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쉽게도 7회에는 고작(?) 삼진 하나만 달랑 올렸다.
힘이 떨어진 건 아니다.
나머지 두 명도 돌려세우지 못했다뿐이지, 손쉽게 처리했으니까.
7이닝 13K 1피안타.
무실점, 무사사구.
이게 오늘의 성적인데.
평소라면 만족, 아니 대만족하고 내려갔을 텐데, 오늘은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어깨는 아직 멀쩡하다.
체력도 든든하고.
극도로 올라온 집중력 때문에 피로를 못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멀쩡했다.
‘투구수는 90개. 아직 1이닝은 더 가능해. 좀 절약하면 완봉도 가능하고.’
이닝에 대한 욕심이 큰 편은 아니다. 어깨가 내 재산인데, 알뜰살뜰 아껴서 써야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같은 기회를 평소처럼 흘려보낸다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Go, 체력은 어때? 어깨는?”
“멀쩡해요.”
“그래, 오늘도 아주 잘하고 있어. 그러면 다음 이닝을 마지막으로-”
“코치. 저 리미트 조금만 더 늘려도 되겠습니까?”
“···”
이런 내 생각을 이미 예상했던 건지, 벤치로 돌아가자 존 와스딘이 나를 반기는 동시에 제한을 걸려고 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빌라는 이미 아까 전부터 안 보였고. 이젠 산체스도 없네. 불펜으로 보낸 거겠지. 평소라면 교체 타이밍이니까.’
좀 미안하구만.
마무리로 올라갈 산체스야 이제 막 들어갔으니 그렇다고 쳐도.
불펜에 들어간지 제법 시간이 지난 아빌라는 어깨가 달아올랐을 텐데. 괜히 똥개훈련 시킨 셈이니까.
‘미안한 건 미안한 가고. 오늘은 무조건 끝까지 간다.’
대단한 성적이지만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아직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내려갈 수가 없었고, 그런 감정을 듬뿍 담아서 존 와스딘과 눈을 맞췄다.
“더 던지고 싶습니다.”
평소라면 무리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거부했을 존 와스딘이었지만, 진지한 내 모습 때문인지, 지금은 그저 한숨만 뱉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코치도 봐서 알잖아요? 오늘 내가 어떤 상태인지. 좋은 날이니까, 조금 더 욕심 내보는 거죠. 다음에 한 경기 걸러도 좋으니. 오늘은 끝까지 가보고 싶습니다.”
숨기지 않고 감정을 표출하자, 결국 존 와스딘은 난감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던지는 정도로 생각하겠지. 살짝 더 힘내는 정도로. 하지만 그 조금 때문에 네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그러다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겁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지. 그 말도 이젠 약빨 떨어졌어, 이 양반아.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기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다 박살 내버리라면서요? 아직 충분히 만족스럽게 못 박살 냈어요.”
설득에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그는 착잡한 듯 다시금 한숨을 뱉었지만.
마지막 말을 끝으로, 보란 듯이 팔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씨익 웃는 내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정신상태는 멀쩡해 보이기는 하네. 평소랑 똑같은 거 보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슬쩍 눈을 돌려 누군가를 봤고. 그 시선의 끝에는 크리스텐슨 감독이 있었다.
묻는 거겠지, 어떻게 할 거냐고. 섣불리 허락할 수 없는 문제기에, 최종 결정권자에게 선택을 미룬 건데.
그의 시선을 받은 라이언 크리스텐슨 감독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감독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존 와스딘은 벤치 한쪽에 비치된 전화기를 집었다.
“어, 나야. 아빌라 다시 벤치로 돌아오라고 하고. 산체스 들어오면 그냥 대기만 시켜. 불펜피칭은 시키지 말고.”
존 와스딘은 불펜과의 통화를 마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건지 의심스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나를 봤다.
