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S!”
“Word!”
“S!”
“Word!”
이게 뭐하는 풍경일까.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을 쓴 남자, 크리스토퍼는 북적이는 관중석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S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이 Word를 붙인다.
이런 걸 처음 겪는 크리스토퍼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관중들은 익숙한 듯 따라했다.
‘인기가 대단하네. 여기선 하퍼도 부럽지 않겠는데?’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조차도 이곳, 미들랜드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하리라.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쉬지 않고 손가락을 놀리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래도 오늘 경기는 충분히 이런 반응이 나올 만했어.’
안 그래도 무더운 날씨에, 허벅지 위로 노트북까지 올리니 고문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자신의 일이니까.
‘플루크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의 직업은 스카우트다.
정확하게 명함에 적힌 대로 읽는다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 마이너 전담 스카우트라고 해야겠지.
트레이드 기간이 끝나면서, 마이너 스카우트인 그도 조금은 한가해졌지만, 오늘은 달랐다.
8월, 4경기 동안 저조한 모습을 보인 고유석으로 인해, 구단의 높으신 분들은 조금 걱정에 잠겼다.
플루크인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도, 실링마저 떨어졌다면, 기껏 약속한 좋은 대우가 우습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제대로 확인하라며 크리스토퍼 그를 파견한 것인데.
‘아직 여전해.’
적어도 오늘 경기에선 지난 6~7월의 활약이 단순히 플루크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이너 전담 스카우트씩이나 되가지고, 팜의 선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한소리 들었던 두 달 전과 똑같았으니까.
‘지금까지 5이닝 무실점 7K. 피안타는 둘. 볼넷이 하나. 성적도 준수하고.’
지난 경기들에서 꾸준하게 실점했던 것과 달리, 한창 잘했던 때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러프라이더스의 타선을 완전히 잠재웠다.
단순히 성적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 그 괴랄한 서클 체인지업이나, 훌륭한 제구, 쓸만한 슬라이더도 그대로였고.
‘최근에는 쓰리핑거 체인지업도 레퍼토리에 추가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안 나오네.’
어쨌든 그런 장점을 유지한 채, 여전히 날카로운 피칭을 보여주는 고유석은 한편으론 약간의 의구심이 들게 했다.
‘빅리그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할 것 같은데 말이야. 좋은 성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좋은 경험은 쌓을 수 있을 텐데···’
타자와 다르게, 투수는 굳이 트리플A를 거치지 않는다.
더블A에서 잘하면, 트리플A를 건너뛰고 바로 빅리그로 직행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
그렇기에 센세이셔널한 두 달을 보냈던 고유석은 누가 봐도 콜업 예정자였다.
레귤러는 조금 그렇고, 확장로스터를 통한 콜업은 거뜬하겠지.
그런데 정작 40인 로스터에 등록조차 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선수 쪽에서 요구했다고 했지. 시즌이 끝난 이후에 로스터로 올려 달라고. 왜지? 빨리 콜업하면 Go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을 텐데.’
빅리그는 빨리 밟으면 빨리 밟을수록 선수에게 이득이다.
애초에 대우가 달라지니까.
한번 빅리그를 밟은 선수는 구단에서도 쉽사리 마이너로 내릴 수 없고, 로스터에서 제외할 수도 없다.
연금이나, 의료보험 혜택에, 직접적으로는 벌이 자체가 달라지지. 그런데 어째서 미뤄달라고 요청한 걸까?
크리스토퍼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찰나, 빠르게 끝난 공격에 고유석이 다시 그라운드로 나왔다.
‘투구수는 이제 82구.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겠네. 오래간만에 무실점 좀 보나? 10K도 가능하겠고.’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다시 앞으로 숙인 그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봤고.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삼진이 올라갔다.
느릿한 구속과 부족한 스터프를 가졌는데도, 정말이지 삼진 하나 만큼은 잘 잡는다.
‘터지기 전에도, 은근히 삼진을 좀 잡는 편이었지. 그게 더 극대화됐어.’
감탄하던 크리스터포는 이내 입맛을 다셨다. 한편으론 조금 아쉬웠으니까.
만약 고유석이 그들이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구속이 늘어났다면 어땠을까?
체격에 걸맞은, 한 95마일쯤 나왔으면 말이다. 거기다 구위도 적절하게 좋으면 더할 나위 없을 거고.
‘저런 피칭에 스터프까지 갖췄으면, 이미 빅리그겠지. 소니 그레이랑 합쳐서 원투펀치가 됐을 거고.’
탁월한 소프트웨어와 조금은 구식인 하드웨어. 잘하면 잘할수록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또 조금 속도를 늦췄군. 천천히 가고 있어.’
