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5화 (15/316)

15화

사실 굳이 노리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이달의 선수 유력 후보다.

이렇게나 잘했는데, 안 주는 것도 좀 웃긴 일이지.

다만 아직 확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그래도 확신은 좀 이르긴 하네. 경쟁자들이 제법 있어서.’

아직 6월이 끝나려면 몇 경기가 더 남아 있고.

경쟁자 또한 제법 있으니까.

‘타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브레그먼이겠고. 투수로는 루크 위버인가?’

브레그먼은 여전히 텍사스 리그를 파괴하며 투수들을 괴롭히는 중이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그래도 성적이 좀 떨어진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경쟁자는 루크 위버.

‘나도 나지만, 얘도 진짜 미친놈이네.’

스프링필드 카디널스의 투수인데.

이번 달 동안 26.1이닝 4자책점, ERA 1.38. 29탈삼진 3볼넷. 사사구 하나라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 중이다.

나 없었으면 그냥 얘가 확정이었겠네.

‘지금 상황에선 내가 더 유리하겠지만, 아직 서로 한 경기씩 남았으니, 내가 다음 등판 조지고, 얘가 잘하면 역전되겠지.’

경쟁자 파악을 위해 고셋에게 빌린 노트북 화면을 보며 턱을 굈다.

이것 참, 아무것도 아닌 상인데, 이상하게 욕심난단 말이야.

타도 코리 왈터라는 목표가 예상보다 쉽게 끝나서 그런가, 새로운 목표가 생겨나니, 괜히 힘이 샘솟는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음 등판에서도 또 7이닝 무실점 찍어서, 30이닝 무실점을 달성하는 거겠지.’

달성만 한다면. 이보다도 더 완벽할 수는 없을 거다. 루크 위버가 노히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실상 이달의 선수 수상이 확정되는 거고.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한번 만난 상대를 또 만난다는 거지.’

다음 등판은 26일.

이번 달 마지막 등판이다.

상대는 또다시 샌안토니오 미션스.

타격이 약해서 쉬운 상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긴 하다.

내 패가 이미 오픈이 된 상황이니까.

그러니 지난 경기보다는 약간 더 조심해야겠지.

‘그래봤자 한 경기지. 기껏해야 세 타석이고. 마이너니 전력분석팀 같은 것도 없을 텐데. 저번처럼 놀라지는 않더라도, 아직 제대로 분석은 안 됐을 거야.’

물론 딱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지금 고유석이라는 투수는 겨우 한 경기 겪어본 정도로는 공략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최소한 더블A에서는.

지나친 흥분이 위험하다는 거지, 미션스는 여전히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다.

그러니 조심만 한다면, 이달의 선수는 충분히 가져올 수 있다.

‘일정을 보면, 루크 위버도 26일에 등판하겠네. 사실상 이달의 선수 결정전이구만. 서로 다른 곳에서 등판하지만.’

대충 파악을 마친 뒤.

노트북을 다시 고셋에게 돌려주기 전, 간만에 메일함을 좀 살펴봤다.

딱히 올 연락도 없고, 메일을 자주 보는 편도 아니라서 푹 묵혀두고 있었는데. 시간 나는 김에 정리 할 겸 한번 살펴봤는데...

‘뭐야? 뭐가 이렇게 많이 쌓였어?’

오래간만에 들어가 본 메일함에는 그야말로 터질 듯 이메일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해킹이라도 당했나? 수신자는 다 다른데, 뭐야?’

이메일 수신자를 확인하니, 대부분 수신자가 달랐다.

그런데 제목은 죄다 비슷비슷하다.

살펴보니 내용도 거의 똑같네.

‘허, 잘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엄청 빠르네.’

마이너 소식에 가장 빠른 곳은 어딜까?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찾아 헤매는 스카우트?

팜만 목 놓아 기다리는 스몰마켓의 서포터?

그도 아니면 언제나 기삿거리를 위하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스포츠 기자?

아쉽게도 셋 다 아니다.

‘스포츠 에이전트와 에이전시 회사들이지. 지금처럼.’

어디어디 에이전시.

무슨무슨 에이전트.

꽉꽉 쌓인 메시지의 주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스타를 만들어주겠다, 우리 회사에는 어떤 선수가 있다, 나랑 함께하면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등등. 무수한 에이전시와 에이전트들이 오만가지 감언이설을 휘황찬란하게 적은 메일이 수두룩했다.

대체 내 이메일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조금 무서울 정도네.

‘세 경기 연속 10K가 팬이나 코리 왈터가 아니라, 에이전트들에게도 임팩트를 제대로 남겼네.’

대부분 메일이 이틀 전에 온 걸 보면, 아마 그게 기점일 거다. 마이너리그 홈페이지에 내 얼굴이 딱 걸린 거 말이야.