“···후우, 체력 테스트하는 셈 쳐야겠지. 그래도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저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봐. 속이 후련할 때까지, 제대로 던져. 단, 무언가 이상이 보이는 즉시 바로 교체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그러더니 존 와스딘은 다시 짤막하게 숨을 뱉으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이번 경기에서 더는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
터덜터덜, 다시 마운드로 올라와, 대충 땅을 고르닥가 깨달은 건데.
‘스트라이드폭 일정하네.’
딱 디딤발을 내딛는 자리인데, 한 치의 엇나감도 없이, 오직 하나의 선명한 신발자국만이 찍혀 있었다.
7이닝, 90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최소한 스트라이드폭은 쭉 일정했다는 거다.
그만큼 내가 집중했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이 자국이야말로, 오늘 경기 내 피칭을 가장 잘 설명해줄 테고.
‘남은 타자는 여섯. 이닝을 허락받기는 했지만, 웬만하면 8회는 15구 안쪽으로 끊어야겠지. 그 이상 던진다면, 9회는 허락하지 않을 거야.’
대충 타자당 투구수 다섯 개 안쪽으로 끊어야 한다는 건데,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이미 앞서서 7이닝을 소화한 선발투수에겐 말이야.
‘다행히 아직도 서클은 타이밍을 못 잡고 있지만, 포심이나 슬라이더는 슬슬 읽혀. 힘도 좀 줄었고.’
한편으론 약간 아쉽다.
그래도 서클이 눈에 익기는 했을 테니, 지금부터 미완성인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섞어서 던진다면, 2이닝은 그냥 코웃음치고 막을 텐데.
애석하게도 오늘 서클 체인지업은 낙폭이 줄고, 역회전이 늘었기에, 잘 먹히지 않을 거다.
서클과 낙폭이 비슷하고, 구속과 툭구폼도 똑같은데,, 역회전은 없으니.
지금 쓰리핑거를 던지면, 그냥 배팅볼밖에는 안 되겠지.
‘욕심도 심하네. 이 정도로 만족해도 모자랄 판에, 그거 쪼끔 아쉽다고.’
아쉬움에 괜히 입술을 적시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사람 참 간사해,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이라더니, 지금 성적 찍은 것만 해도 엄청난데, 모자란 걸 아쉬워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욕심이 좀 지나치긴 하네.
‘그래도 앞으로 쭉 하위타선이라, 전체적인 타자들의 기량이 낮아서 게 다행이야. 또 아직까진 공의 위력이 크게 떨어지진 않은 것도 다행이고.’
긍정적인 점을 찾자면, 아직까지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찍어 누를 만하다는 것.
극단적인 피칭 때문에 삼진을 많이 잡았고, 나머지 아웃카운트도 많은 공을 소모하지 않아서, 투구수를 제법 아꼈고. 그 덕에 아직 여력이 남아 있다.
‘괜히 체력 아낀다고 살살 던지다가 하나 얻어맞을 바에. 잘할 수 있을 때 쏟아붓자.’
먼저 5번타자 데릭 피셔.
앞선 두 타석에서는 삼진 하나. 그리고 안타 하나를 기록했다.
훅스가 나한테 막힌 동안, 이미 점수차가 5대0으로 벌어졌기에, 이기기는 힘들다는 건 이미 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하나.’
그러니 팀의 중심타자로서 자존심이라도 챙기기 위해, 심기일전한 얼굴로 타석에 올랐지만, 결과는 5구째 삼진.
망설이지 않고 다섯 개 모두 전력으로 퍼붓자, 기세에 눌린 타자는 변변찮은 스윙조차 못 해보고 물러났다.
‘맥도날드. 오늘 별로 시원찮았어. 전체적으로 반응이 늦었어. 초구에 쉽게 배트가 나왔었고.’
다음으로 6번타자 체이스 맥도날드. 우타자인데, 오늘 경기 성적은 2타석 2삼진.
‘멀게 포심 하나.’
“스트라이크!”
‘다시 바깥쪽 서클 하나.’
