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불펜을 나가니, 제법 관중이 많다. 일요일이라서 그런가?
6월 중순이라, 슬슬 뜨거워지는 시기인데, 마침 오늘은 구름도 적당히 껴 있어서, 야구하기 딱 좋긴 하네.
“오늘 선발투수가 쟤야? 삼진 잘 잡아서 보는 맛이 있는데. 오늘 잘 왔네.”
“Hey S-word! 오늘도 잘 해봐!”
“지난 경기처럼만 해, S-word!”
기분 좋게 마운드로 향하니, 나를 알아본 관중들이 소리치는데. 아주 지칭하는 방식이 새롭다.
S-word라니, 왜 남의 이름을 욕처럼 여기는 거야.
석이라고, 석. 유석. 유-썩이 아니라, 유석. 고유석.
차라리 썩-썩- 거리면서 낄낄거리는 게 낫지, 진심으로 욕 취급하니까 더 기분 나쁘네.
아무튼, 꽤나 반가운 듯 인사하는데, 확실히 홈에서 잘하니, 그 여파가 크기는 큰가 보다.
익숙한 얼굴의 어르신도 보이는데, 오늘은 전보다 표정이 더 나아 보였다.
눈이 마주치니, 오늘도 잘하라는 듯, 지그시 노려보시는데.
지난 경기가 만족스러우셨나 보네.
‘너는 인상 좀 펴라. 다 표정 밝은데, 왜 너 혼자서 그러고 있어.’
기분 좋게 마운드에 올라가다가 코리 왈터와 눈이 마주쳤는데. 표정이 아주 썩어 문드러졌다.
내가 홈관중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게 못마땅한 거겠지. 이상한 곳에서 속이 좁단 말이야.
‘오늘은 좀 길게 가자. 저번처럼 갑자기 혼자 날뛰지 말고, 천천히 페이스 조절하면서.’
그렇게 스스로 당부하며 마운드에 오르니, 어느새 홈 플레이트에 가 있던 보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을 보아, 이제는 좀 삐진 게 풀린 것 같네. 다행이야.
명색이 배터리인데, 계속 속이 꿍해 있으면 좀 그렇지.
‘불펜에서 보니까, 오늘은 포구도 괜찮은 것 같으니. 마음 편하게 던지자.’
마지막 정신무장을 마친 뒤, 크게 숨을 뱉자, 상대 역시 준비를 마친 듯 리드오프가 홈 플레이트로 걸어왔다.
‘역시 우타석에 들어가네. 후회할 텐데···’
우타석에 들어가는 타자.
크리스 가르시아, 스위치 히터다. 이런 거 보면 은근히 스위치 히터가 제법 있다.
메이저에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마이너에는 루키 때부터 종종 만날 정도로.
‘양손잡이라고 해도, 결국 더 잘하는 방향이 있으니까.’
어설프게 양쪽 다 챙기려 들다간 이도저도 안 되니.
더 성적이 잘 나오는 쪽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겠지.
애매하게 고집부리는 놈들은 위로 못 올라가는 걸 테고.
‘그에 반해 얘는 둘 다 일정하지. 왼손 오른손, 둘 다 똑같이 못 해.’
눈앞의 타자는 그런 선택조차 불가능한 유형이다. 어느 쪽으로 서든지, 다 성적이 안 좋으니까.
뭐가 더 좋은 게 있어야, 거기에 집중하지.
양쪽 다 안 좋은데, 뭘 어쩌겠어.
타율도 1할 중반대에 OPS는 무려 3할 후반.
뜬금포를 날릴 뻥파워도 없다.
확실히 미션스랑 비슷한 느낌이긴 하네.
걔네들 1번타자도 심각했으니까.
‘아니지, 성적은 바우스필드 쪽이 훨씬 나으니까, 비교하면 실례겠네.’
미션스의 1번타자인 바우스필드는 저보다 타율은 2푼 정도가 높고, OPS는 무려 2할이 더 높으니. 비슷하게 여기면 오히려 불쾌하게 여길 거다.
