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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23화 (23/316)

23화

잘하면 된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말이다. 가타부타할 거 없이, 명확하게 딱 떨어지잖아?

“스트라이크 아웃!”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잘하는 거, 타자를 잘 잡는 거면 충분하다는 거니까. 어렵지만, 마음은 훨씬 편하네.

‘아까 보니까 몸쪽으로 높게 넣으니까, 스윙이 엉망으로 나오던데.’

“아웃!”

‘오늘 공이 좀 잘 받네. 타자들 타격감도 별로 안 좋고.’

편안한 마음과 적절한 컨디션.

그 두 가지가 조합되면, 이닝은 순식간에 지워진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포수도 충분한 도움을 줬기에 더욱더 빠르게 지워졌고.

4회 초 투아웃.

4번타자 프랭크 슈윈델이 타석에 올랐고. 지난 타석에서 안타를 하나 기록했었기에 먼저 신중하게 낮은 볼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어··· 네?”

“맞으니까, 의심하지 마.”

“으음···”

낮게 들어간 서클 체인지업, 애매한 코스였기에 타자는 조금 긴가민가한 듯싶었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고. 타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구안이 제법 좋네. 딱 캐치하는 걸 보면. 확신은 못하는 걸 보니,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방금 건 볼이다. 내 스스로도 볼을 생각하고 던졌고. 지금까지 확인한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저것보다는 살짝 높다.

그러니 타자의 눈이 정확했던 거지. 주심과 언쟁을 벌일 정도의 확신까지 얻지는 못했지만.

‘저걸 스트라이크로 만들어주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짬밥이 다르긴 다르구만.’

사실 지금 것 외에도 경기 내내 몇 차례 비슷한 일이 반복됐었다.

앤더슨의 노련한 프레이밍이 공 반 개 정도 차이의 볼은 대부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켜줬거든.

이런 거 보면 좋은 포수가 있는 게 참 좋긴 좋아. 적당히 찍어서 던지면, 카운트 알아서 벌어주잖아?

거기다가 종종 산타처럼 선물도 하나씩 안겨주고 말이야.

“볼!”

“파울!”

기분 좋게 웃으면서도, 신중하게 카운트를 쌓았다. 이미 안타를 하나 쳤던 타자니까.

‘낮은 걸 퍼 올렸었지?어차피 카운트는 유리하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떨궈보자.’

낮은 서클 체인지업. 아니, 많이 낮은 서클 체인지업이 맞겠네. 타자의 배트가 나올 걸 예상하고 하나 던져봤는데.

배트가 나오긴 나왔으나.

“볼!”

아쉽게도 중간에 멈췄다.

거의 바닥을 꽂히다시피 한 체인지업을 잡은 앤더슨은 3루심에게 손짓했지만, 아쉽게도 판정은 유지됐고.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게 공을 던져줬다.

‘오, 선물 하나 왔네. 바운드가 됐었구만.’

주심에게 새로 받은 공이 아니라 방금 막 던진, 바닥에 긁히고, 왠지 좀 꼬질꼬질한 공을 말이다.

마지막 순간 공을 휙 잡아채며, 포수 글러브로 덮었기에, 바운드가 된 건지, 아닌지 조금 애매했는데. 흙이 묻은 걸 보아 마지막 순간 살짝 바닥을 찍은 것 같다.

3루심에게 물어본 건 그냥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행위고, 진짜는 이거였네.

‘고놈 참 회전 잘하게 생겼네. 아주 딱 좋게 생겼어.’

부정투구 아니냐고? 여기에 바셀린이나 파인타르 바른 것도 아니고. 손톱으로 긁은 것도 아닌데. 부정투구일 리가··· 있지.

근데 어떡해? 주심이 새 공 안 줬잖아? 다들 별말 없고. 그러면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는 거지.

원래 선발투수란 게 고독하고 외롭고, 팀의 승패를 책임지는 자리라 참 부담스러운 직업이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선물도 있고 그래야 야구할 맛나고 그러는 거지.