“스트라이크!”
그렇게 2-0.
유리한 카운트를 잡았고, 남은 체력을 감안하면, 투구수를 아끼는 게 낫겠지만, 집착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하나 맞으면, 오히려 더 손해일 테니까.
‘이번에는 낮게 하나 빼고.’
“볼!”
‘마지막으로 하이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 하나.
‘마지막으로 댄리 바스케스. 더러운 인상만큼- 배트도 거칠어.’
7번타자 댄리 바스케스.
일부러 과감하게 슬라이더를 몸쪽으로 집어넣어, 범타를 유도했는데.
따악-하는 타격음이 내 머리에 경종을 울리던 찰나.
“아웃!”
툭 밀어친 타구를 맷 채프먼이 다이빙 캐치로 잡아줬다.
“우리 믿고 끝까지 던져! 죄다 잡아줄 테니까!”
“휘이이이이이익!”
글러브 속 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더니, 이내 자기 가슴을 치면서 소리치는데, 5회 이후로 적막했던 관중석에 다시금 휘파람 소리와 환호성이 새어나왔다.
채프먼의 제스처와 그런 소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니, 비장한 느낌마저 드는데, 솔직히 좀 부담스럽네.
누가 보면 진짜 기록이라도 도전 중인 것 같잖아.
그거 하나 맞는다고, 뭐 크게 달라진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잡고 그래.
이 사랑스러운 귀염둥이야.
아무튼 쓰리아웃.
아쉽게도 KKK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잘 넘겼다. 소모한 투구수도 12개니, 알뜰하게 아꼈다고도 볼 수 있지만.
‘12구가 그냥 12구는 아니지. 투구수 자체는 적게 소모했지만, 힘이 쫙 빠졌어.’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이번 이닝 내내 전력투구를 했기에, 소모한 체력으로만 따지면 12구가 아니라, 20구 이상을 소모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문제인 건데.···’
지금까지와 똑같이 무덤덤한 ㅍ정으로 벤치로 돌아갔고, 그걸 본 훅스는 좌절감에 빠졌지만, 이건 연기였다.
단 1이닝 만에 몸에 힘이 쭉 빠졌으니까. 7회 끝내고 돌아갔을 때만 하더라도 체력이 넘쳤는데. 막판에 너무 무리한 것 때문인지 어깨가 공허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능할까? 한 이닝 더.’
9회 초 훅스 타순은 8-9-1.
그럭저럭 쉬운 타선이지만. 섣불리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멍한 얼굴로 덕아웃에 돌아와, 다시금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차분하게 고민했다.
Go? Stop?
이미 엄청난 성적이기는 하다. 8이닝 15K. 이거만 놓고 봐도 말도 안 되는 기록이지.
‘이 정도면 충분한가?’
여기서 멈추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다. 경악스럽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의 성적이니까.
경기장을 채운 관중들이 그걸 보증해줬다. 채프먼의 호수비에 감탄한 걸 제외하면, 멍한 얼굴로 박수만 치잖아.
평소라면 난리부르스를 추고도 남을 양반들인데 말이야.
‘그런데··· 좀 애매하잖아. 그럴 바엔 그냥 7회에 내려가고 말지. 기왕 8회까지 던진 거, 그냥 깔끔하게 완투하는 게 더 보기 좋을 것 같은데.’
“Go, Go!”
“아, 네. 왜요?”
고민에 잠긴 나를 일깨운 건, 걱정 어린 존 와스딘의 목소리였다.
잘 던지고 돌아와서, 갑자기 멍하니 있으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직 괜찮아요.”
거짓말은 아니다.
솔직히 진짜 힘들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다.
어딘가 몸이 결리다거나, 뻐근하다거나 한 곳도 없고.
이래서 평소에 스트레칭을 충분히 잘 해줘야 돼. 좀 무리해도 멀쩡하잖아.
