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슬라이더 – 30/40
서클 체인지업 – 40/50
패스트볼 – 20/40
스터프 – 20/30
컨트롤 – 50/60
한 투수를 20-80 scale로 평가한 결과물이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잡혀 있으나.
미래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괜찮은 주력구가 하나 있고, 제구도 좋기는 하나. 가장 중요한 것들이 심하게 부족하니까.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는 더더욱.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어. 타구를 최대한 띄우는 식으로. 그러니, 스터프와 무브먼트가 부족한 투수는 더욱 살아남기 힘들겠지.’
실링을 최대한으로 채우더라도, 5선발 내지는 패전처리나 가능하겠지. 그것도 최대한으로 쳐준 거고.
‘그래도 최근 성적이 좋으니,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상상이상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남자는 첫 이닝을 본 순간 기존의 평가가 적힌 수첩을 시원하게 찢었다.
전부 개소리였으니까.
체인지업이 40점? 최대가 50점? 두말할 것도 없이 개소리다.
방금 타자를 돌려세운 서클의 완성도는 못 해도 60점 이상, 그런데 최대 실링이 고작 50점이라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지.
컨트롤? 마찬가지로 지금 피칭만 봐도 60점 이상이고, 슬라이더 역시 평가 이상이다.
‘패스트볼과 스터프, 그리고 무브먼트는 정보랑 똑같지만, 나머진 완전히 달라. 아예 다른 투수라고 봐도 될 정도로.’
대체 어떤 놈이 이딴 식으로 작성한 거야?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이건 너무 많이 다른데요? 아무래도 기존의 자료가 잘못된 것 같-”
“그래, 그래서 이렇게 찢어버렸잖아. 처음부터 새롭게 평가해야 해.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제대로 확인하라고.”
따라온 부사수도 같은 생각인지 말끝을 흐렸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익숙한 얼굴이 제법 보인다. 좋은 재목은 한정적이고, 그렇기에 오다가다 만날 수밖에 없지.
그러면서 몇 차례 안면을 익힌 놈들 몇몇이 지금 이 관중석 안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그놈들 모두 자신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놀라거나, 못 믿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거나, 마찬가지로 수첩을 구기거나.
다 똑같은 생각이겠지.
“저 투수-”
“쉬이, 조금만 더 보자고. 아직은 확실치가 않으니까.”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부사수를 막은 남자는 팔짱을 꼈다. 이마에는 주름이 졌고.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들인데.
두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그의 머릿속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피칭 자체가 완성적이야. 자신의 현재 기량, 타자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했지. 그게 머리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본능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타자를 잡을 줄 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입이 떡 벌어졌던 서클 체인지업처럼 겉으로 보이는 기량은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 있겠지만. 피칭 스타일은 아니다.
컨디션이 좋다고 해서 갑자기 똑똑해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이건 저 투수가 가진 재능이 확실하다.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겠지.
‘성적을 보면, 터지기 이전에도 볼넷은 적었어. 삼진 자체도 생각보다 많고. 피홈런은 많지. 원래도 공격적인 선수였다는 거야.’
즉 자기만의 피칭을 완성한 지는 이미 꽤나 오래되었다는 거다.
“볼”
“볼”
“아웃!”
완급조절하는 것만 봐도 뻔하지. 타자를 죽일 듯이 몰아세우더니, 한순간 갑자기 타이밍을 늦춰서 농락한다.
그에 타자는 타이밍을 빼앗겨, 내야땅볼로 무너졌고.
지금까지는 부족한 기량을 완성도 높은 피칭으로 대신했을 거다.
자기가 가진 걸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꾸역꾸역 버텼던 거고.
그런데 갑자기 그 부족했던 기량마지 채워졌으니···
“스트라이크 아웃!”
‘이런 성적이 안 나오고 배겨?’
또다시 올라간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인데도 빼지 않고, 과감하게 집어넣었고. 그것으로 5회 초가 지워졌다.