그러는 사이 고유석은 어느덧 타자를 몰아세웠다. 철저하게 바깥쪽 위주로 승부하며, 볼카운트를 쌓았고. 타자 역시 처음 헛스윙 이후로는 지독하게 꾹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풀카운트.
느낌이 좋은 고유석의 모습에 연속 삼진을 기대한 크리스토퍼와 관중들이었으나.
“베이스 온 볼!”
아쉽게 볼넷.
낮은 코스에 타자는 움찔거렸지만, 끝내 배트를 참았고, 주심은 볼로 판단했다.
“그게 왜 볼이야!”
“우우우우! 심판 제대로 봐라!”
“삼진이라고 삼진! 스트라이크란 말이야!”
애매한 코스였기에 관중들이 아우성쳤고, 크리스토퍼 역시 스트라이크였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볼넷이라는 주심의 판정에도 동의했고.
‘쯧, 지금까지 잡아주던 코스였는데, 포수가 망쳤어.’
주심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포수 책임이니까.
애매하다고 판단한 포수가 어설프게 프레이밍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스트라이크가 볼로 둔갑됐다.
‘보 테일러, 타격은 제법 괜찮지만, 역시 포수로서는 아직 문제가 많아. 제대로 교육이 필요하겠어.’
좋은 피칭을 망친 포수에 조금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좁힌 그는 곧이어 터진 안타에 고개를 저었다.
‘멘탈이 안 터질 수가 있나. 포수가 삼진 하나 망쳤는데. 쯧, 오늘도 무실점은 글렀네.’
깔끔한 중전 안타에 1사 주자 1,2루가 만들어졌고. 득점권 주자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본 크리스토퍼는 더는 무실점이나 10탈삼진을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보란 듯이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힘들지, 지금 Go의 스펙으로는.’
간혹 득점권 주자가 나갔을 때, 더욱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투수들이 있다.
그런 경우 위기관리 능력 혹은 위기 극복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세이버메트릭스에서는 투수의 위기관리 능력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지만, 타자의 클러치 능력처럼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위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더 낫겠지만, 어쨌든 위기 상황이니, 투수가 전력투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위기관리 능력은 결국 스터프와 무브먼트지. 전력투구했을 때, 타자를 찍어 누를 수 있어야 하니까.’
일단 외야플라이도 주면 안 된다. 주자의 주루능력에 따라 희생플라이가 될 테니까.
장타를 억제하는 건 결국 공에 실린 힘, 즉 구위인데, 고유석은 구속은 물론 구위에서도 부족함이 많은 선수였다.
‘그러니 어설프게 스쳐도 잘못하면 실점이야. 그러니 무조건 삼진을 잡아야 하는 건데···’
6회 정도면 타자들이 투수에게 충분히 적응할만한 시간이다. 억지로 뜬공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시간이고.
그렇기에 무실점에 대한 기대감을 접은 크리스토퍼는 미리 보고서에 한 줄을 추가했다.
‘포수의 책임이 크나, 기본적인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이라는 글자를 말이다.
-스트라이크!
그런 그에게 손가락을 젓듯이 고유석의 느낌이 달라졌다.
한 구를 던지는 데에도 제법 시간을 끌었던 직전 승부와는 달리, 타자가 올라오자마자 초구를 박아 넣었다.
-스트라이크!
곧이어 공을 넘겨받는 즉시 찍어 넣은 2구 서클 체인지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으로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낸 과감한 하이 패스트볼. 키보드를 누르던 크리스토퍼의 손가락이 덜컥 멈췄다.
‘위기관리가··· 되네?’
멘탈이 흔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포수로 인해 볼넷을 내줬으니. 원래대로면 안타를 맞았더라도 2사 주자 1루였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의 삼진은 그런 크리스토퍼의 생각을 전면으로 부정했다.
‘어쩌면···’
한 가지 생각이 머릴 스쳤다.
-스트라이크!
초구 체인지업으로 후속타자에게서도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고유석. 그것을 보며 그의 눈동자가 점점 더 수축했다.
마치 무언가를 포착한 카메라 렌즈처럼.
‘정말로 어쩌면-’
-스트라이크!
2구 역시 서클 체인지업.
몸쪽으로 집어넣었던 초구와 달리, 바깥쪽으로 쭉 빼면서, 정확하게 코너위크를 공략했다.
그것으로 2-0.
마지막 순간의 위닝샷은.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몸쪽으로 던진 서클 체인지업.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역회전하며 존으로 들어가는 그것을 타자는 멍하니 바라만 봤고.
‘Go는 스터프‘가’ 부족한 게 아니라, 스터프‘만’ 부족한 걸지도.’
크리스토퍼 역시 루킹 삼진을 올리며 포효하는 고유석을 멍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왜 그런 요구를 했던 건지.’
