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인터넷 좀 보고 있거든. 매번 고셋에게 빌리기는 뭐하기에, 고장난 노트북 수리해서 말이야.
‘장난 아니었지. 띄워주는 기사가 좀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열광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에이스의 팬들은 나를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 빅리그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암울한 애슬레틱스를 영광의 길로 인도해줄 구원자 말이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내 이름으로 가득해지는 팬 커뮤니티들은 살짝 공포심마저 들 정도였다.
‘반응은 엄청나지만, 뭔가 생각처럼 일이 잘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고.’
허나 그것으로 부족한 것 같다. 최근 들어서 통화할 때 브라이언의 목소리에 조금씩 확신이 사라져갔으니까.
협상이 시작되면 무언가를 요청할 거다, 보호명단에는 무조건 오른다, 다음시즌 메이저 시범경기도 선발로 뛰게 해주겠다. 가르침을 받는다면 어떤 투수가 좋겠느냐 등등.
매번 통화할 때마다 하나씩 늘어났던 협상조건도 저번 통화에서는 싸그리 사라졌다.
그저 자신이 다 책임질 테니, 평소처럼 경기와 피칭에만 집중해 달라고 말했을 뿐.
눈치 둔한 놈들이라도 딱 알 수 있지. 판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걸.
‘아직도 부족하다는 건가? 구단을 협상장에 앉히기엔.’
지금 성적조차 부족하다고? 아니, 이렇게 잘했는데?
당장 빅리그에 데뷔 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유망주 대우조차 못해줘? 구단은 날 얼마나 낮게 보고 있는 거지?
“Go.”
“코치.”
“가서 다 부숴버려.”
대체 얼마나 더 잘해야 돼?
의문심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오기도 생겨났다. 오냐, X발, 어디 한번 끝까지 버텨봐라.
턱이 부서지고는 못 배길 만큼 성적을 아가리에 쳐넣다 보면, 언젠가는 손을 들겠지.
불펜을 나가기 전, 존 와스딘은 씨익 웃으며 어깨를 두들겼고.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열었다.
마운드로 향하는 발걸음마다,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은 여러 가지 환호성이 반겨줬다.
에이스의 팬들이 나를 미래의 구원자로 보고 있다면, 미들랜드의 사람들은 현재의 슈퍼스타로 여기고 있다.
‘하긴, 여기서 올린 성적이 얼만데···.’
직접 공을 던진 내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 없는 성적인데, 그들은 홈관중으로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이러는 것도 당연하지.
그놈의 S-word 소리도 이제는 그냥 해탈한 듯, 감미롭게만 들렸고. 그런 목소리를 레드카펫삼아, 차분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볼배합은 오늘도 평소처럼 갈까? 이번이 세 번째기는 해도, 어차피 쟤들 손도 못 댈 거 같은데.”
원래 오늘 경기 계획은 볼배합을 살짝 바꾸는 거였다. 삼진을 좀 덜 잡는 걸 감안하고, 조심스럽게 가는 거였지.
브레그먼이라는 X같은 괴물이 빠졌다고는 해도, 이번이 세 번째 대결인 만큼, 좀 얻어맞을 테니까.
하지만 직접 불펜에서 공을 받아본 보 테일러는 생각이 바뀐 듯했다. 오늘도 절대로 못 칠 거라며 확신하기도 했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니.”
“으음, 하긴, 볼이 좋기는 해도, 역시 좀 위험하겠-”
“더 공격적으로 가자.”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불펜에서 느꼈던 것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이다, 질질 끌린 힘 싸움을, 줄다리기를 끝내는 날은 바로 오늘이다.
‘끝까지 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올 생각이라면, 집째로 태워버리면 되는 거지.’
내 말에 무언가 느낀 건지, 보 테일러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홈 플레이트로 내려갔다.
“쓰읍- 하.”
홀로 남은 마운드.
길게 숨을 내뱉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살이 익는 듯한 무더위가 경기장을 덮쳤는데도.
이상하게 입안이, 몸속이 더 뜨거워서 그런지, 숨을 들이마시자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열기를 표출하고 싶었는데, 딱 기세 좋게 타자가 홈플레이트로 올라왔다.
‘알레한드로 가르시아. 우타자지만, 지난 경기에선 서클보단 슬라이더에 더 취약했어. 궤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배트 스피드가 느려서, 전력으로 꽂아 넣으면, 빗맞은 파울을 자주 만들었지.’
지난 경기들에서 얻어낸 정보를 떠올리며, 타자가 아닌, 주심을 노려봤다. 뭐해? 시작 안 하고. 준비 다 끝났는데.
“플레이볼!”
빨리 시작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슬쩍 그라운드를 훑어보고, 손목도 확인한 주심은 곧 우렁차게 외쳤다.
내 눈빛에 쫀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준비도 됐고, 시간 됐으니까, 시작한 거겠지.
마이너 심판이라도 짬밥이 얼만데, 좀 노려봤다고 쫄겠어? 그냥 버릇없는 애새끼라고 생각하고 말지.
