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굴러온 돌에게 경기를 빼앗겨, 굉장히 무료해 보이는 보 테일러는 공을 받아달라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어차피 오늘은 자리도 뺏겼는데. 공 몇 개야 받아줄 수 있지. 근데 괜찮겠어? 등판 앞두고 괜히 힘 빼는 거 아닌가 몰라. 나중에 코치한테 한 소리 들을 수도 있고.”
“기를 쓰고 던질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다만 등판이 얼마 남지 않은 투수가 굳이 힘을 빼는 게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 말에 곧 눈썹을 씰룩거렸다.
혹시나 하는 표정도 지었고.
“설마··· 또 뭐 하나 긁힌 거야? 서클이나 슬라이더처럼? 이번에는 뭐, 포심? 커브?”
만약 그렇다면야 나도 참 기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원한 건 말 그대로 확인이니까.
“그런 거 아니니까, 괜한 기대 말고 공이나 잘 받아라.”
“언제는 잘 못 받았나~”
김이 샌 듯 말끝을 흐리는데, 새끼야, 그럼 니가 잘 받냐? 누가 보면 100점짜리 포수인 줄 알겠어?
내가 제구가 좋아서 그나마 불상사가 안 일어나는 거지. 얘는 투수 입장에서 그다지 믿음직한 포수는 아니다.
그나마 빠따 좋은 게 아니었으면, 더블A는커녕 지금도 루키에서 포수 훈련이나 하고 있었을 거고.
‘미묘한 말을 했었지. 구위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어제 계약을 마치고 헤어질 때, 브라이언이 묘한 말을 남겼었다.
두툼한 자료도 줬고.
대충 훑어보니, 내 체구조건과 부족한 구위에 대한 심오하고 잠 알아듣기 힘든 분석이 담겨져 있었는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구위가 좋아질 가능성 있음 정도?
그저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지만, 내게 흥분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건 구위다. 변화구와 제구를 갖추었으니. 여기서 구위까지 좋아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테니까.
‘좋은 수준은 바라지도 않고, 그냥 평균 정도로만 올라가도도 빅리그급이야.’
문제는 정말 가능성이 있느냐는 건데. 브라이언 역시 자료를 넘겨주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는 말라는 말을 남겼다.
정밀한 분석이 아니라, 단순히 영상과 겉으로 드러나는 체격만 가지고 추측한 것이니. 정확도가 대단히 높은 건 아니라면서.
‘그래도 가능성은 제법 높다고 했으니, 나도 한번 확인은 해봐야지.’
비장한 얼굴로 불펜에 들어가니, 가죽 때리는 소리가 반겨준다.
“나이스 볼! 하하, 장난이 아닌데? 곧 빅리그 밟겠어.”
“앤더슨 씨 포구가 좋아서 그렇죠!”
오늘 등판하는 고셋과 처음 보는 포수. 그리고 존 와스딘 코치.
세 사람은 나와 보 테일러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한창 불펜피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경기시작이니, 박차를 가하는 거겠지.
고셋의 피칭이야 이미 수두룩하게 봤으니 필요 없고. 내 시선은 쭈구려 앉은 포수와 존 와스딘에게 향했다.
‘이름이 브라이언 앤더슨이라고 했지? 우리 브라이언이랑 헷갈리니까, 그냥 앤더슨이라고 불러야겠네.’
“쯧··· 포구가 좋기는 무슨··· 나랑 별 차이가 없구만. 트리플A도 별거 없네.”
내가 앤더슨을 보니, 보 테일러가 불쾌한 듯 괜히 혀를 찬다.
본인은 속 쓰리지. 갑자기 위에서 포수 하나 내려오더니, 자기 경기 뺏어간 건데.
그러니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나, 개소리하는 건 못 참는다. 포구하는 기술 자체가 다른데, 무슨 차이가 없어?
“보, 난 널 참 좋아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야.”