5이닝 5탈삼진 3피안타 무실점. 지난 경기들보다는 삼진 페이스가 조금 낮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 성적을 찍었는데.’
28.1이닝 41탈삼진 1볼넷.
9피안타 0자책점.
6월간 기록한 성적이다.
아무리 마이너라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수준.
메이저리거가 재활을 위해 마이너에 내려가도 이 정도는 찍기 힘들다.
“휘이이이익!”
“S-word! S-word!”
호투에 놀란 건 자신들뿐만이 아닌지, 주변 역시 대단히 시끄러웠다.
사실 경기 내내 이런 모습이었지. Suck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S-word라는 이상한 별명을 우렁차게들 외쳤으니까.
경기 내내 듣다보니, 남자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부사수는 여전히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기가 대단하네요, 여기서는 완전히 슈퍼스타인데요? 엄청 잘하기는 했지만.”
“홈이잖아. 마이너라고 해도 말이야. 거기에 저 투수, 딱 팬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하긴, 야구팬 입장에선 저런 투수가 좋을 수밖에 없기는 하죠. 쓸데없이 볼 질 안하고, 삼진 팍팍 잘 잡고.”
이런 투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야구팬이라면 덜 좋아할 수는 있어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다.
내 팀 투수라면 말이야.
‘모자란 놈들. 마이너라고 보고서에 아주 개판을 쳐놨군.’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런 투수를 그딴 식으로 평가해놔? 애초에 잘못 본 건 그렇다 쳐도, 업데이트는 제대로 해놨어야지!
마이너 담당팀의 직무유기인지, 아니면 능력부족인지는 몰라도. 이렇게나 기존의 분석 자료와 실제 모습이 다른 건 분명 크나큰 문제다.
이렇게 놓친 유망주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나마 이번 경우는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무능한 놈들 같으니라고. 보는 눈이 없으면 최소한 열심히라도 해야지. 직무태만이야, 직무태만.’
남자는 무능한 동료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평가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수첩에 무언가를 필기했지만. 이내 다시 그것을 덮었다.
지지부진한 홈팀의 공격이 끝난 뒤. 투수가 다시 마운드로 올라왔는데.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볼 거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 멀었군.’
하마터면 무능하다 욕했던 놈들과 똑같은 실수를 범할 뻔했다.
“이거이거··· 아직도 더 남은 게 있었군.”
그것을 직감한 남자의 말에 조금 늘어져 있던 부사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은 게 더 있다니··· 무슨 소리예요?”
“잘 봐, 투수의 분위기를. 기어가 한 단계 더 올라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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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아웃을 걸어나가니, 끈적한 시선이 곧장 따라붙는다.
그래서 흘끔 옆을 보니, 스카우트들이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뚫어지게 보고 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몸 구석구석이 분석당하는 느낌이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저 양반들이 보기에 지금 내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잖아? 오히려 기쁜 일이지.
‘이쯤 되면 이달의 선수도 확정이나 다름없겠고.’
경쟁자인 루크 위버가 대단한 기록이라도 세우지 않는 한, 이달의 선수 수상은 확정이다.
계속해서 무실점을 이어갔고, 선발투수 승리 요건도 갖췄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내려가도 되겠지. 목표로 삼았던 건 다 이뤘으니까.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그럴 리가 있나.’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한다고? 우스운 짓이다.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마이너 선수가 주목받기란 쉽지가 않다. 드래프트 상위라운드 출신이라, 원래부터 유명하지 않았던 이상에는 힘들지.
그런데 간만에 기회가 온 거다. 그것도 스카우트들까지 쫙 깔린 기회가.
‘이만한 쇼케이스가 언제 또 있겠어.’
특히나 올해는 나한테는 꽤 중요한 시기이다. 이제 마이너 5년 차니까.
‘이때를 기준으로 이다음부터는 구단의 기대치가 급락하지.’
