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7화 (27/316)

27화

“빨리 오셨군요. 보라스 코퍼레이션의 본사가 보스턴에 있으니, 조금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른 아침, 빌리 빈은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연락하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나타나다니.

아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허나, 브라이언,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오히려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래 걸린 거죠. 저는 이 만남이 더 빨리 이뤄질 줄 알았으니까요.”

그 말이 맞다는 듯 빌리 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머리는 복잡했다.

‘결국··· 터져버렸군.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터졌어.’

29일 밤.

폭발적인 반응이 오클랜드를 휩쓸었고. 그건 날이 지난 30일에도 이어졌다.

트레이드 마감을 하루 앞둔 31일, 오늘은 더 말할 것도 없고.

9이닝 18K, 무사사구 완봉승.

그 엄청난 기록은 이미 터질 만큼 차오른 여론을 터트릴 기폭제가 되기 충분했다.

이미 몸아 달아올라 있었던 팬들이, 결국 들고 일어났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무실 밖은 요란한 전화소리가 가득했다.

그를 트레이드 할 생각이냐, 미쳤냐, X새끼들아 등등.

성난 팬들의 반쯤은 욕설에 가까운 전화를 퍼부으며 구단을 직접적으로 압박했고. 담당자들은 정신적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빌리 빈 그에게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부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아니라면, 굉장히 실망할 것 같으니까요.”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고. 앞에 앉은 브라이언은 맹수 같은 눈으로 빌리 빈 그를 봤다.

“어느 정도까지 바랍니까?”

사실상 항복 선언이다.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을 허용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허나 섣불리 패를 깔 생각은 없다는 듯 브라이언은 도리어 되물어왔다.

“구단이야말로,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빌어먹을 새끼.

뻔뻔한 얼굴에 욕설이 빌리 빈의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갔기에, 애써 눌러 삼킨 빌리 빈은 이미 내부 회의 끝에 도출된 조건을 이야기했다.

“40인 로스터 등록. 내년 스프링 트레이닝, 메이저리그 캠프 초청 및 시범경기 5경기 보장.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아뇨, 부족하죠.”

“Go는 마이너리거입니다. 이 이상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빌리 빈의 단호한 말에, 브라이언은 그저 진심이냐는 듯 피식 웃었고. 그 비웃음이 불쾌했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로스터 등록이야, 애초에 Go를 지키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조치이고. 메이저리그 캠프 역시 성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죠. 그러니, 지금 애슬레틱스가 제안한 건 결국 시범경기 출전보장 하나뿐입니다. 앞선 2달 동안 Go가 보여준 퍼포먼스와 그의 기대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론 부족하죠.”

“···후우,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십시오. 뭘 원하는 겁니까?”

하나씩 조목조목 짚으며, 정말로 이게 최선이냐는 듯 묻는 브라이언에 결국 마지막 인내심을 잃은 빌리 빈이었고. 그의 신경질 섞인 물음에도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시범 경기 5경기 출전보장. 이걸 이닝으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5경기. 적지는 않다.

메이저리그 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범경기이니, 눈도장을 찍기엔 딱 좋지.

허나 브라이언이 생각하기 이건 너무 불확실했다. 5경기라고 해놓고, 경기당 달랑 1이닝만 올릴 수도 있으니까.

“시범경기 18이닝 보장이 좋을 것 같군요.”

18이닝. 애매한 숫자 같지만. 한달 뿐인 시범경기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긴 이닝이다.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간 주전 선발투수들이 시범경기에서 보통 이 정도 이닝을 뛰니까.

한 이닝씩 끊는다고 해도, 연투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시범경기에서 투수에게 연투를 시키는 미친 감독은 없으니.

‘최소한 세 경기 정도는 선발을 시켜달라는 거군.’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잡한 함정을 깔아놓긴 했지만, 저 정도 에이전트쯤 되면 바로 알아차릴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그리고?”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Go를 위한 투수 인스트럭터를 고용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가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인물로요.”

“다음 스프링 트레이닝을 위한 인스트럭터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는 당연히 Go를 위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저는 지금 오로지 Go만을 위한 개인적인 인스터럭터를 말하는 겁니다. 다른 선수와 관계 없이 말이죠.”

대부분 메이저 구단은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어린 선수의 성장을 위한 인스트럭터를 고용한다.

코치의 경우 선수가 많다보니, 일일이 다 보살필 수 없기에, 몇몇 선수를 전문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일종의 멘토링인데, 에이스 역시 이미 다음 스프링 트레이닝 인스트럭터를 결정한 상황이나. 브라이언은 그 이상을 요구했다.

