초단위로 루틴이 만들어져 있었고, 하루 일정이 끝나면, 수시로 간략한 테스트를 통해 몸 상태를 체크했다.
“Mr. Go의 수면패턴을 체크해봤을 때, 7시간 40분 정도를 수면을 취하는 게 가장 컨디션이 좋습니다. 이건 웬만하면 시즌이 시작된 이후로도 지키세요.”
적당한 웨이트와 고강도의 코어운동. 그리고 적당한 스트레칭의 반복.
거기에 컨디셔닝까지 맡는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수면시간까지 세세하게 체크하며 몸을 만든 덕분에 늘어졌던 몸이 순식간에 올라왔고.
거기에 충분한 영양섭취 덕분에 매일 1파운드씩 벌크업도 됐지만, 점점 완성되는 몸에 맞춰서, 초조함도 자라났다.
‘공은 대체 언제 던지는 거야? 9월 이후로 그립 한 번 못 쥐었네···’
스프링 트레이닝 시작까지 남은시간은 대략 두 달 가량.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정작 시즌 종료 이후 지금까지 야구공 한번 못 쥐어봤다.
이래도 되는 건가? 피칭 감각이 떨어지는 거 아니야?
눈빛이 좀 수상하더니, 투수가 아니라 보디빌더를 만들려는 건가?
초조함 때문인지 오만가지 생각이 자라났고, 그에 슬며시 물을 때마다 대니얼의 답변은 단호했다.
“벌크업을 하면서, 밸런스가 조금 흔들렸을 테니, 바로잡는 게 최우선이니. 앞으로 일주일은 더 해야죠. Go는 좋은 몸을 가졌으니, 그만큼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니까요.”
“그럼 피칭은 대체 언제-”
“먼저 몸을 풀고 나서 천천히 투구수를 늘리는 형식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몸 상태로 갑자기 공을 던졌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하나하나 옳은 말이라, 결국 뭐라 반박하지 못한 채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켰고. 애써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원래 남자는 허리가 좋아야 하는 법이니까.’
결국 피칭도 허리를 쓰는 운동이니, 코어근육이 발달되면, 구위도 좋아질 수 있고, 어쩌면 구속이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서 성실히 루틴을 이행했다.
그렇게 트레이닝을 시작하고 보름. 생각보다 이르게 몸이 만들어진 건지, 대니얼은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말을 했다.
“이제 슬슬 피칭을 시작해도 될 것 같군요.”
하루 종일 구르느라, 아주 땀에 쩔어버렸음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금 몸에 힘이 깃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공을 던지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쭉 그랬던 것처럼 대니얼은 단호했다.
“루틴을 지키셔야죠. 피칭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식사하시고, 바로 주무십시오. 알람은 미리 맞춰놓으셨죠?”
“네네, 그 놈의 7시간 40분. 아주 정확하게 1초도 안 빼놓고 딱 맞춰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당장이라도 공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거렸지만, 열심히 땀 흘리면서 루틴에 적응한 건지, 몸은 저절로 그의 지시를 이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단련장 한켠에 마련된 간이 불펜에 들어가 딱딱한 바닥 대신 푹신한 흙을 마음껏 밟으며 준비했다.
역시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 돼. 콘크리트나 나무바닥이 아니라. 얼마나 자연적이야?
“지난 시즌 Mr. Go의 투구폼을 분석한 영상입니다. 기존의 폼과 일치하도록 천천히 동작을 이행해보십시오.”
먼저 그간 열심히 놀았던 어깨가 갑작스런 동작에 놀라지 않도록 캐치볼과 섀도 피칭으로 충분히 풀어줬고.
서서히 달아오르는 어깨에 내 마음도 점점 더 뜨거워졌다.
‘생각보다 폼이 많이 올라왔어. 짧은 시간이지만, 근력도 더 강해진 것 같고. 그래, 역시 기본부터 다져야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조함에 물들어 대니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었지만. 막상 피칭이 다가오니 긍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몸이 만들어졌으니까.
원래 사람이란 게 변화무쌍해서 재밌는 동물인 거야.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이제라도 다시 믿음을 회복했으면 된 거지. 그럼그럼.
“섀도 피칭이지만, 그래도 동작이 거의 일치하는군요. 이 정도는 연습투구를 하다보면 알아서 자리를 찾아가겠네요. 네, 코어를 충분히 쓰시면서-”
특유의 뜨거운 눈빛으로 몸 구석구석을 훑는 대니얼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사실 여전히 좀 불쾌하기는 해. 그냥 익숙해진 거지.
“충분히 달아오른 것 같은데, 이제 던질까요?”
“네, 뭐. 최대한 동작에 집중하시고, 몸이 심하게 틀어지지 않도록 의식하십시오. 허리에서부터 충분히 힘을 당기시고요.”
본격적인 피칭.
마운드처럼 볼록 솟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브라이언이 제대로 준비해준 건지, 딱딱한 질감은 똑같았다.
평소 경기에서 하던 것처럼 적당히 마운드를 고르며 숨을 들이마시며 포심 그립을 쥐었다.
평소 불펜피칭할 때는 무조건 서클을 먼저 던지지만, 구위를 제대로 확인하려면 패스트볼을 던져야 할 테니까.
‘어디, 한번 보자고. 정말로 구위가 좋아질 수 있는지, 없는지.’
대니얼의 지시대로 최대한 동작에 집중하며 천천히 손안에 쥔 공을 표적을 향해 던졌고. 몇 개월만인데도, 아니 몇 개월만이기에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채였다!’
스스로 입이 벌어질 만큼 제대로 채인 공. 사방팔방 설치해둔 카메라가 잘 담아주겠지만,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눈에 힘을 가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몸을 맡긴 채 침을 꿀꺽 삼켰고, 곧 동그래진 두 눈이 좁혀졌다.
“어?”
“으음···”
‘느낌은 제대로였는데···’
9월 이후, 무려 세 달 만의 초구.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무색할 만큼, 예전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공이 표적지를 요란하게 때렸다.
‘이게 무슨···’
“하- 하나만 더-”
“네, 그대로 던져 보세요.”
연이어 던진 두 번째 공 역시 똑같았고, 그 이후로는 오기에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다는 증거를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던졌으니까.
‘그냥··· 작년 오프시즌이랑 똑같잖아.’
오늘 허락된 10구를 모두 던졌지만, 만족 따위 없었다.
그저 허탈했을 뿐.
그래, 겨우 이 정도 훈련했다고 하루아침에 구위가 바뀔 리가 있나···
“쯧.”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오르는 짜증에 혀를 차며 애꿎은 마운드를 헤집었을 때. 피칭 내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대니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 것 같군요.”
“네, 딱 보이죠? 오프시즌인 거 감안해도 무브먼트가 심하게 떨어-”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라. Go의 문제점을 알 것 같다고요.”
축 늘어졌던 고개라 빳빳하게 치솟았다.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으니까.
“영상으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젠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뭐가 문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