5년 차 이후로는 아무리 성적을 잘 찍어도 인정을 안 해준다. 시큰둥하게 보는 거지.
마이너에서 충분한 연차가 쌓였으니, 그래서 성적이 좋은 거라는 게 이유고.
X같지만 어쩔 수 없다.
매년 꾸준하게 새로운 유망주들이 유입되는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두각을 보이지 못한 선수에게 계속 기대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직행한 케이스니, 2~3년은 더 봐주겠지만. 어쨌든 앞으로의 야구 인생을 가르는 시기야.’
아직 유망주 딱지 붙어 있을 때, 최대한 몸값을 올려놔야 한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얌전히 제물 좀 돼줄래?’
넌 그래도 군대는 안가잖아?
난 여기서 망하고 한국 돌아가면, 군대까지 가야 하거든?
그러니 부디 닥치고 삼진 당해주지 않으련?
간절함을 담아서 올라오는 타자를 보는데,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다.
그래, 내 인생이 X되건 말건.
니들이 무슨 상관이겠냐.
그냥 찢어 죽이고 싶겠지. 두 경기 내내 털렸으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어?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내가 알아서 쳐 잡아야지, 어쩌겠어.’
되지도 않는 기대를 버리고 타자에게 집중했다.
타순은 이제 두 바퀴를 돌아서, 다시 1번부터 시작이다.
넬슨 워드. 첫 타석은 삼진으로, 두 번째 타석은 내야 플라이로 물러난 녀석.
좌타자에 키가 좀 작다.
키를 감안하더라도 팔 길이가 좀 짧고. 거기에 체격도 좀 호리호리하지만, 의외로 제법 파워가 있다.
‘몸 쪽 공에 잘 대처했어. 두 번째 타석에서는 완전히 자세가 무너졌는데도, 어찌어찌 맞춰냈으니까.’
몸 쪽 공 잘 고르고.
파워도 제법 있는 타자.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정답은 이미 앞에 있다.
‘이번 타석 동안 난 톰 글래빈이다. 너 같은 호빗들을 조지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지.’
말했잖아, 리치가 짧다고.
사실 5.11피트니, 일반인 중에서는 평균 이상의 키지만. 여기선 충분히 호빗이다.
거기에 팔까지 짧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스트라이크!”
정답은 바깥쪽 위주의 승부.
두 번째 타석에서는 타이밍 흔들어보려고 몸쪽으로 집어넣었었는데. 거긴 그래도 제법 잘 친다는 걸 이미 확인했으니. 이젠 약점만 골라서 때려야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계속해서 공이 박히니, 타자는 허우적거렸고.
“파울!”
간신히 배트 끝에 타구가 맞더라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탓에 금방 라인을 넘었다.
놀리듯이 자신의 약점만 건드리니, 쪽팔림, 분노, 짜증 등. 아주 오만가지 감정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어쩌라고? 꼬우면 팔 길게 태어나든가?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꺾여나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하나 더 추가하며 타자는 내려갔고. 그다음으로 올라온 녀석에 입맛을 다셨다.
‘외야 플라이 하나에 안타 하나. 타격감이 나쁘지 않아.’
2번타자 호세 론돈.
직전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했다. 타격감은 좋아 보이고. 우타자인데, 서클에 쉬이 농락당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지.
‘서클이 나오기 전에 막 휘둘렀지. 첫 타석은 3구 만에 외야 플라이, 두 번째 타석에서는 초구를 냅다 후렸지.’
어차피 서클은 답도 없으니, 그나마 상대적으로 약한 슬라이더와 그냥 약한 포심 중에서 하나만 걸리라는 식으로 휘두른 건데.
무식한 것 같아도, 때때로 그런 방법이 먹힐 때가 있다.
괜히 머리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운에 기대보는 거지.
어찌 보면 현명한 거야.
“스트라이크!”
