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4화 (34/316)

34화

시즌은 끝났다.

락하운즈가 텍사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나는 1등석인 벤치에서 구경만 했으니, 아무런 관계없지.

“결국 우승했네.”

“좋아할 거 없어. 여기서 우승을 경험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 잘하는 놈들은 이미 다 올라갔는데.”

다른 선수들도 그다지 감흥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이너리그에서의 우승은 딱 이 정도 값어치니까.

그것을 끝으로 리그가 완전히 종료되자, 슬슬 선수들은 짐을 챙기거나, 혹은 미리 챙겨놓은 짐을 집으로 붙였고.

“너 진짜 빅리그 가긴 가는 거야?”

“가긴 어딜 가? 시즌 끝났으니까, 한국 돌아가야지.”

“뭐? 아니, 그러면 우리 약속은? 락하운즈에 우승까지 만들어낸 포수가 있다고 말해줘야지!”

“내년에 해줄 게, 내년에.”

경기는 안 뛰면서, 정작 위로 올라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 내 모습에 의아해하던 앤디 파즈도 그제야 깨달은 듯 앵앵거렸지만, 이미 한참 늦었다.

리그가 끝났으니, 팀도 휴식기에 들어가고, 선수들도 뿔뿔이 흩어질 차례였으니까.

나도 돌아갈 시간이고.

“너, 약속 꼭 지켜야 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꼭 말하라고!”

마지막까지 집착하던 앤디 녀석마저 숙소를 떠난 뒤, 국제 배송을 해야 하기에 제법 늦게까지 남은 나도 준비를 마쳤다.

“이게 끝입니까? 생각보다 간출하군요.”

“평생 지낼 곳도 아니고, 마이너 숙소니까요. 짐이 간단할 수밖에 없죠.”

덕분에 오래간만에 브라이언과 얼굴을 마주했는데, 별건 아니고, 그냥 미리 싸놓은 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에 도움을 줬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이랑 노트북, 장비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비어버린 방안을 보니, 기분이 묘하네.

어쩌면 여기서 지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수도 있잖아?

“이번 오프시즌 동안의 성장과 시범경기 성적에 따라, 트리플A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잘하면 바로 레귤러 라인업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이번 시즌 성적이 상당하니까요.”

더블A에서는 더 검증할 게 없을 만큼 성적을 올렸으니, 구단에서도 선택을 내려야겠지. 더 이상 여기 두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까.

다음 시즌 시작지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한 단계가 더 높은, 어떤 의미에서는 투수에겐 빅리그보다도 더욱 까다로울 트리플A다.

거기서마저 성적을 올린다면 진짜 즉전감으로 인정받는 거고.

어쩌면 투수, 특히나 선발투수가 부족한 에이스이니, 잘하면 바로 25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겠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말이야.

어느 쪽이든 콜업은 사실상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 숙소도 이제 안녕인 거지.

‘그리고 영원히 안녕이어야 할 테고.’

이 숙소를 다시 본다면, 그건 내가 구단이 만족할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콜업에 실패했거나.

혹은 콜업한 이후에도 성적이 저조해서 강등당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영원히 안 보는 게 더 밝은 미래일 거다.

“가죠.”

“티켓은 제가 미리 끊어 놨습니다. 아직 메이저 쪽은 시즌이 한창이지만··· 어차피 콜업은 없을 테니, 구단에서도 허락했고요. 바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단호하게 돌아서서, 브라이언이 손수 운전하는 차량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미들랜드도 끝이네.’

이건 좀 씁쓸하네.

야구 인생을 통틀어서, 아마 가장 많은 환호성을 받은 게 여기일 거다. 홈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곳도 여기가 유일하고.

그런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이건 조금 감정이 생긴다.

과연 다른 곳, 오클랜드가 됐든, 내슈빌이 됐든. 앞으로 뛸 곳에서 미들랜드만큼 환호를 받으려면 얼마나 잘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막막하기도 했고.

‘뭐, 계속 잘하다 보면, 어디서 뛰든지 좋아해주겠지. 여기도 원래는 나를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잠깐 먹먹해진 눈으로 차창 너머를 바라보다, 문득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잘할 수 있겠죠?”

“잘해야죠.”

명답이네.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 잘해야지, 무조건.

이제 정말 딱 한 걸음 남았는데, 죽어도 잘해야지.

적적한 마음을 위로하는 종류의 말은 아니었지만, 대신 흔들리는 감정을 잡아주기에는 적절한 대답이었다.

“저는 Mr. Go가 그럴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야하고요. 고향에서 딱 세 달만 눈 감고 편히 지내십시오. 마지막 휴식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마음의 준비도 충분히 될 거고요.”

“그것 참···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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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길은 편안했다.

브라이언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돌아왔으니까.

시차를 맞추기 위해 기내식마저 거르며, 물만 마시면서 공복을 유지했기에 속이 조금 쓰렸지만, 막상 도착해서 발을 내딛자마자 말끔하게 사라졌다.

‘조용하네. 아무도 관심 없구만.’