‘자, 이거까지 치면 내가 인정해준다.’

긴 와인드업. 손가락으로 꽉 잡아챈 공을 뿌리며 얌전히 결과를 지켜봤다.

이번에는 슬라이더.

바깥쪽으로 나갈 정도로 던졌고, 유인구라 판단한 타자는 참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각 자체가 달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급격하게 꺾이며, 마지막 순간 존을 스친 공은 프레이밍까지 겹쳐지자, 그 누구도 뭐라할 수 없는 완벽한 스트라이크로 둔갑했고.

루킹삼진을 알리는 요란한 목소리에 타자는 그저 허망한 표정으로 타석에서 물러났다.

“하하하, Go 장난이 아닌데? 던지는 족족 다 쓰러지네. 공 받는 거 말고 하는 게 없어서 좀 민망할 정도야.”

“포수가 공만 잘 받으면 되는 거죠. 한 게 없긴요, 앤더슨 씨가 만든 스트라이크만 몇 갠데. 그리고 선물 고맙습니다. 슬라이더가 아주 멋지게 꺾이던데.”

“선물이라니? 흐흐, 그냥 좀 잘 채인 거겠지.”

그것으로 이닝 종료.

홈 플레이트로 내려가니, 앤더슨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온갖 립서비스를 남발하며 반겨줬고. 그에 내가 은근하게 말하자 마찬가지로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이번 이닝까지 4이닝 5탈삼진 1피안타 무실점 무볼넷. 오늘도 경기는 순항 중이었다. 아마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까지 계속 순항할 것 같고.

####

-스트라잌~!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요란한 삼진콜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이너리그 경기다 보니, 중계방송의 수준이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걱정이 많아 보이더니, 막상 경기에 들어가니 다르군.’

브라이언은 피식 웃었다.

그의 새로운 고객은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건지, 스스로 꽤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어렴풋이 느껴졌고.

그런데 정작 마운드에 올라선 모습은 질 나쁜 중계화면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매섭다.

또한 대단히 폭력적이고.

‘오늘도 10개를 채웠군. 하나 더 잡는다 치면 7이닝 3피안타 1볼넷 11탈삼진인가?’

이미 탈삼진만 85개. 남은 한 명까지 삼진으로 잡는다면 86개로, 다른 경기들의 결과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리그 2위까지 도달하는 셈이었다.

K/BB는 이미 리그 No.1이고.

‘괴물 같은 페이스군.’

이해 못 할 성적은 아니다.

에이전트 생활을 하며, 메이저리거를 만나고, 수많은 경기를 봤던 브라이언 자신조차 놀라울 만큼 멋진 공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클 체인지업, 예전 경기영상을 찾아보니,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든든하게 받쳐주는 슬라이더 역시 뛰어난 변화구지만, 결정구인 서클 체인지업은 지금 성적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과거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서클을 던졌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 계단, 아니, 한 층을 올라간 수준이었고.

저런 걸 가지고 있으면서, 겨우 더블A에서 성적이 떨어질 걸 염려하다니···

‘하긴, 아직은 어린 나이니까. 또 갑작스럽게 성적이 올랐으니, 마냥 좋아할 수는 없을 테고. 다만 점점 자신감이 붙는 게 눈에 보여.’

그의 고객은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확신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브라이언 그는 그 누구보다도 고객의 성적을 믿었다.

고객에게도, 에이전트인 브라이언 스스로에게도 가장 확실한 무기였으니까.

<에이스-다저스 3대4 트레이드?>

<콜리시엄을 떠나는 힐과 레딕? 정말 중요한 건 유망주 유출!>

<당장의 만족을 위해 ‘미래를 팔아넘기는’ 빌리 빈?>

[#A’s]

[이번에 다저스랑 논의 중인 트레이드에 Go까지 껴 있는데, 이거 맞는 거냐?