다른 선수들과 함께 배우는 정도가 아니라, 오직 고유석에게만 맨투맨으로 붙어줄 사람을 원했으니까.

“그것을 통해 Go가 성장할 수 있다면, 에이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게 마지막 요구입니까?”

예상보다 돈이 조금 더 나가겠지만, 브라이언의 말처럼, 구단에게 나쁜 일은 아니기에, 이번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빌리 빈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금 뜻밖의 요구가 나왔다.

“애리조나 가을리그. 초청이 온다면, 구단 차원에서 거절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어째서죠? 가을리그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는 건, 분명 Go에게도 이득일 텐데요?”

“필요한 경험이어야 이득이겠죠.”

애리조나 가을리그.

마이너 정규시즌이 모두 종료된 이후 가을부터 열리는 일종의 독립리그로.

메이저리그 각 구단에서 차출된 마이너리거들이, 각각 6개 팀으로 나뉘어, 9월 말부터, 10월까지. 한 달간 경기를 치른다.

선수들 대부분이 미래의 올스타들이고, 리그에서 서로 어울리거나, 아니면 맞상대하여 경험을 쌓는데.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고유석 역시 이번 가을리그에는 포함될 것이 분명하지만, 브라이언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지금 Go에게 애송이들과 어울리며 노닥거리는 건 시간 손해야. 오히려 남들보다 빠르게 비시즌에 돌입해서, 최대한 준비를 갖추는 게 우선이지.’

브라이언이 생각하기에, 고유석은 이미 충분히 완성적인 선수였다.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진 선수고.

그런 투수에게 경험이 더 필요할까? 메이저리거들과 어울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쓸모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40인 로스터 등록은 페넌트레이스 종료 이후에 이뤄지면 좋겠군요.”

“가을리그는 드래프트를 통해 지명하기는 하지만, 선수가 바란다면, 구단에서 거부하겠습니다. 그런데, 로스터 등록을 페넌트레이스 종료 후에 해달라는 말은···”

빌리 빈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고, 그것을 본 브라이언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얼추 예상이 갔으니까.

“확장로스터를 통한 콜업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네. 저와 제 고객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마도 착각하고 있었을 거다.

브라이언 자신과 제 고객이 당장의 콜업 같은 걸 바랄 거라고.

최소한 확장로스터를 통해 이번 시즌 안에 콜업하길 원한다고 생각했겠지.

사실 얼마 전까지는 자신도 그런 생각이 있기는 했다.

애슬레틱스는 투수진이 심하게 망가졌고, 고유석은 더블A에서 대단히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으니. 지금 당장 콜업해도 이상하지는 않으니까.

구단 내부에서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당장 투수 한 명이 아쉬운 시점이잖은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에서의 콜업은 Go에겐 그리 반길만한 일이 아니야.’

허나 전날의 통화로 생각이 바뀌었다.

전날, 전화로 긴밀한 대화를 나눴고, 그의 고객은 여전히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의지를 밝혔다.

당장은 자신이 빅리그에서 안 통할 것이라고. 아니, 처참하게 박살날 가능성이 높다고.

‘Go는 스스로를 대단히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이지. 그로 인해 어떤 것이 옳은지도 금방 파악하는 사람이고.’

노련한 빅리그 타자들은 구속이 느리고, 구위가 부족한 그의 패스트볼을 쉽게 공략할 거다.

그나마 좋은 슬라이더도 지금처럼 쏠쏠한 활약을 보이지 못할 거고.

결정구인 서클 체인지업은 개중에선 가장 잘 통하겠지만, 나머지가 받쳐주지 않으니, 지금보다는 위력이 떨어지겠지.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의 콜업은 오히려 Go에게 씌워진 이미지, 최고의 유망주라는 팬들의 환상만 깨트리겠지. 또한 망한 시즌, 침몰하는 배에 굳이 올라타서, 희생양으로 싸잡힐 필요는 없어.’

물론 메이저리거가 됐을 때 따라오는 보상 역시 만만치 않겠지만, 그 조금의 이득을 취하자고, 괜히 앞길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보다 더 확실한 준비를 갖췄을 때, 원하는 시점에 콜업되어 데뷔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바라시던대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어 기쁘군요. 오늘 요구한 사항들은 내부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서, 최대한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꽉 깨문 이빨 사이로 한숨쉬듯 새어 나온 말에 브라이언의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한 달간의 기나긴 싸움 끝에 드디어 승리를 쟁취했으니까.

‘최소한 그의 노력이 빛바래지는 않았군. 다행이야, 정말로.’

사실 승리보다는 이쪽이 더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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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 같다.

눈을 뜨는 순간 든 생각이다.