“···산체스 이미 준비 중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매혹적인 속삭임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니까.
썩 물러가라, 사악한 마귀야. 어디서 세 치의 혀를 놀리느냐.
“코치랑 선수 말고. 서로 투수의 입장에서 말해봅시다. 코치 같으면 멈추겠어요? 여기서?”
“아니, 아니겠지.”
“뭐, 그런 거죠.”
오히려 덕분에 정신이 다시 바짝 들었다. 그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처맞더라도, 올라가서 처맞는 게 답이다.
내 말에 피식 웃은 존 와스딘은 이내 타격코치에게 다가가 속삭였고. 그에 고개를 끄덕인 타격코치는 주섬주섬 준비하는 타자들에게 소리쳤다.
“최대한 투수 공 길게 보고, 웬만하면 스윙 자제해. 그렇다고 너무 길게 끌지는 말고.”
그 지시를 들은 타자들은 흘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특히 포수인 보 테일러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뜨거운 눈빛을 쏘아보냈다.
‘그래도 좀 앉으니까 살겠네.’
누가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줄 착각할 만큼, 타자들이 질질 이닝을 끄는 사이, 똥 빠지게 던지느라 소모된 체력이 좀 채워졌다.
열심히 우적우적 씹어 삼킨 아몬드도 도움이 됐고.
‘근데 이거 누구 거지?’
그냥 벤치에 한 봉지 있길래 깔끔하게 비웠는데, 막상 다 먹고 나니까 마음에 걸리네.
마이너리그다 보니, 구단에서 따로 선수들의 간식거리를 챙겨주지는 않기에, 누군가 개인적으로 사다 놓은 걸 텐데, 정작 내가 다 먹었네.
‘뭐, 아무튼 잘 먹었으니까 된 거지. 누군지 몰라도, 완봉하면 열 배로 갚아준다 내가..’
빈 봉투를 대충 쓰레기통에 쑤셔 넣자, 딱 공격이 막을 내렸고. 자리 털고 일어난 나는 다시 글러브를 집었다.
“Go. 준비됐어?”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존 와스딘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까 전의 문답으로 어차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저 내 준비를 물었고. 나는 그저 씨익 웃었다.
‘아홉 번쯤 왔다갔다하니까, 이제 슬슬 내 집 같네. 위에서 이불 깔고 자도 되겠어.’
내 것처럼 익숙해진 마운드로 천처히 걸어가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처음에는 한,두 명 정도가 낸 건지, 소리가 작았는데, 점점 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는 웅장해졌다.
‘오···’
관중석을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날 싫어했던 깐깐한 영감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계시고.
‘선택 잘했네. 쫄보처럼 굴었으면 못 봤겠지.’
박수는 마운드 위에 설 때까지 지속됐고, 모든 힘을 소모한 듯, 공허했던 어깨는 다시금 무언가로 가득 찼다.
그라운드를 살피자, 야수들도 관중들과 비슷한 눈빛을 띠며, 글러브를 팍팍 때렸다.
‘좋아, 끝까지 가봐야지.’
당당하게 홈 플레이트를 노려보자, 걸어오던 선두타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발걸음이 더뎠다.
털 난 사내새끼가 하는 짓이 제법 귀여워서 피식 웃어줬더니, 아주 기겁을 하네.
‘아웃카운트 단 세 개. 쉽지, 별거 아니야. 오늘 잡은 것만 스물네 갠데.’
타석에 올라온 타자와 눈을 맞추며 다시 초구를 던진다는 마음으로 첫 공을 던졌고.
“X발.”
맞았다.
과감하게 포심을 던졌는데, 바로 배트가 나왔다. 다행히 파울.
깜짝이야, 노리고 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정타가 아니라 살짝 빗맞았으니까.
구위가 많이 떨어졌을 텐데, 만약 컨택이 제대로 됐다면, 그냥 넘어갔겠지. 아무리 하위타선이라고 해도.
마지막에 와서 망칠 뻔했네.