[#A’s]

[Go? 아, 이번에 마이너에서 이달의 선수 한 녀석? 근데 걔를 판다고? 뭐, 빌리 빈이 생각이 있겠지.]

[#A’s]

[아무리 빌리 빈이라도 그렇지··· 걔를 왜 팔아? 요즘들어서 선수보는 눈이 안 좋더니. 진짜 맛 간 거 같은데?]

[#A's]

[그래봤자 마이너잖아? 마이너 성적 좀 잘 나온다고, 모시고 살아야 하냐? 리빌딩 하려면 트레이드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A’s]

[최근 여섯 경기 동안 36이닝 56삼진 1실점 1볼넷. 완전히 더블A 폭격하고 있는데 얘를 판다고? 이런 애를 팔고 리빌딩을 하면, 그게 리빌딩이냐? 윈 나우 팀들도 그런 짓거린 안 해.]

이거 봐라? 무기가 좋으니 그 효과도 좋지 않은가?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그저 불쏘시개만 쭉쭉 넣어주는 것만으로 알아서 불타고 있다.

여론은 기사가 나오고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형성됐고. 애슬레틱스의 팬덤은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다.

‘관점의 차이지. 서로 가치가 다르더라도, 원래부터 판매하려던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니까.’

리치 힐과 조시 레딕이야 에이스 팬덤은 물론, 다른 구단들도 다 알고 있다. 그들이 올해 안에 처분되리라는 걸.

A's가 품기에는 너무 값진 선수들이고. 또한 지금 에이스에겐 리빌딩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니지. Go는 애초에 팬들과 구단의 계획 자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소소하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그렇게 팬들의 머릿속에서 고유석이란 선수는 나중을 위해 키워야 할 유망주 정도로 기억됐다.

그런데 그런 선수가 계속해서 점점 더 잘하더니, 또 갑자기 팔려나간다고 한다.

당장의 가치로 따진다면, 실질적인 에이스인 리치 힐과 주전 우익수인 조시 레딕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지만.

애당초 비매품이기에 오히려 그에 대한 반발이 훨씬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로써 Go에게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그를 몰랐던 팬들의 머릿속에도 이름이 콱 박혔지. 기사 몇 개 올린 것으로, 알아서들 다 퍼트려줬으니까.’

이런 선수가 있다는 걸. 그리고 대단히 잘하고 있다는 걸. 다른 구단에서도 탐낸다는 걸. 이젠 모두가 알게 될 거다. 지속적으로 되새기게 될 거고.

브라이언은 여덟 개 팀과 접촉했고, 그중 다섯 명의 사장과 단장을 설득했다.

그들이 에이스에 차례대로 제안을 보내면, 브라이언 자신 역시 차례대로 터트리면 된다.

그렇게 파상공세를 이어가다 보면, 결국 에이스 측에서 먼저 백기를 들거나, 손을 놓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리라.

‘Go가 잘해줘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최소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늘도 무기를 쥐어줬으니. 계속 공격 해보자고.’

####

<7이닝 11K 무실점, Go, ‘2경기 연속 10K 달성!’>

<애슬레틱스 팜 사상 최고의 투수 유망주?>

<젊은 Korean은 무너지는 에이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기사가 쭈르륵 올라온다.

사상 최고, 희망, 경이로움.

온갖 종류의 찬사가 기사 타이틀에 달려 있었고 말이다.

<톰 글래빈의 재림? 완벽한 컨트롤로 타자를 농락하는 You-Suck, Go>

간혹 이런 시류에 합류해, 대충 타이틀만 그럴듯하게 바꿔서 기사를 올리는 타블로이드들도 있었고 말이다.

‘톰 글래빈은 지랄··· 컨트롤 좋고 구속 느린 거 제외하면, 스타일 자체가 다르구만. 그리고 누가 보면 빅리그에서 기록한 줄 알겠어.’

