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스X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있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게임이지.
특히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게임이고.
나도 한때는 미쳤었다.
중학생 때 반 친구 때문에 처음 접한 뒤에 푹 빠져들었다가, 훈련 째고 피시방 간 적도 있으니까.
뭐, 그 뒤에 처절한 대가를 치렀지만. 어쨌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지.
아무튼 그 스X크래프트에서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빌드’다.
그거 하나에 게임의 승패가 사실상 50%는 결정이 난다고 봐도 무방하지.
피지컬이나, 판단력으로 판세를 뒤집을 수는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고.
“아웃!”
만약 그런 빌드를 내가 알아차리면 어떻게 될까?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가지고 노는 거지. 처절하게, 장난감처럼.’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고?
지금 상황이 딱 그렇거든.
8번은 2루땅볼.
9번은 루킹 삼진.
마지막으로 1번타자는···
‘이번에도 눈앞에서 떨어뜨리면-’
“스트라이크 아웃!”
‘이렇게 배트가 나오지.’
헛스윙 삼진.
쭈욱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에 타자는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았다.
낮은 서클을 먼저 보여주고, 다른 것으로 카운트를 잡은 뒤, 조금 높게 하나 던지니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
그렇게 3회 말이 지워졌고. 트래블러스 덕아웃의 분위기가 더욱더 나락으로 치달았다.
‘그래가지고 땅이 꺼지겠나. 좀 더 힘차게 내쉬어 봐.’
꼴사나운 모습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픽픽 한숨 쉬며 타자는 내려갔다.
‘이번 이닝까지는 거의 날로 먹었네.’
3회 말까지 종료되면서 상대한 타자는 딱 10명.
그중 여섯 명이 삼진을 당했고. 안타와 출루는 1회 말의 홈런 이외엔 없다.
“휘유~ 저 투수 장난 아닌데? 완전히 상대가 안 되네.”
“처음에 홈런 맞는 거 보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압살이네. 타자들이 무슨 일부러 죽어주는 느낌인데?”
1회 말에만 하더라도 홈런에 기뻐하던 관중들이 벌써부터 질린다는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내려 봤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홈팀 타자들이 쪽도 못 쓰고 처참하게 털렸으니까.
‘낮은 건 죄다 거르고. 커트라인보다 높으면 배트를 내고. 이거보다 편한 상대가 어딨어?’
관중들이야 놀랍고, 한편으론 어처구니도 없겠지만 사실 당연한 거다.
이미 상대가 어떻게 타격할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제구 좀 몰리는 걸 감안하더라도 씹어 먹는 게 맞는 거지.
내가 이런 핸디캡을 가지고도 쳐맞는 X밥은 아니니까.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가, 애들이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떨어져 있어. 그러니, 코치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겠지.’
타격코치가 지시한다고 해서, 타자들이 무조건 그걸 따르지는 않는다.
결국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건 타석에 선 타자이지, 코치가 아니니까.
허나 이번에는 타자들이 전체적으로 성적이 저조한 터라 제대로 혹했던 것 같다.
‘그래도 베테랑이었으면 자기 주관대로 갔겠지만, 그래봤자 쟤들도 나도 겨우 마이너니까. 아직 어리고.’
결국 가장 결정적인 순간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조언이 떠오르면,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거든.
‘그래도 이제 한 타순 돌았으니, 다음 이닝부터는 바뀌겠지.’
다만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건 딱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다시 지시를 내릴 테니까.
‘뜬금포 하나 제외하면 처참하게 털렸는데. 같은 걸 계속 고집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저쪽도 알기는 알 거다.
2회 끝나고 나서 바로 알아차렸겠지. 나한테 계획이 읽혔고, 내가 그걸 이용한다는 걸.
그런데 왜 이번 이닝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냐면, 거기엔 약간 복잡한 사정이 있다.
사전에 타격에 대한 지시를 내렸는데, 투수가 그걸 알아차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계획을 수정하고, 새로운 지시를 내리거나, 타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게 맞겠지만. 그게 또 말처럼 쉽지가 않거든.