“···공 안 받아준다?”
“네가 훨씬 낫다는 뜻이지.”
“그래, 나중에 코치한테도 그렇게 말하라고.”
예예, 제 공 받아주시는 우리 테일러님께서 최고십니다!
충성충성!
양심에 찔리지만, 투수는 수두룩한데 남은 포수는 얘 하나뿐이니. 바짝 고개 숙여야지.
‘겉모습을 보아, 나이는 제법 있어 보이는데 더블A로 강등이라··· 뭐, 무슨 이유가 있겠지.’
직접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는 포수라서 조금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따로 있어서, 고개를 돌렸다.
“자, 가서 앉아.”
“몸은 충분히 푼 거지? 어깨는 괜찮고?”
“당연하지. 난 어깨 소모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쫄지 마. 너한테 불똥 안 튀길 테니까.”
보 테일러에게 다시금 신신당부하니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로 걸어갔다.
뒤이어 나도 마운드에 올라, 투구폼을 잡자, 고셋에게 집중하던 존 와스딘이 그제야 우릴 발견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잠깐잠깐. Go 지금 뭐 하는 거야? 피칭할 생각은 아니지?”
“딱 보면 모르십니까. 그럴 생각인 거.”
당당하게 말하니,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표정을 보아 투수코치가 굉장히 힘든 직업이라는 건 잘 알겠다.
역시 남의 돈 받고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코치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딱 10개만 던질 거예요.”
“흐음···”
그래도 황급히 설명을 곁들이니, 조금 표정이 밝아졌지만, 여전히 못 미덥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냥 좀 볼 게 있어서요.”
“뭘 봐야 하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디가 불편하다거나.”
“그건 아니고, 뜻밖의 말을 들어서요.”
“뜻밖의 말? 어떤 개새- 아니, 놈이 무슨 말을 지껄인 건데? 한창 잘하는 투수한테.”
대충 설명해주니까, 존 와스딘의 표정이 한층 더 아리송해졌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확실히··· Go, 네 피지컬을 생각하면, 스터프가 심하게 떨어지기는 하지. 잠깐 손 좀 펴봐.”
얌전히 쫙 피니까, 입맛을 다신다. 기분이 이상하네.
중년의 아저씨가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심정도 좀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손가락도 적당히 길고, 악력도 좋은 편이지?”
“못난 수준은 아니죠.”
내 불쾌함을 알아봐 준 건지, 시선을 뗀 존 와스딘은 이젠 본인도 아리송하다는 듯 손으로 턱을 쓸었다.
난 손가락이 길다. 어릴 땐 평범한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키가 크더니, 손가락도 같이 길쭉해지더라고.
이런 거 보면 내가 피지컬 하나는 좋게좋게 타고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럼 정말로 뭔가 다른 문제가- 아니, 이 말은 잊어버려. 아무튼 그래서 그 가능성이라는 걸 직접 보고 싶다는 거야?”
“겸사겸사 컨디션도 점검하는 거죠. 내일 등판이니까.”
“흐음··· 딱 10개야. 그 이상은 안 돼. 투구폼 틀어지지 않도록 집중하고.”
존 와스딘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이내 다시 입을 꾸욱 다물며 약간의 당부만 남긴 뒤 물러났다.
누누이 말하지만, 마이너 코치는 선수에게 이래라저래라 못하거든. 그럴 권한도 없고. 또 본인도 큰 확신은 없어 보이고.
‘코치에게 직접 허락까지 받았으니, 이제 거리낄 것도 없지.’
“보, 공 받아라.”
“바로 던져.”
대화를 마치고 정면을 보니, 나랑 코치가 대화하는 사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보 테일러도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자기 글러브를 쳤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까···’
투구폼을 잡은 나는 그 신호를 따라 가볍게 공을 뿌렸지만, 머릿속은 굉장히 무거웠다.
