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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19화 (19/316)

19화

아칸소 주 원정의 첫 상대는 노스웨스트 아칸소 내추럴.

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의 더블A 팀인데. 오랫동안 버스에 처박혀 있느라 애들이 악에 받친 건지 시리즈를 스윕으로 마무리했다.

그대로 다시 200마일을 내려가서 도착한 원정지 리틀록.

‘리틀록, 사회수업인가 역사수업 때 들어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리틀록을 연고지로 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산하의 더블 A팀 아칸소 트래블러스는 그냥저냥 약하다. 미션스랑 비슷한 정도?

그래도 투수진은 좋은 편이라 성적이 꼴찌는 아니지만, 그거야 어차피 나랑 상관없고. 타자들이 못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지.

“오늘도 평소처럼 갈 거지? 초반에는 서클 위주로 하다가, 점점 슬라이더 비율 높이는 식으로.”

“일단은 그렇게 가야죠. 대신 슬라이더 비율은 평소보다 조금 높여야겠지만.”

“트래블러스에 좌타자가 제법 있던가?”

“골고루 섞여 있죠.”

그나마 특징이 있다면, 좌타자와 우타자가 적절하게 잘 섞여 있다는 것 정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존 와스딘과 간략하게 경기 계획을 이야기하며 몸을 풀었는데.

왠지 불펜피칭부터 조금 느낌이 안 좋았다.

“Suck, 오늘은 왠지 제구가 좀 몰리는 것 같다?”

“어, 약간씩 그러네. 코치가 보기엔 어떠세요?”

원정 경기라서 선공인지라, 타격을 준비해야 하는 보 테일러 대신 공을 받아주던 앤디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히 제구가 좀 몰리기는 한다.

“으음··· 많이 안 좋은 건 아니고, 옛날 같다고 해야 하나? Go 네가 최근 들어서는 딱딱 잘 찔러 넣었는데.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야.”

코치도 같은 생각인 것 같고.

‘버스를 오래 타기는 탔나보네. 몸이 굳었어.’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지옥 같았던 원정길 버스.

심지어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먼 길을 달려왔으니.

몸이 피로를 호소할 수밖에.

그나마 충분히 어깨를 쉬어준 덕분에 힘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별로 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요 며칠 동안 버스로 1000키로를 넘게 달렸으니. 오히려 쌩쌩하면 이상하겠지.’

그래도 서클과 슬라이더의 위력이 떨어지진 않았으니 완전히 최악은 아니다.

‘여전히 예전보다는 나아.’

평소보다 제구가 좀 몰리는 건데, 그거야 제구가 긁히기 전이랑 비슷한 정도고, 그때랑 다르게 지금은 주력구도 확실하게 있잖아?

‘우리 팀은 좌측 라인이 믿을만 하지. 채프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스포트먼도 수비력이 좋은 편이니까. 웬만하면 타구를 그쪽으로 보내야겠지.’

“오늘 우타자 상대할 때는 웬만하면 몸쪽으로 가죠.”

“타구 유도하려고?”

“어차피 정타는 무조건 넘어가니 상관없고. 나머지 빗맞은 타구는 잘하는 놈들 쪽으로 몰아주는 게 낫잖아요?”

“그럼 그렇게 볼배합 가져가도록 하자. 테일러에게는 나중에 내가 말해둘 게.”

맞춰 잡는 건 아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애초에 나는 맞춰잡을 수가 없는 투수니까.

그냥 피칭 자체는 비슷하게 가되, 적당히 타구의 방향만 최대한 유도하는 거지.

야수들을 믿고.

‘지금 컨디션을 봐서는, 지금까지처럼 아예 안 맞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ERA도 충분히 떨어뜨려 놨고, 성적도 오지게 쌓아 뒀으니. 오늘 몇 방 맞더라도 괜찮겠지.

“안 던져?”

“던질 거니까, 자세나 잘 잡고 있어.”

####

타석에 오르기 전, 에릭 아길레라는 한 차례 숨을 골랐다.

더럽게 긴장됐으니까.