‘어우, 심장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타자를 보니, 타석에 올라오면서 덜덜 떨 때는 언제고, 제법 자신감이 올라와 있다.
‘구속이··· 83마일. 해볼 만하기는 하네. 누가 봐도 힘이 떨어졌으니까.’
솔직히 이 정도면 내가 빠따 잡고 타석 들어가도, 눈 감고 열 번쯤 휘두르다 보면 홈런 하나쯤은 나올 거다. 타자 입장에선 충분히 자신감 가질 만 하지.
‘그래도 카운트 벌었으니까. 좋게 생각하자. 그러면 다음은···’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클 체인지업. 나도 슬라이더랑 서클 중에서 고민했었기에,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쓰읍- 하.”
긴 심호흡. 그리고 와인드업.
오늘 경기 내내 찍힌 곳을 다시금 강하게 짓밟으며 공을 던졌고, 날아가는 공을 눈으로 담았다.
‘어? 뭐야?’
“스트라이크!”
뚝 떨어지는 공에 타자도 당황했고, 포수도 당황했고, 나도 당황했다.
뭐야, 갑자기.
‘힘이 빠져서 그런 건가?’
오늘 경기 내내 미칠듯한 역회전만 뽐내던 서클 체인지업이, 갑자기 또 평소처럼 뚝 떨어졌다.
이미 체력소모가 심했기에, 다른 경기랑 비교하면 위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제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수고했다, 새끼들아. 이제 꺼져라.’
게임 끝났는데.
####
-스트라이크 아웃!
브라이언은 평소처럼 마이너 중계를 틀어놓고 업무를 처리했지만. 조금씩 경기가 이어질수록, 손놀림은 느려졌다.
결국 9회에 이르러서는 아예 손을 놓아버린 채, 경기 화면에만 빠져들었고. 그의 얼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뒤덮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친숙해질 지경이다.
주심의 삼진콜이.
계속해서 듣다보니, 아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제 몇 개째지? 아니, 그보다도 왜 오늘은 9회까지 오른 걸까? 평소에는 6회나 7회에서 끊는데.
투구수를 절약하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조금 더 많이 던진 건 사실이다.
‘···내가 제대로 일을 못 해서 그런 거겠지. Go도 상황을 알았던 거야.’
어쩌면 흥만 올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브라이언 자신이, 자신의 무능이 등을 떠민 걸지도 모른다.
-스트라이크 아웃!
완벽하진 않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아름다웠던 경기의 마지막을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장식한 화면 속의 고유석은 저화질의 중계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브라이언은 왠지 저 손끝이 가리키는 게 자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애슬레틱스일지도.
아니, 둘 다겠지.
9이닝 1피안타 18K.
무사사구 완봉승.
그것으로 중계는 끝났고, 화면은 새카맣게 물들었지만, 브라이언은 여전히 검은 화면만 멍하니 봤다.
해야 할 일들, 앞으로의 계획을 잠시 미뤄둔 채로, 그렇게, 조금 긴 시간동안.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대로 얼어붙은 그를 깨운 건,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였다.
‘누구지?’
늦은 시간, 전화할 사람은 없다. 고객들이야 언제든지 에이전트를 찾고, 다른 에이전트들에게 선수를 좀 넘겨줬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가 맡은 고객은 고유석 외에도 조금 있다.
그러니 그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 브라이언은 휴대폰을 집었지만, 화면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떠 있었다.
-브라이언.
지친 듯 쇳소리가 가득한 목소리. 당장 오늘, 완봉승을 한 투수니까. 지치고 힘들 수밖에.
그 목소리에 브라이언은 그저 죄인처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 할 만큼 했습니다. 그러니, 브라이언은 제값을 톡톡히 받아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낸 그가 대답했지만,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스피커너머로 들려왔다.
“편히 주무십시오.”
그래, 게임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저, 응당 받아야 할 전리품을 챙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