‘선수와 코치 간의 신뢰가 깨지니까. 쉽게 말 바꾸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
이미 타자들의 머릿속에는 코치의 지시가 들어가 있는데, 갑자기 그걸 잊어버리라고 하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켜, 상황만 더 악화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3이닝 동안 공격이 깔끔하게 쓸려나갔으니, 이건 확실한 명분이니까.
기존의 지시를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울 명분 말이야.
‘아쉽지만, 그래도 3이닝 공짜로 먹었으니까, 이걸로 만족해야지.’
적당히 만족하며 마운드에서 내려가니,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저저, 눈빛들 봐라.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네. 처참하게 털린 탓인지, 속이 많이 상해 보인다.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러니 그 감정을 다음타석에서 표출하려고 할 텐데.
‘상대가 달라지면. 나도 바뀌면 되는 거지.’
지금까지는 의도적으로 페이스를 조절했다. 적당~히 좀 느긋하게 던졌거든.
인터벌을 억지로 당기는 건 힘들어도, 늦추는 건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또 상대의 생각을 얼추 읽었다고는 해도,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생각이 필요했기에, 포수랑 의견을 주고받느라 좀 시간이 끌린 것도 있고.
근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타순이 돌면서 상대타자들은 내 타이밍에 익숙해졌고, 다음이닝부터는 고삐도 풀릴 테니. 나도 그거에 맞춰서 목줄을 풀 거니까.
‘경기감각은 제대로 올라왔어. 집중력도 충분하고.’
느껴진다, 감각이 올라온 것이.
다 홈런 덕분이지. 간만에 하나 맞았더니, 정신이 번쩍드네. 집중도 더 잘 되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제 2페이즈다, 새끼들아. 홈런 값 다 치르려면 아직 한참은 더 남았어.’
이제부터 내 템포가 좀 빨라질 거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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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돌아온다.
덕아웃 벤치에 앉아, 멍하니 피칭을 보던 이들이 그런 투수를 살갑게 맞이했지만.
“Suck 너 홈런 한방 맞더니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존 와스딘은 그들을 가볍게 막았다. 괜히 집중을 깨트릴 수도 있었으니까.
사실 제지할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친근하게 굴던 이들의 입이 알아서 콱 막혔으니 말이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선수들이 쫙 흩어지며 길을 터줬고, 그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도달한 벤치에 털썩 앉은 투수, 고유석을 보며 존 와스딘은 입가를 매만졌다.
‘또 그 느낌이군. 이번에도 경기에 제대로 몰입했어. 감각이 올라온 거겠지. 지난번에는 무리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처 못 느꼈는데···’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왜 타자들이 겁먹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지를.
비록 하이스쿨 이후로는 타자를 해본 적이 없어서, 타자들의 정확한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마운드에 있는데, 저런 기운을 풍기는 타자가 올라온다면···
‘질식할 것 같겠지.’
단순히 느낌만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 앞으로 펼쳐질 피칭은 타자의 목줄을 쥐어 잡을 테니까.
“코치, 다음 이닝부터는 사인을 제가 내도 될까요?”
대뜸 묻는 말에 존 와스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판단력이 좋은 투수이니, 굳이 자신이 속도를 끊어먹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부턴 그때그때 본인 판단에 맡기는 게 나을 테니까.
‘타자의 행동과 표정을 보고, 파악해서, 적절한 선택지를 고를 줄 알아. 관찰력이 뛰어난 거겠지.’
이건 원래도, 그러니까 갑자기 잘하기 시작했던 6월 이전에도 존재했던 재능이다.
그때도 종종 보는 입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재치 있는 공을 집어넣으며, 뜻밖의 결과를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최근 들어서 그런 모습이 더 잦아졌지. 거의 80% 이상의 확률로 잘 먹혔고.’