혹시 투구폼이 문제인 건가? 아니면 릴리스 포인트? 스트라이드가 좁거나 너무 넓은가? 아니면 레전드의 말을 받들어, 나도 각도를 높여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그래서인지, 허락된 10개의 투구는 금방 끝났다.
“보, 네가 보기엔 어때? 좀 무거워? 뭔가 좋아질 가능성이 보여? 직접 받아본 입장에서 말해봐.”
“···빨간약이랑 파란약. 어느 쪽을 원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으니까. 내 기분이라도 좋게 해줘.”
“정말 죽여주는걸? Suck 너는 사이 영 투수가 될 거야! 받느라 손바닥이 아프더라!”
“그래, 참 고맙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게 네가 원하는 답이냐는 듯, 보 테일러는 칙칙한 표정을 한 채 입만 나불거린다.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좀 낫네.
‘코치도 확신이 없고. 받는 포수도 마찬가지라는 건.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거나, 아니면 큼직한 게 아니라, 너무 작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자라면 어차피 안 되는 거, 헛심 쓰는 대신, 그냥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낫고.
후자라면 시즌 중이 아니라, 비시즌 기간에 유능한 트레이너를 고용하여, 더욱 정밀한 관찰과 분석으로 찾아야겠지.
‘괜한 기대 말고. 지금은 그냥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자. 그래야 브라이언 씨도 일이 더 편해질 거고. 나중에 좋은 트레이너도 잘 데려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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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불펜피칭을 마친 나는 천천히 마운드로 걸어갔다.
이번 경기 상대는 저번 아칸소 원정의 첫 시리즈 상대였던 노스웨스트 아칸소 내추럴.
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의 팀인데, 타격은 같은 아칸소 주 형제인 트래블러스보단 낫다.
전체적으로 타선의 짜임새도 나쁘지 않고. 리그 전체를 놓고 보면 딱 중간 정도?
‘사실 얘들도 잘한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트래블러스보단 훨씬 잘하지. 주의할만한 타자는 라이언 오헌이랑 프랭키 슈윈델, 코리 툽스 정도인가?’
그럭저럭 무난한 상대지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다.
당장 가장 약하다고 생각한 트래블러스한테 홈런 하나 맞았잖아. 뭐, 그 대신 열심히 털기는 했지만.
‘홈런 하나에 탈삼진 열두 개면, 나쁘지 않은 교환이긴 하지.’
“Go, 오늘 잘해보자. 볼펜에서 보니까, 듣던 대로 제구가 좋던데, 경기에서도 내가 다 잡아줄 테니, 마음 편하게 던져.”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쓱 다가와 말을 걸었다. 뉴페이스, 브라이언 앤더슨.
오늘 경기 배터리다.
어제 공 받아줬던 보 테일러는 저~기 클럽하우스에 틀어박혀서, 나를 배신자라며 욕하고 있지만. 그딴 건 상관없고. 지금 당장의 파트너가 중요한데, 그냥 좀 어렵다. 이 사람은.
“아,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앤더슨 씨도 오늘 좋은 성적 거두시길 바랍니다.”
나이가 많단 말이야.
물론 여긴 미국이니까, 3~4살 정도는 다 친구 먹고 있기는 한데. 이 양반은 그보다도 좀 더 많거든.
‘미국 나이로 스물아홉. 한국 나이로는 서른? 서른하나? 노안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자기 나이대로 생긴 거였어.’
보나 앤디에게 하듯이 편하게 하기에는, 내 안의 유교사상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양놈들이랑 섞여서 양식 푸짐하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뿌리까지 고치기는 힘들구만.
내가 어색하게 자기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앤더슨은 겁먹지 말라며 씩 웃었다.
“자신감 넘친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쭈뼛거려? 그냥 막 해. 원래 투수가 포수보다 훨씬 상전이니까.”
