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텍사스 특유의 열기로 가득했던 8월도 서서히 반환점을 돌아, 끝을 향해 달렸고.
시즌 역시 점점 더 마지막에 가까워졌다.
‘네 경기 동안 14실점.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보다 덜 맞았어.’
완봉 이후 네 경기를 치르는 동안 14개의 자책점이 추가로 올렸는데. 이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더 심하게 털릴 줄 알았거든. 적당히 ERA도 3점대까지 다시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고.
‘여전히 잘 먹히는 걸로 봐서는, 서클은 시즌 끝날 때까지도 잘 통할 것 같고. 거기에 쓰리핑거 체인지업이 쏠쏠하게 도와줬어.’
그런데 서클의 약발이 생각보다 더 오래갔다.
거기에 6월부터 손에 익히기 시작했던 스리핑거 체인지업도, 서클에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제법 잘 먹혔기에 성적은 예상보다 썩 괜찮았다.
‘그래도 고쳐야할 것들은 확실하게 알아냈어.’
그래도 예전보단 열심히 털린 것은 변함없기에, 급격히 상승한 기량으로 인해 가려졌던 단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단점은 부족한 구종으로 인한 패턴의 단순화다.
‘포심, 서클, 슬라이더, 커브. 이제 쓰리핑거 체인지업도 추가가 됐지만, 구종이 좀 부족하긴 부족해. 특히 그중에서도 위닝샷은 사실상 서클 하나로 통일됐고.’
현재 내가 가진 구종은 총 다섯. 파이브 피치니, 이게 뭐가 부족한가 싶겠지만, 막상 또 자세히 까보면 그렇지가 않단 말이야.
일단 커브는 돌발성 조커카드 수준이라, 사실상 전력 외니 제외하고. 쓰리핑거는 서클의 위력을 보조해주는 정도니,
실질적으로는 쓰리피치나 다름없지.
‘내가 불펜이었으면 적당한 거겠지만, 선발이니까.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패턴이 단조로워져서 쉽게 읽혀.’
변주를 주려고 해도, 가진 손 패가 별로 없으니 별수 있나.
물론 쓰리피치가 아니라, 투피치만으로 리그를 뒤흔든 선발투수들도 있지만,
그거야 그런 사람들이 난놈이라서 그런 거고. 지금 나한테는 그 정도 실력은 없다.
‘아직은 더블A라서 이 정도로도 적당히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심각해지겠지. 최소한 하나 이상 주력구를 더 만들어야 돼.’
빅리그를 위해선, 이번 오프시즌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구종 하나를 장착해야 하는데.
그 구종은 웬만하면 변형 패스트볼 계열인 게 좋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포심의 위력이 떨어지니, 변형 패스트볼로 헷갈리게 만들어야, 그나마 좀 덜 맞겠지. 물론 진짜로 구위가 좋아진다면, 또 말이 다르겠지만.’
결국 8월 이후 저조한 성적의 원인은 패스트볼의 위력이 떨어져서다.
제아무리 대단한 브레이킹볼이 있다고 해도, 결국 투수가 가장 많이 던지는 건 패스트볼이다.
만약 포심이 든든하게 받쳐줬다면, 지금보단 훨씬 나았겠지. 서클의 위력도 더욱더 올라갈 거고.
‘커터나 투심. 둘 중 하나만 장착해도 지금보단 훨씬 나을 거야. 때에 따라 맞춰 잡을 수도 있을 거고. 그러기 위해선 인스트럭터가 가장 중요한데···’
문제는 내가 원했던 양반을 모실 수가 있냐는 거지.
브라이언에게 부탁해서, 구단에 전달하기는 했지만, 워낙 대단하신 양반이라.
과연 나 같은 마이너 애새끼 가르치는 데에 흥미를 보일지가 의문이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커터, 투심, 둘 다 배울 수 있겠지. 나한테 맞느냐는 그다음 문제고.’
서서히 끝나가는 시즌.