조금 꺼림칙해도, 나쁠 건 없었다.

지금 나는 에이전트가 없는 상황이니까.

한 때는 있었지, 아직 고등학생일 적, 처음 에이스와 계약할 무렵 고용한 양반.

‘아니지, 그걸 에이전트라고 봐야 하나? 브로커에 좀 더 가깝긴 하겠네.’

계약만 적당히 도와주고, 메이저 구단이랑 연결 좀 해준 정도? 그게 전부다.

그래도 한 3년 전쯤에는 가끔 통화도 했고, 훈련도 알아봐주고 했는데. 작년부터는 딱 끊겼다. 그렇게 쭉 지내다가, 재작년에 계약 끝났고.

‘슬슬 한명 구해야 하기는 하지. 내 상황도 생각보다 좋게 흘러가고 있고, 거기에··· 올해는 특별한 행사도 하나 있으니까.’

원래는 에이전트가 딱히 필요없지만, 올해는 다르다. 이제는 다르고.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이제 내 입지가 예전처럼 실링 낮고 스터프 구린 가치 없는 투수가 아니잖아?

‘직접 하려면 대가리가 깨질 테니, 대신해줄 사람을 구할 때가 되기는 했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지금이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이라면, 좋을 때 딱 좋은 조건으로 물어 채는 게 낫겠지만.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에, 아직 절정은 오지 않았다.

조금 더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아직은 대부분은 사기꾼 냄새가 심하단 말이야. 그냥 찔러보는 수준도 많고. 더 확실하게 입질이 제대로 올 때까지, 떡밥을 더 던져야겠지.’

이달의 선수의 가치가 조금 더 올라갔다.

떡밥을 던지기에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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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운명의 낡은 밝았고.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의 얼굴에는 한숨이 가득했다.

연패를 했냐고? 아니, 그건 아니다.

오히려 2승1패로 시리즈 스코어는 우리가 앞서는 중이니까.

별건 아니고, 오늘이 행복의 마지막이거든.

“하아··· 내일이면 또 버스 타겠지? 메이저리거가 새로 한 대 안 사주려나?”

“에이스에 그런 선수가 어딨 겠어. 구단에서 자기들 몫도 안 챙겨주는데.”

“하긴, FA 대박이라도 쳐야 그런 인심이 나올 텐데. 그런 선수가 없으니···

길고 길었던 홈 시리즈가 오늘로서 막을 내리고, 이 뒤로 있을 7월 초의 시리즈들은 죄다 원정이다.

그래, 허리 박살나는 시간이 다시 돌아온 거지.

어리석은 중생들은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하고, 백마탄 왕자가 최신식 버스를 들고 나타나 주길 바랐지만. 당연히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 암울한 미래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의 분위기가 저조했으나. 그것과는 별괴로 내 컨디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Suck, 오늘도 공 좋은데?”

“그러냐?”

그냥저냥 평범한 정도?

오늘도 배터리로 호흡을 맞출 보 테일러는 죽여준다며 호들갑을 떠는데, 저것도 한 두번 들어야 좋지, 계속 들으니까 식상하네.

평소처럼 느긋하게 어깨를 풀면서 슬쩍 옆의 존 와스딘을 보니, 표정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왈터 때문이겠지.’

지난 등판에서 대차게 털리고 도망치듯 경기장을 빠져나갔던 녀석은 다행히 아예 멘탈이 터진 건 아닌지, 다음날 다시 클럽하우스에 얼굴을 비추기는 했지만···

‘살짝 맛이 갔어.’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어딘지 조금 예민했다면. 지금은 좀 심하게 의욕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구단에서 열심히 키우는 투수 유망주 하나가 갑자기 맛이 갔으니. 존 와스딘 입장에서는 제 자리가 위험해서라도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내 지분도 어느 정도 있으니, 오늘이라도 부담감을 덜어 주자고.’

그걸 보니 괜히 좀 미안한데, 대신 내가 잘하는 걸로 때우면 되겠지.

아무리 마이너 코치의 권한이 작다고 해도, 자기 파트에서 괜찮은 유망주 하나가 나오면 결국 그 사람 커리어가 되는 거니까.

뭐, 약간 병주고 약주고 같은 느낌이긴 한데. 어쨌든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이다.

왠지 모를 책임의식을 느끼며 불펜피칭을 마치고. 그라운드로 입장하니. 몇몇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자주 보는 관중들이야 그렇다 치고,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

‘선글라스야 그렇다 쳐도. 손에는 수첩. 앞에는 카메라. 이런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다.

기자거나, 스카우트거나.

그중에서 따진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네.

‘이제 전반기가 끝나가니. 한창 트레이드 많이 할 시기지.’

후반기가 남아 있다고는 해도. 대충 전반기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이번 시즌은 조졌다. 괜찮다. 우승 도전 각이다.