물론 지금은 안 통하지.
남들 서클 체인지업 타이밍에 적응할 동안 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면···
“스트라이크!”
‘어차피 다음 타석은 없는데, 그냥 냅다 집어넣는 거지.’
서클만 던지면 된다는 거다.
최소한 몇 번은 봐야 타이밍이 익숙해지는 공인데, 그걸 안 보고 그냥 휘둘렀으니,
나도 냅다 서클만 던지면 된다는 뜻이다. 적당히 코스만 잘 섞어서.
낮게 하나. 이어서 바깥쪽 하나. 마지막 위닝 샷은-
“스트라이크 아웃!”
몸쪽으로 하나.
서클 세 개에 스윙 세 번 하고 타자는 물러났다.
눈 감고 휘두른 건데. 정말로 다행이다. 다음에 만날 때도 잘 먹힐 테니까.
‘마지막으로 닉 토레스.’
미션스에서 그나마 가장 까다로운 놈. 지금까지 배팅도 까다롭게만 했다.
‘오늘은 꽤 신중하게 타격했어. 천천히, 지켜보는 방식으로.’
땅볼 하나, 외야 플라이 하나.
오늘 경기 성적은 별로지만, 두 타석에서 각각 7구와 8구를 끌어내며, 최대한 장기전으로 유도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러면서 얼추 타이밍도 읽었고.’
보 테일러가 사인을 보낸다.
심상치 않으니 빼자고 하는데. 어차피 소용없다. 볼넷으로 내보낼 거 아니라면야, 결국 존안으로 집어넣어야 하니까.
‘한 구 버리느니, 그럴 바엔 차라리 얻어맞더라도, 짧게짧게 가야지.’
내 쪽에서 사인을 내니, 눈살을 찌푸린다. 진심이냐고 묻는데, 당연히 진심이지.
‘일단 스트라이크 하나만 더.’
가장 먼저 슬라이더.
바깥쪽으로 살짝 걸쳤는데.
따악-하더니, 잠깐, 따악?
‘엌-’
맞았다. 쭉 날아가는 타구.
이거 좀 큰 거 같은데?
아이고, 괜히 슬라이더를-
“파울!”
잘 넣었다. 아주 잘했어.
그래, 당연히 파울이지.
라인 넘어갈 줄 알았다니까?
내가 겨우 저 정도도 예상 못 했을 것 같아?
맞아, 예상 못 했어. 식겁했네.
‘이야, 이걸 딱 치네. 슬라이더 노린 눈치는 아닌데.’
그래도 카운트 하나 잡았잖아? 옛말에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그랬어. 결과가 중요하다는 거지.
이런 뜻이 맞나? 아무튼 그렇다.
“후우···”
침착하게 생각하자. 포심은 안 돼. 방금 거, 슬라이더라서 그나마 좀 비껴맞은 거지. 포심은 진짜 넘어갈 거야.
위닝샷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게 문제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파울!”
이번에도 파울. 그래도 식겁하지는 않았다. 이건 진짜로 예상했던 거니까.
서클 체인지업, 제법 익숙해졌겠지. 그래도 완전히는 아닐 거고.
그래서 일부러 치라고 몸 쪽으로 바짝 붙여봤는데, 3루쪽 파울라인을 넘었다.
이제 볼카운트는 2-0.
판은 깔렸다.
‘그래, 그걸로 가자고.’
다시금 사인을 보내는데, 영 믿지 못하는 눈치다. 하긴, 내 피홈런 8개 중에서 3개가 이거 때문이니, 저럴 만도 하지.
그래도 이번에는 좀 믿어라.
진짜로 가능하니까.
단호하게 눈빛을 보내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묵직한 어깨를 마지막으로 돌렸다.
나는 실질적으로 쓰리피치다.
포심, 슬라이더, 서클 체인지업을 주력으로 던지지. 최근에는 아마 체인지업의 비율이 가장 높을 거고.