입국장 안은 조용했다.

메이저리거쯤 되면, 입국하거나 출국할 때 제법 떠들썩하지만. 겨우 마이너 나부랭이에 관심가지는 사람은 없겠지. 아니, 내 얼굴 아는 사람이나 있을까, 싶다.

“유석아! 여기, 여기!”

아, 한 분 계시네.

내가 무슨 관광객도 아니고,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피켓을 흔들며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손까지 흔드시네.

오래간만에 아들 본다는 생각에 아주 들떠 계시는데, 반가운 것도 있는데,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시선들이 부끄럽기도 해서, 재빨리 다가갔다.

“가게는 어쩌고? 한창 장사할 시간 아니야?”

“직원은 뒀다가 국 끓여먹니? 너희 아빠도 있으니까, 엄마 하나쯤 없어도 괜찮아. 그런데, 미국에서 잘하고 있다더니, 진짠가 보네? 작년보다 혈색이 좋아졌어.”

“그럼 뭐 가짠 줄 알았어? 그런데 피켓은 어디서 난 거야?”

“아들 1년만에 보는 건데, 직접 만들었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손재주 좋잖아.”

“···다음부터는 하지마.”

자랑스럽게 피켓을 흔들거리는 게 여전히 조금 부끄러웠찌만, 한편으론 브라이언의 말처럼 심리적으로 편안해졌다.

아직 공항이기는 해도, 정말로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으니까. 집 좋다는 게 이런 거지

“그런데, 어디가? 택시 안 타?”

“택시는 무슨, 내가 웬만한 택시기사보다 운전 더 잘해.”

공항을 빠져나간 뒤 혹시나 싶어서 묻자, 당당한 얼굴로 말하시는데, 피켓은 단순히 조금 부끄러운 정도지만, 이건 진짜로 아니다.

누가 운전을 잘한다고? 우리 엄마가? 우리 김여사님이 운전을 잘해?

매일 같이 모범택시 타고 다녀도, 차 여기저기 긁으면서 나는 수리비보다 덜 나올 거다.

내 표정이 굳으니, 이번엔 운전연수도 확실하게 받았다며 가슴을 탕탕 치시는데, 30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아빠라면 또 모를까 엄마가 저러니 그다지 미덥지는 않았다.

그렇게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차에 오른 뒤, 살기 위해서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자, 자길 못 믿느냐는 듯 나를 흘기던 엄마가 이내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감독님한테 전화 왔어. 올해도 겨울훈련 같이할 거냐고 물으시던데?”

여기서 말하는 감독님은 락하운즈의 크리스텐슨이나, 애슬레틱스의 밥 멜빈이 아니고.

내 모교의 야구부 감독이신, 박감독님이다.

한국에서 오프시즌을 보낼 때면 항상 야구부 사이에 끼여서 겨울훈련 같이했거든.

마이너라고 해도, 일단은 미국에서 야구하는 프로선수이니, 애들한테 약 좀 쳐주는 대신 훈련 같이 시켜주는 거지.

“학교 가보기는 할 거 같은데, 올해는 훈련 거를 거 같아. 12월 되면 다시 미국 가야 되거든.”

“12월? 원래는 훈련마치고 1월 말쯤에 들어갔잖아?”

“올해는 미국에서 몸 만들어. 에이전트 생겼거든. 생각해보니 말 안 해줬네.”

순간의 정적.

에이전트 얘기에 엄마는 사색에 질렸다. 저번 에이전트가 그만큼 못 미더웠던 거겠지.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런 중요한 건 엄마랑 아빠한테 바로바로 말 해줘야지! 누구야! 그 에이전트가? 너 미국 갈 때 같이 갔던 그 사기꾼 같은 놈이랑 비슷한 건 아니지? 건실한 사람이야? 또 어디다가 팔아먹는 건 아니고?”

그러다 한바탕 한소리를 늘어놓으시는데, 이해한다.

나야 메이저리그라는 꿈에 부풀어서 헤헤 웃으면서 계약하긴 했지만, 부모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영 아니다 싶었을 테니까.

머리굵고 나서 나 혼자 돌이켜 봐도 사기꾼 같은 양반이었는데, 장사하면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봤을 엄마, 아빠 눈에는 어땠겠어?

“이번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큰 회사야. 스캇 보라스···는 엄마는 모를 거 같고. 아, 그래 류영진, 류영진 선배님 알지?”

이번에도 혹시나 그런 작자가 아닌가 의심하는 눈빛에 그저 그런 회사가 아니며, 엄마도 잘 아는 류영진 선배님이나, 추민수 선배도 같은 회사라는 이야기를 약간의 과장과 허풍을 보태서 열심히 풀어주니,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셨다.

“아무튼 그 에이전트 덕분에 올해는 진짜 제대로 훈련하게 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셔. 감독님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드릴 게.”

“하아··· 미국에서 사기 당하는 건 아닌지,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다음에는 이런 일 있으면 미리미리 말해.”

“예엡.”