존 와스딘은 생각했다. 어쩌면 고유석의 실링 중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제구나 변화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것은 곧바로 다음 이닝에서 증명됐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우렁찬 콜에 덕아웃이 시끄러워졌다.
벤치에 앉아 구경하던 투수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으니까.
“와··· 배짱 하나는 진짜- 아니, 어떻게 저런 똥볼을 한복판에 집어 넣을 생각을 해? 심지어 지난 타석에 홈런 날린 놈한테.”
“타자는 서클 예상하고 스윙했네. 제대로 속았어.”
“성격이야 원래부터 평범한 건 아니었지만··· 어째 피칭도 점점 더 미쳐가네.”
그도 그럴 것이 고유석은 2번타자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은 뒤 올라온 3번타자.
지난 1회 말, 자신에게 오래간만의 피홈런을 선사한 타자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과감하게 몸쪽 슬라이더로 파울. 그리고 바깥쪽 높은 코스로 포심으로 투 스트라이크 노볼.
결정적인 상황이니, 하나 빼거나, 결정구인 서클을 집어넣을 거란 타자의 예상을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박히는 포심으로 완벽하게 박살냈으니까.
‘몰린 건가? 아니면 의도한 거? 어느 쪽이든 완전히 가지고 놀았군.’
그래, 바로 저거다.
재빠른 판단력을 밑천으로 한 과감한 구종 선택과 배짱 있는 코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속도.
그것이 키 포인트였다.
위험한 묘수를 두면서도 약간의 고민조차 안 한다. 그저 제 선택을 굳게 믿으며 단호하게 공을 던질 뿐.
예전과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저 자신감이었다.
‘잡생각이 사라지면서 쓸데없는 시간 소모까지 없어지고. 거기에 감각까지 올라왔으니···’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볼!”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공을 받자마자 쉬지 않고 다시 뿌리는 팔놀림에 타자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 깜짝할 사이 투 앤 투.
공을 확인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카운트가 몰리자. 타자는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냅다 배트를 휘둘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삼진아웃.
‘이미 타이밍을 빼앗긴 순간부터 사실상 예정된 결과야.’
그것으로 이닝 종료.
4회 말이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문득 떠오른 의문에 흘끔 손목시계를 확인한 존 와스딘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겨우 4분쯤 지났네. 이닝 하나에 4분이라···’
“빅리그 올라가면 사무국에서 좋아하겠어.”
커미셔너가 바뀌고, 경기시간 단축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아마 지금 경기를 본다면 굉장히 흡족해할 거다. 자신의 정책에 딱 맞는 인재라면서.
이 정도만 해도 이미 타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미칠 지경일 텐데, 우습게도 타자가 바뀔수록···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점점 더 탄력이 붙는다.
5회 말. 이제 슬슬 힘이 빠질 시간인데도 고유석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던졌다.
그 무식한 피칭 앞에서 제구가 몰리는데도 타자들은 차마 배트를 내지 못했고.
결국은 그 속도감에 못 이겨 스스로 자멸해버렸다.
기껏해야 80마일대의 구속.
아무리 마이너라도 해도 우스운 구속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트래블러스 타자들에게는···
‘좌완 파이어볼러 같겠지. 눈 깜짝할 사이, 공이 날아와 박히니까.’
5회 말을 장식한 마지막 타자 역시 그랬다. 살짝 제구가 몰린 덕분에 분명 좋은 코스였다, 정상적이라면 놓칠 리가 없는 공이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그는 결국 멍하니 지켜보다가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Fuck!”
어버버거리는 사이 순식간에 끝나버린 타석에 아무런 반항조차 못 해본 타자는 결국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배트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가난한 마이너리거라 장비 하나하나가 소중할 텐데도 저랬다는 건, 그만큼 분노가 컸다는 것이리라.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 경기장 안의 사람들 중 그를 욕하는 이는 없었다.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야 알겠어. 단순히 인터벌이 빨라지는 정도가 아니라는 걸.’