‘서클이 좋아졌다고 했지? 지난달 성적도 엄청나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경기 전 오늘 선발투수의 데이터를 미리 확인했다.

마이너리그 사이트 아무데나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성적을 대충 적어놓은 걸 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29.1이닝 63탈삼진 1볼넷 피안타 9. 그리고···

‘실점 제로, 자책점 제로, ERA 제로.’

6월부터 29.1이닝 연속 무실점. 아니, 이제 딱 30이닝 무실점이다. 타자 두 명이 그대로 물러났으니까.

압도적이다 못해 경이로움까지 나오는 성적. 4월에 만났던 녀석이기에 오히려 그 언밸런스함이 주는 두려움이 상당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마운드에 올라 서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이 데이터 아닌 데이터를 목도한 트래블러스 타자들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믿지 못하거나. 호승심을 불태우거나. 겁에 질리거나.

‘완전히 달라진 거야. 그때랑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젠장, 저런 놈이 왜 아직 더블A에 있는 거냐고!’

그중에서 에릭은 세 번째에 속했다. 약간의 두려움과 짙은 긴장감이 그를 옭아맸으니까.

그보다 앞서서 타석에 올라간 동료들은 순식간에 처리됐다.

에릭 자신은 대기타석에서 그 처참한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봐야 했고.

“후우···”

억지로 긴 숨을 뱉으며 애써 마음을 달래려고 하는데도,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긴장을 안 하냐고! 내 앞에서 두 명이 연달아서 삼진을 당했는데! 그런 체인지업을 바로 옆에서 봤는데!

에릭 아길레르는 그렇게 외치고만 싶었다.

“크흠···”

주심의 재촉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애써 배트를 꽉 쥐었다.

손 떨림을 감추기 위해서.

저 망할 투수에게 이런 감정을 들킨다면, 그대로 자신까지 씹어먹을 것만 같았다.

‘진정, 진정하자. 할 수 있어, 에릭. X발 아무것도 아니라고. 공 보고, 배트만 휘두르면 되는 거야.’

주문을 걸듯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타석에 들어서자, 그를 쓱 훑어본 포수가 말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스윙 세 번만 해. 너무 쫄지 말고. 금방 지나갈 테니까.”

“뭐··· 뭐? X잘 하지 마. 내가 우습게 보여?”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애써 부정하듯 소리를 치니, 오히려 더 비웃는다.

그것을 보니 울컥 화가 솟았고, 그 분노가 용기로 변하려던 찰나.

“스트라이크!”

초구가 날아왔다.

그것을 본 순간 다시금 머리가 하얘졌고. 떨림이 시작됐다.

‘이걸 어떻게 쳐?’

눈앞으로 오다가 뚝 떨어지는 공. 분명 공을 딱 마주했을 때는 볼이었는데. 심판의 선언에 포수를 내려보니, 거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이런 걸 치라고? 이런 걸 칠 수가 있다고? 내 눈앞에서 공이 떨어지는데? 누가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 연달아 머릿속에 떠오르며 에릭 아길레르의 정신을 좀먹었다.

“스트라이크!”

곧이어 날아온 2구.

바깥쪽에 살짝 걸친 슬라이더였고. 앞서 확인한 체인지업 만큼이나 그 변화가 급격했다. 한순간 꺾여 들어왔으니까.

‘이건··· 너무하잖아!’

더블A에 올라온 이후로 눈이 동그래질 정도의 브레이킹볼을 숱하게 봐왔다.

개중에는 손을 못 대겠다 싶은 것들도 수두룩했고.

그렇지만 어찌어찌 적응하며, 팀의 3번타자를 맡을 만큼 성적을 쌓았는데. 이건 힘들다.

‘그렇게 대단한 서클이 있으면, 그거 하나만 뛰어나야 평등한 거지!’

서클도 충분히 개같은데, 슬라이더까지 까다롭다고? 왜 내가 메이저도 아니고, 마이너에서, 더블A에서 이런 걸 상대해야 하는 건데?