물론 갑자기 후반기부터 어메이징한 연승을 거둔다거나, DTD가 이루어져 상황이 급변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략적인 예상은 가능하지.

‘그러니 만약 스카우트라면. 성적 망한 팀일 가능성이 높지. 마이너 경기까지 관찰할 정도면, 유망주를 수급하겠다는 뜻일 테니까.’

어디를 관찰하는지는 모른다. 미션스일 수도 있고, 우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네.

‘뭐든 간에 만약 우리 팀을 관찰하는 거라면, 내가 유력한 트레이드 매물이지.’

내 실링은 원래 대단히 낮았다. 스터프는 여전히 구리고.

그런데 갑자기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한 거다. 프런트 입장에서도 의아하고, 난감할걸?

이게 단순히 일시적인 플루크인지, 아니면 정말로 잠재력이 폭발한 건지 애매하니까.

차라리 구위가 엄청나게 좋아졌다거나, 구속이 올랐다거나 하는 식의 기량 발전이라면 오히려 편하다.

안 팔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좋아진 건 변화구와 제구. 감각적인 것들이지. 그러니 일시적인 플루크로 급격하게 좋아질 수가 있는 것들이고.’

성적은 더럽게 좋다. 이번 한 달 동안은. 그런데 그게 플루크인지 감이 안 잡힌다.

아니, 지금으로선 플루크일 가능성이 살짝 더 높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특별한 트레이닝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좋아진 거니까.

솔직히 나도 여전히 내 갑자기 발전한 기량이 믿기지가 않는데. 구단이 쉽게 믿을 수 있겠어.

여기까지는 오클랜드의 입장이고.

‘날 매물로 받아오는 팀 입장에서도, 적당히 딱 긁어보기 좋고 말이야.’

만약 트레이드가 된다면, 나를 받아갈 팀 입장에서도 딱 좋긴 하다.

터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어차피 메인 상품은 따로 있으니, 적당~히 덤으로 얻어가는 거지.

‘투수에 당장 성적도 좋으니, 팬들한테 호구딜 아니라면서 내세우기 딱 좋지.’

구색 맞추기에도 좋고.

‘이거, 어쩌다 보니 이번 경기 하나에 여러 개가 겹쳐서 걸렸네.’

물론 다 망상일 수도 있다.

3루나 내야수비가 급한 팀이면 내가 아닌 채프먼을 노릴 수도 있겠지.

“Suck, 오늘도 힘들다 싶으면 내 쪽으로 굴려! 알지?”

“어어, 그래. 고맙다.”

빌리 빈이 갑자기 미쳐버려서, 저런 특급 유망주를 판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미션스에도 괜찮은 놈이 몇 있으니까, 걔들을 주시하는 걸지도 모르고.

‘설사 그렇다고 쳐도, 스카우트가 보고 있어서 나쁠 건 없지. 트레이드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어필해야 할 대상들이니까.’

몸에 힘이 들어간다.

부담감은 아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아니고.

딱 기분 좋은 수준.

“플레이볼!”

곧 우렁차게 울린 주심의 경기시작 선언에 그 느낌을 꽉 붙든 채로 몸을 움직였다.

잔뜩 긴장한 선두타자.

얼굴에는 비장함까지 감돈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했다보니, 이번에는 저번처럼 맥없이 털리지 않을 거라며 의지를 다지는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어림없지. 의외성이 사라진 거지, 공의 위력이 떨어진 건 아니니까.

오늘도 초구로 들어간 몸쪽 서클 체인지업에 타자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오늘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집중하면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고.’

“스트라이크!”

다시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스윙이 헛돌았고, 배트는 공을 스치지조차 못했다.

‘그럴 리가 있나. 겨우 한 번 봤다고 다 공략하면, 구종가치가 왜 있어? 투수들은 왜 변화구를 익히고?’

남은 건 마지막 위닝 샷.

손안에 공을 굴리며 슬쩍 관중석 한편을 봤다.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라운드를 내려 보는 이들. 저 선글라스 속의 눈동자는 누굴 담고 있을까?

딱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나는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고.

허나 상관없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차피 지금부턴 나를 볼 테니까.’

위닝 샷은 슬라이더였고.

타자의 배트는 다시금 헛돌았다. 경기를 시작하는 깔끔한 삼구삼진.

“아웃!”

뒤이어 2번타자는 3구째에 빗맞은 외야 플라이로 간단하게 처리됐고.

“스트라이크 아웃!”

3번타자는 5구만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며 타석에서 물러났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며 다시금 훑어보니, 스카우트들은 선글라스를 집어치운 채, 마치 금덩이를 보듯 나를 봤다.

몇몇은 손에 쥔 수첩을 다급하게 찢거나 구기기도 했고.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이달의 선수, 그리고 스카우트들에게 어필. 오늘 한번 1타 2피를 노려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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