어째서 아직까지 더블A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저쪽 단장의 생각이 있겠지.
혹은 오늘이 그 운명의 순간일 수도 있고.
‘그래도 멘탈은 좋네. 저쯤 되면 본인도 초조해져서 덜덜거리는데.’
그나마 타석에 들어와, 침착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는 하나. 미안하게도 애초에 선택을 잘못했다.
‘차라리 좌타를 했어야지.’
“플레이볼!”
타자 몸쪽으로 낮게.
채찍처럼 왼팔을 휘두르며 오늘 경기의 초구를 던졌고. 결연한 표정의 타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쳐다보지만.
“스트라이크!”
역시나 공이 박히고 난 다음의 반응은 죄다 똑같았다.
또옹~그란 눈과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달라진 서클을 처음 본 놈들은 죄다 저런 반응이었기에, 그리 인상 깊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저 오늘도 잘 박혀 들어간 서클 체인지업이 기뻤을 뿐.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지만, 원래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이지.’
옛말을 따르는 것도 좋으나, 내가 살아오며 누적된 경험도 중요하기에. 그것을 굳게 믿고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파울!”
3구는 86마일짜리 낮은 포심.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다시 4구 낮은 서클.
그나마 칠만했던 포심에 홀려 한 차례 타격 타이밍을 잡았던 타자는 비슷한 코스로 들어오는 서클 체인지업을 참지 못했고. 후련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다음 타석은 좌타로 올라오겠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걸 보아, 왜 우타로 올라왔는가, 심각한 후회감이 드는 것 같은데.
다음 타석은 슬라이더로 요리하면 되겠군. 아주 좋아.
뒤이어 올라온 2번타자.
앤디 이바네즈(Andy Ibáñez)
맞나? 좀 헷갈리네.
알파벳 위에 쉼표나 물결표 찍히면 좀 난감하다.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를 모르겠거든.
아무튼 우리 팀 앤디, 파즈와 마찬가지로 쿠바 출신인데.
성적은 앞의 녀석보단 낫지만. 좋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래도 쿠바 출신들은 은근히 뻥파워가 좋으니까.’
이번 시즌 외에 마이너 기록이 없는 걸 보아, 아마도 올해 넘어온 걸 텐데.
이런 경우는 당장의 성적 가지고는 실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힘들다.
말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니, 제 실력이 안 나오거든.
‘살짝 간만 볼까? 배트 낼 거 같은데··· 좀 멀게 가자.’
바깥쪽 슬라이더.
혹시 맞을 걸 대비해서, 쭉 빼면서도 전력으로 찔러 넣었다. 구속은 80마일.
따악-
“채프먼!”
“마이.”
바로 배트가 나온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쭉 당겼지만, 살짝 빗맞은 타구가 3루로 흘렀고, 그것을 채프먼이 스무스하게 잡아, 1루로 던지며 투 아웃을 만들었다.
배트가 나올 줄 예상했다.
보통 저 시기가 뭔가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찰 때니까.
나도 처음 미국 왔을 때는 저랬거든.
말은 안 통하지, 음식도 다르지, 문화도 다르지, 가족은 옆에 없지.
실력으로라도 우뚝 서기 위해서 조급하게 구는데, 루키에서 잘하다가 싱글A 올라가면서 훅 갔었지.
녀석도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일부러 살짝 뺏는데, 역시나 딱 쳐줬다.
‘투구수 아꼈네.’
기분 좋은 스타트.
하지만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올라오는 놈이 그래도 저 팀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 중 하나니까.
애초에 그러니 3번타자겠지만.
‘라이언 코델, 파워도 준수하고, 선구안도 좋아. 까다롭긴 한데···’
일단 슬라이더는 자제.
눈이 좋은 녀석이라, 어설프게 집어넣었다간 큰일 난다.
그러면 포심과 서클 두 개로 풀어나가야 하는 건데···
충분히 가능하지.