‘슬라이더는 아껴두고. 일단 카운트부터 잡자.’
포수를 보자 딱 적절한 사인을 보냈다. 몸쪽으로 딱 붙은 패스트볼.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90마일 한번 찍어봐라!’
깊은 소망을 담아 이번 경기의 첫 번째 공을 던졌고. 과감하게 들어온 초구에 타자는 배트를 움찔거렸다.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아주는 주심. 깊이 들어왔는데도, 스트라이크가 올라갔으니, 타자로선 불만을 표출해볼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놀랐을 뿐.
‘쯧, 89마일이네. 아니, 인간적으로 이런 날은 90마일 찍혀야 하는 거 아니냐? 진짜 죽이게 들어갔는데.’
그래, 놀랍겠지.
처음부터 최고구속을 찍어서?
그럴 리가 있나. 그래봤자 아직 80마일대인데, 이게 뭐가 놀라워.
진짜는 구위지.
여전히 평균보단 조금 아래겠지만, 타자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익숙해졌던 것과 비교하면 느낌이 다를 거다.
‘그러니 오늘은 평소보다 정타도 적게 나오겠지.’
내 피칭의 가장 큰 위험은 가벼운 패스트볼로 인해, 일단 맞으면 정타가 나오기 쉽다는 거다.
실제로 6월 이후 지금까지 나온 피안타들을 살펴보면, 빗맞은 안타도 몇 개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잘 맞은 직선타구, 즉 라인드라이브가 많았지.
배트를 힘으로 밀어낼 수가 없기 때문인데, 오늘은 그에 대한 위협이 평소보다 확연하게 줄어들 거다.
그러니···
‘더 과감하게 찔러도 된다는 거지.’
2구, 서클 체인지업.
지난 경기의 마지막 타석에서는 정확하게 따라갔었다.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긴 했지만, 상당히 멀게 갔었지.
그 감각이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있다면, 오늘은 그때보다 조금 더 빨리 타이밍을 잡겠지만.
“스트라이크!”
그건 내가 그대로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고.
체인지업이 나올 타이밍이라는 걸 알기에, 이번엔 타자도 망설이지 않고 배트를 휘둘렀고. 축적된 경험으로 계산한 건지, 배트가 낮게 돌았지만. 결과는 헛스윙 스트라이크.
타자의 얼굴을 보니,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난 저런 표정 보면 기분이 참 좋더라.
‘죽이지? 나도 보고 깜짝 놀랐어.’
서클 체인지업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보는 건, 지금처럼 타자의 헛스윙이다.
서클인 걸 알든 모르든, 무지막지한 낙폭에 껌뻑 속아서 선풍기 질을 해대지.
허나 오늘은 살짝 다르다.
‘낙폭을 계산한 건가? 낮게 휘둘렀네. 좋은 생각이지만, 오늘은 아니야.’
포구 위치가 평소보다 높이가 살짝 높다. 그 대신 더 옆으로 이동했고.
‘약간씩 바뀐 거지만, 타석에서 보기엔 완전히 다른 구종 같겠지.’
낙폭이 조금 덜해진 대신, 더욱 급격하고 날카로워진 역회전.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것에서 조금 달라진 공에 타자의 눈동자는 심각하게 흔들렸고. 슬쩍 고개를 돌려, 대기타석과 벤치에 있는 다른 놈들을 보니, 죄다 비슷한 눈빛이다.
‘자, 이제 얌전히 꺼져라.’
멍한 타자를 가만히 내버려둘 만큼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라서, 어영부영 자세를 잡는 즉시 다시 공을 쏘아 보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기존에도 약점이었던 슬라이더. 과감하게 존안으로 집어넣자, 손도 못 대고 물러났다.
반대손의 슬라이더에 약하다니, 쟤도 참 막막하겠어.
‘자, 다음 어떤 찌끄래기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대기타석을 노려보니, 후속타자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괜히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당혹감이 물씬 느껴지는 모습에 괜스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자제시켰다.
공 좋다고 신냈다간, 그때부터 얻어맞을 테니까.
물론 약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강력한 힘에 스스로 취해, 자신감 있게 공을 던지면서도, 약간의 자제력을 갖춘다면.
“스트라이크 아웃!”
그게 진짜 무서운 투수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타자들이 바라보는 지금 내 모습은.
“아웃!”
X나게 무서운 투수겠지.
삼구삼진. 삼구삼진. 2구땅볼.
1회를 끝내는데 소모한 투구수는 단 여덟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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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관중들의 환호성에 시끄러웠던 경기장인데, 지금은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고, 덕아웃 안은 차가웠다.
한여름의 텍사스인데도 말이다.
“이번 이닝은 무조건-”
“저번 경기 때는 이 정도는-”
“무슨 공이 그렇게-”
경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아직 많은 이닝이 남아 있고.
올라갈 타석도 제법 남았다.
그런데도 타자들의 입에선 이미 패배한 패잔병의 한탄과 비슷한 말들이 새어나왔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이게 현실이라고?