약간의 억울함마저 드는 상황에 시야가 흐려진 에릭 아길레르였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마지막 공 간다. 그대로만 있어.”

얄미운 포수의 트래쉬 토크 때문은 아니다. 부끄러움, 저속하게 표현하자면 쪽팔림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자, 이대로 루킹 삼진 당할 거야? 배트 한번 못 휘둘러 보고 끝낼 거냐고!’

명색이 타자인데. 변변찮은 스윙 한 번 못 해보고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 안 했다.

억지로나마 멘탈을 가다듬은 에릭 아길레르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타격폼을 잡았다.

‘내 스윙을 하는 거야. 겁먹지 말고, 얼어있지 말고, 평소처럼, 후련하게.’

집중을 마치니, 그때까지 기다려주기라도 한 듯. 투수 역시 다시금 투구폼을 취했고.

곧이어 3구가 날아왔다.

투수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공을 본 순간 냅다 배트를 휘두른 에릭이었으나. 머릿속에는 자책감이 뒤덮였다.

‘망했어! 너무 막 휘둘렀잖아! 또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면 어떡해? 저번에 만났을 때는 느린 커브도 던지던데···’

긴장감 때문일까.

대단히 정직하게 스윙했다.

스트라이크존의 정중앙을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는 배트의 궤적에 스스로 낭패감이 들었지만···

“어?”

곧이어 들린 건 공이 가죽 글러브에 박히는 소리가 아니라, 빠악-하는 우렁찬 타격음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휘이이익!”

“Home Run!”

관중들이 소리친다.

휘파람도 불고, 환호성도 질렀다. 멍하니 지켜본 타구의 끝은 담장 너머.

에릭 아길레르는 공이 넘어간 뒤에도 잠깐 우두커니 홈 플레이트에 서 있었다.

‘패스트볼···이었네.’

“빨리 안 꺼지냐? 다음 타석 때 대가리에 공 꽂아 줘?”

지금까지 들었던 비웃는 듯한 말투 대신, 과격한 어투로 쏘아붙이는 포수의 말에 그제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1루로 걸어 나갔다.

‘뭐야 생각보다 별거 없-’

이겨냈다는 성취감 때문일까?

지금까지 그를 옭아맸단 긴장감과 두려움이 싹 해소됐다.

해소되는 듯 싶었다.

천천히 베이스를 돌면서 흘끔 투수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아··· 큰일났네.’

투수는 명백히 빡 돌았다.

보통 저러면 둘 중 하나다.

분노에 취해서 막 던지다가 얻어맞거나. 광기에 휩쓸려 타자들을 폭압적으로 찍어 누르거나.

전자라면 다행이겠지만. 애석하게도, 투수는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분노에 열기를 뿜어내는 듯싶으면서도, 등 뒤로는 한겨울 같은 싸늘함이 감돌았으니까.

‘난··· 홈런 하나 쳤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알아서 하겠지.’

####

투수에게 홈런은 세금이다.

결코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대가를 치뤄야 하니까.

그렇기에 이 세상에 홈런을 안 맞는 투수 같은 건 없다.

여러 레전드들, 영웅들도 커리어 동안 수백 번도 넘게 홈런을 맞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렉 매덕스도 통산 피홈런이 300이 훌쩍 넘고.

당장 나만 해도 이번 시즌 동안만 여덟 개의, 아니, 이젠 아홉 개의 피홈런을 기록 중이고 말이야.

이렇듯 홈런은 투수에게 대단히 가까운 놈이지만···

‘오래간만에 맞았더니 더 X같네 이거.’

그렇다고 해서 홈런 맞고 화가 안 나면 그건 또라이지.

우리 아빠 봐봐, 일평생 장사하시면서 수십 년도 넘게 세금 내셨는데, 매번 고지서 나올 때마다 입에 욕을 달고 사시잖아.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 거나, 이번에는 왜 또 유독 빨리 나오냐 거나, 대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 거나하시면서 말이야.

홈런도 그런 거다.

‘괜찮아, 괜찮다고 새꺄.’

그러니 내가 화나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거지.