‘정석적으로 가자. 어차피 쟤도 처음 보는 걸 텐데. 굳이 어렵게 갈 이유는 없지.’
같은 생각인 듯, 보 테일러도 비슷하게 사인을 요구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타자를 보니, 조금 긴장한 눈치다.
우타자 입장에서 좌투수의 수준 높은 서클을 봤으니, 영 마음이 껄끄럽겠지.
‘바깥쪽으로 하나.’
녀석의 머리에 경종을 울리듯 공을 던졌다. 깔끔하게 들어간 포심 패스트볼.
88마일로 최고구속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나쁘지는 않다.
“스트라이크!”
‘이걸 잡아줘? 나야 떙큐지.’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딱 잡아주는 심판. 타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는 입꼬리가 씰룩거렸고.
카운트 하나 꽁으로 먹었으니, 이제 거리낄 것도 없지.
‘오케이, 그럼 몸쪽으로 하나.’
쭉 들어오는 체인지업.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으나, 예상보다 거리는 훨씬 멀다.
애초에 일부러 낮게 떨어뜨리기도 했고.
‘그리고 다시 바깥쪽 하나.’
사실 정석 중의 정석이다. 투수라면 누구나 아는 레퍼토리거든.
허나 그렇기에 제구만 가능하다면야, 평범한 상황에서 가장 쓸 만하다.
정석이란 건 애초에 잘 먹히기에 정석이 된 거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나 스트라이크 아웃.
한 구 빼지는 않을까, 싶었던 건지 배트를 참았는데. 영~ 나를 모르는구만.
‘이래 맞으나, 저래 맞으나. 어차피 맞으면 장타인데. 그럴 바엔 그냥 집어넣어야지.’
애초에 파워가 확실한 타자를 상대로 굳이 투구수를 늘릴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1회가 막을 내렸고.
“휘이이이익!”
“오늘도 쭉쭉 가보자!”
“계속 이렇게만 해라!”
오늘도 첫 끗발은 죽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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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기록 세우겠는데?”
“이제 한 타순 돌았구만, 무슨 대기록? 지랄 말고 공이나 잘 받아.”
“오늘은 잘 받았잖아?”
“그렇긴 하지. 앞으로도 그렇게만 딱딱 받아줘. 그러면 같이 손잡게 메이저 가겠네.”
립 서비스에는 립 서비스.
겨우 3이닝 돌았는데, 호들갑 떠는 보 테일러에게 피식 웃으며 말하니,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
“오늘도 무난하게 이기겠네.”
“당연히 이겨야지, 최소한 6회까지는 쟤들 1점도 못 낼 텐데.”
“다들 긴장 풀고, 침착하게 가자, 한 점만 내면 되니까.”
경기 시작 이후로 쭉 이어진 무안타의 행렬은 팀 분위기를 띄우기 충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래간만에 볼넷을 하나 내준 터라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볼넷도 진짜 오랜만이네. 대체 몇 경기만이야?’
아무리 공격적으로 피칭한다고 해도, 예전에는 그래도 경기당 하나씩은 찍었던 거 같은데.
제구가 긁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승부를 피해본 적이 없는 터라, 오래간만에 볼넷이 올라갔다.
그래서 약간 아쉽-
‘어우, 지금 내가 뭔 생각 중이야. 볼넷 하나 내준 게 뭐 대수라고. 다른 투수들이 알면 미친놈이라고 하겠네.’
예전에는 안타만 좀 덜 맞아도, 홈런만 안 맞아도 행복했는데. 벌써 잘하는 게 익숙해진 건지,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못한 것만 계속 기억나고.
사람 참 간사하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의 경쟁자께서는 여전히 표정이 X같으시구만. 저럴 바에는 차라리 경기 그만 보고,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있는 게 나을 텐데 말이지.’
훈훈한 덕아웃 분위기와는 별개로.
홀로 떨어져 앉은 코리 왈터는 다리까지 꼬고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하긴, 자기도 지난 경기에 좀 잘했는데, 내가 더 잘해버리니 짜증 날 수밖에.