명확하게 드러난 단점.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려던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브라이언? 무슨 일이에요?”
브라이언. 우리 에이전트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종종 연락하며, 내 몸 상태를 묻고는 했던지라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오늘은 용건이 달랐다.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좋은 소식, 그 말에 왠지 모를 기대감이 가슴 안쪽에 근질거렸고,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건지, 브라이언은 피식 웃으며, 가장 듣고 싶었던 소식을 전해줬다.
-그가 스프링 트레이닝 인스트럭터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정말로요? 진짜 제 개인 인스트럭터를 수락했다고요?”
-다만, 조건부 수락입니다. Go가 오프시즌 트레이닝에서 만족스러운 수준의 발전을 보였을 때, 인스트럭터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더군요.
“뭐, 그 정도가 어디에요? 무려 매덕스를 모셔오는 건데.”
내 말에 그 말이 맞다는 듯, 브라이언은 피식 웃었다.
그렉 매덕스. 라이브볼 시대 최고의 투수 중 한명.
그런 사람에게 배울 수 있다는 건데, 조건이 무슨 소용이야?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솔직히 일단 던져놓고도 정말로 될까, 싶었는데, 가능성은 생긴 거잖아?
“그런데 만족스러운 수준의 발전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스터프. 스터프가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판단이 되면, 흔쾌히 인스트럭터직을 받아들이겠답니다. 자료는 저희 측에서 지속적으로 보내주기로 했고요.
“스터프라, 나쁘지 않네요.”
-네, 원래 우리의 목표였으니까요.
애초부터 이번 오프시즌 트레이닝의 최대 목표는 스터프, 구위를 올리는 거였다.
구위를 적당수준까지 올리지 못하면, 어차피 빅리그는 꿈 속 이야기니까.
어차피 무조건 구위를 향상시켜야 하는데, 원래 목표를 달성하면 추가보상도 있다는 거잖아? 그것도 무려 그렉 매덕스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의 보상이.
‘보상이 이렇게나 두둑한데, 오프시즌 내내 똥 빠질 만큼 굴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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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8월의 마지막 등판을 앞뒀고, 시즌 막바지에 다다랐기에, 몸에는 제법 피로감이 쌓였지만, 매덕스라는 이름 석 자는 그 피로감을 싹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조건부 수락이라고 했지? 오프시즌 트레이닝 결과에 따라 수락한다고. 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심 있을 때 최대한 눈길을 사로잡아야 돼.’
위대한 투수라고 해서 코칭까지 잘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긴 다르겠지.
하나만 제대로 배워도 투수 인생이 달라질 테고 말이야.
그런 두근거리는 흥분감이 밖으로도 표출되는 건지, 경기 전, 불펜피칭을 받아주던 보 테일러가 눈썹을 씰룩였다.
“Suck, 오늘 컨디션 좋나봐? 공에 제법 힘이 실리는데? 요즘 따라 병 걸린 닭 같더니. 오늘은 좋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넌 그냥 공이나 잘 받아.”
저저, 못 배워먹은 놈 저거.
병 걸린 닭이라니! 성적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로 아주 투수 대우를 개판으로 하네.
말본새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보기에도 힘이 실리긴 한 것 같아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던지는 입장에서도 제법 공이 착착 잘 박히고 있고. 거기다 오늘은 상대도 딱 좋지.
‘러프라이더 애들은 아직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좀 괜찮겠네.’
오늘 경기 상대는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 타격 약한 놈들인데, 이번이 두 번째 맞상대다.
즉 쌓인 거 열심히 풀었던 놈들이랑 다르게, 얘들은 아직 나한테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거지.
워낙 두각을 내보인 탓에 서클을 잔뜩 의식하고 있을 테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단히 수월하지는 않겠지만. 괜찮은 상대라는 건 변함없었다.
타선이 약하기도 하고.