그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만큼, 경기는 냉혹했다.
‘갑자기 잘해지더니, 오늘은 또 뭐야 대체. 그게 끝이 아니었다고?’
원래 못했던 투수다. 정정한다, X나게 못했던 투수다.
근데 6월이 되더니,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더럽게 잘해졌다.
한때 그들의 동료였던 브레그먼처럼, 리그를 폭격했고. 휩쓸었다.
타자와 투수라는 포지션만 다를 뿐, 상대하는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똑같겠지.
그게 저 투수의 정점인 줄 알았는데. 뭐가 더 남아 있었던 건가? 오늘 마운드에서 선보인 모습은 조금 더 달라졌다.
“구속은 그대로지?”
“어, 패스트볼도 여전히 80마일대에서 놀고. 나머지도 비슷해. 예전이랑.”
“근데 왜 더 빠르게 느껴지냐··· 아니, 더 날카로워.”
“···그냥 오늘 좀 미쳤나보지.”
패스트볼은 평소보다 무겁다.
물론 여전히 다른 투수들이 던진 것과 비교하면, 느려 터지고 힘도 부족하지.
하지만 그런 다른 투수들이 가지지 못한 다른 것들이 저 투수에겐 있었기에 약간의 상승만으로 무게감이 달라졌다.
“아웃!”
“오늘은 슬라이더도 날아다니네. 원래도 좋은 편이긴 했지만···”
“힘이 장난이 아니더라. 무슨 커터 같던데?”
이번 이닝 선두타자를 아웃시킨 슬라이더 역시 오늘은 그 힘이 남다르다.
구속도, 꺾이는 폭도, 다 이전이랑 비슷한데, 마치 잘 던진 커터처럼 배트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우타자들조차 간신히 빗맞은 땅볼이나 만들 수 있었고, 좌타자들은··· 그냥 넋이 나갔다.
마지막으로 서클 체인지업은···
“서클··· 맞지? 오늘은 다른 거 던지는 것 같은데.”
“다른 거?”
“그, 뭐야, 역회전하는 거 있잖아. 요즘 안 쓰는 거. 스크류볼이던가?”
아니, 서클이 맞긴 맞나? 그냥 다른 구종이었다.
앞서 언급한 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처럼, 오늘따라 유독 힘이 더 강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완전히 다르다.
“스트라이크 아웃!”
“Fuck!”
또다시 올라간 삼진.
죄다 헛스윙이다.
이전 경기에서는 종종 루킹 삼진도 자주 나왔는데, 오늘은 저 서클에 당하면 그저 헛스윙 삼진뿐이었다.
왜냐고?
“눈앞에서 사라져. 칠만 했던 거 같았는데···”
“그건 아닐걸.”
“뭐 이 새끼야?”
“너 까는 게 아니라, 그냥 스윙이랑 엄청 멀었어. 여기서 봐도 보이더라.”
오히려 눈으로 보기에는 예전보다는 더 치기 쉬운 느낌이거든. 떡하니 들어오니까.
그런데 못 친다.
분명 시야에 잡힐 만큼 비슷하게 들어왔는데, 마지막 순간 확인하면 저 멀리 사라져있다.
몇몇만 느낀 건 아니겠지. 당한 타자들 죄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그냥 저렇게 생겨먹은 공일 테니까.
“자, 서클 들어간다.”
‘지랄하고 있네···’
휙휙 쓰러지는 타자에, 기세등등해진 포수는 종종 트레쉬 토크의 일환인지, 대놓고 구종을 말하기도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다른 구종을 던진다는 걸 알아서?
“스트라이크 아웃!”
‘이게 어떻게 서클이야?’
아니, 저게 이전 경기들에서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서클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또 삼진이네.’
오늘 경기에서만 세 개의 삼진을 올린 알레한드로 가르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참하게 발리는 것보다, 적막한 경기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계속 그랬던 것처럼 환호하고, 열광하고, 그 S-word인지 뭔지 하는 X같은 챈트를 하는 게 낫지.
‘우리가 퍼펙트나 노히터를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관중들은 그저 압도되어 있었다. 공포에 질린 훅스, 자신들처럼 말이다.
6이닝동안 12개의 삼진을 당했지만. 간신히 빗맞은 안타 하나가 나오기는 했다.
그러니 언급하면 부정 타는 대기록 같은 건 이미 없는 셈이지.
그런데도 관중들은 마치 감히 소리를 내뱉는 게 대단히 불경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짤막한 박수로 감정을 표현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아까 전부터는 맥주나 팝콘, 나초 같은 간식거리조차 집어먹지 않았고.
‘X같네.’
시원하게 박살난 자신감. 처참하게 털린 자존심. 제물로 바쳐진 것 같은 절망감.
수많은 감정이 타자들에게 몰려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X같은 건.
‘끝까지 안 내려갈 거 같은데···’
이 악몽이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6회가 끝난 지금 투구수는 이제 겨우 79개에 불과했고. 터덜터덜 마운드를 내려가는 투수의 얼굴에서도 여전히 만족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