보 테일러가 괜찮냐고 사인을 보내는데, 단호하게 노려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하게 말하면 안 괜찮다. 좀 맞을 거야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맞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고맙다,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어. 컨디션 안 좋다고 좀 나약해졌더니, 바로 후드려 맞는구만.’

오래간만의 피홈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입안을 바짝 말랐지만, 다시 홈으로 돌아온 타자를 보니, 홈런 장면이 떠올라, 도리어 머리가 차분해졌다.

‘패스트볼을 노린 건 아니야. 그런 종류의 스윙이 아니었으니까. 타자는 그냥 자기 스윙을 한 거고, 어쩌다 공이 얻어걸린 거지.’

홈런은 맞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완벽하게 공략당한 게 아니라, 어쩌다가 아다리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라는 것.

내 타이밍을 읽었다거나, 익숙해졌다거나 한 게 아니다.

또한 예상대로 상대 타선은 약하다.

뜬금포를 제외하면, 내가 생각했던 수준과 비슷한 정도.

전체적으로 반응이 느리고, 스윙이 체인지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으니,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겠지.’

실험대상은 지금 올라오고 있는 타자다.

자바리 헨리, 지명타자인데, 아주 당당한 걸음걸이로 타석에 들어왔다.

홈런이 나오기 전, 대기타석에서는 조금 긴장한 눈치더니, 내가 얻어맞는 걸 보고 좀 풀린 것 같다.

‘딱 좋네. 침착하게, 원래 계획대로 타격해 봐. 무슨 생각인지 좀 읽게.’

초구를 집어넣으니 스윙이 나왔다. 이번에도 살짝 몰린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헛스윙.

‘1번타자랑 2번타자. 3번은 건너뛰고 얘까지. 묘하게 배트가 쉽게 나와.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은데, 아래로 하나 가보자.’

먼저 사인을 보내니, 내 들끓는 감정을 읽은 건지, 보 테일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던진 2구.

“볼!”

85마일짜리 낮은 패스트볼.

이번에는 또 참는군. 배트가 살짝 움찔거렸지만, 꾹 참았다.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엿보이는데, 이러면 몇 가지가 추론이 가능하지.

‘지금까지는 낮은 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어. 둘 중 하나겠지.’

낮은 ‘코스’가 문제거나. 혹은 낮게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이 문제거나.

‘한번 알아보자고. 비슷한 높이로 하나 더. 대신 바깥쪽으로, 그리고 살짝 걸치도록.’

3구. 쭉 뻗어서 던지니 배트가 나오다가 멈춘다. 체크 스윙.

“스트라이크!”

하지만 일부러 집어넣었기에 카운트는 올라갔다. 이러면 보다 더 확실해지지.

‘내 서클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거구만. 자세한 건 아니겠지. 그냥 좀 대단히 위력적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낮은 코스는 체인지업을 염두에 두고 그냥 배제하라고 지시한 거고. 대신 슬라이더나 패스트볼 같은 것들을 노리라면서.’

대충 캐낼 건 거의 다 캐냈다. 아직까지는 추상적인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찾아가는 거지.

‘그럼 마지막으로 몸쪽을 볼까?’

길게 와인드업하며, 공을 타자의 몸쪽으로 바짝 붙였다.

이번에도 서클 체인지업.

가깝게 붙다가 역회전하면서 떨어지는 공에 타자의 배트가 딸려 나왔다.

“아웃!”

배트 밑동을 스친 건지, 마운드로 굴러온 타구. 그것을 휙 주워다가 1루에 던지는 것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방향이 어디든 낮은 코스는 거의 체인지업이라고 생각하면서 배트를 참는다. 그 외에는 무조건 배트를 내고. 무슨 생각인지 잘 알겠어.’

상대의 계획을 엿보았으니.

최소한 그게 바뀌기 전까지는 이용할 수 있다. 제구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가지고 놀 수 있겠지만. 징징거릴 수야 없지.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무실점도 깨고, 홈런도 하나 가져갔으니. 너네도 마땅한 보상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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