그러니 타자도 예상할 거다.
뭐가 날아올지를.
서클은 이미 감을 잡았으니, 또 던지면 후릴 수 있다.
포심은 원래도 쉽고. 슬라이더도 넉넉하게 칠만 하겠지. 그러니 그 중에서 선택할 텐데.
‘실질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쭉 공이 날아간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살짝 들린다는 기분이 드는데, 이것 때문에 사실 이 구종을 좋아한다.
잘 못 던져서 문제지.
‘나 원래 포피치야.’
공을 본 타자는 덜컥 멈췄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린 타이밍을 완벽하게 부정해버리는 공이 날아갔으니까.
느릿느릿하게 날아가던 공은 늙은 코끼리의 코처럼 축 늘어지듯 글러브로 들어갔고.
‘이건 팜볼이나 아리랑볼이 아니라 커브고. 처음 보지?’
67mp/h의 슬로우 커브.
킬로로 환산하면 106쯤 된다.
성인 남성도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충분히 찍을 수 있는 구속이지.
X나게 느리고, X나게 구려서, 일단 맞으면 무조건 홈런인데. 그래도 예전에는 제법 던졌다.
나 같은 놈이 살려고 뭔 짓을 못하겠어? 있는 거 다 끌어 써야지.
가끔 이렇게 장한 짓을 해주기도 하고.
“스트라이크 아웃!”
루킹 삼진에 주심은 요란한 삼진콜로 나를 축하 했고.
그것으로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 즉 무결점 이닝이 완성됐다.
‘가끔 조커카드로 쓸 만하겠네. 또 한 달쯤 푹 묵혀야겠어.’
뽕 뽑았으니 이제 다시 봉인이다. 다른 거 좋아졌는데, 이걸 굳이 왜 써? 가끔 이렇게 한번 쓰고 마는 거지.
다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뭐,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처럼 얘도 갑자기 긁히기 시작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구속을 확인한 타자는 허탈한 한숨을 짓더니, 이내 표정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축하한다. 한 달에 한 번 뿐인 룰렛의 첫 번째 당첨자가 된 것을.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이불을 뻥뻥 차도록.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타자가 완전히 타석에서 물러난 뒤, 그제야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실감이 나지 않은 거겠지.
투수가 한 이닝 동안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목도했는데. 쉽게 목소리가 나오겠어?
“S-word! S-word!”
“KKK! KKK!”
“X발 X나게 멋졌다! 이 X나게 쿨한 새끼야!”
그래그래, 다 이해하니까 진정 좀 합시다. 그 S-word 소리는 좀 집어치우고.
계속 들으니까 소드(Sword)라고 하는 것 같아서 슬슬 좀 멋있게 느껴지는데.
어쨌든 내 이름 욕 취급 하는 거잖아, 기분 나쁘다고.
“Suck, 넌 진짜 미친놈이야.”
그래, 얘처럼 차라리 대놓고 썩이라고 해, 썩이라고.
황급히 마운드로 뛰어온 보 테일러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더러 미친놈이라고도 하고. 하긴, 커브가 홈런 맞는 걸 세 번씩이나 목격했는데. 그걸 집어넣어서 삼진 잡았으니. 놀랍기는 하겠네.
“내가 좀 쩔기는 하지.”
“그 X같은 거만함도 지금은 X나게 멋지네. 아무튼 이 기세로 다음 이닝까지-”
“다음은 무슨 다음? 이번이 마지막이야.”
고개를 저으니, 대체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이해가 안 되겠지.
타자 두 명만 더 잡으면 30이닝 무실점이고.
삼진도 두 개만 더 잡으면 4경기 연속 10K인데. 그런 엄청난 기록을 굳이 버린다는 게 쉽게 납득할 만한 일은 아니지.
“어? 왜? 아니, 두 명만 더 잡으면 30이닝 무실점인데··· 네 경기 연속 10탈삼진은 안 아쉬워?”