그러더니 그는 홈 플레이트로 내려가는데,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포구도 잘하고. 프레이밍도 좋고. 경기에서도, 실수 안 하던데. 그거면 된 거지.’
타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고. 투수 입장에선 그냥 공만 잘 받으면 장땡이다.
‘뭐, 제대로 호흡을 맞춰보면,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앤더슨이 내려간 뒤, 야수들 역시 제각각의 포지션에 섰고. 선두타자 또한 타석에 올라왔다.
“S-word! 오늘도 잘해라!”
“이번에도 삼진 열 개 알지?”
“너 보려고 온 거니까, 싹다 박살 내버려.”
관중들도 준비된 것 같고.
포수 마스크를 내리고 글러브를 팡팡 때리는 앤더슨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나도 준비를 마쳤다.
“플레이볼!”
경기시작 선언. 미리 준비를 마친 채 배트를 휘휘 돌리는 타자에게 나는 시선을 뒀다.
‘이야~ 처음부터 메이저리거가 올라오네.’
1번타자 테런스 고어.
우타자고, 포지션은 중견수.
이번 경기의 첫 타자이자, 오늘 경기 내추럴의 리드오프인 그는 무려 3년차 메이저리거다.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꾸준~하게 빅리그에 얼굴을 비췄지.
‘대주자로 말이야.’
기록을 보면 지금까지 빅리그에서 24경기를 뛰었는데, 정작 타석은 열 타석에 못 미친다. 죄다 대주자로 나갔으니까.
타격은 어떻냐고? 타격까지 좋았으면 그냥 계속 빅리그에 남았겠지.
올해는 시즌 극초반에 네 경기를 뛰었다는데, 타석에 오른 건 딱 한 번이었고. 그마저도 삼진 하나가 딱 찍혀있다.
‘여기서도 성적이 별로 좋지는 않고. 타율이 2할 5푼에 OPS가 5할 9푼이던가?’
그래도 빅리그 대주자 요원이니, 발 하나는 엄청나서 나가면 성가시겠지만.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겠지.
‘그나마 출루율이 가장 높긴 하지만, 선구안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 삼진도 많이 잡혔고. 장타율이 낮은 걸 보면 파워도 부족하고. 하긴, 좀 호리호리하긴 하네.’
타자로선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그나마 발이 빠르니, 어설픈 내야땅볼은 내야안타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물론 나도 구위가 약해서, 정타로 맞으면, 장타가 나오겠지만··· 배트를 짧게 잡은 걸 보아, 그마저도 힘들겠네.’
가장 먼저 바깥쪽으로 하나.
오늘은 편안하게 푹 쉬어서 그런가, 딱 알맞게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86마일짜리 포심.
타자의 얼굴에 현타감이 깃든다. 내가 이걸 그냥 흘려보냈다고? 이런 표정인데.
하긴, 이런 건 처음 보겠지. 그래도 빅리그 왔다갔다 하면서 눈이 높아졌을 테니, 더 황당할 거고.
‘역시 선구안이 안 좋아. 자기 생각에 스트라이크존의 중심에서 조금이라도 멀다 싶으면 그냥 참는 거야.’
사실 다른 타자에게 던졌다면 좀 위험했을 거다. 바깥쪽이기는 해도 휘둘러 볼 만한 코스니까.
선구안 좋고 컨택이 좋은 녀석이라면, 냅다 후려쳤겠지.
그런데도 참는 걸 보면, 대충 어떤 성향인지가 그려졌다.
저조한 성적 때문에 스스로 타격에 대한 자신감도 낮은 것 같고.
‘카운트만 잡으면, 삼진은 자동으로 딸려 나오겠구만.’
파악을 마친 뒤 포수를 보자, 앤더슨은 비슷한 코스의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낮게 떨어뜨려서, 헛스윙을 유도해보자는 건데,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코스가 스트라이크라는 걸 알았으니, 방향을 포착하면 뭔가 반응이 나오겠지.’