다만 그런 타자에 대한 측은함과 함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한 전율도 올라왔다.
‘경기 초반에 상대 계획을 역이용하면서 가져온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었어. 타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속도를 높여 타이밍을 뒤흔드는 것으로.’
절망한 타자의 심정과는 별개로, 폭압적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투수에 대한 경이로움 역시 피어올랐으니까.
‘홈런으로 무실점은 깨졌지만. 그 외에는 완벽해. 뭐라고 더 말할 게 없을 만큼. 이미 사기가 꺾인 트래블스가, 이 흐름을 깨트리기는 어렵지.’
만약 존 와스딘 자신이 평범한 관중이었다면. 손바닥이 쓰리도록 박수를 쳤을 거다.
홈팀 타자들이 무기력하게 쓸려나가는 모습에, 경기 내내 헛웃음만 흘리다가, 결국에는 인정하고, 후련하게 환호성을 토해낸 홈 관중들처럼.
“더럽게 잘하네! 그래! 이렇게 시원시원한 맛도 있어야지!”
“You-Suck? 피칭처럼 이름도 Cool하네! 넌 내가 꼭 기억해둔다!”
과연 존 와스딘의 그의 예상처럼 이후로도 트래블러스는 넘어간 흐름을 되찾아오지 못했다.
7이닝 1실점 1피안타 1피홈런. 그리고 12탈삼진.
홈런의 대가는 혹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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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시리즈를 마치고, 다시 X같이 먼 길을 지나 홈으로 돌아오니, 토끼 같은 자식은 아니고. 스마트한 에이전트가 반겨줬다.
“결정 내리셨습니까?”
“예, 뭐. 확실하게 내렸죠.”
일단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다.
법률적으로도 깨끗하고, 실제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 에이전트도 맞다고 한다.
왜 나를 원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기꾼은 아니라는 거지. 그거면 계약할 이유는 충분하고.
‘이 양반 생각이 뭐든지 간에, 어쨌든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이 되는 거니까. 훈련지원만 받아도, 훨씬 남는 장사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인위적이라 조금 거슬리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하겠습니다.”
“하하하, 훌륭한 선택입니다, Mr. Go,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계약하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던 건지, 호탕하게 웃으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고. 그에 시원스레 사인하고, 악수까지 마친 뒤 남은 커피를 홀짝거리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왜, 그 사기꾼 같은 멘트있잖아? 2년 안에 메이저리그 어쩌구.
진짜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 에이전트니, 분명 사기꾼이 아닌데, 왜 그런 사기꾼 같은 말을 한 걸까? 나한테서 뭔가 가능성이라도 본 건가?
“저, 그런데. 2년 안에 메이저리거로 만들어 준다고 하셨죠?”
괜히 궁금해져서 슬쩍 물어봤지만. 딱히 큰 기대는 없다.
십중팔구 좋은 인상 남기려고 한 립서비스일 테니까.
그렇기에 물어봐 놓고도 별 기대 안 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생각보다 진지한 답변이 돌아왔다.
“네, Mr. Go라면 충분히 가능한 목표입니다. 그에 대한 비전도 있고요.”
“비전이요? 혹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에이전트, 브라이언은 마치 내가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Go의 성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구속, 스터프, 그런 건 다 제쳐놓고 말이죠.”
뭐야, 결국 입바른 말이었구만. 누가 모르나? 내 성적 좋은 거. 지금 당장이야 엄청나게 좋지,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고.
“알아요, 저 성적 좋은 거.”
“아뇨, Go는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본인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대충 시큰둥하게 대답하니,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엄하게 꾸짖듯이 말하는데, 솔직히 조금 쫄렸다. 정색하니까 분위기가 확 바뀌네.
“지난 7월 3일 등판 이후 Mr. Go는 현재 ERA 3.33, 탈삼진 75개. 볼넷 7개를 기록 중입니다. 대단히 뛰어난 성적이죠.”