“충분해, 이 정도면.”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이미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4경기 연속 10K? 물론 대단하지. 나도 마음 같아선 진짜 X나게 하고 싶다.
그런데 슬슬 좀 어깨가 힘들다. 신중하게 피칭하느라 투구수를 좀 소모했거든.
이미 챙길 거 다 챙겼는데, 굳이 더 무리해서 유일한 자산이나 다름없는 어깨를 소모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달의 선수도 확정이고. 스카우트들도 뻑이 갔고. 이거면 됐지, 뭘 더 바래?’
저거 봐, 완전 사랑에 빠진 눈들이잖아. 황급히 어딘가로 전화하는 사람도 있고.
‘자, 어서들 프런트에다가 전하슈. 웬 동양인이 X나게 잘한다고.’
이거면 된 거지.
‘우리 프런트도 대가리 좀 깨지겠네.’
####
-빌리, 좋은 제안이란 거 알잖아? 이만한 조건은 어디서도 못 받는다고?
“알아, 그래도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트레이드 기간 한 달은 더 남았다고.”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줘.
“이만 끊을 게.”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빌리 빈 단장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만 해도 세 번째니까.
‘그래, 망했다 싶으니, 다들 뭐라도 하나 뜯어가려고 난리들이군.’
이번 시즌은 망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
그 사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자, 오만 곳에서 피라냐처럼 씹어 먹으려고 들었다.
리치 힐과 조시 레딕.
주요 매물은 이 두 사람이다.
어쩌면 A’s를 잘 알아서 그런 거겠지.
단년 계약을 맺은 리치 힐은 명백히 선발투수 전향에 선공했고. 에이스가 됐다.
조시 레딕은 주전 우익수이자 팀 내의 핵심 타자 중 한 명이고. 허나 FA고 얼마 남지 않았지.
에이스에 그런 선수들을 잡아둘 자금력은 없다. 그러니 트레이드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두 선수 모두 준수한 자원이고, 어딜 가든 제몫을 할 재원들이니.
굶주린 개떼처럼 달려드는 건데···
‘묘한 공통점이 있단 말이야. 리치 힐과 Go. 조시 레딕과 Go. 혹은 셋 모두.’
기시감. 약간의 기시감이 느껴졌다. 의외의 선수가 공통적으로 언급됐으니까.
‘Go You-Suck. 연락 온 구단 모두 이 선수를 언급했어. 덤인 척 받으려고 하면서도, 은근한 뉘앙스를 감추지 못했다.’
Go You-Suck. 알고 있다. 최근 성적이 미쳐 날뛰고 있다는 거. 이미 보고받은 지 오래니까.
허나 이미 애슬레틱스 내부적으로는 플루크라고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급격하게 상승한 만큼, 거품이 많이 껴 있다는 내부적인 판단이었지.
변화구와 제구는 분명 훌륭하나, 특별히 스터프나 무브먼트가 좋아지지는 않았으니, 곧 거품이 꺼질 거라고.
그렇기에 이미 트레이드 매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내려졌는데. 조금 꺼림칙했다.
방금 전 통화했던 빌어먹을 동종업계 동료들은, 자신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만약 플루크가 아니라면?’
한 가지 가정이 가능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구단에서는 Go의 비약적인 발전이 플루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들어맞는다면.
‘Go가 올해로 5년차니···’
뒷머리가 바짝 섰다.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으니까.
만약에 지금의 성적이 계속 된다면···
‘올겨울 룰 5 대상자군. 40인 로스터에 올리지 않았으니까.’
트레이드로 쓰긴 아깝다.
선발투수는 중요한 자산이니까.
허나 마냥 지킬 수도 없었다.
미친 척하고 한번 긁어보려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
“데이비드 올라오라고 해.”
그러니 확신이 필요했다.
정말로 지금 이 성적이 플루크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