에이전트도 이 정도인데, 이번에는 진짜 메이저리거들이랑 같이 뛴다는 걸 알면,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입을 꾹 닫았다.

나중에 기사나면 알겠지.

‘기사라··· 내년에 입국할 때는, 아주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면 좋겠네.’

1년만의 귀국은 조용했다.

내가 관종인 건 아닌데, 그래도 기왕이면 최대한 시끄러워야 나도 기분 좋고, 부모님도 체면이 살겠지.

‘차분하게 쉬자, 차분하게. 브라이언 말처럼, 믿고 푹 쉬는 거야. 내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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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네. 훈련도 못하고.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더럽게 안 가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짐승의 삶을 살았다. 먹고 자고 싸고. 아주 본능에 충실한 삶이지.

매일 같이 적당히 러닝은 하는 덕분에 살이 붙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게 문제였다.

트레이닝에 대한 기대감은 풍부한데, 정작 그 시간은 너무 먼 이야기니···

‘만날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없지.’

인터넷 찾아보니 아웃사이더라고 하던가? 신조어 같던데, 딱 그 꼴이구만.

변명하자면, 내가 사교성이 낮아서 그런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문제다.

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같이 야구부에 있던 녀석들이나, 친구도 제법 있었는데, 미국 건너가서 구르는 동안 죄다 연락이 끊겼거든.

‘그래도 겨울훈련 꼽사리 끼면 가끔씩 만나기는 했지만, 올해는 그것도 글렀으니.’

내 모교는 그다지 명문은 아니다. 드래프트 출신도 별로 없고, 프로라고 해봐야 죄다 신고선수지.

그나마 마이너, 더블A라도 간 내가 끗발이 제일 좋다면 말 다한 거지.

그러다 보니, 소속 구단도 없는 녀석들이 많아서, 겨울 훈련에 참석하면 가끔 만나고는 했다. 서로 민망해지고.

‘최소한 주의사항은 확실하게 지키겠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메일을 확인하니, 브라이언은 칼같이 오프시즌 주의사항을 보내줬다.

술 먹지 말라거나, 탄수화물 섭취는 웬만하면 자제하라거나, 기본적인 식단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권고가 적혀 있는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사람을 가려서 만날 것이었다.

특히나 외국 출신 마이너리거들의 경우 안 좋은 일에 연루되거나, 감시망을 피해 ‘디자이너’가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마이너리거라 조금이라도 연루되면 사무국에서도 즉각 조치를 취할 거라는 약간의 겁도 줬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밖에 안 나가니, 다 해결되네.”

나는 그런 권고를 아주 잘 지키고 있으니까.

가끔 가게일 돕는 거 제외하면 사람을 안 만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

그렇게 브라이언의 말처럼 빈둥빈둥 푹 쉬고 있는데.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오타니 쇼헤이가 선발투수 겸 8번타자로 출장하여 세계 야구의 관심을 집중···

-시카고 컵스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를 차지하며, 1945년 이후, 71년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구단의 오랜 염원이었던 108년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그 사이 세상이 망하려나 보다.

믿기지 않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으니까.

작년 프리미어 12에서 한국 타자들을 학살했던 투수는 갑자기 타자를 겸업하고 있지를 않나.

시카고 컵스는 71년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질 않나.

심지어 월드 시리즈 상대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라서 염소의 저주와 와후 추장의 저주 둘 중 하나가 확정적으로 깨지게 생겼다.

“쯧쯧, 말세다, 말세. 세상이 망하려는 거야.”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내 상황도 세상이 망할 징조지.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시범경기 나가면, 한국에서도 제법 이야기가 나올 텐데, 그 스카우트는 뭐라고 생각하려나? 아니지, 벌써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네.’

미국 진출을 눈앞에 뒀을 때, KBO 구단 역시 제법 접촉을 많이 했었다.

내가 미국에서는 똥볼이라서 그렇지, 여기선 그래도 적당~히 투수 유망주 정도는 됐으니까.

당당하게 템퍼링을 저지르며, 나를 살살 꼬시려고 했던 양반들이 많았는데. 미국 진출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었다.

내가 메이저는커녕 시범경기라도 오르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던 사람도 있었고.

그런 내가 당당히 메이저 캠프에 입성해서, 시범경기 출장까지 보장받았으니, 쪽팔릴 사람 여럿 되겠네.

‘그래봤자 시범경기지만 말이야.’

그 양반들이 할 얼굴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게 끝이었다.

겨우 시범경기 정도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

오래간만의 휴식에 몸은 조금 둔해졌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가슴 속의 열기 역시 겨울에 다다르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활활 타올랐고.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브라이언이 잠자코 푹 쉬라고 했던 건지.

체력회복이나 관리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푹 쉬면서 몸이 늘어져, 잡념이 많아진 것 때문인지, 잠자고 있었던 열망에 불이 지펴졌으니까.

‘세상이 망해 가는데, 나라고 메이저리거 되지 말란 법 없지.’

메이저, 빅리그.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그 이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게,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마음의 준비도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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