‘딱히 크게 위험한 타자는 없어. 대부분 파워도 약한 편이고.’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OPS가 7할이 넘는 타자조차 겨우 셋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8할이 넘는 타자는 아예 전무하다.
사실 러프라이더스만의 문제는 아닌게, 원래 시즌 막바지쯤 되면 리그 수준이 낮아지는 편이다.
이즈음에는 잘하는 놈들 죄다 올라가거든. 우리 팀도 타구 열심히 잡아주던 채프먼이 트리플A로 올라갔고.
다만 투수들은 트리플A가 심각한 탱탱볼 리그라서 그런지, 제 아무리 잘하더라도 더블A에 대부분 남아 있었기에, 리그 자체가 상당한 투고타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 혼자 타고투저하고 있지만, 오늘은 좀 다르겠지.’
간만에 손맛 좀 보기를 고대하며, 한구한구 정성스럽게 던져, 어깨를 충분히 달아올린 뒤 불펜을 나서자.
“어, S-word다!”
“Hey, S-word! 오늘은 좀 잘 해봐라! 이번 달은 너무 별로였잖아! 간만에 삼진 좀 10개만 올려 달라고!”
홈관중들이 평소처럼 환호하며 나를 맞이했다. 성적이 떨어진 뒤로 조금 환호성이 잦아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6~7월 두 달 간 보여줬던 게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약발이 좋았다.
“너 사실 미들랜드가 좋지? 그래서 더 안 올라가려고 일부러 쳐맞는 거잖아? 다 알고 있어.”
간혹 그 사랑이 지나쳐서, 저런 음모론을 펼치는 분들도 계신데, 그럴 리가 없잔수 이 양반들아.
아무튼 부진하면서 시들시들해진 에이스 팬들과 다르게, 미들랜드 내에서는 여전히 슈퍼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렇게들 좋아하는데, 간만에 좀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 도리겠지.
“오늘은 어떻게 갈까?”
“적당히 평소처럼 가다가, 쟤들 타격감 보고, 안 좋은 것 같으면 빡세게 가자.”
“그러다가 5회부터는 쓰리핑거 조금씩 섞고?”
마운드로 걸어가며, 함께 불펜에서 나온 보 테일러와 간략하게 볼배합을 논의했는데. 마지막 말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서클 잘 먹히면, 오늘은 쓰리핑거 참자.”
“왜? 이젠 쓰리핑거도 꽤 쏠쏠하게 먹히잖아?”
“그러니까, 서클로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아끼자고. 일정 보면 쟤들 다음달에 한번 더 만날 텐데. 쓰리핑거는 그때 쓰는 거지.”
“아, 오케이. 완전히 이해했어.”
“그래, 참 빠르기도 하네.”
얘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포수면 척하면 척하고 알아야지.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여 주자, 보 테일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충 녀석을 내려보낸 뒤 홀로 마운드에 서서 상대타자들을 훑어보자, 녀석들도 나를 봤다.
‘독기가 많이 빠지기는 빠졌네. 낄낄 웃는 놈들도 보이고.’
몇 경기 좀 못했다고, 타자들의 경계심이 확 낮아졌다.
이젠 좀 우습게 보인다는 거지. 8월 한 달에 한해서는 그럭저럭 리그 평균, 아니 그 이하의 투수였으니까.
‘후회할 텐데.’
내가 다른 놈한테 털렸다고, 너네한테도 털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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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거품 완전히 꺼졌던데.”
“사실 원래도 못하던 놈이었잖아? 갑자기 두 달 정도 잘한 거지.”
“서클은 아직 그대로라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돼. 저번에 만났을 때도 사실 서클 말고는 별 거 없었잖아?”
러프라이더스의 벤치에는 자신감이 흘렀다. 비록 그다지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고, 타자들 개개인 역시 저조한 성적만을 찍고 있지만.
상대 투수 역시 기세가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실 크게 난타를 당한 적은 없기에, 아예 무시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전의 성적이 워낙 대단했던 만큼, 조금 더 얕보이는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특히나 8월 이후로 새로 팀에 합류한 선수들은 고유석의 잘했던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더욱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고 말이다.