여전히 내가 못 믿겠다는 듯 보자, 답답한 듯 내 성적을 쫙 나열하며 쏘아 붙이는데. 좋은 성적인 건 맞다.
당장은 리그 탑급이니까.
미쳤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6월을 보냈고. 7월의 첫 경기 역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지.
‘볼넷이야 원래도 적었고. 거기에 최근 들어 삼진도 많이 잡아서, 여러모로 기괴한 성적이 됐지.’
다만 이게 진짜 순수하게 내 실력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엄밀히 말하면 한 30%는 플루크지. 아마 이번 달이 막차일 거고. 8월부터는 어느 정도 분석도 되고, 이미 만났던 놈들 다시 만날 테니, 아마 좀 맞기 시작할 거다. 지금처럼 삼진을 무식하게 잡는 것도 힘들 거고.
“네, 참 좋은 성적이죠. 시간이 지나서 타자들이 적응하고, 어느 정도 분석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좀 떨어겠지만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네?”
“지금 당장의 성적과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성적이 하락 하더라도, 시즌 종료시점에 Go는 여전히 텍사스 리그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겁니다. 이건 단순히 제 개인적인 추측이 아니라, 정밀한 분석의 결과물이죠.”
그렇게 말하더니 쓱 웬 서류뭉치를 내미는데, 대충 훑어보니 숫자가 빼곡했다.
아마도 내가 기록할 성적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겠지. 여러 가지 데이터와 함께.
“그런데도 오클랜드를 비롯한 여러 메이저 구단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못하고 있죠. 왜? 무브먼트와 스터프라는 단점이 명확하니까요. Go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요.”
마치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나쁜 짓 하고 선생님 앞에 끌려간 기분이다.
“성적이 떨어질 것이다? 물론 가능성은 있습니다. 네, 사실 꽤 높죠. 하지만 그 불확실한 가능성 때문에 당장의 성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거야말로 Go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니까요. 조금 불쾌하실 수도 있겠지만 한 마디 하자면··· 가장 먼저 Mr. Go 본인부터 스스로 가진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조언해 주는 것도 선생님 비슷하네.
솔직하게 말하면··· 날카로운 게 가슴을 찌른 기분이다. 혼자 몰래 숨겨두고 있던 비밀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만 같았으니까.
콤플렉스라···
없을 수가 없지.
한국에서도 구속이 다른 녀석들과 비슷하거나 느렸고. 미국에서는 대부분 10km/h 가량 차이가 난다. 구위 역시도 비교하면 하찮은 편이고.
그런 놈들 틈에 끼여서 구르고 구르다 보니,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긴 했다.
그래서 계속 좋은 성적을 찍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지.
방금 브라이언에게 말했던 것처럼, 조금 지나면 다시 내려박겠지, 타자들이 익숙해지면 성적이 떨어지겠지. 그런 생각 말이야.
‘내 스스로 색안경 끼고 있었구만.’
내 딴에는 그게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이 맞다. 프로선수에게 가장 객관적인 건 결국 기록과 숫자. 이 두 가지니까.
“평균구속이 85마일인 포심. 평균 이하의 무브먼트와 떨어지는 스터프. 이게 Go입니까? 아뇨, 텍사스 리그 탈삼진 4위. 삼진 볼넷 비율 1위. 9이닝당 볼넷 비율 1위. 이게 진짜 Go죠.”
“맞는 말이네요.”
“네, 인정이 빨라서 좋군요.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지금 Go처럼, 구단들 역시 편견에서 비롯된 잘못된 인식 대신, 올바른 진실을 보게 하는 것. 그리하여 Mr. Go의 진짜 가치를 인정받는 것. 그게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쉽지는 않을 텐데요?”
내 스스로도 이런 콤플렉스와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데. 과연 바깥에서 볼 때는 어떨까?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그걸 고치는 건 굉장히 어려울 거고.
그것을 지적하는 말에 브라이언은 다시 처음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수가 하기 어려운 일 대신하라고 있는 게 에이전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