그대로 2구.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코스의 공이 날아오자, 타자의 배트가 움찔거렸다.
고민하는 것 같은데, 결국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서클 체인지업을 예상했구만. 역시 어느 정도 알려지긴 한 거야.’
곧이어 쭈욱 떨어지는 공에 타자의 얼굴이 편안해졌지만··· 이내 다시 일그러졌다.
“스트라이크!”
“What?”
일부러 좀 높게 던졌거든. 살짝 걸치도록. 그래도 심판의 재량에 따라 볼로 판정될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잡아줬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카운트도 몰렸고, 심판에 대한 불신도 생겨났고. 할 건 다 했네.’
이제 남은 건 그저···
“스트라이크 아웃!”
보상을 챙기는 것뿐.
높은 하이 패스트볼.
역시나 카운트가 몰리자, 타자는 곧바로 스윙했고, 간절한 의지가 담긴 것 때문인지, 제법 박력도 있었지만, 공을 맞히지는 못했다.
‘88마일. 구속 잘 나오네.’
최고구속은 아니나, 그래도 그에 근접한 걸 보아, 컨디션이 나쁘진 않은 것 같구만.
타자, 테런스 고어 본인은 저런 구속의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일단 삼진 하나. 첫 타석은 쉽게 먹었는데···’
2번타자 코리 툽스.
앞서 언급했던 내추럴에서 까다로운 타자 중 한명인데, 일단 성적만 놓고 봐도 쓸쓸하게 물러난 테런스 고어보단 훨씬 낫다.
타율도 .296으로 거의 3할에 육박한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잡힌 스타일이나···
‘아직까진 괜찮지.’
아직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 처음 만난 놈들한테 깨지기엔 심하게 좋거든.
“스트라이크!”
내 서클이 말이야.
초구공략을 노린 건지, 바로 배트가 나왔는데, 뚝 떨어지는 초구 서클 체인지업에 공략은 실패했다.
거나하게 헛스윙하며 살짝 몸을 비틀거린 녀석은 딱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여줬다.
그래그래, 다 안다, 기껏해야 비디오나 좀 봤을 텐데, 직접 보니까 상상했던 거랑 차원이 다르지?
‘어우, 집중하자 집중. 또 신나서 깝치다가 홈런 맞을라.’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다시 집중했고. 차근차근 카운트를 잡아갔다.
“볼!”
“스트라이크!”
“볼!”
“아웃!”
바깥쪽과 안쪽을 넘나들며, 요리조리 하나씩 공을 찍어 넣자, 눈알만 빙빙 굴리던 타자는 곧 배트를 휘둘렀고, 걸친 공을 억지로 쭉 당겼으나, 역회전에 살짝 빗맞았다.
결과는 파울 플라이.
그것으로 투아웃.
‘라이언 오헌, 좌타자고, 성적이 좋아. 하지만 잡을만 하지. 일단 먼저 몸쪽으로 서클 하나.’
“스트라이크!”
‘나가는 슬라이더 하나.’
“스트라이크!”
‘낮게 체인지업 하나 깔고.’
“볼!”
‘마지막은 바깥쪽 낮은 포심.’
“스트라이크 아웃!”
기세를 놓치지 않고, 곧이어 올라온 3번타자 라이언 오헌까지 삼진으로 잡자, 불펜을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경기장이 요동쳤다.
“S-word! S-word!”
“오늘도 삼진쇼 가자!”
“이번 경기는 좀 길게 던져 봐! 완봉까지 해버리라고!”
관중들은 마치 바로 그거라고 말하는듯 박수를 치거나, 만족스럽게 웃으며 환호했고. 분명 그리 크지 않은 경기장에, 많지는 않은 관중인데도 그 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 스터프고 나발이고···’
그것을 들으니,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브라이언이 했던 말의 의미를.
‘결국 잘하면 되는 거지.’
그것 외의 올바른 진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