“쟤 구속 89마일 나온다며? 그 정도면 한숨 자고 일어나서 휘둘러도 맞겠네.”
“무브먼트도 구리다던데, 솔직히 이해가 안 되네. 성적이 좋은 게.”
“자자, 다들 집중. 다들 알다시피 상대 투수 서클 체인지업이 좋으니까. 조금 느리다 싶으면 웬만하면 건들지 말고 참아. 레퍼토리 뻔하니까, 웬만하면 승부 길게 가고.”
일종의 필승법이었다.
느리면 일단 참는 것.
고유석의 서클에 지독하게 당한 텍사스 리그 구단들이 찾아낸 방법인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생각보다 잘 통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꾹 참다가, 패스트볼인 것 같으면 냅다 휘두르다 보면, 하나쯤은 얻어 걸리니까.
기본적으로 스터프가 떨어지기에, 얻어걸린 공은 쉽게 외야로 날아갔고 말이다.
타격코치는 자신의 타자들에게도 그것을 주문하며 덕아웃에서 내보냈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지의 한복판인데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
선두타자가 타석에 올라가는 순간, 텁텁한 기운이 그들을 짓눌렀다.
무심한 듯 어깨를 돌리던 투수의 분위기도 한순간 바뀌었고, 타석에 오른 앤디 이바네즈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거품 꺼졌다더니, 무슨 압박감이 이렇게 쎄?’
강렬한 눈빛에 그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지난 경기의 기억이 되살아나려던 찰나.
애써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털어낸 이바네즈는 다시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배트를 쥐었다.
‘후, 쫄 거 없어. 이번 달 ERA가 5.32, 그냥 저번이 플루크였던 거지. 이게 원래 성적인 거야. 삼진은 여전히 좀 잡는 편이지만, 그래봤자지.’
그렇게 생각하며 타격자세를 취한 앤디 이바네즈였지만, 본격적인 승부가 시작되고, 초구가 날아들어온 순간.
“스트라이크!”
머리는 삽시간만에 하얘졌다.
‘서클은 여전하다더니··· X발 여전한 수준이 아니잖아. 그냥 그대로야.’
그 빌어먹을 놈의 서클 체인지업. 이미 텍사스 리그에서는 마구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조한 성적을 보고 서클 역시 좀 떨어진 줄 알았다.
여전하다고는 해도, 플루크가 끝났으니, 어느 정도는 질이 내려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온 초구는 처절하게 털렸던 지난 경기와 똑같았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한층 더 짜증스러워졌다.
또다시 서클 체인지업.
마치 서클이 패스트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이어 던진 투수는 잠시 숨을 골랐고, 그것은 마치 뜸들이기와 같았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이바네즈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해져갔으니까.
‘슬라이더? 포심? 설마 연달아서 또 써클? 계획을 알면 한번 꼬아서 서클을 다시 한번 집어 넣을 수도 있어. 아니, 하지만-’
고민이 꼬리를 물고 계속됐을 때.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고,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냅다 스윙한 이바네즈였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더럽게 높은 하이 패스트볼.
이런 거에 배트를 휘두른 건가? 스스로 그렇게 되물을 정도였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빠르면 패스트볼이라 생각하고 치라고? 말이 쉽지···’
쓸쓸한 걸음으로 타석에서 물러난 뒤에야 깨달았다.
느린 패스트볼. 부족한 구위. 그로 인해 쉬이 양산되는 장타 등등.
저 투수가 가진 단점은, 타이밍을 읽고 공을 맞힐 수 있을 만큼 투수에게 익숙해지지 못한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당장 우리한테는 그냥 6월 그대로라는 거잖아.’
그것은 곧 결과로 증명됐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투수는 흔들렸던 지난 경기들과는 달리, 플루크라고 떠들어댔던 한 달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타자들을 쓸어 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