당당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고유석을 보며, 크리스토퍼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에이전트가 무슨 생각인 건지를.
‘여기서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내년엔 정말로 볼만하겠어. 그러니, 굳이 올해 올라와서 얻어맞을 필요는 없지.’
그저 그런 신인 투수가 아니라, 팬들의 바램처럼 구세주로 등장할 생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분명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크리스토퍼가 보기엔 충분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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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까지 끝나면서, 시즌 종료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두 경기쯤 남았나?’
선발 로테이션을 감안하면, 나한테 남은 경기는 두 경기 정도쯤 될 거다.
아, 우리가 지금 사우스 디비전 2위로, 디비전 시리즈 진출은 확정됐으니, 잘하면 한 경기쯤 더 나갈 수도 있겠네.
‘포스트시즌은 관심없고. 그 다음이 문제지.’
마이너리그 포스트시즌.
일단은 가을야구인데, 솔직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아마 마이너리그에 포스트시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제법 많을걸?
그러다 보니, 사우스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이 확정된 상황인데도, 선수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넌 겨울에 어디로 가냐?”
“에이전트가 구단이랑 얘기해서 호주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마 그쪽으로 가겠지. 너는?”
“난 그냥 올해는 패스. 너무 많이 뛰었어.”
“딱히 갈 곳도 없고. 그냥 집이나 가야지.”
당장 클럽하우스만 봐도, 우승한다고 해봤자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을 포스트시즌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겨울, 오프시즌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X나게 막막하지. 마이너 시즌 막바지는.’
오프시즌. 이번 시즌의 부족함을 채우고, 장점을 조금 더 갈고 닦으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시간인데. 마이너 선수에겐 오프시즌만큼 답 없는 순간이 없다.
다음시즌 준비? 보너스 베이비가 아닌 이상, 가난한 마이너리거에겐 머나먼 이야기다. 대다수는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으니까.
마이너 봉급이 쥐꼬리라고는 해도, 당장 입에 풀칠 정도는 가능한데, 겨울에는 그마저도 뚝 끊기거든.
그렇기에 몇몇은 아르바이트, 여기 말로 파트타임 잡을 위해서 윈터리그를 알아보지만. 그나마 성적이 좋은 놈들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윈터리그조차 못 뛴다.
마이너리거라고 해도 일단은 구단과 정식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라, 독립리그는 불가능한데···
‘또 막상 정식 윈터리그는 선수를 가려서 받는단 말이야.’
애리조나 가을리그는 애초에 선수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MLB랑 협의가 되어 있는 캐리비안 리그는 평범한 더블A 선수보단 더 수준 높은 선수를 원한다.
그나마 호주는 그보단 좀 커트라인이 낮지만, 역시 어느 정도 유망주 정도는 되야 기웃거릴 수 있고.
“너네들 겨울 훈련은 어디서 할 거야? 애리조나? 플로리다?”
“가긴 어딜 가? 스프링 트레이닝을 애리조나에서 하니, 집에서 몸 좀 만들다가, 그거 맞춰서 애리조나로 가야지.”
“난 삼촌이 플로리다에 있어서, 거기서 지내다가, 나중에 합류하려고.”
그러니 대부분은 그냥 고향집에서 할 일 없이 놀면서, 대충 동네 헬스장에서 몸이나 만드는데 그친다.
비빌 언덕조차 없는 녀석들은 그저 막막함에 한숨이나 푹푹 쉬고는 하고.
이런 겨울나기에 대한 걱정으로 마이너리거들은 시즌 막바지에 들어서면 집중력을 잃고 성적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당장 나도 작년까지는 그랬지만, 올해는 다르다.
‘브라이언이 알아서 준비해준다고 했으니, 기다리다가 몸만 가면 되겠지.’
든든한 우리 에이전트님 덕분에 올해로 집 근처 헬스장은 안녕이니까.
트레이너들이 여자 회원만 밝혀서 꼴 보기 싫었는데, 올해는 안 봐도 되겠네.
아마 그 어느 때보다도 빡빡한 오프시즌을 보내야 할 테니까.
거기다 구단과의 협상으로 내년 메이저 스프링 캠프와 시범경기까지 확정됐으니,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고.
‘좋긴 좋네. 걱정 없이 마지막까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그덕에 마지막까지도 집중력과 경기력이 유지됐으니.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나한테 있어서는 역사적인 시즌이니까.’
최소한 나한테 있어서는 새로운 도약과도 같은 시즌이지.
모든 것이 달라졌으니까.
꺼져가던 빅리그를 향한 희망 역시 다시금 활활 타올랐고.
‘그런 시즌의 마지막을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야 없지.’
수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몸에 피로가 제법 쌓였지만. 예전과 달리 편안한 마음 덕분에 최소한 마지막을 장식할 정도의 여력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