공 던지고 이틀 지났는데도, 여전히 온몸에 뻐근함이 가득하다. 몸살 걸린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미쳤지. 갑자기 완투를 다 하고, 부상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야.’

평소 6이닝에서 7이닝을 던지니, 그보다 2이닝 정도를 더 던진 셈인데, 피로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

거기다가 힘이 빡 들어서 전력투구도 많이 했으니, 체력소모가 더 심했을 테니까.

어깨 안 나간 걸 다행이라고 여기며,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어제 통화했을 때,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지. 오늘 만나서 협상할 거라고.’

트레이드 마감일은 내일이다.

원래는 7월 31일인데, 올해는 31일이 일요일이라, 마감기한이 하루 늦춰진 거지.

그러니 오늘 협상 내용에 따라 내 처지가 결정된다.

혹시 몰라서 짐은 미리 싸뒀다. 트레이드가 결정되면, 바로 이동해야 할 테니

어젯밤 뻐근한 몸 이끌고 끙끙 앓으면서, 대충 옷가지만 가방에 넣어 놨지.

‘웬만하면 좀 괜찮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터치하자, 화면에 불이 들어왔고.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먼저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숨도 한번 들이마신 뒤 확인한 메시지는 간략했다.

[에이스에서 모든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보호명단 등록 역시, 전날 의논했던 대로 시즌 종료 이후로 잡았고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Mr. Go – 브라이언(에이전트)]

한 차례의 어퍼컷. 소리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빅리그에 한 걸음 더 나아갔는데, 이 정도 세리머니는 해야지.

물론 내가 원했다면 가까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한 달하고 하루 뒤에 빅리그를 밟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가는 정도가 딱 좋다.

‘더블A니까 좀 먹히는 거지. 수준 조금만 높아지면 바로 개같이 털릴 거야. 그럴 바엔 조바심내지 말고 차근차근 땅을 다지는 게 나아.’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도 한 가지 가르침을 얻었다. 허상인지 아닌지, 진짜라도 내가 체득시킬 수 있을지는 별개지만.

‘서클 체인지업, 지난 경기에서 갑자기 바뀌더니, 9회에는 다시 돌아왔지.’

지난 29일에 나는 같은 구종인데 서로 판이한 두 가지 공을 경험했다.

낙폭이 덜한 대신 역회전성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과 역회전도 괜찮지만, 낙폭이 죽여주는 평소의 서클 체인지업 말이다.

갑작스럽게 변한 서클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특히나 우타자들에게는 쥐약처럼 군림했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지만, 진짜 중요한 건 마지막, 9회에는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는 건데···

‘대략적인 원리는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한 원인은 컨디션이다.

정점에 이른 컨디션으로 펄펄 끓어 넘치는 힘 덕분에 공을 제대로 채면서 묵직한 무게가 실렸고. 그 덕분에 수직 무브먼트가 상승하여, 덜 떨어지는 대신, 반대로 역회전은 조금 더 심해진 거지.

9회부터는 체력소모로 인해 다시 힘이 떨어지면서, 원래대로 돌아온 거고.

‘단순히 내 생각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있어.’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런 변화를 보이지 못했던 건 힘 때문일 거다.

죽을 둥 살 둥 던져도, 충분한 힘을 실지 못했던 거지.

어제는 컨디션 덕분에 조건이 딱 충족된 거고.

이 가정이 맞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긴다.

‘브라이언은 구위가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지. 무언가 다른 문제로 인해서 지금 구위가 나쁜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건네줬던 자료는 책상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다. 기대감에 애지중지 모셔놨지.

‘그 말대로 뭔가 나한테 문제가 있고, 그걸 해결해서 정말로 구위가 올라간다면. 체인지업도 저번처럼 변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던지는 힘에 차이를 주는 것으로 서클을 둘로 나눠서 던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낙폭이 심한 것과 역회전이 심한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말이다.

사실상 구종 하나를 더 가지게 되는 셈이지.

‘물론 가능 여부는 아직 모르지. 지난 경기 같은 서클을 내가 다시 던질 수 있을 지도 의문이고. 그냥 어쩌다가 잘 맞아서 그런 걸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기대 좀 한다고 돈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또 없는 사례도 아니니까.

타자에 맞춰서 같은 공을 조금 변주해서 던지는 투수는 종종 있고, 약간의 힘 조절을 하거나, 조금 더 비트는 것만으로 공은 놀라울 만큼 변하기도 하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자, 온 사방이 쑤셔온다. 아직은 좀 더 잠자코 누워 있으라는 것처럼.

‘연습피칭이라도 했다간, 바로 어깨 나가겠네.’

훅스와의 경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그냥 빈말이었는데, 이러다가 진짜로 한 경기 거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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