우스운 건 이게 다 마이너리거, 겨우 더블A 투수의 호성적에 나온 반응이라는 거다.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 본인도 고유석을 지지하고, 눈여겨 보는 쪽에 가깝지만. 그런 그조차도 조금 의아할 만큼 지금 여론은 과하게 열광적이다.

마이너리거가, 기존에도 유명했던 유망주가 아닌, 아시안 마이너리거가 이런 종류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포스팅으로 넘어온 선수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이너리그 출신이 말이다.

‘없지. 최소한 지금까지는.’

데이비드 자신은 본 적 없다.

물론 아시안이라고 해도, 센세이셔널한 선수들은 종종 있었고. 마이너리거를 휩쓸며, 순식간에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빅리그로 직행한 선수도 있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다.

‘거기다, 이제는 단순히 언론 플레이만 있는 것도 아니야.’

팬들이 움직이고 있다.

에이스의 팬들은 희망이 없고, 한숨만 나오는 메이저 경기보다는,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이런 종류의 기사에 더욱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졌다는 소식이거나, 이겨도 불안했다는 기사보단. 이쪽이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당장 마케팅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만 봐도, 요 며칠 동안은 팬 커뮤니티 내에서 Go You-Suck이라는 이름이.

등판하지 않은 날의 그저그런 레귤러 불펜 투수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팬들은 새로운 유망주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지금 성적을 놓고 콜업 시기를 추측하는 등. 행복한 상상을 펼치고 있었고.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이 됐다고 했지. 에이전트인 브라이언 매켄지가 계약을 주도했고, 브라이언, 자기 사장한테 X같은 것만 배웠군.’

보라스의 작품은 아니다.

물론 그도 대단히 언론플레이에 능한 사람이지만, 그 정도되는 거물이 마이너리거 하나 띄워주겠다고 이 정도 수고를 할 리는 없다.

그러니 담당 에이전트의 짓일 텐데, 브라이언 매켄지.

데이비드 자신이 부단장이던 시절 몇 차례 만났던 기억이 난다.

2009년, 맷 홀리데이가 로키스에서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됐을 때. 그의 전담 에이전트라며 프런트로 와서는 이것저것 요구했었으니까.

제법 오래전의 일이라, 그때는 노련하지 못한 티도 나고, 에이전트치고는 좀 성급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 성급함에 부스터까지 달았구만. 굉장히 공격적이야. 대단히 빠르고. 거기에 타이밍도 정확하게 노릴 줄 아는군.’

만약 자신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 입장이라면, 굉장히 머리가 아팠을 거다.

온 사방에서 트레이드 제안이 빗발치고 있고, 새로운 제안이 올 때마다, 대체 어디서 새 나갔는지, 그게 또 기사로 나온다.

행복한 상상을 하던 팬들은 그런 기사가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분노조절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과격한 반응을 보였고.

‘트레이드도 직접 발품 팔았을 텐데, 딱 애매한 곳들만 집어서 유도했어.’

차라리 트레이드 조건이라도 좋았다면, 그냥 욕먹을 거 각오하고 팔아치운 다음, 팬들에게 사정사정을 하겠는데.

전부 약간씩 미묘했다.

고유석을 데려오고 싶어 한다는 건 잘 알겠지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올 선수가 마땅찮은 구단들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는데, 헐값에 팔았다는 말까지 나온다면···’

그땐 진지하게 성난 팬들에게 테러당할 각오해야 하리라.

새로 뽑은지 6개월밖에 안 된 데이비드 그의 차는, 단장의 것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분해될 거고.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에 몇몇 직원들은 정신적인 피로를 호소하겠지.

‘대신 유래없을 만큼 관심이 집중된 만큼 성적이 떨어지면, 그에 따른 역풍도 크겠지만.’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은 흘끔 노트북 화면을 확인했다.

쭉 올라온 기사들과 그 속에서 재생되는 하이라이트 속의 피칭과 강렬하고 압도적인 성적. 그것을 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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