그걸 보니 나는 오히려 더욱 안심됐다. 말했잖아, 진짜 무서운 건 저런 게 아니라고.
“Suck, 너 근데 이제 무실점 기록 좀 길지 않아?”
“드릴러스 전부터 쭉 무실점이었으니까, 제법 길긴 하지? 이제 19이닝째네. 선발만 따지면 16이닝 연속 무실점이고.”
“오~ 오늘 무난하게 20이닝 찍겠는데? 이러다가 신기록 세우는 거 아니야?”
“이제 겨우 20이닝인데 신기록은 무슨··· 그리고 마이너에서 신기록이 뭔 상관이야. 찍어도 위에서 찍어야지.”
드릴러스 전부터 이어진 무실점 이닝에 대한 이야기까지 흐르니, 표정이 더 썩어들어간다.
저거 보는 맛도 쏠쏠하네.
“잘난 척은··· 뭐 대단한 기록이라고.”
속삭이듯 불편한 감정을 내뱉는데, 못 들을 줄 알았던 건지, 아니면 들으라고 한 건진 모르겠으나. 아주 잘 들었다.
‘무슨 신기록도 아니고, 심지어 마이너 기록인데, 대단한 건 아니지. 하지만···’
맞아, 대단한 기록은 아니지.
하지만 효용가치는 충분하다.
윗분들에게 어필할 수도 있고. 어쩌다 알려지기라도 하면, 유명세도 제법 생길 테니까.
괜찮은 마이너 유망주로 말이야.
허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경쟁자 압박하는데에 이만한 게 또 없지.’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당연히 상대보다 잘하는 거다.
쉽게 이기는 방법은 상대보다 훨씬 잘하는 거고.
그러면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이기는 방법은 뭘까? 이건 내 실력만으로는 안 된다.
상대도 받쳐줘야 하니까.
‘멘탈, 승리를 만드는 건 내 실력이지만, 그 시기를 앞당기는 건 상대의 멘탈이지.’
별건 아니고. 그냥 마이너에서 버티면서 터득한 방법이다.
태평양을 건넌 순간부터, 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언더독이었다.
나보다 훨씬 화려한 경쟁자들을 상대로 자이언트 킬링을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해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고.
이번도 마찬가지지.
내가 꺾은 경쟁자들은 대부분 제풀에 지쳐 넘어졌다.
웬 같잖은 놈이 자기보다 성적을 더 찍으니, 자존심이든, 불안감이든 간에, 결국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너졌지.
‘그런 점에서 볼 때, 왈터 쟤는 딱 이기기 좋은 놈이야. 모든 조건을 갖췄으니까.’
자기의식 강하고. 자존심 세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며. 결정적으로 나를 무시한다.
그 무시하는 놈이 성적을 올린 거지.
자기 없는 동안, 자기자리에서, 엄청난 성적을.
그것만으로 찝찝한데, 구단에서는 대놓고 그놈과 자기를 저울질하고.
열이 안 받고 배기나.
나는 왈터의 복귀전에서, 내 지난 피칭을 엿볼 수 있었다.
조급하고, 초조하고. 그래서 더 무리해서 던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제대로 보였지.
그것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지도.
‘내 할 일만 잘하면 경쟁이야 이기겠지만, 기왕이면 시기를 앞당겨야지. 남은 시즌, 넉넉하게 마음 편히 던질 수 있도록.’
어떻게 앞당기냐고?
간단하다.
눈앞에서 찍어 누르는 거지.
거센 압박감에 더 조급해지고, 더 초조해지고, 그래서 더 무리하다가 결국 펑!하고 터져버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
이게 내가 찾은 이번 경쟁에서의 필승법이자. 경쟁을 조기 종결시킬 방법이었다.
감사하게도···
“Suck, 준비하자. 슬슬 공격 끝날 것 같은데.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잘 던지기만 해.”
“알아서 잘 던질 테니까, 보, 너야말로 잘 받기나 해라.”
실행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